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Robespierre
프랑스 1758–1794

생존권과 혁명 정부를 논한 자코뱅 정치가

프랑스 혁명기의 변호사이자 국민공회 의원으로, 공안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792년 생필품 연설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재산과 상업의 정당한 영역도 인정했다. 1794년 정치도덕 보고에서는 덕과 공포를 혁명 정부의 원리로 제시했다. 이 주장은 공포정을 정당화한 당사자의 논리이며, 여러 위원회와 국민공회가 내린 결정을 모두 그의 개인 명령으로 볼 수는 없다. 테르미도르의 정치적 패배 뒤 처형됐다.

자코뱅, 대표, 그리고 공화국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의 변호사로서 삼부회에 선출되어 혁명 정치에 들어왔다. 그는 검열, 사형, 식민지 노예제, 참정권 같은 문제에서 점차 강한 민주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자코뱅 클럽의 연설은 그를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클럽은 국가기관이 아니었고, 국민공회·파리 코뮌·구역의 행동과 동일시할 수 없다.

왕정 붕괴와 공화국 수립 뒤 그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공안위원회는 여러 의원이 매달 갱신되며 운영한 전시 행정부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역할을 이 제도 밖의 절대 권력으로 그리면 국민공회와 다른 위원회의 책임을 지우게 된다. 반대로 제도적 집단성은 그가 공개적으로 옹호한 공포와 숙청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생존권, 혁명정부, 테르미도르

로베스피에르의 정치를 공포정치라는 한 낱말로만 읽으면 그가 제기한 사회적 쟁점과 억압을 정당화한 논리가 함께 사라진다. 1792년 생필품 연설에서 그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사치품과 구별하고, 재산과 교역의 정당한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빈곤한 사람이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사유재산의 즉각적 폐지안도, 최고가격제의 실제 효과에 대한 보증도 아니었다.

1793년의 전쟁·방데 내전·지방 봉기 속에서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 감시기구를 통해 비상 통치를 확대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 제도의 유력한 지도자였고 1794년 2월 ‘덕과 공포’의 결합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따라서 모든 체포를 그의 개인 명령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에베르파와 당통파 숙청 및 권리 축소에 대한 정치적 책임도 분명하다. 프레리알 22일법 뒤 억압이 정점에 이르자 동료 의원들은 다음 숙청을 두려워했고, 테르미도르 9일 체포와 다음 날 처형으로 그의 정치적 국면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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