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개조로
「여러 계급의 연합」을 약속한 새 국가는 왜 7년 만에 사유재산을 없앴는가?
건국 초기 공산당은 토지개혁·반혁명 진압·항미원조·삼반오반으로 권력을 다졌고, 1950년 중소조약과 소련 원조로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1953년 「과도시기 총노선」과 곡물 통구통소는 신민주주의를 사실상 끝냈고, 1954년 헌법이 총노선을 국가의 강령으로 적었다. 1955~1956년 마오가 몰아친 농업 합작화와 상공업 공사합영으로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은 건국 후 첫 지도부 숙청이었고, 후펑 사건과 숙반은 지식인과 기관을 겨냥했다.

연합정부의 약속과 복구: 공동강령에서 일변도까지
1949년 9월 베이핑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는 공산당 외에 중국민주동맹·국민당혁명위원회 등 민주당파와 무당파 인사가 참여했다. 회의가 채택한 공동강령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독재를 국가 형태로 삼되, 민족자산계급의 사유 재산 보호와 국영·합작사·사적 자본·국가자본주의가 함께하는 혼합경제, 각 민주 계급의 연합을 약속했다. 쑹칭링·리지선·장란 같은 비공산당 인사가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마오는 이미 「인민민주독재를 논함」에서 민족자산계급은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없고 국가권력에서 주된 역할을 맡지 못한다고 이 연합의 계급적 한계를 밝혀 두었다. 1 2 3 4
새 정부의 첫 과제는 초인플레이션 수습과 경제 복구였다. 천윈은 국영 무역 회사를 통해 곡물·면사를 장악하고 화폐와 재정을 통일해 1950년 봄 물가를 안정시켰다. 은행은 중국인민은행 아래 국유화되었고, 1952년까지 물가 안정과 상업 회복이 이루어져 공업과 농업이 전쟁 전 최고 수준을 되찾았다. 이 시기의 혼합경제는 국영 부문이 주도하되 민간 상공업과 시장이 공존하는 것이었고, 1952년에도 공업 단위의 17%가 국가 체계 밖에 있었다. 1951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는 “3년 준비, 10년 계획 경제 건설”을 간부들에게 분명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정표대로라면 사회주의 건설은 1953년 이후 10년에 걸친 긴 과정이었다. 5 6 7 8 9
1949년 12월 마오는 스탈린의 70세 생일에 맞추어 첫 외국 방문으로 모스크바에 갔다. 스탈린은 1945년 국민정부와 맺은 조약을 유지하려 했고 마오는 몇 주 동안 별장에서 사실상 방치되었다. 1950년 1월 저우언라이가 합류하면서 협상이 본격화되어 2월 14일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서명되었다. 소련은 연리 1%의 3억 달러 차관과 1952년까지의 창춘 철도·뤼순 반환을 약속했으나, 중국은 그 대가로 외몽골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차관을 전략 광물로 갚아야 했다. 신장에는 소련이 사실상 쥔 비철·희유 금속 합작 회사가 남았고, 마오는 이런 합작 회사에서 소련의 가부장적 태도를 느꼈다. 10 11 12
소련 쪽에 서는 「일변도(一邊倒)」는 마오가 1949년 6월에 이미 선언한 노선이었다. 조약은 냉전에서 중국의 자리를 정했고, 1953년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의 156개 핵심 사업에 소련의 설비·기술자·차관이 들어갔다. 둥베이의 안산 제철소에서는 1951년부터 소련 고문과 함께 무계목 강관 공장·대형 압연 공장·용광로의 「3대 공정」이 시작되었고, 1953년 착공한 창춘 제일자동차 공장은 1956년 소련 ZIS-150을 바탕으로 한 해방(解放) CA-10 트럭을 처음 내놓았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우에 대한 마오의 불만은 뒤에 중소 분열의 개인적 배경이 되었다. 13 14 15 16 5
토지개혁 (1950~1952)
1950년 6월 7기 3중전회에서 류사오치가 토지개혁 보고를 했고, 6월 28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가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류사오치는 중앙 토지개혁위원회 주임이 되어 새로 해방된 남방과 서부 농촌의 개혁을 이끌었다. 법은 지주의 토지·역축·여분의 곡식·농구·여분의 가옥이라는 「5대 재산」을 몰수해 나누되 지주의 상공업과 다른 개인 재산은 남기게 했고, 중농의 땅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으며, 내전기와 달리 부농 경제를 보존하고 법을 지키는 부농은 투쟁 대상으로 삼지 않게 했다. 마오는 같은 회의에서 토지개혁 앞에 선 3억 1천만 인구의 지역에서 지주계급을 무너뜨리되 다른 계층까지 한꺼번에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했다. 17 18 19 20
공작대가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지주·부농·중농·빈농·고농으로 나누고, 억울함을 털어놓는 「소고(訴苦)」 집회와 「투쟁대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내전기보다 온건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지도부는 지주들이 전쟁을 틈타 새 질서에 맞설까 걱정했고, 1951년 5월 무렵 개혁은 왼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마오는 「너무 일찍 과오를 바로잡지 말라」고 했고, 공안 기관이 아니라 농민 자신이 지주를 고발하고 처단하게 하여 농민을 혁명에 묶으려 했다. 구타는 장려되지 않았지만 금지되지도 않았다. 1951년 2월의 정치국 결의는 농민들에게 불법인 고문을 쓰지 말라고 설득하라고 했지만, 마을마다 공개 처형이 잇따랐다는 보고가 있다. 18 9
1953년까지 신장·티베트·칭하이 등 일부 소수민족 지역을 뺀 대륙 대부분에서 토지개혁이 끝났다. 공식 집계로 3억여 명의 땅 없거나 적은 농민이 약 7억 무(4,700만 헥타르)의 토지와 생산 수단을 얻었고, 해마다 지주에게 내던 약 3천만 톤의 소작료가 사라졌다. 경작지의 약 45%가 지주와 부유한 농민에게서 땅이 없거나 적던 60~70%의 농가로 넘어갔다. 1952년 곡물 생산은 공식 수치로 1949년보다 42.8% 많았고, 농가의 39%가 6~7호 단위의 「호조조(互助組)」에 들었다. 개혁은 향촌의 옛 권력을 없애고 당 조직을 마을 단위까지 뿌리내리게 했다. 지주 처형자 수는 20만에서 500만까지 추산이 엇갈리고, 많은 연구자는 100만~200만 명 범위를 든다. 21 8 17 18


항미원조와 반혁명 진압
1950년 10월 8일 마오는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이름으로 인민지원군 조직 명령을 내렸고, 펑더화이가 이끈 지원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넜다. 유엔군이 북조선 깊숙이 들어와 둥베이 공업 지대를 위협한다는 판단이었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으로 끝났고, 지원군은 1958년 10월까지 모두 철수했다. 마오의 맏아들 마오안잉도 지원군 장교로 미군 공습에 죽었다. 중국 측 사망자는 2010년 공식 수정치로 18만 3,108명, 2020년 관영 매체 보도로 19만 7,653명이며, 미 국방부는 약 40만 명이 죽고 48만 6천 명이 다쳤다고 추산한다. 출동 병력은 연인원 약 300만 명이었다. 22 23 24 5
전쟁은 국내의 모든 운동에 「보가위국(保家衛國)」의 명분을 주었다. 1951년 2월 정치국은 항미원조 선전 교육을 전국 구석구석에 퍼뜨리라고 지시했다. 참전과 함께 첫해의 온건한 정책은 실제의 또는 잠재적인 「국가의 적」에 대한 대규모 운동으로 바뀌었다. 1950년 10월 10일 마오는 「반혁명 활동 진압에 관한 지시」, 이른바 쌍십 지시를 내렸고 공안부장 뤄루이칭에게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표적은 국민당 잔당과 특무, 비밀결사와 「토비」, 종교 종파였고, 외국인과 기독교 선교사가 미국의 첩자로 대중 재판에 섰다. 유엔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금수를 결의하면서 인민공화국의 유엔 진입 가능성도 당분간 닫혔다. 9 5 25
마오는 처형의 「할당」을 지방에 내려보냈다. 그는 대략 인구의 0.1%를 처형해야 최악의 반혁명 분자를 없앨 수 있다고 하면서 뒤에 0.05%로 줄이고 0.1%를 상한으로 하라고 했고, 1951년 1월 상하이에는 그해 1~2천 명, 광둥에는 이미 3,700명 넘게 죽인 것이 “아주 좋다”고 전보를 보냈다. 1951년 봄 대중집회에서의 공개 처형이 절정에 이르렀다. 1954년 공안부 부부장 쉬쯔룽의 보고는 71만 2천 명 처형, 129만 명 투옥, 120만 명 관제, 모두 262만 명 체포라고 집계했고, 마오는 1957년 1950~1952년에 7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양쿠이쑹은 실제 처형이 공식 수치보다 훨씬 많았다고 보며, 연구자들의 추산은 50만에서 200만 명에 이른다. 25 18 26
지식인에게는 사상 개조가 요구되었다. 1951년 9월 저우언라이가 지식인의 사상 개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대학 교수·과학자·전문직 종사자들은 자아비판과 공개 고백, 미국 「숭배」의 청산을 요구받았고, 이 운동은 1952년 삼반·오반 운동과 합쳐졌다. 1951년 5월 마오는 영화 「무훈전(武訓傳)」 비판을 직접 지휘해 문예계에 경고를 보냈다. 예술가와 작가도 문학은 공산당이 이끄는 노동 인민의 계급적 이익을 반영해야 한다는 마오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처우를 받았다. 27 5 28
삼반·오반: 간부의 정화와 자본가의 종속
1951년 말 둥베이에서 시작된 삼반 운동은 간부의 탐오·낭비·관료주의를, 1952년의 오반 운동은 자본가의 뇌물·국가 재산 절취·탈세·부실 공사·국가 경제 정보 절취를 겨냥했다. 노동자와 점원이 고용주를 고발하는 「호랑이 사냥」 집회가 상하이·톈진·충칭의 상공업계를 휩쓸었다. 1951년 말 상하이에만 훈련받은 선전원이 1만 5천 명이었고, 1952년 2월 첫 주에 고발 편지가 1만 8천 통, 첫 달 말까지 21만 통이 들어왔다. 마오는 탐오분자를 전국에서 1만에서 수만 명은 처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벌금과 추징으로 기업 자산이 국가로 넘어갔고, 많은 기업주는 정부에서 돈을 빌려 벌금을 냈다. 상하이에서만 1952년 1월 25일부터 4월 1일 사이에 적어도 876명이 자살했다. 29 5
오반 운동은 공동강령이 약속한 민족자본 보호를 사실상 철회했다. 마오의 지시에 따라 민간 상공업 단위는 법을 지키는 부류, 기본적으로 지키는 부류, 반은 지키고 반은 어기는 부류, 심각하게 어기는 부류, 완전히 어기는 부류의 다섯으로 나뉘었고, 대도시에서는 앞의 셋이 약 95%라고 했다. 공산당은 기업가들이 당과 정부 관리를 조직적으로 매수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이 고발은 부르주아지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넓어졌다. 국가는 원자재 공급과 판매를 쥐고 가공 주문과 일괄 수매로 민간 기업을 계획에 묶었다. 운동의 대가로 상하이·톈진의 경제가 위축되자 서북국 같은 지방 당국은 호랑이 사냥을 계속하면서도 경제를 안정시키려 정책을 고쳤다. 처벌이나 개조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수백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30 5 29 31
과도시기 총노선과 곡물 통구통소 (1952~1953)
1952년 9월 이후 마오는 여러 차례 과도시기 총노선을 입에 올렸다. 1952년 12월 재정부장 보이보가 「공사 기업 평등」을 내건 신세제를 내놓자 마오는 이를 당의 총노선에서 벗어난 사상 문제라고 비판했고, 1953년 여름 전국 재정경제 공작회의는 보이보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1953년 6월 15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는 총노선을 처음 비교적 완전하게 정식화했다. 10~15년, 또는 그보다 조금 더 긴 기간에 나라의 공업화와 농업·수공업·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는 류사오치 등이 내세운 「신민주주의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 「사유 재산을 보장하자」를 우경 관점이라고 반박했다. 32 33 34
총노선은 1953년 12월 당 중앙이 표현을 확정하고 1954년 2월 7기 4중전회와 9월 헌법에 들어가 국가의 기본 강령이 되었다. 비판은 당 밖으로도 향했다. 1953년 9월 16~18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에서 향촌 건설 운동가 량수밍이 “노동자는 하늘 아홉째 층에, 농민은 땅 아홉째 층에 있다”며 공업화가 농민을 버린다고 말하자, 마오는 그 자리에서 그의 「반동 사상」을 길게 공격했다. 공산당 밖 인사가 국가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은 이로써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32 35
공업화의 재원 문제는 곡물에서 터졌다. 도시와 공업의 수요가 늘고 투기가 겹치면서 1953년 6월 국고의 곡물 적자가 40억 근에 이르렀다. 천윈은 10월 10일 전국 곡물 회의에서 계획 수매와 계획 공급을 제안했고, 10월 16일 당 중앙의 결의, 11월 23일 정무원 명령을 거쳐 12월부터 티베트를 뺀 전국에서 곡물의 계획구매·계획공급, 곧 「통구통소(統購統銷)」가 시작되었다. 농촌에서는 국가가 정한 값과 품종으로 곡물을 사들이고 도시에서는 정량을 배급하며 사상인의 곡물 거래를 엄격히 막았다. 1954년에는 면화로 넓혀졌고 이 제도는 1985년까지 이어졌다. 제도는 곡물 값을 안정시키고 공업화의 원시 축적을 보장했지만, 농민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도농 이원 구조를 굳혔다는 평가도 함께 받는다. 36 6
가오강·라오수스 사건
1952년 가을 제1차 5개년 계획을 앞두고 중앙은 지방 권력을 줄이려 가오강·라오수스·덩쯔후이·덩샤오핑·시중쉰 등 대행정구의 1인자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다섯 마리 말의 상경」이라 불린 일이다. 동북의 「왕」으로 불린 가오강은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이 되어 8개 경제 부처를 맡았고, 라오수스는 당 조직부장이 되었다. 마오가 세율 개편 등을 두고 류사오치·저우언라이에 대한 불만을 가오강에게 털어놓자, 가오강은 이를 후계 구도의 신호로 읽었다. 그는 1953년 여름 재정경제 공작회의에서 보이보와 류사오치를 공격했고, 류의 측근이 짠 정치국 명단 초안에 국민당 지배 지역, 곧 「백구(白區)」 출신이 늘어난 것을 이용해 근거지 출신 원로들의 지지를 모았다. 9월에는 라오수스가 조직 공작회의에서 안쯔원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류사오치에 맞섰다. 37 38
펑더화이와 린뱌오는 가오강을 지지했지만, 덩샤오핑과 천윈이 낌새를 채고 마오에게 보고했다. 1953년 12월 마오가 남방에 가 있는 동안 류사오치가 대리하게 하자고 하자 가오강은 순번제를 주장하며 자신을 부주석이나 총서기로 올리려 동분서주했다. 12월 24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는 “베이징에 두 개의 사령부가 있다”며 그를 이름 없이 비판했다. 1954년 2월 7기 4중전회는 「당의 단결 강화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고, 가오강은 그달 권총 자살에 실패한 뒤 연금되어 8월 17일 수면제로 목숨을 끊었다. 라오수스는 1955년 1월 체포되어 1975년 옥중에서 죽었다. 1955년 3월 당 전국대표회의는 두 사람의 「반당연맹」을 규정하고 출당시켰다. 건국 후 첫 지도부 숙청은 「당내 두 사령부」라는 틀이 마오의 손에서 언제든 쓰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38 37 39 40
사건은 소련과의 관계도 건드렸다. 가오강은 소련식 공업 조직과 계획을 적극 받아들인 지도자로, 5개년 계획의 자문 단계에서 소련과의 통로 구실을 했고 1952년부터는 농민의 자본주의 경향을 막으려 빠른 집단화를 주장했다. 그런 그가 몰락하자 사건의 표면적 쟁점과 실제 속도 논쟁이 어긋나게 되었다. 실각한 쪽은 빠른 사회주의화를 주장한 가오강이었지만, 그 뒤 실제로 속도를 높인 사람은 마오 자신이었다. 덩샤오핑은 정치국에 들어갔고 천윈은 1956년 당 부주석이 되었다. 38

제1차 5개년 계획과 1954년 헌법
1952년 초 저우언라이는 천윈·보이보·리푸춘·녜룽전과 제1차 5개년 계획 초안을 짰지만 모스크바의 소련 전문가들이 퇴짜를 놓았고, 1953년 초 가오강의 국가계획위원회가 최종안을 준비했다. 계획(1953~1957)은 소련 156개 지원 사업을 포함한 694개 대·중형 공업 사업에 집중하고, 농업과 수공업을 합작사로, 자본주의 상공업을 국가자본주의의 궤도로 옮기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계획을 위해 1953년 첫 근대적 인구 조사가 실시되어 대륙 인구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5억 8,30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53년과 1954년 소련과 기술 협정이 맺어졌고 수많은 소련 기술자가 공장을 세우는 데 참여했다. 6 13 41 42
총노선을 법의 형식으로 굳힐 헌법도 만들어졌다. 스탈린은 1949년 류사오치의 방소, 1950년 마오의 방문, 1952년 10월 류사오치의 편지에 대한 답에서 거듭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헌법을 제정하라고 권했다. 1953년 1월 13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는 마오를 주석으로 하는 헌법 기초위원회를 꾸렸고, 마오는 그해 말 기초 소조를 데리고 항저우 시후에 머물며 초안을 다듬었다. 1954년 6월 14일 그는 초안의 두 기본 원칙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고 설명했다. 1953년 선거를 거쳐 소집된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954년 9월 20일 106조의 헌법을 통과시켰다. 서문은 과도시기 총노선과 소련과의 「깨뜨릴 수 없는 우의」를 적었다. 마오가 국가주석, 류사오치가 전인대 상무위원장, 저우언라이가 국무원 총리가 되었고, 정치협상회의는 입법 직권을 넘겼다. 43 44 45 41 17
새 헌법이 기본권을 적은 이듬해 문예계와 기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1955년 1월 당 선전부가 마르크스주의 문예 비평가 후펑의 비판을 건의했고, 5월 슈우가 후펑과의 편지를 넘겨 「반혁명 집단」의 증거로 삼게 하자 후펑은 5월 17일 체포되었다. 마오는 이 편지 자료집에 직접 서문과 평어를 달았다. 공식 수치로 약 2,100명이 연루되고 92명이 체포되었다. 이 운동은 1955~1957년 「숙반(肅反)」, 곧 숨은 반혁명 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으로 커졌다. 1955년 9월까지 220만 명이 조사를 받았고, 1957년 10월 끝날 때까지 1,8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대상이 되어 21만 4천 명이 체포되고 2만 2천 명이 처형되었으며 모두 5만 3천 명이 죽었다. 46 47 48
「사회주의 고조」: 농업 합작화와 공사합영 (1955~1956)
토지개혁 뒤의 농촌은 호조조, 토지를 출자하고 배당을 받는 초급 합작사, 노동에 따라서만 분배하는 고급 합작사의 단계를 밟도록 계획되었다. 1955년 6월 초급 합작사는 65만 개, 가입 농가는 1,690만 호였다. 그해 4월 마오는 합작사를 130만 개로 두 배 늘리자고 했고, 당 중앙 농촌공작부장 덩쯔후이는 100만 개로 반쯤만 늘리자고 했다. 7월 31일 마오는 성·시·자치구 서기 회의 보고 「농업 합작화 문제에 관하여」에서 농촌에 사회주의 고조가 닥쳐오는데 “일부 동지들은 전족한 여인처럼 비틀거리며” 너무 빠르다고 불평만 한다고 질책했다. 10월 7기 6중전회 확대회의는 덩쯔후이를 「우경 기회주의」로 비판했다. 49 50 51 42
그 뒤 속도는 폭발적이었다. 1956년 말 전국 농가의 96.3%가 합작사에 들었고, 1957년에는 93.5%가 고급 합작사에 있었다. 당의 계획은 고급 합작사로의 이행을 제2차 5개년 계획 시기로 잡고 있었지만 1년 남짓 만에 거의 모든 농촌이 집단화되었다. 수공업자의 90% 이상도 1956년 말까지 합작사로 들어갔다. 대가도 컸다. 1955년부터 「퇴사」 요구가 일어나 광둥성에서만 7만여 호가 합작사를 떠났고, 1956~1957년 퇴사 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고급 합작사가 소득을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농민은 이동과 부업의 자유를 잃었으며, 간부들이 사원을 함부로 처벌하거나 묶어 때리는 일이 잦았다. 1953년의 곡물 통구통소와 1958년의 호구 등기 조례는 농민을 땅에 더 단단히 묶었다. 52 13 42 53
도시에서는 1955년 하반기부터 몇 달 만에 민간 상공업 전체가 업종별로 「공사합영(公私合營)」으로 넘어갔다. 1954년 9월 정무원이 「공사합영 잠정 조례」를 통과시켰고, 1955년 11월 당 중앙은 업종 전체의 공사합영을 지도하는 회의를 열었다. 1956년 1월 10일 베이징이 처음으로 전 업종의 공사합영을 선언했고 상하이·톈진·광저우·우한 등이 잇따랐다. 북과 징을 울리며 전환을 「신청」하는 행진이 조직되었다. 이윤을 국가 세금·적립금·복지·자본가 배당으로 나누던 「4마분비(四馬分肥)」는 자산 평가액에 대해 연 5%의 「정식(定息)」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정식은 1966년 9월에 끊겼다. 상하이의 룽이런처럼 협조한 자본가는 「붉은 자본가」로 대우받았다. 공식 서술은 이를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한 부르주아지의 평화적 「매수(贖買)」라고 부른다. 54 52 55 31

1956년: 모델의 완성과 첫 균열
제1차 5개년 계획은 소련식 전략이 강조한 분야에서 성공했다. 1953~1957년 공업 생산은 연평균 18.7% 늘었고 국민소득은 연 9% 성장했으며, 595개 대·중형 사업이 완공되어 철강·석탄·시멘트·전력·기계 공업의 근대적 토대가 놓였다. 반면 수리를 포함한 농업은 정부 투자 예산의 4%에 그쳤고, 지도부는 농업의 굼뜬 성장과 국영 상업이 도시에 공급할 곡물을 충분히 거두지 못하는 데 점점 더 불안해했다. 국가와 계획 체계, 단위와 「철밥통」의 도시 사회가 소련을 본떠 갖추어졌다. 13 42
그런데 바로 그해 모델 자체가 흔들렸다. 1956년 2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는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4월 25일 마오는 정치국 확대회의 연설 「10대 관계에 관하여」에서 소련 건설의 결함과 오류에서 교훈을 얻자며 중공업과 경공업·농업, 중앙과 지방,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를 조정하는 「중국의 길」을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류사오치의 지지를 받아 지나치게 높은 경제 목표를 줄이는 「모진(冒進) 반대」를 추진했으나 마오는 못마땅해했다. 9월 15~27일 1,073만 당원을 대표하는 1,026명의 대표가 모인 제8차 당대회는 사회주의 제도가 기본적으로 세워졌으며 이제 국내의 주요 모순은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지 사이가 아니라 빠른 경제·문화 발전에 대한 인민의 요구와 그에 못 미치는 현실 사이에 있다고 선언했다. 당 규약에서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표현이 빠졌고 개인숭배 반대가 강조되었다. 56 57 17 58 59 31
개조의 속도는 문제를 남겼다. 고급 합작사에서 농민의 노동 의욕은 떨어졌고 1956~1957년 일부 지역에서 퇴사 요구와 소요가 이어졌으며, 10월의 헝가리 혁명은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충격을 지도부에 주었다. 마오는 1957년 2월 이 긴장을 「인민 내부 모순」으로 다루겠다며 지식인에게 비판을 권했고, 그 결과가 백화제방과 반우파 투쟁이었다. 1956년의 자신감과 불안이 함께 다음 10년의 급진화를 준비했다. 52 56 60 61
평가: 7년 만의 사회주의
1981년 공산당의 「역사결의」는 1949년부터 1956년까지를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점진적으로 이루고 경제를 빠르게 회복시키며 생산수단 사유제의 사회주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마친 시기로 높이 평가한다. 국가자본주의의 낮은 형태에서 높은 형태로, 호조조에서 초급·고급 합작사로 나아가는 과도 형식을 고안해 부르주아지의 평화적 매수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결의는 1955년 여름부터 농업 합작화와 수공업·상업 개조를 “너무 서둘렀고 변화가 너무 빨랐으며” 일을 거칠고 획일적으로 해 오랫동안 문제를 남겼고, 1956년 이후 옛 상공업자를 제대로 쓰고 다루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31
「여러 계급의 연합」을 약속한 국가가 왜 7년 만에 사유 재산을 없앴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독해가 맞선다. 한쪽은 공동강령의 혼합경제가 진지한 장기 전략이었고 한국전쟁과 냉전, 곡물 위기, 마오의 조급함이 그것을 일찍 끝냈다고 본다. 다른 쪽은 7기 2중전회 보고가 이미 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전환을 말했고, 「제한과 반제한」을 주요 계급투쟁으로 본 이상 연합은 처음부터 과도적이었다고 본다. 1953년의 총노선과 1955년의 「고조」는 두 독해 모두에서 전환점이다. 신민주주의라는 말은 1953년 이후 공식 담론에서 사라졌다. 62 63 9 34
수치는 단일한 값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토지개혁기의 지주 사망자는 20만~500만 명, 반혁명 진압의 처형자는 공식 71만 2천 명에서 연구자 추산 200만 명까지, 삼반·오반의 자살자는 상하이에서만 석 달 새 876명 이상에서 전국 수십만 명이라는 주장까지 폭이 넓다. 한국전쟁의 중국 측 사망자도 공식 18만~20만 명과 미 국방부 추산 40만 명이 엇갈린다. 협동화의 수치는 96.3%(1956년 말 가입 농가), 90%(초보적 집단화), 93.5%(1957년 고급 합작사)로 기준에 따라 다르다. 스튜어트 슈람은 수억 농민이 땅을 얻은 일과 그 과정에서 처형된 수백만 명, 그 가운데 분명히 죽지 않아야 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를 이 시기의 물음으로 남겼다. 18 25 29 24 52 41 42 11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이 7년은 소련이 내전과 신경제정책, 강제 집단화로 십수 년에 걸쳐 지나간 길을, 반식민지 농업국이 상대적으로 적은 생산 감소와 함께 짧은 기간에 지나간 사례였다. 자본가 계급은 몰수가 아니라 「매수」의 형식으로 사라졌고, 집단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농업 생산은 연평균 약 4% 늘었다. 그러나 그 성공이 마오에게 준 자신감, 곧 대중 동원으로 객관적 조건을 앞지를 수 있다는 믿음은 소련 모델을 넘어서는 「중국의 길」, 대약진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다져진 정치 운동과 할당, 「인민」과 「적」의 경계를 다시 긋는 방식은 이후의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31 62 42 61 25
결과
1956년 중국은 소련형 계획경제와 일당 국가를 갖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공업 생산은 연평균 18.7% 늘었지만 농업은 투자의 4%에 그쳤고, 토지개혁과 반혁명 진압, 삼반·오반의 인명 피해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으로 추산된다. 1981년 「역사결의」조차 1955년 여름 이후의 개조가 너무 빨랐다고 인정했다. 급속한 개조의 성공은 마오에게 자신감을 주어 소련 모델을 넘어서는 「중국의 길」, 곧 대약진 운동을 구상하게 했다.
연표와 지도
- 11949.09정치협상회의와 공동강령
공산당·민주당파·무당파가 참여한 회의가 임시헌법 구실의 공동강령을 채택했다.
- 21949.12–
1950.02 마오의 모스크바 방문과 중소조약두 달의 협상 끝에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과 3억 달러 차관에 합의했다.
- 31950.05.01혼인법 공포
강제 결혼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등록과 여성의 이혼권을 정했다.
- 1950.06토지개혁법 공포
전국 농촌에서 지주 토지 몰수와 분배가 시작되어 1952년 말 완료되었다.
- 41950.10반혁명 진압운동 · 한국전쟁 참전
10월 10일 반혁명 진압 지시가 내려졌고 19일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 51951.02.18「3년 준비, 10년 건설」
정치국 확대회의 결의가 계획 경제 건설의 일정표를 간부들에게 알리고 토지개혁의 고문 금지를 지시했다.
- 1951.05.20「무훈전」 비판
마오가 영화 비판을 직접 지휘해 문예계와 지식인에게 경고를 보냈다.
- 61951.09–
1952 지식인 사상 개조 운동저우언라이의 연설 뒤 교수와 전문가들이 자아비판과 공개 고백을 요구받았다.
- 71951.12–
1952.10 삼반·오반 운동간부의 부패와 자본가의 「5독」을 겨냥한 운동으로 민간 상공업이 국가에 종속되었다.
- 1952.12보이보의 신세제
「공사 기업 평등」을 내건 세제가 총노선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았다.
- 81953제1차 5개년 계획 · 과도기 총노선
소련 원조 156개 사업으로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고, 마오는 신민주주의 대신 사회주의 이행을 선언했다.
- 1953첫 근대적 인구 조사
계획을 위해 실시된 조사가 대륙 인구를 5억 8,300만 명으로 집계했다.
- 91953.06.15과도시기 총노선의 정식화
마오가 10~15년 안의 공업화와 사회주의 개조를 내걸고 「신민주주의 질서 확립」을 우경으로 비판했다.
- 101953.07.27한국전쟁 정전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었다. 인민지원군은 1958년까지 철수했다.
- 111953.09.16–
18 량수밍 비판중앙인민정부위원회에서 농민의 처지를 말한 량수밍을 마오가 공개적으로 공격했다.
- 1953.12곡물 통구통소 시작
티베트를 뺀 전국에서 국가의 곡물 계획 수매와 도시 정량 배급이 시작되었다.
- 121953.12.24「두 개의 사령부」
마오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가오강을 이름 없이 비판했다.
- 1954.02가오강·라오수스 사건
4중전회가 두 사람을 「반당연맹」으로 비판했고 가오강은 8월 자살했다.
- 131954.06.14헌법 초안 연설
마오가 시후에서 다듬은 초안의 두 원칙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설명했다.
- 141954.09헌법 제정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첫 헌법이 채택되고 마오가 국가주석, 류사오치가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되었다.
- 151955.03.31「반당연맹」 결의
당 전국대표회의가 가오강과 라오수스를 출당시켰다.
- 161955.05.17–
1957.10 후펑 체포와 숙반후펑 「반혁명 집단」 사건이 1957년까지 1,80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숙반 운동으로 커졌다.
- 1955.07「농업 합작화 문제에 관하여」
마오가 점진론자를 「전족한 여인」이라 비판하며 집단화를 가속했고 1년 만에 농가 90%가 합작사에 들어갔다.
- 171956첫 국산 트럭
창춘 제일자동차 공장이 소련 ZIS-150을 바탕으로 한 해방 CA-10을 내놓았다.
- 181956.01상공업 공사합영 완료
베이징·상하이 등에서 자본가들이 「북과 징을 울리며」 기업의 국가 편입을 신청했다.
- 191956.02.25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스탈린 비판이 소련 모델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재검토를 불렀다.
- 201956.04.25「10대 관계에 관하여」
마오가 소련의 결함에서 교훈을 얻자며 중공업 편중과 중앙집권의 완화를 말했다.
- 211956.09제8차 당대회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을 선언하고 주요 모순을 「선진적 제도와 낙후한 생산력」으로 규정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을 당 규약에서 뺐다.
관련 인물 27명
지도부3
집행 · 지휘3
참여12
천윈과 함께 가오강의 움직임을 알려 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재정부장, 1953년 신세제 논란보이보1908–2007공사 기업을 동등하게 과세하는 신세제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쑹칭링1893–1981비공산당 인사로 연합정부의 상징이었다.
1950년 조약의 소련 측 당사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마오를 두 달간 기다리게 한 뒤 동맹과 차관에 동의했다.
비공산당 출신 중앙인민정부 부주석리지선1885–1959국민당혁명위원회를 이끌고 연합정부의 한 축이 되었다.
중국민주동맹 주석,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장란1872–1955민주당파를 대표해 부주석이 되었고 1954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5개년 계획 입안자, 조약 협상단원리푸춘1900–19751950년 모스크바 협상에 참석했고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5개년 계획 초안 작성자녜룽전1899–19921952년 저우언라이의 계획 초안 팀에 참여했다.
「다섯 마리 말」의 한 사람시중쉰1913–20021952년 대행정구 지도자로서 베이징으로 불려 왔다.
가오강을 지지한 원수린뱌오1907–1971펑더화이와 함께 가오강을 지지했다가 마오의 승인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해명해 면책되었다.
공사합영에 협조한 「붉은 자본가」룽이런1916–2005상하이의 가족 기업을 1956년 국가에 넘기고 새 정권에 협조했다.
비밀연설로 스탈린을 비판한 소련 지도자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1956년 2월의 연설이 중국 지도부에 소련 모델의 재검토를 촉구했다.
대상 · 피해6
1954년 비판받고 8월 자살했다.
가오강과 함께 숙청된 조직부장라오수스1903–19751955년 체포되어 1975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합작화 속도에 반대한 농촌공작부장덩쯔후이1896–19721955년 합작사를 100만 개로만 늘리자고 했다가 「전족한 여인」, 「우경 기회주의」로 비판받았다.
농민의 처지를 말했다가 공격받은 향촌 건설 운동가량수밍1893–19881953년 9월 중앙인민정부위원회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를 「하늘 아홉째 층과 땅 아홉째 층」에 비유했다가 마오의 공격을 받았다.
「반혁명 집단」으로 몰린 문예 비평가후펑1902–19851955년 5월 체포되었고 그의 사건은 숙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마오의 맏아들마오안잉1922–1950인민지원군 장교로 복무하다 유엔군 공습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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