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본주의 발전노선
Non-Capitalist Path of Development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발전론이다. 1920년 7월 레닌의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민족·식민지 테제에 뿌리를 두고, 냉전기에 소련이 신생 독립국을 위한 대안 경로로 내세웠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혁명보다 위로부터의 국가주도 근대화를 우선했다.
상세
이론의 기원
비자본주의 발전노선의 출발점은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민족·식민지 문제 보고와 테제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세계를 분할하고 10억을 넘는 인구를 식민 예속에 두었다고 분석하고, 피억압 민족의 혁명운동을 국제 공산주의와 연결했다. 같은 대회의 가입 조건은 코민테른 소속 당들에게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의 혁명운동을 직접 원조할 의무를 지웠다.
국가주도 근대화라는 성격
냉전기에 이 노선은 소련이 신생 독립국을 위해 내세운 대안적 발전 경로로 정식화됐다. 자본주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하지도 않는 근대화가 목표였고, 아래로부터의 인민 봉기나 풀뿌리 사회주의 혁명보다 위로부터의 국가주도 근대화가 우선시됐다. 집권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지배 엘리트·민족정부와 제휴하는 방식이 택해졌고, 현지 공산당 활동가를 투옥·고문한 정권과도 협력하는 모순이 있었다는 비판적 평가가 있다. 스탈린 시기 소련 외교는 제국주의 앞에서 '시기상조'로 판단된 노동계급 혁명을 억제하고, 신생 독립국이 '민족 자본가'와 제휴해 우선 국가주도 산업화와 농업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몽골에서의 적용
1921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몽골인민당 대표단에게 레닌은 몽골인민공화국이 비자본주의 경로를 따르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조건으로 당과 정부의 성실한 노동, 협동조합 수의 성장, 새 경제활동 형태와 민족문화의 도입, 아라트의 당·정부 지지를 제시했고, 인민혁명당을 공산당으로 '전환'시키는 데에는 반대하며 '간판만 바꾸는 것은 유해하고 위험하다'고 말했다. 몽골인민당은 1920년 6월 아라트·라마·귀족을 포함한 다원적 반식민 조직으로 결성되어 1921년 혁명과 코민테른 지원을 거치면서 좌·우로 갈라졌고, 이 시기에는 민족문제가 사회문제를 압도했다.
1920년대 당과 정부는 귀족의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협동조합과 소련 교역에 기반한 국가주도 경제를 세웠다. 국립은행(소련과의 합작), 새 화폐, 우편제도, 국영무역회사가 잇따라 들어섰고 1924년 헌법은 인민권력 기관으로 '후랄'을 세웠다. 1928년까지 소련과의 교역은 수입의 15퍼센트, 수출의 2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레닌의 1920년 구상에 맞먹는 대규모 경제개발 원조는 아직 제공되지 않았다.
화폐·은행 편년에는 이설이 있다. 위키백과 MPR 문서는 국립은행(몽골 무역산업은행)이 1924년 6월 설립되어 1925년 12월 실버 코인 튜그릭 발행을 시작했고 1928년 유일 법화가 되었다고 전한다. 미 의회도서관 계열 서술은 1924년 합작은행 설립과 화폐 발행을 구분하지 않으나, 몽골은행 공식 연혁은 은행 설립(1924)과 튜그릭 창출을 분리해 기록한다.
보그드 칸이 사망한 1924년 이후 당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위를 잡았다. 새 화신 탐색이 금지됐고, 제3차 당 대회에서 당은 노동 아라트의 혁명적-민주적 독재를 '몽골인민공화국' 명의로 세우고 비자본주의 발전 경로를 선언했으며, 이름을 몽골인민혁명당으로 바꾸고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대회 날짜는 사료마다 다르다. 미 의회도서관 계열 서술은 1924년 8월 4~24일로, 몽골계 서술은 8월 4~31일로 전한다. 몽골계 서술은 같은 대회에서 단잔·바바산이 24시간 내 체포되어 후레 교외 새르하드에서 처형됐고 소련 대표 바실리예프가 이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고 덧붙인다.
다만 이 노선의 성문화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몽골계 서술은 대회가 '몽골인민혁명당의 궁극 목표는 공산주의 달성이며 몽골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우회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고 전하는 반면, 미 의회도서관 국가연구는 비자본주의 노선을 확인한 조치가 1928년 12월 제5차 전국 대후랄에서 비준됐다고 본다. 같은 계열의 서술은 제3차 당 대회를 '무용한 요소' 숙청과 당명 변경, 단잔 처형으로 서술할 뿐 비자본주의 노선 선언과 연결하지 않는다.
1925년 제4차 당 대회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확정하고 비자본주의 노선의 민주혁명 강령을 채택했다는 서술은 IFDDR 계열 한 출처에만 근거하므로 귀속 표기가 필요하다. 위키백과 MPR 문서는 대신 1926년 제5차 대회가 사유재산 제한과 국유화를 요구했다고 전해 상충한다.
노선의 변동과 뒤집힘
1928년 제7차 당 대회에서 좌익이 중앙위 다수를 장악하고 코민테른의 권고에 따라 빈곤·중간 아라트를 강화하고 부유층의 권력을 줄이며 봉건·승려 경제권력을 파괴하고 산업화를 가속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700여 귀족의 재산이 몰수되고 토지 국유화, 운수·소매 국유화, 대외무역 독점이 시행됐다. 1930년 후반까지 봉건계급의 경제·사회 권력이 파괴되고 승원이 전면 몰수됐으며, 1926년 수출의 60퍼센트 이상을 통제하던 외국 기업의 비중은 1929년 14.5퍼센트로 떨어졌다.
1932년 서부 몽골의 반혁명·반공 봉기 이후, 코민테른과 소련 공산당의 지시로 몽골 당 중앙위원회는 종전 정책을 '좌경 편향'으로 규정하고 집단농장 실험을 중단했다. 최프발산은 '우리 나라의 전반적 발전은 아직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서지 않았고 소련 경험을 모든 것에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진술했다. 이는 1924년 제3차 당 대회에서 세운 '일반 노선'으로의 복귀, 즉 '신전환'(shine ergelt)으로 규정된다. 당 중앙위는 다수 간부들이 '즉각적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고 '소련에서 적용된 사회주의 건설 방식을 기계적으로 모방'했다고 결론지었고, 농업공동체가 해체되고 아라트의 사적 활동이 다시 장려됐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실패와 재산 몰수에 반발한 1932년 봉기로 3년간 가축 700만 마리가 도살되는 피해가 났다.
몽골 경로의 특수성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소련 러시아와 달리 자본주의 단계를 완전히 우회했다는 점에 있었다. 1940년 제10차 당 대회는 1925년 제2차 당 강령의 과제가 달성되어 일반민주단계가 완료됐고 비자본주의 발전 경로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제3차 강령을 채택했다. 같은 해 제8차 대후랄(1940년 6~7월)이 채택한 제2차 헌법은 1936년 소련 헌법을 모델로 삼아, 목축민·노동자·인텔리겐치아의 국가가 사회주의로의 미래 이행을 위해 비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취한다고 선포했다. 반혁명분자에 대한 선거권 박탈 조항이 추가됐고 몽골인민혁명당이 '노동 인민의 전위이자 모든 조직의 핵심'으로 규정됐다.
전국적 토론을 거쳐 1960년에 채택된 제3차 헌법은 비자본주의 경로의 완료를 반영했다. 위키백과 MPR 문서는 채택 회차를 1960년 7월 제4차 대후랄로 밝히고, IFDDR 계열은 1960년이라는 연도만 전한다. 헌법은 인민공화국을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조직된 아라트, 노동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몽골인민혁명당을 사회와 국가의 지도적·지향적 역량으로 선포했다. 1958년 제13차 당 대회는 몽골이 '순수한 목축국에서 농업-공업국으로 변모'했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몽골은 1962년 유럽 외 최초로 코메콘에 가입했고, 사회주의 블록과의 교역이 1960년 수출 94퍼센트, 수입 76퍼센트를 차지했으며, 1962~1972년 3·4차 5개년 계획 기간 1인당 산업생산이 240퍼센트 증가했다. 몽골 노동계급은 1940년 1만 4,800명에서 1959년 7만 4,200명으로 늘었고, 농업 종사 비중은 1940년 90퍼센트에서 1960년 60퍼센트로 줄었으며 1963년 도시 인구 비중이 40퍼센트를 넘었다.
몽골인민혁명당의 혁명기 구분은 사료에 따라 다르다. IFDDR 계열은 '일반민주단계 1921~1940', '사회주의 건설 1940~1960', '코메콘 통합 1960~1990'으로 나누지만, 같은 출처의 다른 부분은 일반민주단계를 1921~1928로도 표기한다. 미 의회도서관 계열 서술은 경제발전을 '일반민주적 개조 1921~1939', '사회주의 기초 건설 1940~1960', '사회주의 물질·기술 기반 완성 1961년 이후' 3기로 구분한다.
탄압과의 관계
이 노선의 시행은 탄압과 분리되지 않았다. 미 의회도서관 계열 서술은 1920~30년대 숙청과 좌·우파 당내 투쟁으로 2만 7천 명 이상(인구의 약 3퍼센트)이 사망했다고 전하며, 이 계열의 다른 서술은 1921년 이후 귀족·승려 집단이 공격받아 수만 명이 죽었다고 적는다. 두 수치는 대상 집단이 달라 그대로 합산할 수 없다. 보도와 40여 명은 1922년 8월 '반혁명 활동'과 무제한 군주제 복원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보도와 14명이 처형됐다. 단잔은 1924년 제3차 당 대회 중 '자본주의' 내지 '부르주아 경향' 혐의로 처형됐는데, 두 사망은 경위와 혐의, 시기가 서로 다르다. 1937~39년 스탈린주의 대숙청으로 2만~3만 5천 명의 몽골인이 몽골과 소련에서 처형됐고 약 1만 7천 명의 승려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무부 장관 겸 총사령관 최프발산과 NKVD 관료들이 이 캠페인을 조직했다. 겐덴과 아마르 같은 총리들도 1937년과 1941년 모스크바에서 총살됐고, 1939년 3월부터 최프발산이 스탈린주의 독재를 이끌었다.
1960~70년대의 재부상과 노선의 종언
몽골의 경험은 1960~7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발전 이론가들이 아프리카·아시아의 옛 식민지에 대한 모델로서 재조명했다. 새로 독립한 국가들을 둘러싼 '비자본주의 발전' 논쟁의 핵심은 식민 통치로 왜곡된 경제와 사회구조가 몽골처럼 자본주의를 우회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였다. 1960년 '아프리카의 해'에 17개국이 독립하면서 이 논의가 확대되어 이집트·말리·기니·가나 같은 반제국주의 신생국이 잠재적 적용 대상으로 거론됐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는 몽골 경험을 모든 국가가 따를 '기본 모델'로 볼 것인지, 신생국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볼 것인지 두 갈래 입장이 있었으며 1960년대 말에는 민족적 조건에 따라 정책과 속도가 달라야 한다는 분석으로 정리됐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소련 외교는 평화공존과 단계적 발전을 내세우며 원조를 대폭 확대했다. 1954~1979년 소련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 76개국에 경제 원조 약 180억 달러와 군사 원조 약 470억 달러를 제공하며 이 모델을 지원했다. 네루 시기 인도(1947~1964)와 나세르 시기 이집트(1956~1970)가 대표적 사례로 꼽히며, 비하이 제철소와 1970년 완공된 아스완 댐이 상징적 협력 사업으로 제시된다. 두 사례 모두 국가주도 산업화·혼합경제·국유화와 연결되며, 아스완 댐은 누비아 주민 이주 등 환경·사회 문제도 낳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열의는 줄어들어 이데올로기적 변혁보다 지정학적 영향력 유지가 우선시됐다. 경제 침체, 군사원조 우선(앙골라·에티오피아 등), 수혜국들이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않고 민족주의·권위주의 정권을 강화한 데 대한 환멸이 그 원인으로 제시된다. 수혜국들이 소련 원조를 정권 강화에 사용했다는 점과 원조 사업의 지연·초과지출, 소련 경제 침체로 1970년대 대규모 원조가 제한됐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몽골의 비자본주의 발전 노선 운용은 사회주의 공화국의 종료와 함께 닫힌다. 1989년 12월 시위, 1990년 1~3월 반MPRP 시위와 당 지도부 사임, 1990년 5월 당의 지도적 역할을 삭제하고 야당을 합법화한 헌법 개정과 시장경제 이행 승인, 1992년 1월 채택돼 2월 발효된 새 헌법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이 종료됐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모델의 원천도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