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혁명
탈스탈린화의 희망은 왜 부다페스트에서 소련 전차에 부딪혔는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연 탈스탈린화의 기대 속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터진 봉기였다. 10월 부다페스트의 학생·노동자 시위가 전국적 항쟁으로 번지자 개혁파 너지 임레가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 중립을 선언했다. 소련 지도부는 이를 진영의 붕괴로 보고 11월 대규모 군사 개입으로 봉기를 진압했다.
“스탈린의 최고 제자”가 만든 나라
마차시 라코시는 스스로를 “스탈린의 가장 훌륭한 헝가리 제자”라 불렀다.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1945년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라코시는 1949년까지 헝가리에서 스탈린식 일당 독재의 축소판을 완성했다. 그가 “살라미 전술”이라 이름 붙인 방식(연정 파트너를 한 조각씩 잘라내듯 제거하는 방법)으로 1945년 총선에서 57%를 득표했던 독립소지주당을 비롯한 모든 경쟁 세력이 분쇄되었고, 1949년 8월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라코시 체제를 떠받친 두 기둥은 공포와 강제 산업화였다. 국가보안기관(ÁVH)은 2만 8천 명의 정규 요원과 4만 명의 정보원을 거느렸고, 전 인구의 10%가 넘는 100만 명에 대한 감시 파일을 작성했다. 약 65만 명이 박해를 받았고, 40만 명이 수용소나 감옥에 갇혔다. ÁVH 장교의 월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3배에서 12배에 달했다. 1949년 라슬로 러이크 전 내무장관(ÁVH의 창설자 자신)이 티토주의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이것은 동유럽 최초의 본격적인 스탈린식 쇼재판이었다.
경제는 소련 모형을 그대로 복제했다. 중공업에 모든 자원이 쏠렸고, 농업 집단화가 강제되었으며, 소비재 생산은 억압되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1952년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938년 수준의 66%에 불과했고, 1950년보다 20%나 하락했다. 전쟁 배상금은 국민소득의 4분의 1에 달했고, 코메콘 가입으로 서방과의 직접 무역은 차단되었다. 식량 배급제가 시행되었고, 6차례에 걸친 ‘평화 공채’ 강제 매입으로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총 56억 포린트가 개인 소득에서 흡수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균열을 냈다. 모스크바의 지시로 라코시는 총리직을 개혁파 너지 임레에게 넘겨야 했다. 너지의 “새 노선”은 강제 수용소를 해산하고, 농민에 대한 강제 납부 부담을 줄였으며, 중공업 투자를 축소하고 소비재 생산을 늘렸다. 헝가리인들은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나 라코시는 당 제1서기로 남아 모든 개혁을 뒤에서 훼손했고, 1955년 4월(모스크바에서 말렌코프가 실각하자) 너지는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축출되었다. 개혁의 약속은 철회되었고, 다시 강경노선으로 돌아갔다.
이어 1956년 2월, 흐루쇼프가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범죄를 고발한 비밀연설은 헝가리에 지진을 일으켰다. 연설 내용은 신속히 유출되어 전국에서 논쟁이 불붙었다. 청년 조직이 운영하던 페퇴피 서클에서는 수천 명이 참석한 철야 토론회가 열려 민주화와 지적 자유를 요구했다. 러이크의 미망인은 한 토론회에서, 라코시가 지방 연설 중 한마디 던지듯 발표한 남편의 복권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항의했다. 1956년 10월 6일, 20만 명의 부다페스트 시민이 러이크의 복권 장례 행렬에 참석했다. 3주 후 일어날 폭발의 예행연습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내린 해결책은 절반짜리였다. 1956년 7월 18일 라코시는 마침내 물러났지만, 후임은 그의 오른팔인 게뢰 에르뇌(또 한 명의 스탈린주의자)였다. 너지는 당에 복귀하지조차 못했다. 사람들이 원한 진짜 변화 대신, 그들이 얻은 것은 간판만 바뀐 연속성이었다.
한 통의 비밀연설이 라코시 체제를 무너뜨리기까지
1956년 2월 25일 자정을 막 넘긴 시각,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네 시간 동안 스탈린을 낱낱이 고발했다.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연설은 스탈린이 1930년대 대숙청에서 충성스러운 당원 수십만 명을 허위 자백과 고문으로 숙청한 사실, 전쟁 준비의 실패, 소수민족 전체의 강제이주, 그리고 자신의 우상화를 위한 '개인숭배' 조장을 적시했다. 흐루쇼프는 연설을 '일급비밀'로 분류했지만, 며칠 안에 지역 당 조직에서 수백만 당원 앞에 낭독되었고, 3월에는 서방 언론에 전문이 유출되었다. 6월 5일 《뉴욕 타임스》가 전문을 게재하면서 이 연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헝가리 노동인민당 제1서기 라코시 마차시에게 이 연설은 정치적 지진이었다. 라코시는 스스로를 '스탈린의 최고의 헝가리 제자'라 부르며 1949년부터 숙청과 쇼재판, 강제 집단화, 사상경찰 아브하(ÁVH)에 의한 공포통치를 이식한 인물이었다. 스탈린에게 적용된 모든 비판은 라코시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3월 중앙위원회에서 마지못해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결의를 통과시켰지만, 그의 진짜 전략은 최소한의 양보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설의 내용은 통제할 수 없이 번져나갔다.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DISZ) 산하에 만들어진 페퇴피 서클은 봄부터 문학·경제·역사·이데올로기 토론회를 열었고, 이내 반체제 지식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6월 '언론의 자유' 토론회에는 7,000명이 넘는 군중이 강당 밖 거리까지 메웠다. 연사들은 공개적으로 라코시의 퇴진과 라지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 대학에서는 금지되었던 독립 학생 조직 MEFESZ가 부활했다.
모스크바는 불안해졌다. 6월 미하일 수슬로프가, 7월 13일에는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직접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었다. 미코얀은 7월 14일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에서 "당 지도부가 말 그대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으며, 나날이 권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모든 정치국원이 문제의 핵심은 라코시 본인이라는 데 동의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미코얀이 직접 "당과 정권을 구하기 위해 라코시 동지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게뢰 에르뇌와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7월 18일, 라코시는 '건강상의 이유'로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소련으로 떠났다. 그러나 후임은 개혁파가 염원하던 너지 임레가 아니라, 라코시의 최측근이자 스페인 내전 시절부터 '스탈린주의 집행자'로 악명 높았던 게뢰 에르뇌였다. 모스크바는 라코시를 제거했지만 체제는 교체하지 않았다. 이 반쪽짜리 조치는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10월 6일 라지크의 유해 이장식에 20만 명이 운집하면서, 헝가리 사회는 이미 체제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음을 드러냈다. 흐루쇼프의 '비밀'은 라코시를 무너뜨렸지만,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공백이었다.
10월 23일, 하루 만에 시위가 봉기로 바뀌다
1956년 10월 23일은 화요일이었다. 아침은 평범했지만, 이미 여러 균열이 누적되어 있었다. 10월 16일 세게드 대학에서 금지되었던 독립 학생조합 MEFESZ가 부활했고, 22일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대회는 16개조 요구를 채택했다. 소련군 철수, 비밀선거, 라코시의 소환과 재판, 복수정당제, 언론의 자유, 스탈린 동상 철거, 3·15 국경일 부활 등이 담긴 이 요구는 혁명의 강령이 아니었다. "공산당 금지"도 "사회주의 폐지"도 없었다. 학생들은 사회주의의 개혁을 요구한 것이지 전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23일 오후 2시, 학생들과 시민들은 페퇴피 광장에 모였다. 배우 신코비치 임레가 페퇴피 샨도르의 「민족의 노래」(Nemzeti dal)를 낭송했고, 라코시 정권이 공공 낭독을 금지했던 바로 그 시였다. 이어서 학생 대표가 16개조를 낭독했다. 군중은 벰 장군 동상으로 행진했다. 1848년 헝가리 혁명에 참전했던 폴란드 장군에게 바치는 헌화는 의도된 것이었다: 폴란드에서 고무우카가 소련과 협상해 군대 철수를 이끌어낸 '폴란드 10월'에 대한 연대의 표시였다. 저녁이 되자 군중은 20만 명으로 불어나 의사당 광장을 메웠다.
광장의 군중은 한 이름을 연호했다: "너지! 너지!" 1953~55년 총리 시절 개혁을 추진했다가 라코시에게 축출된 너지 임레는 개혁파의 상징이었다. 너지는 저녁 늦게 의사당 발코니에 나타났다.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말은 어색했다. "동지들"이라는 호칭을 쓰자 야유가 터졌다. 그는 "자연스러운 발전"을 기다리라고 했고, 군중은 냉담했다. 미국 공사관의 전보는 "군중이 거의 듣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같은 시각 오후 8시, 게뢰 에르뇌 제1서기가 라디오 연설을 했다. 내용은 비타협적이었다. 시위대를 "민족주의적·쇼비니즘적" 세력으로 규정하고, 학생 요구를 일축했다. 이 연설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연설을 들은 군중은 브로디 샨도르 거리의 라디오 방송국으로 몰려가 16개조의 방송을 요구했다. 학생 대표단 10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으나, 그 중에는 14세 소녀도 있었지만, 보안경찰(ÁVH)은 이들을 억류했다. 밖에서는 군중이 대표단의 석방을 외쳤다.
밤 9시 30분경, 군중은 스탈린 동상이 서 있던 영웅광장으로 이동해 트럭과 윈치로 8미터 높이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동상은 목이 잘렸고, 군중은 "Russians go home!"을 외치며 붉은 별을 뜯어냈다. 스탈린의 장화만 받침대에 남았다.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는 평화롭던 군중의 분위기가 빠르게 악화되었다. 게뢰의 연설과 대표단 억류 소식에 분노한 군중 앞에서, ÁVH는 최루탄을 던졌고 이내 발포했다. 누가 첫 총을 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피해 기록은 분명하다. 부다페스트 2번 외과병원은 그날 밤 6구의 사망자와 36명의 부상자를 접수했다. 미국 공사 대리 스펜서 반스는 국무부 전문에서 "헝가리 군대는 비무장 군중에게 발포를 거부했다. ÁVH 제복을 입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자들이 발포했다"고 보고했다. 부다페스트 시내 다른 지역은 조용했으나, 방송국 주변에서는 이미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밤 11시가 되자 헝가리 군대 일부가 현장에 도착했지만 병사들은 모자에서 붉은 별을 떼어내며 시위대 편에 섰다. 시위대는 구급차를 탈취해 ÁVH에 전달되던 무기를 빼앗았고, 경찰차에 불을 질렀다. 게뢰는 이미 유리 안드로포프 주헝가리 소련대사를 통해 흐루쇼프에게 "전례 없는 규모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군 개입을 요청한 상태였다. 소련군 지도부는 '파도'(Volna) 작전의 암호명 '콤파스(Kompas)'를 오후 9시에 발령했고, 소련 전차 부대는 헝가리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10월 23일은 이렇게 끝났다. 헝가리 국기 한복판에서 붉은 별이 잘려나간 깃발, 혁명의 상징이 될 그 깃발 아래서, 부다페스트는 전투에 돌입했다.
일주일 만에 체제의 기둥을 뽑아내다: 너지 개혁의 정치적 전개
너지 임레가 10월 24일 총리로 복귀했을 때만 해도, 그가 내건 개혁은 1953년 그가 한 번 시도했다가 좌절된 '신노선'의 연장선이었다. 소련 지도부도 그렇게 읽었다. 미코얀과 수슬로프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너지와 카다르에게 집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일당체제와 바르샤바조약 잔류라는 두 기둥은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10월 23일 밤 게뢰 에르뇌 제1서기의 '반혁명' 연설에 분노한 군중에게, 그리고 나흘 동안 부다페스트 시가전에서 소련 전차를 상대한 무장 봉기 세력에게, 1953년식 개혁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였다. 전국 각지에서 즉흥적으로 결성된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위원회는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구 당기구를 해체시키고 있었다. 10월 27일에는 공식 노조연맹 SZOT마저 대학생·작가연합과 공동으로 혁명 요구를 발표했다. 당은 더 이상 정보 독점도, 물리력도 쥐고 있지 않았다.
10월 28일, 너지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사임을 무기로 자신의 새 정치노선을 관철시켰고, 카다르가 여기에 동참했다. 미코얀과 수슬로프는 이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나흘 전투로 지쳐 있었고, 헝가리 인민군 부대가 반란 측에 가담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군사적 진압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라디오 연설에서 너지는 봉기를 '반혁명'이 아니라 '위대한 민족적·민주적 운동'으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선언했다. ÁVH 국가보안국을 해체하고, 무장 봉기 세력을 신설 국가방위군에 편입시키며, 소련군의 철수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말까지 소련군 부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틀 뒤인 10월 30일, 너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일당제를 폐지하고 1945년형 연립정부로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내각에는 소농민당 출신 틸디 졸탄과 코바치 벨러, 민족농민당의 에르데이 페렌츠, 그리고 사회민주당 대표까지 합류했다. 이 다당제 정부 선언은 모스크바가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포기한 것으로 읽기에 충분했다.
같은 날 모스크바에서는 극적인 반전이 있었다. 10월 30일 소련 공산당 상임간부회는 「소련 정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우호 및 협력 원칙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고, 헝가리에서 군대를 철수하며 '필요하다면 헝가리 전체에서 철수한다'는 주코프의 의견을 승인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0월 31일, 흐루쇼프는 입장을 뒤집었다. '우리가 헝가리에서 떠나면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즉 제국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우리의 약함으로 인식하고 공세에 나설 것이다.' 이집트를 놓고 영국·프랑스가 수에즈 전쟁을 개시한 시점과 맞물려, 제국주의에 약함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개입 반대로 급선회시킨 것이다.
11월 1일, 소련군 부대가 헝가리 동부 국경을 다시 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너지 정부는 오후 내각회의를 소집했다. 안드로포프 소련 대사가 초청되어 해명을 요구받았으나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내각은 이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카다르를 포함하여,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하나는 바르샤바조약 탈퇴 선언,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식 중립국 선포였다. 동시에 유엔에 4대 강국이 헝가리의 중립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산당이 이끄는 동유럽 국가 정부가 서방 강국에 정치적 도움을 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지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중립」을 선언하는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헝가리 인민의 수백 년 된 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1월 3일, 너지 정부의 대표단이 소련군 철수 협상을 위해 퇴쾰 기지에 도착했을 때, 크류치코프가 동행한 KGB 주력부대가 협상단 전원을 체포했다. 대표단을 이끈 말레테르 팔 국방장관은 너지와 함께 1958년 교수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너지가 일주일 만에 뽑아낸 기둥들, 즉 일당제와 바르샤바조약 그리고 소련군 주둔은, 소련 지도부에게 더 이상 정치적 해결이 가능한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11월 4일, 소련 전차가 부다페스트를 다시 덮치다
1956년 10월 30일, 소련 공산당 상임위원회는 헝가리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주코프 국방장관도 "부다페스트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필요하다면 헝가리 전체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라우다에는 다음 날 「소련 정부는 헝가리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즉시 부다페스트에서 소련군을 철수할 용의가 있다」는 선언이 실렸다.
그러나 불과 24시간 만에 결정은 완전히 뒤집혔다. 10월 31일 상임위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평가를 재검토해야 한다.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정적 반전이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첫째, 너지 임레가 10월 30일 다당제를 공식 선언하고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을 선포한 것이 소련 지도부의 인내심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미코얀과 수슬로프는 현지에서 "정치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둘째, 영국과 프랑스가 10월 29일 수에즈를 공격한 시점과 겹치면서, 흐루쇼프는 헝가리 철수가 제국주의자들에게 "약함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셋째, 중국과 다른 동유럽 지도부가 군사 개입을 압박했다.
11월 1일 작전명 「회오리바람」이 승인되었다. 주코프가 계획을 총괄하고 코네프 원수가 지휘를 맡았다. 17개 사단, 6만 명 이상의 병력, 3천 대가 넘는 전차(대부분 최신형 T-54)가 투입되었다. 이는 10월 23일 파견된 5개 사단(3만 1,500명)과 비교해 세 배 이상의 규모였다.
개입 직전, 소련은 교묘한 기만 작전을 펼쳤다. 11월 3일 소련군 사령부는 퇴쾰에서 철군 협상을 제안했고, 말레테르 팔 국방장관을 비롯한 헝가리 군사대표단이 참석했다. 자정 무렵 세로프 KGB 의장의 지시로 대표단 전원이 체포되었다. 헝가리군은 침공 몇 시간 전에 머리가 잘린 셈이었다. 소련은 동시에 점령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거짓 '말레테르 성명'을 내보내 헝가리군에게 사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1월 4일 오전 3시, 소련 전차가 부다페스트에 진입했다. 남쪽 소록샤리 길과 북쪽 바치 길 두 방향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와 도나우 강의 모든 교량을 장악했다. 오전 4시 25분 부더외르시 길의 막사에 첫 포격이 가해졌다. 오전 5시 20분, 너지는 라디오를 통해 마지막으로 "소련군이 우리 수도를 공격했다. 정부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35초간 방송했다.
같은 시각 오전 6시, 부다페스트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솔노크에서 카다르 야노시는 "헝가리 혁명노동자농민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소련군의 개입을 "요청"했다. 사실상 소련 전차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정권이었다.
전투는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다. 소련군은 부다페스트 시가전에서 노동자 계급 거주지인 체펠과 8구·9구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특히 코르빈 영화관 일대는 봉기의 상징적 거점으로, 소련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헝가리군은 조직적 저항보다는 산발적·개별적 전투를 벌였다. 유엔 보고서는 헝가리군 부대가 소련 편에서 싸운 사례는 단 한 건도 기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주코프는 11월 9일까지 헝가리군 12개 사단과 2개 기갑연대, 공군 전체가 무장 해제되었다고 보고했다.
마지막 저항은 11월 11일 체펠과 두너우이바로시에서 진압되었다. 공식 집계로 소련군은 669명 전사, 51명 실종, 1,251명 부상을 기록했다. 헝가리 측에서는 최소 2,500명이 사망하고 약 20만 명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했다. 사망자의 절반은 30세 미만이었고, 53퍼센트는 노동자였다.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비보 이슈트반 국무장관만이 국회의사당에 남아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라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소련군이 의사당을 점령했을 때 그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너지 임레를 죽이기까지: 19개월의 납치, 비밀재판, 교수형
1956년 11월 4일 새벽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침공하자 너지 임레는 측근 8명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카다르 야노시는 11월 22일 너지 일행에게 자유로운 출국을 보장한다는 서면 약속을 내밀었고, 너지가 대사관 문을 나서는 순간 소련군은 그를 납치해 버스에 태워 루마니아 스나고브로 이송했다.
1957년 1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소련·불가리아·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5개국 정상회담에서 카다르는 너지 그룹의 처리를 의제로 올렸다. 루마니아 측 회의록에 따르면 "너지의 책임과 법적 결과"라는 표현이 이 자리에서 처음 명시됐다.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카다르와 흐루쇼프는 너지를 재판에 세우기로 합의했다. 12월 21일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는 너지에 대한 정치적 기소를 결의했고, 1958년 2월 5일 부다페스트 군사법원에서 비밀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인민법원평의회 의장 비더 페렌츠가 주재했다. 피고는 너지와 국방장관 말레테르 팔, 언론인 기메시 미클로시, 도나트 페렌츠, 틸디 졸탄 등 8명이었다. 너지의 핵심 참모 로손치 게저는 구금 중 단식투쟁을 벌이다 1957년 12월 21일 강제 영양주입 중 사망했다. 또 다른 참모 실라지 요제프는 심문에 응하지 않아 사건이 분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내무부 녹음기사들이 총 52시간 분량의 재판 전 과정을 테이프에 담았으며, 국가보안부는 선전용 영화 제작을 위해 법정을 촬영하기도 했다.
너지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실질적 변론조차 거부했다. 검찰은 그에게 "조직적 음모의 개시와 지도" 및 "반역" 혐의를 적용했다. 변호인은 증인 소환을 허용받지 못했고, 비더 판사는 피고들의 증거 제출을 반복적으로 차단했다. 1958년 6월 15일, 법원은 너지·말레테르·기메시에게 사형과 전 재산 몰수를 선고했다. 도나트는 12년, 틸디는 6년, 코파치 샨도르는 종신형을 받았다.
형은 다음 날인 6월 16일 새벽 부다페스트 교도소 안뜰에서 집행되었다. 세 사람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시신은 타르지로 싸여 철사로 묶인 채 교도소 구내에 매장되었다. 카다르 정권은 집행이 끝난 뒤에야 관영통신을 통해 공개했다. 1961년 시신들은 신공동묘지 301번 구획으로 옮겨졌고 얼굴이 땅을 향한 채 익명으로 묻혔다. 유족들은 1989년 봄까지 무덤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1989년 6월 16일, 형 집행 31주기에 너지와 동료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영웅광장에서 국장으로 재안장되었다. 25만 명이 운집한 이 장례식은 헝가리 사회주의 정권 붕괴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혁명이 멈춘 자리: 결정된 것, 남겨진 것, 그리고 끝나지 않은 논쟁
소련 전차가 부다페스트를 장악한 뒤에도 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11월 14일, 부다페스트 각 구역 노동자평의회 대표들이 모여 대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우리는 사회주의 원칙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선언한다"면서도 소련군 철수와 너지 임레의 복권, 파업권 보장을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약 2,100개의 노동자평의회가 꾸려져 28,000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이는 당-국가와 다른 방식의 사회주의, 즉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노동자 자주관리의 실험이었다. 카다르 정권은 초기에 협상하는 척했으나 12월 11일 중앙노동자평의회 지도부를 체포했고, 이에 맞선 48시간 총파업을 마지막으로 평의회 운동은 1957년 중반 분쇄되었다.
혁명의 진압이 국제적으로 못박은 것은 냉전의 교착이었다. 1956년 10월 27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우리는 이 나라들을 잠재적 군사동맹국으로 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953년 처칠이 소련의 동유럽 안보지대를 사실상 인정한 이래, 서방은 현상 타파를 원하지 않았다. 벡에시 처버(Csaba Békés)의 분석을 따르면, 1956년 이후 미국의 대동유럽 정책은 '위성국가들의 독립 회복이 가까운 미래에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정 위에 재편되었고, 냉전은 '강제된 공존(compelled coexistence)'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에즈 위기가 동시에 터진 것은 우연이었을지 모르나, 미국이 소련 세력권 내 봉기에 군사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신호는 분명해졌다.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를 둘러싼 역사가들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첫째 쟁점은 1990년대 공개된 이른바 '말린 노트', 즉 블라디미르 말린이 기록한 소련 공산당 상임위 회의의 단편적 속기록의 해석이다. 10월 30일 상임위는 만장일치로 헝가리 철군을 결정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를 소련이 실제로 타협할 용의가 있었고 다른 길이 가능했다는 증거로 읽는다. 그러나 벡에시를 비롯한 다수 역사가는 이 철군 결의가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고 소련 진영에 남는다'는 전제 아래 최대한의 양보였을 뿐이며, 너지가 11월 1일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한 순간 선택지는 사라졌다고 본다. 미코얀조차 그날 "우리는 헝가리가 우리 진영에서 제거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둘째 쟁점은 혁명의 성격 그 자체다. 카다르 정권은 33년간 1956년을 '반혁명'으로 규정했고 서방 주류는 민족 해방 투쟁으로 보았다. 그러나 C. L. R. 제임스와 해나 아렌트, 그리고 유럽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평의회의 자발적 출현에 주목하며 1956년을 '관료적 당-국가에 맞선 노동자 민주주의의 혁명'으로 해석했다. 이 세 갈래 해석은 오늘날까지 완전히 수렴되지 않았다. 1989년 10월 23일 헝가리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혁명의 정당성은 회복되었으나, 빅토르 오르반의 피데스 정권은 2010년대 이후 1956년을 반공 민족주의 서사로 재전유하여 노동자평의회의 급진적 민주주의 유산은 오히려 지워지고 있다.
1991년 옐친의 사과와 1992년 러시아 의회 연설은 1956년에 대한 국제적 평가의 종착점처럼 보였지만, 2023년 푸틴 정권의 메딘스키 역사교과서가 혁명을 '서방이 조직한 파시스트 봉기'로 규정한 사건은 이 역사가 아직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헝가리 외무장관 페테르 씨야르토는 즉각 "이들을 파시스트로 낙인찍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대응했다. 1956년의 유일하게 확실한 유산은 이 물음이다: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개혁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그리고 그 답은 1968년 프라하에서 다시 한번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
진 것은 혁명이었지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혁명이 진압된 후 헝가리에는 세 가지 사실이 굳어졌다. 첫째, 소련은 동유럽에서 일당 독재의 틀을 벗어나는 어떤 개혁도 군사력으로 저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끝내면서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 실제 선례는 1956년 부다페스트였다. 둘째, 카다르 야노시가 이끄는 새 정권은 1963년까지 대부분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1968년 '신경제체제'를 도입해 제한된 시장 개혁을 허용하는 이른바 '굴라시 공산주의'의 길을 열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라는 카다르의 선언은 혁명이 아니라 소비와 무관심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겠다는 사회계약의 선언이었다. 셋째, 헝가리에서 약 20만 명이 서방으로 탈출했고, 유럽 각국 공산당에서는 대규모 탈당이 이어졌다. 영국 공산당만 해도 1만 명 이상이 당을 떠났고, 이탈리아 공산당은 1957년 한 해에만 30만 명의 당원을 잃었다. 서유럽 공산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소련 모델의 도덕적 권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진압과 함께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끝나지 않았다. 카다르 정권은 1956년을 '파시스트 반혁명'으로 규정하고 이 틀 안에서 30년 넘게 공식 역사를 통제했다. 이에 맞서 헝가리 국내외의 민주 진영은 1956년이 스탈린주의 독재에 맞선 민주적·사회주의적 봉기였으며, 노동자평의회와 자주적 학생 조직, 재건된 비공산당 정당들이 보여준 자발적 민주주의야말로 이 혁명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루카치 죄르지가 '혁명도 반혁명도 아닌, 봉기'라는 절충적 표현을 제안한 것은 이 대립을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1989년 체제 전환 이후 논쟁은 더 복잡해졌다. 너지 임레의 장례식이 열린 1989년 6월 16일, 개혁 공산주의자들은 너지를 자신들의 선구자로 내세웠고, 새로운 우파는 1956년을 반공 민족 투쟁으로 재정의하며 전간기 호르티 체제의 전통까지 복권시키려 했다. 2000년대 이후 오르반 빅토르 정권은 혁명의 기억을 '자유를 위한 민족적 희생'이라는 서사로 포획했고, 푸틴의 러시아는 2023년 역사 교과서에서 1956년을 '서방이 조직한 파시스트 봉기'라고 다시 썼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는 없다. 한쪽에서는 1956년을 냉전사의 분수령으로, 소련 진영 내 개혁의 한계를 폭력적으로 확정한 사건으로 읽는다. 다른 쪽에서는 노동자평의회의 출현에서 국가 사회주의를 민주화할 수 있는 잃어버린 가능성을 본다. 또 1956년의 좌절이 없었다면 1968년의 프라하도, 1980년의 그단스크도 없었다는 역설은, 혁명이 '졌지만' 동유럽의 해방 연대기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한 페이지로 남게 했다.
1956년이 유럽에 못 박은 것, 못 박지 못한 것
1956년 11월 4일 이후, 유럽의 냉전은 제도화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 교착의 두 축을 부다페스트가 동시에 증명했다. 첫째, 서방은 소련의 세력권 안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헝가리 혁명 내내 「봉쇄」를 넘어서는 어떤 군사적 개입도 고려하지 않았다. 내부 검토 보고서는 헝가리에서의 봉기가 승산이 없으며 핵전쟁으로 번질 위험이 있다고 결론 내렸고, 수에즈 위기가 같은 시기에 터지면서 미국은 소련의 제국주의를 비판할 도덕적 지위마저 잃었다. 둘째, 소련은 바르샤바조약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10월 30일 소련 상임위는 「헝가리 주둔 소련군 철수 협상」에 응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지만, 바로 그날 밤 개입을 최종 결정했다. 너지가 중립을 선언한 11월 1일은 결정을 실행으로 옮긴 날일 뿐이다. 이 두 명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재확인되었고, 1989년까지 유럽 안보의 무언의 규칙으로 작동했다.
헝가리 역사가 벡시 처버(Csaba Békés)는 최근 공개된 양측 기록들을 분석해, 1956년이 냉전을 악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화했다고 주장한다. 초강대국들은 전면전만은 피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해에 도달했고, 유럽의 분할선은 사실상 양측이 묵인하는 영구적 배치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굴라크 공산주의」라는 카다르의 노선 역시 이 틀 안에서만 설명 가능하다. 카다르는 1963년까지 대부분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계획경제에 시장 요소를 도입했으며, 1970년대에는 동구권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소련의 군사적 승인 위에서만 가능했고, 카다르는 자신을 집권시킨 소련 전차의 기원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1989년 7월 6일 사망한 바로 그날, 헝가리 대법원은 너지 임레에 대한 1958년 판결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역사학계의 논쟁은 1956년의 성격 자체를 둘러싸고 전개되어 왔다. 카다르 정권은 1956년을 파시스트·호르티 잔재 세력이 조직한 「반혁명」으로 규정하고 30년간 공식 담론을 통제했다. 반면 망명 지식인과 국내 민주화 운동은 1956년의 주류가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했다고 반박했다. 문제는 1989년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논쟁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가 민크 언드라시(András Mink)가 분석했듯, 1989년 이후 헝가리 우파 진영은 1956년 혁명을 전전(戰前) 호르티 체제의 반공 투쟁과 연결 짓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밀고 나갔다. 극우 성향의 일부 해석은 1956년을 1944년 화살십자당(Arrow Cross)의 반볼셰비키 투쟁의 연속으로까지 위치 지었다. 2006년 50주년을 앞두고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성왕관(Holy Crown)을 내건 극우 시위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한때 저항의 상징이었던 1956년의 기억이 전간기 극우의 상징 체계와 접속된 것이다.
2023년 8월, 러시아의 전 문화부 장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1956년 혁명을 서방이 조직한 파시스트 봉기라고 기술한 역사 교과서를 출간했다. 헝가리 외무장관 시야르토 페테르는 「이 사람들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공개 반박했다. 67년이 지난 지금도, 1956년은 누구의 혁명이었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과
소련군의 진압으로 수천 명이 죽고 20만 명 이상이 서방으로 탈출했다. 너지는 체포되어 1958년 비밀리에 처형됐고, 소련이 세운 카다르 정권이 들어섰다. 혁명은 좌절됐으나,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개혁이 어디까지 허용되는가라는 물음을 유럽 전체에 남겼다.
연표
- 1956.02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스탈린 비판이 동유럽 전역에 개혁의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 1956.10.23부다페스트 시위
학생·노동자 시위가 전국적 봉기로 번졌다.
- 1956.10–11너지의 개혁
너지가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 중립을 선언했다.
- 1956.11.04소련의 개입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진입해 봉기를 진압했다.
- 1958너지의 처형
체포된 너지가 비밀재판 뒤 처형됐다.
관련 인물 31명
주도 · 집행9
봉기를 진영의 붕괴로 보고 군사 개입을 최종 결정했다.
침공군 사령관이반 코네프1897–1973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으로 부다페스트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국방장관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국방장관으로 군사 개입을 뒷받침했다.
주헝가리 대사유리 안드로포프1914–1984부다페스트 주재 소련 대사로 진압의 현장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소련이 세운 대항정부카다르 야노시1912–1989너지 정부를 떠나 소련의 지원으로 대항정부를 세워 헝가리를 이끌었다.
진압 지휘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거부권 행사아르카디 소볼레프1903–1964소련 유엔 상임대표로서 1956년 11월 4일 안보리에서 헝가리 개입을 비난하는 미국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바르샤바조약에 따른 합법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KGB 의장, 말레테르 체포를 지시이반 세로프1905–199011월 3일 밤 퇴쾰에서 소련군 사령부로 초청된 말레테르 팔 국방장관 등 헝가리 대표단의 체포를 직접 지시해, 침공 직전 헝가리군 지휘부를 무력화했다.
너지 재판의 재판장페렌츠 비더1911–1990피고의 변론을 억압하고 증거 제출을 불허하며 재판을 주도했다.
참여12
수슬로프와 함께 부다페스트에 파견되어 사태를 조율했다.
부다페스트 파견미하일 수슬로프1902–1982미코얀과 함께 현지에서 강경 대응을 조율했다.
대사관 직원 (현장 참여)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선전선동부장으로서 사상적 대응 주도표도르 콘스탄티노프1901–1991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5~1958)으로서 헝가리 봉기 이후 지식인들 사이의 '수정주의' 위험을 공개 경고하고, 1958년 『현대 수정주의에 반대하여』를 발표했다.
너지 정부 문화장관루카치 죄르지1885–19711956년 10월 임레 너지의 혁명 정부에서 문화장관을 맡았으며, 당의 민주적 재건을 시도했다. 혁명 진압 후 루마니아에 억류되었다.
중립 선언을 의결한 국무장관졸탄 틸디1889–19611956년 10월 30일 너지 임시정부의 국무장관이 되었고, 11월 1일 각료회의에서 와르샤바 조약 탈퇴와 중립을 만장일치로 의결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나지 정부의 마지막 국무장관이슈트반 비보1911–1979소련군 도착 후 국회의사당에 홀로 남아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작성했다.
마지막 라코시 충성파 총리언드라시 헤게뒤시1922–19991956년 10월까지 총리로 재임하며, 미코얀 보고서에 라코시 운명을 논의한 회의 참석자로 기록되었다.
혁명에 합류한 경찰 수장샨도르 코파치1922–200110월 23일 시위대에 발포를 거부하고 혁명에 합류했다.
나지 정부의 국무장관게저 로손치1917–195711월 1일 연립 내각에서 국무장관으로 중립 선언에 투표한 각료회의에 참석했다. 소련 개입 후 체포되어 1957년 12월 옥중 단식으로 사망했다.
라디오 청사 방어를 지휘한 군인팔 말레테르1917–195810월 23일 라디오 청사로 파견된 기갑부대를 지휘했고, 이후 나지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나지 정권의 동료페렌츠 도나트1913–1986같은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복권되어 개혁 경제학자가 되었다.
반대 · 저항2
대상 · 피해3
목격 · 증언5
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의 자발적 출현을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으로 해석하고 『현실을 직시하며』(1958)를 집필했다.
중앙노동자평의회 전 구성원벌라주 너지1920–2003평의회 결성과 저항을 기록한 1차 증언을 망명지에서 출판했다.
혁명 연구의 선도적 역사가처버 벡시1957–1956년 혁명이 냉전 교착을 고착시켰다는 논지로 사건의 결론부를 뒷받침했다.
사후 추산을 남긴 외무장관게저 절젠스키1941–현재그는 혁명 후 처형된 인원을 350명으로 추산했다.
당보 특파원피터 프라이어1927–2006검열되지 않은 부다페스트 보도로 당 노선에 맞서고 사직했다.
관련 용어
출처: Csaba Békés et al., The 1956 Hungarian Revolution: A History in DocumentsEncyclopaedia Britannica: Hungarian Revolution of 1956
← 역사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