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에서 반우파 투쟁으로
당의 정풍을 도와 달라며 비판을 청한 마오는 왜 6월 8일 반격으로 돌아섰고, 그 반격은 어떻게 55만여 명을 우파로 낙인찍는 운동이 되었는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혁명 뒤 마오는 「백화제방·백가쟁명」과 「인민 내부 모순」론을 내세워 당 밖의 비판으로 관료주의를 씻자고 했다. 1957년 5월의 「대명대방」에서 민주당파의 장보쥔·뤄룽지·추안핑은 권력 분점과 재심 기구를, 베이징대 「민주의 벽」의 학생들은 민주와 법제를 요구했다. 6월 8일 당은 반격으로 돌아섰고, 덩샤오핑이 지휘한 반우파 투쟁은 할당에 따라 공식 집계 55만여 명을 우파로 규정해 노동교양과 하방으로 보냈다.



1956년의 두 충격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비밀연설로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숙청을 고발하자 중국 지도부는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마오쩌둥은 3월 말 소련 대사에게 스탈린이 중국에 저지른 잘못을 길게 늘어놓으면서도 그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강조했고, 4월 《인민일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관하여」는 스탈린이 모든 것에서 틀렸다는 생각을 “중대한 오해”라 불렀다. 마오는 같은 달 「10대 관계를 논함」에서 중앙의 판단이 스탈린의 과오 30%, 공적 70%라고 밝히며 “이 평가는 대체로 맞다”고 말했다. 중국은 소련의 「전면 부정」과 거리를 두면서도, 소련 모델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신호를 함께 보냈다. 1 2
9월의 제8차 당대회는 이 분위기를 제도로 옮겼다. 대회는 집단지도와 개인숭배 반대를 강조하며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표현을 당 규약에서 뺐고, 사회주의 개조가 끝난 사회에서 계급투쟁은 더 이상 「중심 고리」가 아니며 당은 경제 건설에 집중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같은 실무 지도자의 비중이 커졌다. 1981년의 「역사결의」는 이 8대 노선을 옳았다고 평가했는데, 그 노선이 1년도 지나지 않아 뒤집힌 계기가 바로 1957년 여름의 반우파 투쟁이었다. 3 4
6월 포즈난 봉기, 10월 폴란드의 고무우카 복귀와 헝가리 혁명은 다른 교훈을 남겼다. 중국 지도부 일부는 동유럽의 사태를 중공업만 앞세우고 인민의 생활을 소홀히 한 결과로 읽었다. 류사오치는 흐루쇼프에게 헝가리를 무력으로 진압하라고 압박했고, 마오도 처음의 반대에서 돌아서 두 번째 개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헝가리 당이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가 관료적 전제로 무너졌다는 판단은 마오에게 중국 당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경고로 다가왔다. 5 6
11월 제8기 2중전회에서 마오는 이 경고를 공개적으로 꺼냈다. 그는 쓰촨 청두의 학생 100여 명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오다 기차역에서 저지당한 일을 들며, 학생이 거리로 나서고 노동자가 파업하는 것을 “좋은 일”로 여겨야 하고 관료주의를 하는 자는 대중이 끌어내릴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당이 인민과 떨어진 「귀족 계층」으로 자라지 않도록 경계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주관주의·종파주의·관료주의의 「세 가지 나쁜 기풍」을 바로잡는 정풍운동을 벌이겠다고 예고했고, 앞으로 인민 내부와 당내의 문제는 무력이 아니라 정풍과 비판·자기비판으로 풀겠다고 했다. 마오가 말한 「대민주」는 대중이 국가 기구 밖에서 시위와 파업으로 관료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7 5
「백 가지 꽃이 피게 하라」
구호는 정치보다 예술에서 먼저 나왔다. 1951년 마오는 경극 개혁 논쟁 속에 중국희곡연구원에 「백화제방·추진출신(百花齊放, 推陳出新)」이라는 제사를 써 주었고, 1953년 천보다가 역사 연구의 방침을 묻자 「백가쟁명(百家爭鳴)」 네 글자로 답했다. 1956년 1월 당 중앙의 지식인 문제 회의는 500만 지식인을 끌어안자는 방향을 정했다. 4월 27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앙선전부장 루딩이가 학문과 예술은 행정 명령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마오는 이튿날 총괄 발언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과학 발전과 문예 번영의 방침으로 삼자고 말했다. 5월 2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는 이 방침을 공식으로 내놓으며 소련의 리센코파가 모건 유전학파를 억누른 일을 반면교사로 들었다. 4 8 9
5월 26일 루딩이는 중난하이 화이런탕에서 과학자·의사·작가·예술가에게 「백화제방, 백가쟁명」 보고를 했다. 그는 학술·기술 문제를 정치 문제와 엄격히 갈라야 하고 학자에게 견해를 이유로 정치적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하며, 독립적 사고의 자유, 변론의 자유, 창작과 비판의 자유, 자기 의견을 발표하고 견지하고 보류할 자유를 내세웠다. 과학 예산이 크게 늘었고, 8월 칭다오의 유전학 좌담회는 모건파 학자에게 강의·연구·출판의 권리를 돌려주었다. 역사학의 시대 구분, 경제학의 가치 법칙을 둘러싼 논쟁이 열렸고, 국가가 지원하는 첫 시 잡지 《성성(星星)》 같은 문예지가 창간되었다. 9 8 4
그러나 지식인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오는 농민의 세금 부담을 비판한 량수밍을 중앙정부 회의에서 「반동」이라 몰아세운 적이 있었고, 1955년에는 당의 문예 통제에 반대하는 30만 자 의견서를 정치국에 낸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가 후펑이 「반혁명 집단」의 우두머리로 체포되었다. 마오는 후펑의 편지를 엮은 자료에 직접 서문을 썼고, 당국 집계로 2,100여 명이 연루되어 92명이 체포되었다. 이어진 「숙반」(반혁명 숙청) 운동은 대학과 기관에 공포를 남겼다. 초기의 비판은 주로 간접적이었고 운동 자체를 칭송하는 투였다. 저우언라이가 받은 편지도 대부분 조심스러운 건의였고, 그는 지식인을 더 북돋아야 한다고 마오에게 건의했다. 4 10 11
문학에서는 먼저 금기가 흔들렸다. 젊은 작가 왕멍의 소설 「조직부에 새로 온 젊은이」는 관료화한 당 기관을 그렸고, 류빈옌은 「다리 공사장에서」와 「본보 내부 소식」 같은 르포로 간부의 무사안일과 신문의 검열을 고발했다. 시인 아이칭은 같은 장미만 기르던 정원사가 꿈에서 다른 꽃들에게 문을 닫았다고 꾸지람을 듣는 우화 「꽃 기르는 사람의 꿈」을 썼다. 마오는 이 작품들을 1957년 2~3월 연설에서 거듭 언급했다. 쓰촨 시인 류사허의 「초목편」에 대해서는 “독초”라 비판해야 한다면서도 그런 시가 100편 있어도 혼란은 없다고 했다. 4 12 13
「인민 내부 모순」 연설과 정풍 지시
1957년 1월 성·시·자치구 당서기 회의에서 마오는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글도 공개적으로 실어 반박할 길을 찾아야 한다며, 대중에게 해로운 생각을 접하게 해 「예방접종」을 시키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내부 연설에서는 밭에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라듯 「독초」도 해마다 김매야 하며, 뽑은 풀은 거름이 된다고도 했다. 그는 고위 간부 열에 아홉은 「장기공존·상호감독」을 포함한 이 방침에 찬성하지 않거나 반쯤만 찬성한다고 불평했다. 꽃을 피우라는 말과 김을 매라는 말은 처음부터 한데 있었다. 4 8
2월 27일 마오는 최고국무회의 제11차 (확대) 회의에서 「인민 내부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를 연설했다. 그는 적과 우리 사이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모순을 갈라, 사회주의 사회에도 모순이 남아 있으며 인민 내부의 비적대적 모순은 민주적 방법, 설득과 교육, 「단결·비판·단결」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날 때가 많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도 한때 틀렸다고 여겨졌다는 대목은 지식인을 안심시켰다. 사회주의에도 모순이 있다는 인정은 「모순 없는 사회」를 내세운 소련 교리와 다른 중국 독자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연설은 녹음으로 각지에 전달되었고, 3월의 전국 선전공작회의에서 마오는 지금은 “방(放)이 부족하지 지나친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말했다. 14 15 8
당내의 저항은 컸다. 혁명이 이겼는데 왜 남의 감독을 받아야 하느냐,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일하기 어려워진다는 불만이 나왔다. 류사오치와 펑전을 비롯한 지도부 다수는 당 밖의 사람을 끌어들여 당을 정풍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마오는 3월 17일부터 4월 초까지 톈진·산둥·장쑤·상하이·저장을 돌며 지방 간부를 설득했다. 4월 27일 당 중앙은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를 내려 관료주의·종파주의·주관주의를 바로잡는 정풍을 결정했고, 5월 1일 《인민일보》에 실린 지시는 “아는 것은 다 말하고, 말할 때는 남김없이 하라. 말한 사람에게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경계로 삼는다”는 원칙을 약속했다. 4 16 8 17
4월 30일 마오는 톈안먼 성루에서 민주당파 지도자들을 불러 같은 약속을 되풀이하며 당의 정풍을 도와 달라고 청했다. 민주당파는 1941년 결성된 중국민주동맹(민맹)과 농공민주당 같은 「제3세력」의 후신으로, 1949년 공동강령을 채택한 정치협상회의를 거쳐 신정부에 참여했으나 1954년 헌법 제정 뒤 실권을 잃어 가고 있었다. 첫 중앙인민정부에서 부주석 6명 중 3명, 부장 24명 중 11명이 민주당파였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1956년 8대는 공산당과 민주당파의 「장기공존·상호감독」을 공식 방침으로 확인했다. 민맹 부주석이자 교통부장, 《광명일보》 사장이던 장보쥔은 마오가 인민 내부 모순을 말한 것은 이론의 돌파라며 크게 고무되었다. 17 18 8 19
대명대방: 「정치 설계원」과 「당천하」
5월 초부터 중앙 통일전선부는 민주당파·무당파 인사 좌담회를 13차례, 상공업계 좌담회를 25차례 열었고, 각 기관과 대학, 연구소, 문예 단체도 좌담회를 열었다. 신문은 비판을 그대로 실었다. 5월 1일부터 6월 7일 사이 총리실과 각 기관에 편지가 수백만 통 쏟아졌다. 이 국면을 「대명대방(大鳴大放)」, 또는 「57년의 봄」이라 부른다. 비판의 다수는 당이 혁명성을 잃고 관료화해 권력과 특권을 독점하고 대중과 멀어졌다는 것이었고, 지식인에 대한 푸대접과 자기검열에 대한 고발이 뒤따랐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회주의와 공산당의 정당성을 전제로 기존 체제를 더 잘 돌아가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8 4
5월 22일 《인민일보》에 실린 좌담회 발언에서 장보쥔은 공업에는 설계원이 많은데 정치에는 설계원이 하나도 없다며, 정협·인대·민주당파·인민단체가 정치의 「네 개 설계원」이 되어 국가의 기본 정책을 미리 토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의 당위원회 지배에 대한 불만을 토론에 부치자고 하고, 반혁명 진압·삼반·숙반에서 남은 문제를 당과 정부가 결심하고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5월 22일 민맹 부주석이자 삼림공업부장 뤄룽지는 전국인대와 정협 안에 집권당·민주당파·무당파 세 쪽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두어 삼반·오반·숙반의 잘못을 재심하자고 제안했다. 상공업계의 장나이치는 이미 전해에 삼반·오반 사건의 재심을 주장한 바 있었다. 19 20 8 21
1940년대 자유주의 잡지 《관찰》을 이끌었던 추안핑은 4월 후차오무의 추천으로 《광명일보》 총편집이 되었고, 4월 19일 신문의 공산당 당조가 철수하면서 《광명일보》는 처음으로 민주당파의 신문다워졌다. 6월 1일 그는 통전부 좌담회에서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께 드리는 몇 가지 의견」을 발언해, 당이 천하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당천하(黨天下)」의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발언은 이튿날 《인민일보》와 《광명일보》에 전문이 크게 실렸고, 6일 국무원 비서장 보좌 루위원이 시중쉰이 주재한 좌담회에서 이를 심각한 오류라고 반박했다. 마오는 뒤에 장보쥔의 「정치 설계원」, 뤄룽지의 「평반 위원회」, 추안핑의 「당천하」를 우파의 3대 정치 이론으로 꼽았다. 사회학의 부활을 조심스레 제안한 인류학자 페이샤오퉁도 뒤에 「독초」, 「대우파」로 몰렸다. 22 23 20 24
비판은 지식인 밖으로도 번졌다. 농민은 합작사의 비효율을 비판하며 땅을 돌려 달라고 했고, 노동자는 임금 제도가 불합리하고 무급 초과근무를 강요당한다고 호소했다. 국민당 시절이 더 나았다는 말, 소수민족이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말도 나왔다. 톈진의 한 고등학교 교사 황신핑은 “왜 여러 정당이 돌아가며 집권하는 제도를 가질 수 없느냐”고 물었고, 민주당파도 자기 무장을 가져야 한다는 말, 「하이드 파크」 같은 공개 연설장을 열자는 말도 전해졌다. 6월에는 후베이 한양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 소요가 일어났다(한양 제1중학 사건). 마오는 집권 8년도 안 되어 30만 건이 넘는 의견이 나왔다며 “그럼 나는 다시 징강산으로 가야 하느냐”고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4 25 17 8
베이징대학의 「민주의 벽」
5월 19일 오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2학년 학생들이 대식당 남쪽 벽에 첫 대자보를 붙였다. 곧 열릴 청년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학교 대표가 누구이며 어떻게 뽑혔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어 「대담한 제안」이라는 대자보가 「민주의 벽」을 열자고 하자 그날 밤 대식당과 소식당 주변의 벽과 게시판이 대자보로 뒤덮였고, 20일 오후까지 162장이 붙었다. 당위원회 서기 장룽지는 당위원회를 대표해 대자보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22일부터 토론회와 연단이 곳곳에 섰고, 26일 학생들은 칭화대학의 운동회에 가서 연대를 호소했으며 운동은 베이징의 다른 대학과 톈진의 난카이대학으로 번졌다. 이를 「5·19 운동」이라 부른다. 26 4
물리학과의 탄톈룽은 「첫 번째 독초」에서 신문 편집자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무지가 진리를 가로막는 만리장성이라고 썼고, 류치디는 「후펑은 반혁명이 아니다」에서 후펑의 석방을 요구했다. 중문과 장위안쉰과 선쩌이의 시 「때가 왔다」는 자기 시의 불씨가 “5·4”에서 왔다고 노래했다. 학생들은 반혁명 숙청 때 잘못 투쟁당한 사례의 공개, 인사 기록의 본인 공개, 금서 해제, 정치 과목 필수제 폐지, 맹목적 소련 학습 반대를 요구했다. 어떤 대자보는 간부와 노동자의 임금 차이를 들어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29일 학생들은 「백화학사」를 세워 사회주의를 옹호한다는 전제 아래 어떤 문제든 자유롭게 논쟁하겠다고 선언하고 잡지 《광장》을 냈다. 26 4
가장 큰 반향을 부른 것은 중국인민대학 법학과 4학년 린시링이었다. 군 문서원 출신으로 인민대학에 보내진 그는 5월 23일 베이징대 학생회의 후펑 문제 토론회에 왔다가 연단에 올라, 법률로 보면 「후펑 반혁명 집단」은 증거가 부족하며 당에 의견서를 낸 것이 어떻게 반혁명이냐고 물었다. 그는 공유제가 사유제보다 낫지만 지금의 사회주의는 봉건의 토대에서 생긴 「비전형적」 사회주의이며, 진정한 사회주의는 공유제와 함께 사회주의 민주와 건전한 법제를 갖춘 것이라 했다. 그는 5~6월 두 학교에서 여섯 차례 연설했고, 후야오방의 비서였던 약혼자를 통해 얻은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내용을 공개했다. 《인민일보》가 그의 발언을 내부 참고자료로 올리자 류사오치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 27 26 25
학생들의 비판은 대체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당의 특권과 비민주를 공격한 것이었다. 민주당파의 요구가 권력 분점과 감독 기구였다면, 학생들은 소련식 체제 자체의 근원, 곧 국가 권력의 고도 집중과 법제의 부재를 물었다. 한 대자보는 “5·19에서 시작해 민주광장에서 형성되고 있는 민주는 소련 형식을 베낀 것도, 서유럽 형식을 들여온 것도 아니고 오늘 중국의 사회주의 토양에서 자란 것”이라고 썼다. 같은 시기 물리학과 출신 젊은 핵물리학자 팡리즈는 동료들과 교육에 관한 건의서를 쓰다가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자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았다. 대학의 발언은 뒤에 가장 가혹하게 처벌되어, 베이징대에서만 716명이 우파로 규정되었고 그것도 칭화대보다 적다는 이유로 장룽지가 강등되었다. 26 28 4
6월 8일: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방향은 5월 중순에 이미 바뀌고 있었다. 5월 14일 당 중앙은 우경분자·반공분자의 발언을 “꾸미지 말고 그대로” 보도해 대중이 그 정체를 알게 하라고 지시했고, 15일 마오는 「사정이 변하고 있다」를 써서 고위 간부에게 돌렸다. 글은 당내의 수정주의를 교조주의보다 큰 위험이라 했고, 당 밖 지식인 가운데 우파는 1~10%라고 보았다. “우파의 진공은 아직 정점에 이르지 않았다. 그들은 한창 신이 나 있다. 우리는 우파가 한동안 날뛰게 내버려 두어 정점에 이르게 하겠다.” 그는 물고기를 낚을 필요도 없이 대어가 스스로 떠올랐다며, 그것은 “사람을 잡아먹는 상어”라고 했다. 이 글은 6월 12일에야 당 전체에 내려갔다. 같은 시기 신문은 계속 비판을 실었고 비판자들은 이 변화를 알지 못했다. 29 30 8 4
구실은 익명의 편지였다. 6월 6일 국무원 좌담회에서 추안핑을 반박한 루위원이 자신이 받은 협박 편지를 공개하자, 마오는 이튿날 후차오무와 우렁시에게 이것이 우파에 반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6월 8일 당 중앙은 마오가 쓴 당내 지시 「힘을 조직해 우파분자의 미친 듯한 진공을 격퇴하자」를 내려, 이것은 당 안팎을 전장으로 하는 “큰 전쟁”이며 이기지 못하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고 「헝가리 사건」이 일어날 위험도 있다고 했다. 같은 날 《인민일보》 사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는 소수의 우파가 「당의 정풍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공산당과 노동계급을 뒤엎으려 한다고 선언했다. 사설은 끝에 당이 여전히 선의의 비판을 듣겠다고 덧붙였지만, 이날로 백화제방은 끝났다. 17 31 25 4
반격은 신문의 사설로 이어졌다. 상하이의 젊은 평론가 야오원위안이 6월 10일 《문회보》를 공격하는 글을 쓰자, 14일 《인민일보》는 이를 옮겨 실으며 「문회보의 한 시기 자산계급 방향」을 냈다. 7월 1일 마오가 직접 쓴 사설 「문회보의 자산계급 방향은 비판되어야 한다」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음모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이 양모(陽謀)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리 적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귀신과 괴물은 나오게 해야 없앨 수 있고, 독초는 땅 위로 돋게 해야 뽑아낼 수 있다.” 사설은 민맹과 농공민주당이 조직과 계획과 강령을 갖고 움직였다며, 봄 내내 중국의 하늘을 어지럽힌 먹구름의 근원이 「장뤄 동맹」, 곧 장보쥔과 뤄룽지에게 있다고 지목했다. “말한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약속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32 33 8 17
6월 19일 《인민일보》는 마오의 2월 연설을 처음 공개했다. 마오가 속기록을 고치고 보탠 이 판본에는 2월에 없던 「향기로운 꽃과 독초」를 가르는 여섯 기준이 들어 있었다. 말과 행동이 각 민족 인민의 단결,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 인민민주독재, 민주집중제, 공산당의 영도, 사회주의의 국제 단결에 이로운가 하는 것이었고, 그 가운데 사회주의의 길과 당의 영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비판을 권하던 연설이 비판을 가르는 잣대가 되었다. 7월 칭다오 회의에서 마오는 베이징이 우파 1,500명을 쳤으니 전국에서 베이징 열 개만큼은 쳐내야 하고, 소수 유명 인사를 빼고 우파를 노동교양에 보내라며 노동교양 조례를 만들라고 했다. 14 15 4 17
「우파」의 기준과 할당
운동의 실무는 당 총서기 덩샤오핑이 맡았다. 7월 23일 그가 주재한 중앙서기처 회의는 우파의 조직 처리를 서두르지 말되 통전부·선전부·조직부가 12월까지 방안을 내라고 정했다. 9월 2일 중앙은 당내 우파도 당 밖 우파와 똑같이 처리하고 「당력이 길고 직위가 높을수록 해가 크다」며 당원이라고 봐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10월 15일 「우파분자 구분 기준」은 사회주의 제도와 당의 기본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집중제에 반대하는 자, 국가 생활에서 공산당의 영도에 반대하는 자, 인민의 단결을 깨뜨리는 자, 반당 소집단을 조직하거나 참여한 자, 이들을 도운 자를 우파로 정했고, 그 우두머리를 「극우분자」로 따로 두었다. 34 17 25
기준은 넓었고 할당은 기계적이었다. 각 단위에 대략 5%를 우파로 정하라는 지표가 내려왔고, 지식인이 몇 명 없거나 아무도 발언하지 않은 단위도 숫자를 채워야 했다. 익명의 고발, 파벌 싸움, 개인적 원한으로 우파가 된 사람도 많았고, 관리와 지식인이 경쟁자를 치는 데 운동을 이용했다. 「우파」에는 청년 공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처럼 정부를 왼쪽에서 비판한 사람들도 섞였다. 1957년 여름과 초가을에 도시 주민 약 40만 명이 우파로 낙인찍혀 수용소나 농촌 노동으로 보내졌고, 연말까지 30만 명이 넘었다는 집계도 있다. 운동은 1958년의 「반우파 보충 수업」으로 이어졌다. 25 4 17 35
첫 표적은 민주당파와 언론의 유명 인사였다. 1958년 1월 장보쥔은 교통부장·정협 부주석·농공민주당 주석·민맹 제1부주석·《광명일보》 사장 등 아홉 직책을 잃고 「중국 제1호 대우파」가 되었고, 뤄룽지는 「제2호 우파」로 삼림공업부장과 인대 대표에서 물러나 급여가 4급에서 9급으로 깎였다. 그를 공격한 사람 가운데에는 같은 민맹의 역사학자 우한도 있었고, 10년을 함께 산 언론인 푸시슈는 당의 요구로 「양가죽을 쓴 늑대」라는 고발문을 썼다. 추안핑은 1957년 11월 《광명일보》에서 해임되고 1958년 1월 「반당·반인민·반사회주의 자산계급 우파」로 규정되었다. 법학계에서는 독립적 사법을 주장한 법률가들이 다른 직종으로 쫓겨났고, 법학 잡지는 정간되거나 선전물로 돌아갔다. 19 36 20 22 23 25
문예계에서는 1955년 숙반 때 천치샤와 「반당 집단」을 꾸몄다는 혐의를 받았던 딩링을 저우양이 다시 공격했고, 9월 마오는 딩링을 당에서 내쫓아야 할 자산계급 지식인이라 지목했다. 딩링을 변호한 시인 아이칭, 평론가 펑쉐펑, 극작가 우쭈광이 우파가 되었고, 류빈옌은 당에서 제명되었고 왕멍도 함께 비판받았다. 민맹의 페이샤오퉁은 학계에서 쫓겨났고 자기 「죄」를 인정해야 했다.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일하던 젊은 주룽지, 역학자 첸웨이창, 경제학자 구준, 옛 윈난 군벌 룽윈도 우파가 되었다. 팡리즈는 1957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허베이 짠황에서 노동을 했고 1959년 초 당에서 제명되었다. 경제학자 마인추는 1957년 6월 인대에서 「신인구론」을 발표했다가 1958~1960년 두 차례 비판을 받고 1960년 베이징대 총장에서 물러났다. 그의 인구 억제론은 맬서스주의로 몰렸다. 37 13 12 24 25 28 38 39
처벌: 노동교양과 자볜거우
7월 26일 국무원 전체회의는 「노동교양 문제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에 비준을 요청했고, 8월 4일 《인민일보》가 이를 공포하며 설득 교육도 단순 처벌도 통하지 않고 직장에서 계속 쓸 수도 없는 「나쁜 분자」를 거두어 노동으로 개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노동교양은 재판 없이 공안의 행정 결정으로 사람을 수용하는 제도로, 1955년부터 반혁명분자 처리에 쓰이던 관행이 반우파 투쟁 속에 법제화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한의 상한조차 없었고, 1979년에야 최장 4년으로 정해졌다. 이 제도는 2013년 12월 전국인대 상무위원회가 폐지할 때까지 존속했다. 17 40 41
1958년 중앙은 우파를 죄의 경중에 따라 여섯 가지로 처리하게 했다. 무거운 쪽부터 노동교양, 감독 노동, 유용 관찰, 해임, 강등·감봉, 행정 처분 면제였다. 앞의 두 처분을 받은 사람은 일터를 떠나 변경과 농촌,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했다. 베이징 공안국이 직접 관리한 싱카이후 수용소는 감옥이 모자라 급히 세워졌고, 정치범을 일반 범죄자와 섞어 감시하게 했다. 북대황의 개간 농장에서는 관리들의 과잉 경쟁 속에 식량은 모자라고 노동은 과중해 많은 이가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장보쥔·뤄룽지 같은 중앙 지명의 「대우파」는 장관급 대우를 일부 유지했고, 이름 없는 기층의 우파들이 더 비참한 운명을 겪었다. 17 25
가장 참혹한 곳은 간쑤성 주취안 북동쪽 바단지린 사막 가장자리의 자볜거우 농장이었다. 40~50명을 가두도록 지은 노동개조 농장은 1957년 노동교양 농장이 되어 11월부터 간쑤 각지의 우파를 받았고, 1958년 최고 3,074명을 수용했다. 염습지와 사막에 둘러싸인 땅은 수용자를 먹일 수 없었는데, 대기근 속에 「우파는 곧 반동」이라는 논리로 식량이 충분히 오지 않았다. 1960년 9월 1,900여 명이 아무 시설도 없는 가오타이현 밍수이탄의 새 농장으로 옮겨졌고, 사람들은 나뭇잎과 쥐, 끝내 죽은 동료의 살까지 먹었다. 11월 내무부장 첸잉이 사태를 발견해 구조가 시작되었으나 밍수이탄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200여 명이었다. 농장은 1961년 10월 폐쇄되었고 당국은 사망자의 병력서를 굶주림 아닌 자연사로 꾸몄다. 42 43
낙인은 본인에 그치지 않았다. 우파는 지주·부농·반혁명분자·나쁜 분자와 함께 「흑오류」로 묶였고, 공산당원은 전원 제명되었으며 절반 이상이 공직을 잃었다. 가족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자녀는 진학과 취업에서 차별받아 대개 중학 이상을 다니지 못했다. 린시링은 학교에 남아 감독 노동을 하다 1958년 7월 반혁명죄로 체포되어 1959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다가 「반당 집단」으로 몰리자, 같은 논리가 당 안으로 돌려진 「반우경」 운동이 일어나 300만 명이 넘는 간부와 당원이 「우경 기회주의자」로 비판받았다. 반우파 투쟁이 만든 침묵 속에서 대약진 운동의 허위 보고와 과오는 견제받지 않았다. 17 27 44 25
「모자 벗기기」에서 「개정」까지
1959년 9월 중앙은 건국 10주년을 맞아 진심으로 뉘우친 우파의 「모자를 벗기기」로 하면서, 그 수를 전체 우파의 20% 안팎으로 묶으라고 했다. 같은 해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허락을 얻어 우파 지식인 4만 명을 복권시켰다. 1959~1964년 30여만 명이 모자를 벗었으나 이들은 「모자 벗은 우파」라는 새 꼬리표를 달았고, 문화대혁명에서 대부분이 다시 공격받았다. 추안핑은 1966년 8월 투쟁대회에 끌려다니다 자살을 기도했고 9월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다. 장보쥔은 1969년 위암으로, 뤄룽지는 1965년 심장병으로 숨졌다. 17 45 22
복권은 마오 사후에야 왔다. 1977년 중앙당교를 맡은 후야오방이 《인민일보》 논설로 억울한 사건의 재심을 열었고, 그해 12월 중앙조직부장이 되었다. 1978년 봄 통전부·공안부·조직부·선전부·민정부가 산둥 옌타이에서 연 회의에서는 모자만 벗기면 충분하다는 보수파와 전면 복권을 주장한 후야오방 쪽이 맞섰다. 4월의 중앙 11호 문건은 “1957년 반우파 자체는 틀리지 않았고 문제는 확대화”라며 모자를 모두 벗기되 복권은 언급하지 않았다. 진리 기준 논쟁으로 분위기가 바뀐 뒤 9월 17일의 55호 문건은 “우파로 정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잘못 정해졌다면 사실에 근거해 개정한다”며 명예 회복과 복직, 당적 회복을 정했다. 다만 개정된 사람에게 경제적 보상이나 배상은 없었다. 17 25
1981년까지 우파 54만여 명이 「개정」되었고, 「중우분자」와 「반사회주의 분자」로 처리된 31만 5천 명도 복권되었다. 그러나 장보쥔·뤄룽지·펑원잉·추안핑·천런빙 다섯 명은 중앙의 결정으로, 지방에서 지명한 91명과 함께 모두 96명이 「모자만 벗기고 원안은 유지하며 개정하지 않는」 우파로 남았다. 린시링은 후야오방이 세 차례 복권을 지시했음에도 베이징시 당위원회와 옛 공안 계통의 반대로 1980년 「개정하지 않음」 결론을 받았고, 베이징 대학생 우파 가운데 유일하게 개정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83년 프랑스로 떠났다. 당은 「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운동 자체가 옳았음을 보여 주는 표본을 남겨 둔 것이다. 17 46 27
공식 평가는 덩샤오핑의 말로 굳었다. 1980년 2월 그는 “1957년 반우파에서 우리는 적극분자였고, 확대화에는 내 책임이 있다. 나는 총서기였다”고 말했고, 3월에는 반우파 투쟁은 “여전히 긍정해야 한다”며 “잘못은 확대화에 있다”고 했다. 1981년 6월의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정풍이 사회주의 민주를 발양하는 정상적 단계였고 극소수 자산계급 우파의 진공에 대한 반격은 “완전히 옳고 필요했다”면서도, 반우파 투쟁이 심각하게 확대되어 지식인·애국 인사·당 간부를 잘못 우파로 몰아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고 규정했다. 2021년의 세 번째 역사결의도 반우파 투쟁이 “심각하게 확대되었다”는 표현을 되풀이했다. 17 4
평가: 「양모」인가 오판인가
가장 오래된 쟁점은 마오의 의도다. 마오 자신은 7월 1일 사설에서 「양모」를 말했고, 장룽과 존 핼리데이의 『마오』, 소년 시절 피해자였던 해리 우는 처음부터 반대자를 끌어내려는 함정이었다고 본다. 이른바 「뱀을 굴에서 끌어낸다(引蛇出洞)」는 말은 반우파 투쟁 직후부터 널리 퍼졌으나, 리선즈는 그 출처를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오늘날 학계의 통설과 린춘, 크리스틴 비달, 데이턴 레크너 같은 연구자들은 마오가 헝가리식 위기를 막고 지식인을 사회주의 건설에 끌어들이려 했으며, 비판의 규모와 날카로움에 허를 찔려 방향을 틀었다고 본다. 이 견해에서 「양모」와 「뱀」은 사태를 처음부터 장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려는 사후의 설명이다. 주치의 리즈수이는 운동을 진짜 반혁명은 적고 지식인은 마오가 원하는 대상만 비판하리라는 계산에 건 도박이라 불렀다. 1956~1957년 지도부 안의 대립을 문화대혁명의 출발점으로 분석한 맥파쿼의 『문화대혁명의 기원』 제1권은 이 논쟁의 고전이 되었다. 4 47 8 32
피해의 규모도 엇갈린다. 1978년 이후 복권 과정의 공식 집계는 1957년과 1958년 「보충 수업」에서 우파로 정해진 사람을 55만 2,973명으로, 그 가운데 개정된 사람을 55만 2,877명으로 든다(흔히 인용되는 55만 2,877명은 개정자 수다). 이 숫자에는 「중우분자」와 「반사회주의 분자」, 가족과 낙인 없이 처벌받은 이들이 빠져 있다. 연구자들은 실제 피해자를 100만~200만 명, 넓게 잡아 300만 명, 사회주의 교육운동까지 넣으면 500만 명으로 추산하며, 기밀 해제된 중앙 문서를 근거로 우파 317만 명과 중우분자 143만 명을 드는 주장도 있다. 비정상 사망은 불완전한 통계로 4천여 명이라 하나 자볜거우 한 곳에서만 2,500명가량이 죽었다는 추산(간쑤성 1964년 문건은 송치자를 2,369명으로, 작가 자오쉬는 3,500명가량으로 본다)과 견주면 크게 모자란다. 17 25 42 43
결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비교적 모인다. 반우파 투쟁은 「장기공존·상호감독」을 사실상 끝내 민주당파를 정치적 장식으로 만들었고, 정치 투쟁의 무대를 당과 당 밖 세력 사이에서 당 내부 노선 투쟁으로 옮겼다. 8대가 선언한 「대규모 계급투쟁의 종결」은 1년 만에 뒤집혀 계급투쟁이 다시 경제 건설을 압도했고, 농업 전문가와 지식인의 반대가 사라진 자리에서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다. 2018년 쩡자오진과 조슈아 아이젠먼의 연구는 안후이·허난·장쑤 144개 현에서 우파 비율이 높았던 곳일수록 2000년까지도 경제 실적과 교육 수준이 낮았음을 보였다. 법조의 전문화도 멈추었다. 덩샤오핑은 뒤에 “1957년 이전 마오쩌둥 동지의 영도는 옳았고, 반우파 투쟁 이후 잘못이 점점 많아졌다”고 했다. 17 25 3
사회주의 운동에 이 사건이 남긴 물음은 무겁다. 마오는 헝가리를 보며 관료화한 당이 대중과 떨어지는 위험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말했고, 「인민 내부 모순」론은 사회주의 사회에도 갈등이 있으며 그것을 억압이 아닌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는 중요한 인정이었다. 학생들이 「진정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와 법제를 요구했을 때, 당은 그 비판을 적과의 모순으로 바꾸어 버렸다. 모리스 마이스너는 백화제방의 시기가 중국이 소련식 발전 모델과 결별한 때였으나, 그 결별이 정치와 지식 생활에서 스탈린식 방법과의 결별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 “잔인하고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썼다. 1956년 「백화제방」 보고를 했던 루딩이도 만년에 마오가 「백가」를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두 집으로 줄여 학문 논쟁을 계급투쟁으로 바꾸었다고 비판했고, 반우파 투쟁에서 문화대혁명까지 1인 지배의 뿌리를 따지지 못해 오류가 되풀이되었다고 돌아보았다. 1986년 말 팡리즈·류빈옌·쉬량잉이 1957년의 우파들에게 기념 모임을 제안한 편지를 보낸 일은 이 기억이 다음 세대의 민주화 요구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48 14 9 28 26
결과
민주당파는 정치적 장식이 되었고 8대의 경제 건설 노선은 계급투쟁으로 돌아섰으며, 비판이 사라진 자리에서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다. 낙인은 1959~1964년 일부 벗겨졌다가 1978년 이후 「개정」되었으나 96명은 끝내 개정되지 않았고, 당은 운동이 「필요했으나 확대되었다」는 평가를 지금도 유지한다. 실제 피해자는 공식 수치를 크게 넘는다는 추산이 많고, 운동이 처음부터 「양모」였는지는 마오 시대를 읽는 핵심 쟁점으로 남았다.
연표와 지도
- 1956.02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스탈린 비판이 중국 지도부에 개인숭배와 소련 모델의 문제를 제기했다.
- 11956.04.25「10대 관계를 논함」
마오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소련 모델을 그대로 따르지 말자고 하며 스탈린의 공과를 3 대 7로 평가했다.
- 21956.05.02「백화제방·백가쟁명」 제기
마오가 최고국무회의에서 학문·예술의 다양성을 권하는 방침을 밝혔다.
- 31956.05.26루딩이의 「백화제방, 백가쟁명」 보고
중앙선전부장 루딩이가 화이런탕에서 학자·예술가에게 독립적 사고와 변론, 창작과 비판의 자유를 약속했다.
- 41956.09.15–
27 제8차 당대회집단지도를 강조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당 규약에서 뺐으며, 계급투쟁 대신 경제 건설을 중심 과업으로 삼았다.
- 1956.10–
11 헝가리 혁명부다페스트의 봉기와 소련의 개입은 마오에게 당과 대중의 괴리가 위험함을 보여주었다.
- 51956.11.10–
15 8기 2중전회와 정풍 예고마오가 헝가리를 교훈으로 들며 이듬해 주관주의·종파주의·관료주의를 바로잡는 정풍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 61957.02.27「인민 내부 모순의 올바른 처리」
마오가 사회주의 사회의 비적대적 모순은 설득과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 1957.04.27당 정풍운동 지시
중앙이 당 외부 인사의 비판을 받는 정풍을 지시했고 5월 초 「대명대방」이 시작되었다.
- 71957.04.30톈안먼 성루의 민주당파 좌담
마오가 민주당파 지도자들에게 “말한 사람에게 죄가 없다”며 당의 정풍을 도와 달라고 청했다.
- 81957.05비판의 분출
민주당파와 대학에서 일당 독점, 소련 모방, 숙청 운동의 과잉을 비판하는 발언과 대자보가 쏟아졌다.
- 1957.05.15마오의 내부 지시 「사정이 변하고 있다」
당 간부에게 배포된 글에서 마오는 우파가 「미쳐 날뛰게」 두라고 지시했다.
- 91957.05.19베이징대의 첫 대자보
역사학과 학생들의 대자보에 이어 「민주의 벽」이 열려 이튿날까지 대자보 162장이 붙었다.
- 101957.05.22「정치 설계원」과 「평반 위원회」
장보쥔의 「정치 설계원」 발언이 보도되고, 뤄룽지가 과거 운동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할 위원회를 제안했다.
- 111957.05.23린시링의 베이징대 연설
인민대학 학생 린시링이 후펑 사건의 증거 부족을 지적하고 지금의 사회주의를 「비전형적」이라 비판했다.
- 121957.06.01추안핑의 「당천하」 발언
《광명일보》 총편집 추안핑이 통전부 좌담회에서 당이 천하를 자기 것으로 여긴다고 비판했다.
- 1957.06.08「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민일보》 사설과 당 내부 지시로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었다.
- 131957.06.19모순론 연설의 수정본 공개
《인민일보》가 2월 연설을 처음 실으며 「향기로운 꽃과 독초」를 가르는 여섯 기준을 덧붙였다.
- 1957.07–
09 우파 낙인의 확산각 단위에 5% 안팎의 할당이 내려와 여름과 초가을에 지식인·학생·간부 수십만 명이 우파로 규정되었다. 1958년까지의 공식 집계는 55만여 명이다.
- 141957.07.01「양모」 사설
마오가 쓴 《인민일보》 사설이 비판을 내버려 둔 것은 음모가 아니라 「양모」라며 「장뤄 동맹」을 지목했다.
- 151957.07.18칭다오 회의
마오가 전국에서 「베이징 열 개만큼」 우파를 쳐내고 우파를 노동교양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 161957.08노동교양 제도 도입
재판 없이 행정 결정으로 수용을 허용하는 제도가 우파 처리의 도구가 되었다.
- 1957.10.15「우파분자 구분 기준」
중앙이 우파와 「극우분자」의 기준을 정해 각 단위에 내려보냈다.
- 171958.01장보쥔·뤄룽지·추안핑 해임
장보쥔은 아홉 직책을, 뤄룽지는 부장과 인대 대표 자리를 잃었고, 추안핑은 「자산계급 우파」로 규정되었다.
- 181959–
1961 우파 수용소의 대기근간쑤 자볜거우 농장의 우파 3천 명 가운데 대부분이 굶어 죽었다.
- 1959.09–
1964 첫 「모자 벗기기」건국 10주년을 맞아 뉘우친 우파의 모자를 벗기기로 했다. 1964년까지 30여만 명이 모자를 벗었다.
- 1978–
1980 우파 낙인 취소당은 극소수를 제외한 전원의 우파 판정을 「착오」로 취소했으나 운동 자체는 「필요했다」고 유지했다.
- 191978.09.17중앙 55호 문건
봄의 옌타이 회의 논쟁 끝에 잘못 정해진 우파를 사실에 근거해 「개정」하라는 실시 방안이 내려갔다.
관련 인물 28명
집행 · 지휘3
참여10
정풍 개방에 신중했으나 반우파 투쟁을 지지했다.
지식인 정책의 온건파저우언라이1898–19761956년 「지식인 문제」 보고로 지식인 우대를 주장했다.
비밀연설로 논쟁을 촉발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스탈린 비판이 중국의 개인숭배·소련 모델 논의를 열었다.
반우파 투쟁기의 비판문 필자야오원위안1931–2005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을 썼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보고를 한 중앙선전부장루딩이1906–19961956년 학문·예술의 자유 토론을 제안하고 보고했으나, 그의 부서가 반우파 투쟁의 선전도 이끌었다.
우파 「개정」을 밀어붙인 중앙조직부장후야오방1915–19891977~1978년 옌타이 회의와 55호 문건으로 우파의 전면 복권을 이끌었고, 린시링의 복권을 세 차례 지시했다.
뤄룽지를 공격한 민맹의 역사학자우한1909–1969반우파 투쟁에서 같은 민맹의 뤄룽지를 비판했다.
「백가쟁명」을 이끌어 낸 마오의 비서천보다1904–19891953년 역사 연구의 방침을 묻자 마오가 「백가쟁명」으로 답했다.
폴란드 10월의 지도자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1905–19821956년 10월 그의 복귀와 헝가리 혁명이 중국 지도부에 당과 대중의 괴리를 경고했다.
마오가 반면교사로 든 소련 유전학의 권력자트로핌 리센코1898–19761956년 5월 마오는 백화제방을 공식 제기하며 리센코파가 모건 유전학파를 억누른 일을 반면교사로 들었고, 8월 칭다오 유전학 좌담회가 모건파의 권리를 되살렸다.
대상 · 피해11
1957년 우파로 규정되어 북대황 농장에서 20년 넘게 노동했다.
반우파 투쟁으로 박해받은 물리학자팡리즈1936–20121957년 12월부터 1958년 8월까지 강제노동을 겪었고 1959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복권·복당했다.
「중국 제1호 대우파」장보쥔1895–1969「정치 설계원」 발언으로 우파의 우두머리로 몰려 1958년 아홉 직책을 잃었고, 끝내 개정되지 않았다.
「중국 제2호 우파」뤄룽지1896–1965삼반·오반·숙반을 재심할 위원회를 제안했다가 「장뤄 동맹」으로 몰려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당천하」 발언의 《광명일보》 총편집추안핑1909–19666월 1일 「당천하」를 비판했다가 우파로 규정되었고, 1966년 행방불명되었다.
「진정한 사회주의」를 외친 학생 연사린시링1935–2009베이징대·인민대에서 여섯 차례 연설한 뒤 우파로 몰려 징역 15년을 받았고, 베이징 학생 우파 가운데 유일하게 개정되지 않았다.
1955년 숙청으로 지식인을 침묵시킨 문예이론가후펑1902–1985「후펑 반혁명 집단」 사건은 백화제방 초기 지식인의 침묵을 낳았고, 1957년 학생들은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딩링을 변호해 우파가 된 시인아이칭1910–1996「꽃 기르는 사람의 꿈」을 썼다가 1957년 우파로 몰려 북대황과 신장으로 보내졌다.
「신인구론」으로 비판받은 베이징대 총장마인추1882–19821957년 6월 「신인구론」을 발표했다가 1958~1960년 비판받고 총장에서 물러났다. 우파로 규정되지는 않았다.
「반우경」 운동을 부른 국방부장펑더화이1898–1974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다가 실각했고, 이어진 반우경 운동이 반우파의 논리를 당 안으로 돌렸다.
비밀연설과 「역사적 경험」 논쟁의 대상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1956년 흐루쇼프의 비판 뒤 중국 지도부는 그의 공과를 7 대 3으로 평가하며 소련의 전면 부정과 거리를 두었다.
목격 · 기록1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자료 22자료 23자료 24자료 25자료 26자료 27자료 28자료 29자료 30자료 31자료 32자료 33자료 34자료 35자료 36자료 37자료 38자료 39자료 40자료 41자료 42자료 43자료 44자료 45자료 46자료 47자료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