에스캄브라이 반란
Escambray rebellion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쿠바 에스캄브라이 산악지대에서 여러 반군 조직이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맞서 벌인 무장 충돌이다. 정부의 진압 작전은 '반도테 소탕 작전'(스페인어 루차 콘트라 반디도스, LCB)으로 불렸고, 1965년 정부군이 잔존 반군을 제거하면서 끝났다.
상세
배경과 성격
에스캄브라이 반란은 1959년 쿠바 혁명 승리 직후 시작되어 1965년까지 이어졌다. 반군의 사회적 구성은 단일하지 않았다. 바티스타 정권의 옛 군인, 지역 농민, 그리고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에 맞섰다가 돌아선 옛 게릴라가 뒤섞여 있었다. 사회주의 노선 전환과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에 반대한 옛 게릴라가 지도부에 있었고, 농지 집단화에 반대한 소지주 농민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반란군 농민들은 일부 옛 바티스타 군부대의 도움을 받았으나, 주로 3월 13일 혁명운동(DR) 출신 인물들이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반공주의자 오스발도 라미레스와 코만단테 윌리엄 알렉산더 모건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같은 지역에서 바티스타 군과 싸운 경력이 있었다. 모건은 1961년 처형되었다.
외부 지원과 그 한계
미국은 라미레스와 모건을 카스트로에 대한 대안으로 보았고, CIA 훈련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려 했다. CIA는 반군에 일부 원조를 제공했으나, 1961년 피그만 침공 실패 이후 모든 지원을 철회했고 이는 반군의 최종적 패배를 결정지었다. 이 실패 후 오스발도 라미레스는 에스캄브라이 산악지대로 돌아왔고, 카스트로의 사절 파우레 초몬이 제안한 투항을 거부했다. 미국의 지원은 자료에서 CIA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비밀 지원으로 서술되며, 이 서술은 출처에 따른 귀속된 진술이다.
정부의 진압
정부의 주된 전술은 소규모 반군 집단을 상대로 수천 명의 병력을 투입해 점차 좁혀지는 포위의 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에스캄브라이를 정리하도록 파견된 지도부는 반군을 소멸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팔꿈치를 맞대고 덤불을 훑어라'). LCB 진압 작전의 지휘관은 쿠바 공산당 창당 구성원인 코만단테 라울 메넨데스 토마세비치와 리사르도 프로엔사였다. 피그만 침공에도 참여했던 스페인계 소련 고문 프란시스코 시우타트 데 미겔도 진압 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카스트로는 압도적 병력을 동원해 때로는 25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투입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민병대였다(정부군 사망자 4,000명 가운데 3,500명이 민병대원이었다). 반란은 압도적 수적 우위로 결국 진압되었고, 일부 반군은 투항한 뒤 즉시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극소수만이 탈출했다. 반도테 소탕 작전은 앞선 바티스타 군과의 전쟁보다 더 오래 걸렸고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사상자와 미해결된 쟁점
라울 카스트로는 1970년 연설에서 이 반란으로 쿠바 혁명군 병력 5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반군과 민간인, 정부 편 민병대를 포함한 사망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전체 전투원 사망자 추정치는 1,000명에서 7,000명 사이다. 추가 연구로는 조너선 브라운의 2017년 논문 '쿠바의 반도테 반혁명, 1959–1965'가 참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