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에서 반우파 투쟁으로
당을 비판하라고 초대한 마오는 왜 6주 만에 비판자 55만 명을 우파로 낙인찍었는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헝가리 혁명 뒤 마오는 「백 가지 꽃이 피게 하라」며 지식인에게 당의 관료주의 비판을 권했다. 1957년 5월 비판이 일당 지배 자체로 번지자 6월 8일 방향을 바꿔 반우파 투쟁을 시작했고, 덩샤오핑이 지휘한 운동은 55만 명에게 우파 낙인을 찍어 노동교양과 하방으로 보냈다.
1956년의 두 충격
1956년 2월 소련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중국 지도부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4월 『인민일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관하여」는 스탈린의 공을 7, 과를 3으로 평가하며 소련의 「전면 부정」에 거리를 두었고, 동시에 제8차 당대회는 집단지도와 개인숭배 반대를 강조하며 마오쩌둥 사상을 당 규약에서 뺐다. 마오는 겉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근거 1 · 근거 2
10~11월 폴란드의 10월과 헝가리 혁명은 다른 교훈을 주었다. 마오는 헝가리의 봉기가 당이 대중과 괴리되고 관료주의가 쌓인 결과라고 보았고, 중국에서 같은 일을 막으려면 당 밖의 비판을 받아 관료주의를 씻어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인민 내부 모순」 개념으로 사회주의 사회에도 모순이 있음을 인정했고, 이는 소련의 「모순 없는 사회」론과 다른 독자적 이론으로 제시되었다. 근거 3 · 근거 4
「백 가지 꽃이 피게 하라」
구호는 1956년 5월 처음 제기되었으나 지식인은 1955년 후펑 사건 — 문예이론가 후펑과 그 「반혁명 집단」 수천 명의 체포 — 을 기억하며 침묵했다. 1957년 2월 27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는 1,800명의 간부와 지식인 앞에서 「인민 내부 모순의 올바른 처리」를 연설해 비판이 「독초」가 아닌 「향기로운 꽃」이 될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연설의 원문은 회람되었으나 6월에야 크게 수정되어 공개되었다. 근거 5 · 근거 4
당 지도부 다수 — 류사오치·펑전 등 — 는 당 밖의 비판을 받는 정풍에 소극적이었고, 마오는 3~4월 지방을 돌며 간부들을 설득했다. 4월 27일 중앙의 정풍 지시가 내려지자 5월 초부터 통일전선부가 민주당파와 지식인을 초청하는 좌담회를 열었고 신문이 비판을 실었다. 「대명대방(大鳴大放)」이라 불린 이 국면은 약 5주간 계속되었다. 근거 2 · 근거 6
비판은 어디까지 갔는가
비판은 마오가 기대한 「관료주의·종파주의·주관주의」의 범위를 넘었다. 민주동맹의 장보쥔은 정책을 심의할 「정치 설계원」을, 뤄룽지는 반혁명 진압·삼반오반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할 위원회를 제안했다. 지식인들은 「당천하(黨天下)」— 당이 모든 것을 독점한다 — 를 비판했고 소련 모방과 「외행이 내행을 지도한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우한(武漢)·청두 등에서는 노동자 파업과 학생 소요도 있었다. 근거 7 · 근거 2
베이징대학에서는 5월 19일부터 학생들이 「민주의 벽」에 대자보를 붙였다. 물리학과 학생 탄톈룽 등은 반혁명 진압의 처형 통계 공개, 소련의 헝가리 개입 재평가, 「계급투쟁」 교육의 중단을 요구했고 「백화학사」 같은 자생 조직이 생겼다. 대학의 발언은 뒤에 가장 가혹하게 처벌되었다. 린시링 같은 인민대학 학생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내걸고 당의 특권을 비판했다. 근거 2 · 근거 8
6월 8일: 방향 전환
5월 15일 마오는 당 간부에게 「사정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돌려 우파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당분간 「미쳐 날뛰게」 두라고 지시했다. 6월 8일 『인민일보』 사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와 같은 날의 당내 지시는 「우파의 진공」에 대한 반격을 선언했다. 마오가 2월 연설에서 제시했던 「향기로운 꽃과 독초」를 가르는 여섯 기준은 6월 공개된 수정본에 삽입되어 사후적 근거가 되었다. 근거 8 · 근거 9
운동은 덩샤오핑이 총서기로 실무를 지휘했다. 표적은 먼저 장보쥔·뤄룽지·추안핑 등 민주당파와 언론계의 유명 인사였고 이어 각 기관·대학·중등학교에서 5% 안팎의 할당을 채우는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1957년 말까지 30만, 최종적으로 공식 집계 55만 2,877명이 우파로 규정되었으며, 실제 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추정이 있다. 작가 딩링·아이칭, 학자 마인추, 젊은 팡리즈가 포함되었다. 근거 8 · 근거 10
처벌: 노동교양과 하방
우파는 여섯 등급으로 나뉘어 해고·강등·감봉·「감독 노동」·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1957년 8월 국무원이 도입한 노동교양은 재판 없이 행정 결정으로 수용하는 제도로, 우파 처리를 위해 급히 마련되었고 2013년까지 존속했다. 간쑤의 자볜거우 농장에는 우파 약 3천 명이 보내졌고 1960년 대기근 속에 대부분이 굶어 죽었다. 근거 11 · 근거 12
낙인은 본인에 그치지 않았다. 우파의 자녀는 진학과 취업에서 차별받았고 「우파 가족」은 이후 20년의 정치운동에서 거듭 표적이 되었다. 1959년 루산 회의 뒤 「반우경」 운동은 같은 논리를 당 안으로 돌려 간부 수백만 명을 조사했다. 반우파 투쟁이 만든 침묵 속에서 1958년 대약진의 과장 보고와 실패는 아무 견제도 받지 않았다. 근거 8 · 근거 13
「양모」인가 변심인가
마오는 1957년 7월 「뱀을 굴에서 끌어냈다」고 말했고, 공식 역사는 운동이 처음부터 반대자를 드러내는 「양모(陽謀)」였다고 설명한다. 맥파쿼 등 역사가들은 마오가 진심으로 당 관료주의를 견제할 비판을 원했으나 비판이 당의 지도 원칙에 이르자 놀라 방향을 바꿨으며, 「양모」는 사후에 만든 설명이라고 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근거 14 · 근거 2
1978년 이후 당은 반우파 투쟁이 「필요했으나 심각하게 확대되었다」고 규정하며 55만 명 가운데 96명을 제외한 전원의 낙인을 취소했다. 운동 자체의 정당성은 유지되었고, 장보쥔 등 「대우파」의 복권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식인이 당과 맺은 관계 — 초대와 배신, 침묵과 순응 — 는 이 사건에서 하나의 원형을 얻었고, 1989년의 학생들에게도 기억되었다. 근거 8 · 근거 15
결과
지식인의 비판 통로가 닫히면서 대약진의 과오를 견제할 힘이 사라졌다. 「우파」 낙인은 1978년 이후에야 취소되었고, 운동이 처음부터 「양모」였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마오 시대의 성격을 묻는 질문이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956.02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스탈린 비판이 중국 지도부에 개인숭배와 소련 모델의 문제를 제기했다.
- 1956.05.02「백화제방·백가쟁명」 제기
마오가 최고국무회의에서 학문·예술의 다양성을 권하는 방침을 밝혔다.
- 1956.10–11헝가리 혁명
부다페스트의 봉기와 소련의 개입은 마오에게 당과 대중의 괴리가 위험함을 보여주었다.
- 1957.02.27「인민 내부 모순의 올바른 처리」
마오가 사회주의 사회의 비적대적 모순은 설득과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 1957.04.27당 정풍운동 지시
중앙이 당 외부 인사의 비판을 받는 정풍을 지시했고 5월 초 「대명대방」이 시작되었다.
- 11957.05비판의 분출
민주당파와 대학에서 일당 독점, 소련 모방, 숙청 운동의 과잉을 비판하는 발언과 대자보가 쏟아졌다.
- 1957.05.15마오의 내부 지시 「사정이 변하고 있다」
당 간부에게 배포된 글에서 마오는 우파가 「미쳐 날뛰게」 두라고 지시했다.
- 1957.06.08「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민일보』 사설과 당 내부 지시로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었다.
- 1957.07–09우파 낙인의 확산
각 단위에 할당이 내려와 지식인·학생·간부 55만 명이 우파로 규정되었다.
- 21957.08노동교양 제도 도입
재판 없이 행정 결정으로 수용을 허용하는 제도가 우파 처리의 도구가 되었다.
- 31959–1961우파 수용소의 대기근
간쑤 자볜거우 농장의 우파 3천 명 가운데 대부분이 굶어 죽었다.
- 1978–1980우파 낙인 취소
당은 극소수를 제외한 전원의 우파 판정을 「착오」로 취소했으나 운동 자체는 「필요했다」고 유지했다.
관련 인물 10명
주도 · 집행2
참여4
대상 · 피해2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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