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정치비서 겸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중앙문혁소조 조장에서 1970년 실각
「문화대혁명은 광기의 시대였고, 그때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1988년 석방된 뒤 천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사람들이 내 비극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푸젠 출신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배운 뒤 1937년 옌안에서 마오의 정치비서가 되어 마오의 저작을 다듬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건국 후 『홍기』 편집장과 선전 분야 책임자로 대약진 운동의 이론을 썼고,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1970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 쪽에 서 국가주석직 문제로 마오의 분노를 사 실각했고, 1981년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에서 18년형을 받았다. 1989년 사망했다.
다른 이름: 진백달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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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73
중국공산당대표
이념·선전- 『홍기』 편집장·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
- 마오쩌둥의 정치비서·중앙당교 교원1937–1949
- 중공 중앙 선전부 부부장·정치연구실 주임1949–
- 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1966–1970정치·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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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중국과학원 부원장
학술·연구 -
1962–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경제·재정·계획
경력 연표
- 1927중국공산당 입당
- 1927–1931모스크바 중산대학 유학
- 1937–1949옌안 중앙당교 교원, 마오쩌둥의 정치비서
- 1949중공 중앙 선전부 부부장, 중국과학원 부원장
- 1958–1966『홍기』 편집장
- 1962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 1966–1970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
- 1966–1970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 1970.09루산 회의(9기 2중전회) 뒤 심사·구금
- 1973제10차 당대회에서 당적 박탈
- 1981.01특별법정에서 징역 18년 선고
관련 역사 사건
지둥 사건과 특별법정의 책임 심리
1967년 12월 26일 천보다는 탕산에서 중공 지둥 당 조직을 두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한 당일 수 있고, 실제로는 국민당과 배신자가 여기서 작용했을 수 있다」고 말하며 탕산시 당서기 양위안과 시장 바이윈 등을 심사 대상으로 지목했다. 특별법정 판결문은 그가 1966년 「온갖 우귀사신을 쓸어버리자」는 구호를 내걸어 간부와 대중에 대한 박해와 진압을 선동했고, 1967년 7월 장칭·캉성과 함께 류샤오치에 대한 신체 박해를 결정해 그의 행동의 자유를 빼앗았으며, 루딩이를 반혁명 분자·배신자·내부 적대분자로 거듭 무고했다고 적었다. 지둥 연설에 대해서는 「천보다의 선동으로 지둥 사건이 중대한 결과를 낳아 대량의 간부와 대중이 박해를 받았다」고 인정했다.
지둥 사건의 규모는 탕산 지역 당사 연구자들의 정리로 남아 있다. 이 지역에서 박해받은 간부와 대중은 8만 4천여 명, 그중 2,955명이 죽고 700여 명이 장애를 입었다. 지둥에서 활동한 간부 1,604명이 심사 대상이 되어 737명에게 배신자·특무·국민당·주자파라는 죄명이 붙었고, 지하당원 662명이 심사 대상이 되어 282명이 죄명을 뒤집어썼다. 사후 특별법정에서도 지둥 사건은 그에게 적용된 혐의 가운데 하나였다. 검찰 측은 그가 지둥 지하당 사건을 만들어 8만여 간부·대중이 박해받고 그중 3천 명 가까이가 죽었다고 주장했다.
1980년 11월 29일 법정에서 천보다는 처음에 「탕산 문제는 나는 알지도 못했고 관여한 적도 없다」고 부인했으나, 13년 전 자신의 녹음이 재생되자 류샤오치·루딩이·지둥 사건에 대해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인정했다. 변호인은 그가 1970년 루산 회의 직후 신체의 자유를 잃었으므로 그 뒤의 범죄에는 책임이 없고, 지둥 사건의 결과도 그의 발언 하나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고 변론했다. 법정은 그를 반혁명 집단 적극 가담, 정부 전복 음모, 반혁명 선전 선동, 무고·함정의 죄로 인정해 징역 18년과 정치적 권리 5년 박탈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