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5 정치·당 지도 · 소련 · 당 최고 지도자
경력 연표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38.01–1939.03
- 정위원 1939.03–1964.10
1964.10 해임
관련 역사 사건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모스크바 당 제1서기 · 지하철 건설
- 1939.11–1940.03겨울전쟁전후 회고록에서 겨울전쟁을 '도덕적 패배'라 평한 소련 지도자회고록에서 '이 정도 대가를 치른 승리는 사실상 도덕적 패배였다. 우리 국민은 진실을 듣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소련 지도부 내부에서도 겨울전쟁이 재앙이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 1941–1945대조국전쟁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방어전과 반격에 참여했다.
- 1948–1955티토-스탈린 결별1955년 화해의 주역베오그라드를 방문해 관계를 정상화했다
- 1953베리야의 몰락제거를 조직주석단 내에서 베리야 제거를 조직한 핵심 인물이었다.
- 1953헝가리의 새 노선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라코시가 집단적으로 일할 줄 모른다며 오류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공산당 제1서기, 1953–1964흐루쇼프는 말렌코프를 밀어낸 뒤 독일 현상 유지를 고수하는 강경 구상을 밀어붙였다. 동유럽에 초안을 보내고 바르샤바 조약을 집단안보 협상의 지렛대로 삼은 것도 그였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비밀연설을 낭독한 제1서기마지막 날 비공개 회의에서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를 낭독했다.
- 1956헝가리 혁명개입을 결정봉기를 진영의 붕괴로 보고 군사 개입을 최종 결정했다.
- 1956–1957백화제방에서 반우파 투쟁으로비밀연설로 논쟁을 촉발스탈린 비판이 중국의 개인숭배·소련 모델 논의를 열었다.
- 1957반당 그룹 사건승리한 제1서기문제를 중앙위원회로 넘겨 다수파를 역전시켰다.
- 1957–1965소련 우주 계획정치적 후원자당 제1서기로서 우주 계획에 최우선의 자원과 정치적 지원을 부여하고 그 성취를 사회주의의 성취로 세계에 내세웠다.
- 1958–1962대약진과 대기근인민공사를 비판하고 전문가를 철수1960년 7월 소련 기술자 철수로 공업 계획이 중단되었다.
- 1956–1969중소분열소련 쪽 당사자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 노선으로 논쟁을 열었고, 1960년 고문단을 철수시켰다.
- 1961베를린 장벽 건설소련 공산당 제1서기 겸 총리, 1차·재차 베를린 최후통첩을 날린 장본인흐루쇼프는 1958년 11월 서방 3국에 서베를린 철수를 요구하는 6개월 최후통첩을 발하고 1961년 빈 정상회담에서 이를 재차 확인했다.
- 1962쿠바 미사일 위기대치를 이끈 소련 지도자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결단을 내렸다가 핵전쟁 직전에 철수를 택했다.
1953–1958: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 베리아 제거에서 「반당 그룹」까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3월 6일 발표된 새 지도부에서 말렌코프가 각료회의 의장이 되고 베리아, 카가노비치, 불가닌, 몰로토프가 제1부의장을 맡았다.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당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열 명으로 구성된 프레지디움의 맨 끝 서열에 놓였다. 3월 14일 말렌코프가 중앙위원회 서기국에서 물러나자 서기 명단의 선두에 흐루쇼프가 섰고, 1953년 9월 중앙위원회가 그를 제1서기로 공식 선출했다.
첫 표적은 베리아였다. 흐루쇼프는 말렌코프와 손잡고 베리아의 개혁안을 막았고, 그의 부관 크루글로프와 세로프를 포섭한 뒤 1953년 6월 26일 프레지디움 회의에서 베리아를 체포했다. 베리아는 비공개 재판을 거쳐 1953년 12월 다섯 측근과 함께 처형되었다.
다음은 말렌코프였다. 1955년 1월 중앙위원회 회의는 그를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와 베리아의 득세를 도운 혐의로 비판했고, 다음 달 불가닌이 그를 대신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말렌코프는 프레지디움 의석을 유지한 채 전력 담당 장관으로 물러났다. 흐루쇼프의 전기 작가 윌리엄 톰프슨에 따르면 이 무렵 흐루쇼프가 집단지도체제의 첫 번째 인물이라는 지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1957년 상반기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는 흐루쇼프 축출을 위한 지지를 조용히 모았고 불가닌과 셰필로프가 가담했다. 6월 18일 프레지디움 회의에서 흐루쇼프 지지자 둘이 빠진 틈을 타 이들은 그의 해임을 추진했다. 흐루쇼프는 프레지디움 위원 전원이 통보받지 않았다고 항의했으며, 주코프 원수를 통한 군 통제와 보안 부서 장악을 유지했다. 그가 장악한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모스크바로 불려 와 중앙위원회 회의를 열게 했고, 이 회의는 세 주모자를 「반당 그룹」으로 규정해 중앙위원회와 프레지디움에서 제명했다. 몰로토프는 몽골 주재 대사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공업·연구 직위로 밀려났다.
승자의 보상으로 주코프는 프레지디움 정식 위원이 되었지만, 흐루쇼프는 그의 인기와 힘을 두려워했다. 1957년 10월 주코프가 발칸 순방에 나선 사이 프레지디움 회의가 그의 해임을 준비했고, 몇 주 뒤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아무도 그를 변호하지 않았다. 1958년 3월 흐루쇼프는 불가닌을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자신이 이끄는 소련 국방위원회를 만들어 권력 장악을 완성했다.
1956년 2월 25일 — 스탈린의 관을 연 비밀연설
1956년 2월 25일 자정 무렵, 제20차 당대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4시간 동안 말했다. 대의원 1,436명은 충격과 침묵 속에 들었다.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이 연설은, 스탈린에 대한 레닌의 유언을 공식적으로 처음 인용했고, 대숙청의 불법성을 폭로했으며, 전쟁 전야의 스탈린의 무능력을 고발했다.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레닌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을 자행했으며, 「나치 침공 전야에도 정보를 무시했다」고 밝혔다.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들이 고문당하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스탈린은 지도를 보며 전쟁을 지휘한다고 했다.」
이 연설은 '비밀'이었지만, 이스라엘 정보국이 6월에 입수하고 CIA가 공개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수백만 공산당원이 당을 떠났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간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관을 열었지만, 그가 풀어놓은 힘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