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의 부인으로 국민당 좌파에 남아 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이 된 인물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다른 이름: 송경령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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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7
정치·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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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9
보위중국동맹대표
사회운동·조직 -
1949–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중앙인민정부 부주석·국가 부주석
정부·행정 -
1954–1959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입법·국가 대표 -
1968–1972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국가주석 직무 대행중국 국가원수 · 정부 수반 · 당 지도자
정치·당 지도 -
1975–1981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입법·국가 대표 -
1981
사회운동·조직
경력 연표
- 1938중국보위동맹을 조직해 항전 구호 활동
- 1949–1954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1959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 1959–1975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1968.10.31–1972.02.24국가부주석으로 국가주석 직무 대행
- 1975–1981다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 1981중국공산당 입당,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관련 역사 사건
- 1924–1927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1927년의 파국국민당 좌파에서 정변에 반대한 인물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다.
- 1927–1936징강산에서 옌안까지: 소비에트 근거지와 대장정스노의 근거지 방문을 주선한 인물1936년 에드거 스노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 1937–1945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항전 지원 단체를 조직한 인물1938년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을 창설해 중국 항전 지원을 모았다.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비공산당 출신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해 여섯 부주석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 1949–1956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개조로중앙인민정부 부주석비공산당 인사로 연합정부의 상징이었다.
1931년 이후 상하이와 홍콩의 항일·구호 활동
1931년 독일에서 돌아온 쑹칭링은 국민당 정부가 일본에 맞서기보다 공산당과 군벌을 먼저 진압하려는 정책을 비판하며, 그 정책이 민중의 저항을 억누른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모스크바와 연락을 이어갔고, 진겅·랴오청즈·천두슈 등 공산당 지도자들의 구출에 관여했다. 또한 비서 리윈을 통해 중국공산당과 연락했으며,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의사 마하이더와 기자 에드거 스노를 옌안에 보냈다. 1934년 코민테른 메모에 따르면 현지 소련 대표는 그녀를 공산당에 입당시키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독자적 가치를 잃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활동은 당시 그녀가 공산당원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1937년 12월 홍콩으로 옮긴 뒤에는 항전과 국제 연대를 호소하는 글을 발표했다. 1938년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을 창설해 중국의 항전 지원을 위한 국제적 지지를 모으고, 구호 물자를 마련하며 소식지를 발행했다. 1945년 12월 이 단체는 중국복리기금으로 개편되었고, 1950년 8월 중국복리회로 개칭되었다. 이 조직은 공산당 계열 단체와 군대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는 한편 아동 복지와 사회복지 활동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