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테르미도르
Thermidor in the French Revolution
프랑스 혁명력의 월 이름으로, 혁명사에서는 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이 체포된 정치적 전환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음 날 처형되었다. 테르미도르 8일 연설은 그 전날인 7월 26일의 연설이다. 소련의 관료화에 대한 비유인 소비에트 테르미도르와 구별한다.
상세
역사
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국민공회에서 소수파로 몰려 체포되었고 다음 날 처형되었다. 국민공회 스스로의 역사 서술은 이 사건을 공포정치의 종료이자 테르미도르파 공회의 출발로 놓는다. 테르미도르 반동(프랑스어: Réaction thermidorienne, Convention thermidorienne)은 프랑스 사학의 시대 구분에서 국민공회의 마지막 시기, 즉 1794년 7월 27일부터 총재정부가 출범하는 1795년 11월 2일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공포정치가 끝나고 집행권이 공안위원회에서 분산되었으며, 자코뱅파(산악파)의 급진 노선에서 온건한 입장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테르미도르라는 이름은 공화력 11번째 월 테르미도르(그리스어 thermos, ‘더위’)에서 왔으며, 이 달은 7월 19~20일에 시작해 8월 17~18일에 끝난다. 혁명 운동사에서 ‘테르미도르’는 이후 원래의 혁명 지도부로부터 권력이 미끄러져 나가고 급진 정권이 보다 보수적인 정권으로 대체되는 국면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반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좌파에 대한 제1차 백색테러가 일어났고 자코뱅 클럽이 해산되었으며 상퀼로트가 흩어지고 산악파 이데올로기가 포기되었다. 1794년 12월 24일에는 최고가격령(Maximum, 가격·임금 통제)이 폐지되었고, 1795년 8월 22일에는 공화력 3년 헌법이 작성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5일(공화력 13일 방데미에르) 왕당파 봉기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공회는 1795년 10월 25일 해산했다.
혁명 정부의 해체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공안위원회는 분기별로 위원이 교체되고 권한이 축소되다가 1795년에 사라졌다. 1794년 12월 24일(공화력 3년 니보즈 4일) 최고가격령이 폐지되었고, 자유주의적 공회의 정책은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 인사도 뒤집혀 공포정치 시기 억류된 많은 용의자가 석방된 반면 수많은 혁명 활동가가 체포되었고, 로베스피에르와의 ‘공모’ 혐의를 받은 공직자가 해임되었으며, 카리에르와 조제프 르봉 같은 파견 의원들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1795년 백색테러는 다수의 투옥과 수백 건의 처형으로 이루어졌고, 거의 전부가 정치적 좌파에 대한 것이었으며 다수가 재판 없이 이루어졌다. 1794년 7월 29일 승리자들은 파리 코뮌 위원 7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테르미도르파 질서에 반대한 대중 봉기(공화력 3년 제르미날 12일과 프레리알 1일, 1795년 4~5월)는 실패했고, 왕당파도 키베롱 상륙(1795년 6~7월)과 방데미에르 13일 봉기에서 차례로 실패했다. 1795년 10월 26일(공화력 4년 브뤼메르 4일)에는 ‘혁명에 적절히 관련된 행위’에 대한 일반 사면이 의결되었으나 망명자·추방자·방데미에르 관련 피고는 제외되었다.
‘테르뢰르(공포정치)’라는 말 자체가 이 반동기에 만들어지고 퍼졌다. 1794년 7월 28일(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10일) 로베스피에르 몰락까지의 폭력을 이유로 그 시기를 정치적으로 규정하기 위해서였다.
구분
좁은 사건과 시대 구분을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테르미도르 9일은 1794년 7월 27일의 하루 사건이고, 테르미도르 반동은 1794년 7월 27일부터 총재정부 출범까지 이어지는 국민공회 통치의 마지막 시기이며, 총재정부는 그 뒤의 통치 체제다. 공회 통치의 종료 시점은 기준에 따라 다르다. 프랑스 측 서술은 1795년 10월 선거 후 공회의 자진 해산일인 1795년 10월 26일을, 영어 측 서술은 총재정부 출범일인 1795년 11월 2일을 든다. 이 항목은 두 날짜를 병기하고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프랑스적 맥락은 소비에트 테르미도르라는 비유와 구별된다. 프랑스의 테르미도르에서는 군주정이 복고되지 않은 채 공포정치를 대체하는 온건 정권이 들어섰다. 반면 트로츠키는 『배신당한 혁명』(1936)에서 스탈린의 대두와 혁명 이후 관료층을 ‘소비에트 테르미도르’라 불렀는데, 이는 자본주의를 복고하지 않은 체제 내부의 ‘반혁명적 퇴행’이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스탈린의 승리, 볼셰비즘으로부터 당의 분리, 부상하는 관료층을 분석하며 지배층이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닌, 계급적 뿌리에서 소외된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1936년의 이 책은 스탈린주의에 관한 트로츠키의 주요 저작이며, 그는 스탈린주의를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국가 장악에 비유해 ‘보나파르티즘’의 한 형태라고도 불렀다. 이후 다른 저자들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테르미도르 비유를 적용하기도 했다.
사례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가 논란에 휩싸이고 공안위원회와 공회로부터 독재 혐의로 비판받는 가운데 연설을 했다. 그는 상대를 지목하지 않고 공격하며 위협했고, 다음 날 발언이 저지된 채 체포령이 표결되었으며 7월 28일 생쥐스트, 쿠통, 르바, 동생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처형되었다.
백색테러와 그 주체들의 사례도 있다. 프레롱과 탈리앵은 자코뱅파와 충돌한 뮈스카댕 무리를 조직했고(특히 1794년 9월 19일), 자코뱅 클럽은 1794년 11월에 폐쇄되었으며, 1794~95년에는 생튀뤼주 후작이 이끄는 2,000~3,000명 규모의 ‘콜레 누아르’ 무리가 행인을 구타했다. 1795년 백색테러는 프랑스 남동부(론 강 유역)로 번져 리옹의 제위 결사와 솔레이유 결사가 자코뱅파, 공화파, 헌법파 사제, 신교도, 정치 수감자를 롱르소니에, 부르, 리옹, 생테티엔, 엑스, 마르세유, 툴롱, 타라스콩에서 추격하고 학살했으며, 시·도 당국의 공모가 잦았다. 툴롱의 자코뱅파와 그 동조자들은 타라스콩과 마르세유에서 학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