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개조로
「여러 계급의 연합」을 약속한 새 국가는 왜 7년 만에 사유재산을 없앴는가?
건국 초기 공산당은 토지개혁·반혁명 진압·항미원조·삼반오반으로 권력을 다졌고, 1950년 중소조약과 소련 원조로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1953년 「과도기 총노선」은 신민주주의를 사실상 끝냈고, 1955~1956년 농업 집단화와 상공업 공사합영으로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은 건국 후 첫 지도부 숙청이었다.
공동강령: 연합정부의 약속
1949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는 공산당 외에 민주동맹·국민당혁명위원회 등 민주당파와 무당파 인사가 참여했다. 회의가 채택한 공동강령은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인민민주독재」를 국가 형태로 삼되 민족자본의 보호, 사유재산 존중, 다당 협력을 약속했다. 쑹칭링 등 비공산당 인사가 부주석이 되었고 마오는 「인민민주독재론」에서 이 연합의 계급적 한계를 명시했다. 근거 1 · 근거 2
새 정부의 첫 과제는 초인플레이션 수습과 경제 복구였다. 천윈은 국영 무역기업을 통해 곡물·면화를 장악하고 통화를 통일해 1950년 봄 물가를 안정시켰다. 1952년까지 공업 생산은 전전 최고 수준을 회복했다. 이 시기의 혼합경제는 국영 부문이 주도하되 민간 상공업과 시장이 공존하는 것이었고, 마오는 신민주주의 단계가 「상당히 긴 기간」 계속될 것이라 말했다. 근거 3 · 근거 4
모스크바의 두 달
1949년 12월 마오는 스탈린의 70세 생일에 맞춰 첫 외국 방문으로 모스크바에 갔다. 스탈린은 1945년 국민정부와 맺은 조약을 유지하려 했고 마오는 몇 주 동안 별장에서 사실상 방치되었다. 저우언라이가 합류한 1월에야 협상이 시작되어 2월 14일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서명되었다. 소련은 3억 달러의 차관과 1952년까지의 창춘철도·뤼순 반환을 약속했으나 몽골 독립 승인과 신장·만주의 특권을 요구했다. 근거 5 · 근거 6
「일변도(一邊倒)」 — 소련 쪽에 선다 — 는 마오가 1949년 6월 이미 선언한 노선이었다. 조약은 냉전에서 중국의 자리를 정했고, 1953년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의 156개 핵심 사업에 소련의 설비·기술자·차관이 투입되었다. 안산 제철소와 창춘 자동차 공장 같은 동북의 공업 기지가 이렇게 세워졌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우에 대한 마오의 불만은 뒤에 중소 분열의 개인적 배경이 되었다. 근거 7) · 근거 3
토지개혁과 반혁명 진압
1950년 6월 토지개혁법은 새로 해방된 남방과 서부 농촌에서 지주 토지의 몰수와 분배를 명령했다. 공작대가 마을에 들어가 계급을 구분하고 「소고」 집회와 「투쟁대회」를 열었으며, 지주는 처형·투옥되거나 「감독 노동」에 놓였다. 1952년 말까지 3억 농민이 4,700만 헥타르를 분배받았고, 처형된 지주는 100만~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개혁은 향촌의 옛 권력을 없애고 당의 조직을 마을 단위까지 뿌리내리게 했다. 근거 8) · 근거 3
한국전쟁 참전과 함께 1950년 10월 시작된 반혁명 진압운동은 국민당 잔당·비밀결사·「토비」를 겨냥했다. 마오는 처형 비율의 「할당」을 지방에 내려보냈고 1951년 봄 대중집회에서의 공개 처형이 절정에 달했다. 공식 집계로 71만 명이 처형되었으며, 사상개조 운동은 지식인에게 자아비판과 미국 「숭배」의 청산을 요구했다. 전쟁은 이 모든 운동에 「보가위국」의 명분을 주었다. 근거 9 · 근거 10
삼반·오반: 자본가의 종속
1951년 말 시작된 삼반 운동은 간부의 부패·낭비·관료주의를, 1952년의 오반 운동은 자본가의 뇌물·탈세·국가재산 절취·부실공사·경제정보 절취를 겨냥했다. 노동자와 점원이 고용주를 고발하는 「호랑이 사냥」 집회가 상하이·톈진의 상공업계를 휩쓸었고, 벌금과 추징으로 기업 자산이 국가로 넘어갔다. 상하이에서만 자살이 수백 건에 이르렀다. 근거 11 · 근거 3
오반 운동은 공동강령이 약속한 민족자본의 보호를 사실상 철회했다. 자본가는 「법을 지키는 부류」와 「위법 부류」로 분류되었고, 국가는 원자재 공급과 판매를 통제해 민간 기업을 계획에 묶었다. 1953년 마오가 「과도기 총노선」에서 「10~15년 안에 사회주의 공업화와 개조를 완성한다」고 선언했을 때, 신민주주의는 사실상 끝나 있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는 더 완만한 이행을 생각했으나 마오를 따랐다. 근거 11 · 근거 12
가오강·라오수스 사건
동북의 「왕」으로 불린 가오강은 1952년 베이징으로 옮겨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마오가 류사오치·저우언라이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표하자 이를 후계 구도의 신호로 읽었다. 그는 조직부장 라오수스와 함께 원로들을 상대로 류사오치를 「백구(白區)」 출신으로 깎아내리며 지지를 모았으나, 덩샤오핑과 천윈이 마오에게 보고했다. 1953년 12월 마오는 「두 개의 사령부」를 경고했다. 근거 13 · 근거 14
1954년 2월 4중전회는 두 사람을 「반당연맹」으로 비판했고 가오강은 8월 자살했으며 라오수스는 1955년 체포되어 1975년 옥사했다. 사건은 소련과의 관계도 건드렸다. 가오강은 소련 고문과 가까웠고, 뒤에 흐루쇼프는 그가 스탈린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회고했다. 건국 후 첫 지도부 숙청은 「당내 두 노선」이라는 틀이 마오의 손에서 언제든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근거 13 · 근거 3
「사회주의 고조」: 집단화와 공사합영
토지개혁 뒤 농촌은 호조조 → 초급 합작사(토지 출자, 배당) → 고급 합작사(집단 소유)의 단계를 밟도록 계획되었다. 1955년 여름 마오는 「농업 합작화 문제에 관하여」에서 속도를 늦추려는 간부를 「전족한 여인」에 비유하며 고조를 명령했고, 1956년 말 농가의 96%가 고급 합작사에 들어갔다. 소련이 5년 걸린 집단화를 중국은 1년 반 만에 완료했으며, 곡물 통일구매판매(1953)와 호적제(1958)가 농민을 토지에 묶었다. 근거 3 · 근거 7)
도시에서는 1955년 말부터 몇 달 만에 모든 민간 상공업이 「공사합영」으로 전환되었다. 자본가는 자산 평가액의 연 5% 「정식(定息)」을 10년간 받는 조건으로 소유권을 넘겼고,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는 북과 징을 울리며 전환을 「신청」하는 행진이 조직되었다. 1956년 9월 제8차 당대회는 개조의 완성을 선언하고 「대규모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했으나, 마오는 곧 이 판단을 뒤집게 된다. 근거 3 · 근거 11
1956년: 모델의 완성과 첫 균열
제1차 5개년 계획은 연 15% 이상의 공업 성장을 달성했고 헌법(1954)·국가기구·계획 체계가 소련을 본떠 갖추어졌다. 그러나 1956년 2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은 개인숭배와 소련 모델 자체를 문제 삼았고, 4월 마오는 「10대 관계론」에서 중공업 편중과 중앙집권을 완화하는 「중국의 길」을 말했다. 제8차 당대회가 당 규약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뺀 것은 이 분위기의 표현이었다. 근거 7) · 근거 15
개조의 속도는 문제를 남겼다. 고급 합작사에서 농민의 노동 의욕은 떨어졌고 1956~1957년 일부 지역에서 탈퇴 요구와 소요가 있었으며, 헝가리 혁명은 지도부에 충격을 주었다. 마오는 이 긴장을 「인민 내부 모순」으로 다루겠다며 지식인에게 비판을 권했고, 그 결과가 백화제방과 반우파 투쟁이었다. 1956년의 자신감과 불안이 함께 다음 10년의 급진화를 준비했다. 근거 16 · 근거 17
결과
1956년 중국은 소련형 계획경제와 일당 국가를 갖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급속한 개조의 성공은 마오에게 자신감을 주어 소련 모델을 넘어서는 「중국의 길」 — 대약진 — 을 구상하게 했다.
연표와 지도
- 1949.09정치협상회의와 공동강령
공산당·민주당파·무당파가 참여한 회의가 임시헌법 구실의 공동강령을 채택했다.
- 11949.12–1950.02마오의 모스크바 방문과 중소조약
두 달의 협상 끝에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과 3억 달러 차관에 합의했다.
- 1950.06토지개혁법 공포
전국 농촌에서 지주 토지 몰수와 분배가 시작되어 1952년 말 완료되었다.
- 21950.10반혁명 진압운동 · 한국전쟁 참전
10월 10일 반혁명 진압 지시가 내려졌고 19일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 31951.12–1952.10삼반·오반 운동
간부의 부패와 자본가의 「5독」을 겨냥한 운동으로 민간 상공업이 국가에 종속되었다.
- 41953제1차 5개년 계획 · 과도기 총노선
소련 원조 156개 사업으로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고, 마오는 신민주주의 대신 사회주의 이행을 선언했다.
- 1954.02가오강·라오수스 사건
4중전회가 두 사람을 「반당연맹」으로 비판했고 가오강은 8월 자살했다.
- 1954.09헌법 제정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첫 헌법이 채택되고 마오가 국가주석, 류사오치가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되었다.
- 1955.07「농업 합작화 문제에 관하여」
마오가 점진론자를 「전족한 여인」이라 비판하며 집단화를 가속했고 1년 만에 농가 90%가 합작사에 들어갔다.
- 51956.01상공업 공사합영 완료
베이징·상하이 등에서 자본가들이 「북과 징을 울리며」 기업의 국가 편입을 신청했다.
- 1956.09제8차 당대회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을 선언하고 주요 모순을 「선진적 제도와 낙후한 생산력」으로 규정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을 당 규약에서 뺐다.
관련 인물 13명
주도 · 집행3
지도부3
참여4
대상 · 피해2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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