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명」을 가장해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운 폴란드 장군
「1920년 10월 9일, 빌뉴스는 폴란드 장군 젤리고프스키가 아니라 리투아니아인 젤리고프스키가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군 출신 폴란드 장군으로 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해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이 사건은 1938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교를 막았다. 1947년 런던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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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러시아 제국군 보병 장교 임관
- 1917–1918러시아 내 폴란드군 조직, 제4폴란드소총병사단장
- 1919귀국 후 폴란드군 제10보병사단장
- 1920리투아니아-벨라루스 전선 사령관, 10월 「항명」으로 빌뉴스 점령
- 1920–1921중부 리투아니아 수장
- 1925군사부 장관
- 1935–1939폴란드 하원 의원
- 1940–1947런던 망명정부 국민평의회 위원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빌노 근교의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87년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처형된 바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다.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로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내고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단을 이끌었으나, 그에게 사회주의는 갈수록 독립의 수단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세워 러시아와 싸웠고, 1918년 11월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를 아우르는 연방으로 러시아를 밀어낸다는 구상 아래 1920년 키예프로 진공했다가 바르샤바 앞까지 몰렸으나, 8월의 반격으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리가 조약의 국경을 얻어냈다. 192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26년 5월 쿠데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폴란드를 통치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35년 5월 병사했다. 소비에트의 선전과 수사 문서에서 그는 폴란드 반동의 화신이자 「폴란드 군사조직」의 창설자로 살아남아,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근거 서사에까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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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7–1892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 연루로 시베리아 유형
- 1892–1908폴란드 사회당(PPS) 지도자, 기관지 『로보트니크』 발행인
- 1908–1914전투단과 소총병 연맹 조직, 갈리치아에서 군사 간부 양성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장(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
- 1917–1918독일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로 마그데부르크 요새 수감
- 1918.11–1922.12국가원수(나첼니크 파인스트바)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26.55월 쿠데타로 재집권
- 1926–1935사나차 체제의 실권자, 국방장관 겸 두 차례 총리
- 1932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민족국가 구상을 밀어붙인 엔데치아 이론가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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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1893사회주의 운동가, 노동자 교육·비합법 노동조직 활동
- 1906–1914국가민주당 지도자, 러시아 제국 두마 폴란드 문제 자문
- 1919–1923폴란드 하원 의원, 국민민주 진영 원내·당 지도자
- 1920–1921민스크·리가 평화협상 폴란드 대표, 민족국가 노선 주도
- 1923–1925종교·공교육 장관
- 1942–1944폴란드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의장
- 1945–1947국가민족평의회 부의장
리가 평화를 설계한 농민운동 외교가
협상이 교착에 빠지자 돔프스키는 상대 수석대표 아돌프 이오페에게 일대일 비공개 교섭을 직접 제안했고, 그것이 막힌 국경 문제를 풀어 예비조약 체결로 이끌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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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갈리치아 폴란드 농민당 입당
- 1907–1913빈 의회 담당 기자·『쿠리에르 르보프스키』 공동편집자
- 1913–1918폴란드 군사·민족위원회 활동, 폴란드 군단 복무
- 1919–1922제헌의회 의원, 농업위원회 위원
- 1920–1921폴란드 외무차관, 민스크·리가 평화협상 대표단 수석대표
- 1921외무부장, 비스와프 비토스 내각
- 1923–1931농민정당 지도자, 세임 부의장
- 1931『리가 평화』 회고록 출간, 바르샤바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