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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시민권 54 · 민족·국가 92 · 사건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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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54전체보기

루치안 젤리고프스키

Lucjan Żeligowski
외국 정치가 폴란드 폴란드 1865–1947 ○ 사망

「항명」을 가장해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운 폴란드 장군

「1920년 10월 9일, 빌뉴스는 폴란드 장군 젤리고프스키가 아니라 리투아니아인 젤리고프스키가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군 출신 폴란드 장군으로 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해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이 사건은 1938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교를 막았다. 1947년 런던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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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러시아 제국군 보병 장교 임관
  • 1917–1918러시아 내 폴란드군 조직, 제4폴란드소총병사단장
  • 1919귀국 후 폴란드군 제10보병사단장
  • 1920리투아니아-벨라루스 전선 사령관, 10월 「항명」으로 빌뉴스 점령
  • 1920–1921중부 리투아니아 수장
  • 1925군사부 장관
  • 1935–1939폴란드 하원 의원
  • 1940–1947런던 망명정부 국민평의회 위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반혁명 세력 폴란드 폴란드 1867–1935 ○ 병사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빌노 근교의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87년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처형된 바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다.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로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내고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단을 이끌었으나, 그에게 사회주의는 갈수록 독립의 수단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세워 러시아와 싸웠고, 1918년 11월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를 아우르는 연방으로 러시아를 밀어낸다는 구상 아래 1920년 키예프로 진공했다가 바르샤바 앞까지 몰렸으나, 8월의 반격으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리가 조약의 국경을 얻어냈다. 192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26년 5월 쿠데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폴란드를 통치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35년 5월 병사했다. 소비에트의 선전과 수사 문서에서 그는 폴란드 반동의 화신이자 「폴란드 군사조직」의 창설자로 살아남아,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근거 서사에까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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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2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 연루로 시베리아 유형
  • 1892–1908폴란드 사회당(PPS) 지도자, 기관지 『로보트니크』 발행인
  • 1908–1914전투단과 소총병 연맹 조직, 갈리치아에서 군사 간부 양성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장(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
  • 1917–1918독일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로 마그데부르크 요새 수감
  • 1918.11–1922.12국가원수(나첼니크 파인스트바)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26.55월 쿠데타로 재집권
  • 1926–1935사나차 체제의 실권자, 국방장관 겸 두 차례 총리
  • 1932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

Stanisław Grabski
외국 정치가 폴란드 폴란드인 1871–1949 ○ 자연사

민족국가 구상을 밀어붙인 엔데치아 이론가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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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3사회주의 운동가, 노동자 교육·비합법 노동조직 활동
  • 1906–1914국가민주당 지도자, 러시아 제국 두마 폴란드 문제 자문
  • 1919–1923폴란드 하원 의원, 국민민주 진영 원내·당 지도자
  • 1920–1921민스크·리가 평화협상 폴란드 대표, 민족국가 노선 주도
  • 1923–1925종교·공교육 장관
  • 1942–1944폴란드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의장
  • 1945–1947국가민족평의회 부의장

얀 돔프스키

Jan Dąbski
외국 정치가 폴란드 폴란드인 1880–1931 ○ 자연사

리가 평화를 설계한 농민운동 외교가

협상이 교착에 빠지자 돔프스키는 상대 수석대표 아돌프 이오페에게 일대일 비공개 교섭을 직접 제안했고, 그것이 막힌 국경 문제를 풀어 예비조약 체결로 이끌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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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갈리치아 폴란드 농민당 입당
  • 1907–1913빈 의회 담당 기자·『쿠리에르 르보프스키』 공동편집자
  • 1913–1918폴란드 군사·민족위원회 활동, 폴란드 군단 복무
  • 1919–1922제헌의회 의원, 농업위원회 위원
  • 1920–1921폴란드 외무차관, 민스크·리가 평화협상 대표단 수석대표
  • 1921외무부장, 비스와프 비토스 내각
  • 1923–1931농민정당 지도자, 세임 부의장
  • 1931『리가 평화』 회고록 출간, 바르샤바에서 사망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92전체보기

펠릭스 야코블레비치 콘

Феликс Яковлевич Кон
비소련 혁명가 소련 폴란드 1864–1941 ○ 자연사

바르샤바 소년 애국자에서 코민테른의 노혁명가로: 봉인열차와 함께 돌아온 폴란드인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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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루치안 젤리고프스키

Lucjan Żeligowski
외국 정치가 폴란드 폴란드 1865–1947 ○ 사망

「항명」을 가장해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운 폴란드 장군

「1920년 10월 9일, 빌뉴스는 폴란드 장군 젤리고프스키가 아니라 리투아니아인 젤리고프스키가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군 출신 폴란드 장군으로 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해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이 사건은 1938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교를 막았다. 1947년 런던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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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러시아 제국군 보병 장교 임관
  • 1917–1918러시아 내 폴란드군 조직, 제4폴란드소총병사단장
  • 1919귀국 후 폴란드군 제10보병사단장
  • 1920리투아니아-벨라루스 전선 사령관, 10월 「항명」으로 빌뉴스 점령
  • 1920–1921중부 리투아니아 수장
  • 1925군사부 장관
  • 1935–1939폴란드 하원 의원
  • 1940–1947런던 망명정부 국민평의회 위원
비소련 혁명가 소비에트 폴란드인 1866–1925 ○ 병사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과 러시아 혁명을 모두 거친 국제주의자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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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폴란드 노동자동맹 공동 창립
  • 1893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 공동 창립
  • 1896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 1906–1907SDKPiL 대표로 RSDLP 런던 당대회 참석, 중앙위 후보위원
  • 1914–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독일에서 반전 운동으로 투옥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TKRP) 위원장
  • 1922–1925MOPR 중앙위 초대 의장, KUNMZ 초대 총장

레오 요기헤스

Leo Jogiches
비소련 혁명가 독일 폴란드 1867–1919 ✕ 살해

혁명의 지하 조직가. 언제나 뒤에서, 마지막엔 맨 앞에서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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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빌뉴스 최초의 지하 사회주의 연구 서클 창립
  • 1890징집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 룩셈부르크와 만남
  • 1892사회민주주의 도서관 출판사 설립
  • 1893룩셈부르크와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 훗날 SDKPiL) 공동 창립
  • 1905–1906바르샤바에서 SDKPiL 중앙위 지도 — 체포, 8년 중노동형, 탈옥
  • 1907RSDLP 런던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 선출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지하 조직 총괄 — 신문 《스파르타쿠스》 발행 지휘
  • 1919.1–1919.3KPD 지도부 장악,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조사 주도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14전체보기

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와 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19–192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1939.08–1940.08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1941–1945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소련은 개전 첫 해의 파국적 손실을 딛고 공업 기반을 통째로 동쪽으로 옮겨 재무장했으며,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전세를 뒤집고 1945년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치 독일을 무너뜨렸다. 독일 국방군 지상 전투력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소모되었고, 파시즘 격파의 압도적 부담을 짊어진 것은 다민족 소비에트 인민이었다.

1944.08–10

바르샤바 봉기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독일 점령에 맞서 폴란드 국내군이 수도를 해방하고 소련군보다 먼저 폴란드의 주권을 드러내려 한 무장 봉기다. 독일군의 철수와 소련군의 접근, 런던 망명정부와 소련 사이의 국경 및 국가권력 분쟁이 결정을 재촉했다. 국내군은 도시 일부와 행정망을 장악했지만 독일군의 증원과 민간인 학살에 밀렸고, 서방의 공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소련군은 비스와강 동쪽에 멈춰 있었으며 9월에야 제한적인 지원을 했다. 63일 뒤 국내군은 항복했고, 독일군은 주민을 추방한 뒤 바르샤바를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4–1948

폴란드: 루블린 위원회에서 통일노동자당까지

1944년 7월 소련이 후원한 폴란드민족해방위원회가 루블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에는 런던 망명정부와 루블린의 두 정부가 생겼다. 얄타 합의에 따라 1945년 6월 국민통일임시정부가 세워져 미코와이치크가 부총리로 귀국했고, 미국과 영국이 이를 승인했다.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는 연립의 여러 당이 함께 통과시켰다. 공안부와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국내군 후신의 지하조직을 상대했고, 1945년과 1947년 두 차례 사면이 있었다. 1946년 6월 국민투표와 1947년 1월 총선의 공식 결과는 정부 진영의 압승이었으나, 1989년 이후 공개된 집계는 다른 수치를 보여 준다. 미코와이치크는 1947년 10월 폴란드를 떠났다. 고무우카의 「폴란드의 길」은 1948년 9월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비판되어 그가 해임되었고, 12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통합해 폴란드통일노동자당이 세워졌다.

1955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나토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나토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1956.06

포즈난 봉기

포즈난 봉기는 1956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업도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발단은 포즈난 최대 공장인 ZISPO(옛 체겔스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바르샤바 중앙정부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세금 환급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아침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곧 10만 명 규모의 시위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경제적 요구를 내걸었으나 당국이 대화를 거부하면서 시위대는 당 위원회, 보안국 청사, 감옥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국방장관이 파견한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장군이 전차 400여 대와 병력 1만 명을 동원해 30일까지 봉기를 진압했으며, 최소 5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1968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브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1980–1981

폴란드 연대노조와 계엄

1980년 여름, 식료품 가격 인상에 맞선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은 21개 요구를 내건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했고, 8월 31일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동구권 최초의 공인 독립노조인 '연대'(Solidarność)가 탄생했다. 1,000만 명이 가입한 연대노조는 16개월 동안 단순한 노동조합을 넘어 자치공화국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되었으나, 소련의 압박과 경제 파탄 속에서 당 제1서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1981년 12월 13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평의회를 세워 연대를 불법화했다. 수만 명의 군경이 통신망을 차단하고 지도부를 구금했으며, 부이크 탄광에서는 특수진압대가 파업 광부 9명을 사살했다.

1989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일당 체제가 잇따라 무너졌다. 헝가리는 국경을 열었고, 폴란드는 원탁회의로 자유선거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됐다. 결정적 차이는 고르바초프가 1956년·1968년과 달리 무력 개입을 포기한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