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빌노 근교의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87년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처형된 바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다.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로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내고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단을 이끌었으나, 그에게 사회주의는 갈수록 독립의 수단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세워 러시아와 싸웠고, 1918년 11월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를 아우르는 연방으로 러시아를 밀어낸다는 구상 아래 1920년 키예프로 진공했다가 바르샤바 앞까지 몰렸으나, 8월의 반격으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리가 조약의 국경을 얻어냈다. 192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26년 5월 쿠데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폴란드를 통치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35년 5월 병사했다. 소비에트의 선전과 수사 문서에서 그는 폴란드 반동의 화신이자 「폴란드 군사조직」의 창설자로 살아남아,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근거 서사에까지 등장한다.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그는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선언했다.
알렉산데르 자바츠키는 노동자 출신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들어가 전후 폴란드의 당·군·국가기구를 구축한 지도자였다. 그는 소련에서 조직된 폴란드 군대의 정치사업과 국내 권력 재편을 잇는 역할을 맡았고, 실레지아 행정 책임자로서 전후 복구와 주민 보호 문제에도 관여했다. 국가평의회 의장으로서 비에루트 사후 당 지도부 경쟁에서 오하프와 맞선 유력 후보였지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패했으며, 이후에도 체제의 보수적 안정 노선을 대표했다.
그는 당국이 노동자들을 ‘훌리건’으로 갈라 부르는 논리를 거부하고, 국가의 폭력이 폭발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법정에서 지적했다.
스타니스와프 헤이모프스키는 전후 폴란드에서 정치적 피고인과 사회적 약자를 변호한 법률가였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참가자들의 변호를 맡아, 사건을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국가 정책과 보안기관의 폭력이 낳은 사회적 충돌로 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론은 강압 수사와 당국의 ‘훌리건’ 낙인을 법정에서 다투며 노동자들의 존엄과 법적 권리를 지켰다. 이후 그는 감시와 언론 공세, 거액의 벌금, 변호사 업무 정지로 보복을 받았다.
스테판 비신스키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사회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와 민족 정체성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국가와의 공개 대립만이 아니라 1950년 협정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신자 공동체와 교회 제도의 활동 공간을 보존하려 했다. 1953년 체포되어 1956년까지 억류되었지만, 석방 뒤에는 교회의 장기적 조직력과 도덕적 권위를 재건했고, 기에레크 시기에는 국가와 공존하면서도 독립된 사회 세력으로 남았다. 1980년 연대노조가 출범하자 정부와 파업 노동자 모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야쿠프 베르만은 전후 폴란드에서 이념·문화 정책과 국가보안기구를 감독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힐라리 민츠와 함께 1948년 이후 정권의 핵심 삼두체제를 이루었고,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된 체제를 운영했다. 1956년 비에루트 사망 뒤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이듬해 당에서 제명되어 스탈린주의 청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 대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노동자 출신으로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나치 점령기에는 지하당을 이끌며 인민군과 민족평의회를 조직했다. 1948년 '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되어 1951년 체포·투옥되었으나, 1956년 노동자·지식인의 봉기 속에 제1서기로 복귀해 집단농장 해체·노동자평의회·문화 자유화를 추진했다. 흐루쇼프의 개입 위협을 협상으로 막아내며 폴란드의 주권 공간을 일시 확보했지만, 1968년 반지식인·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연합은 붕괴했고, 1970년 가격 인상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 끝에 실각했다.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1964년 그는 유럽안보회의가 국가 안보를 보장하고, 그 장애물이 제거되면 유럽 국가들의 경제 협력이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전후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훗날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항의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1956년 6월 27일, 그는 포즈난 ZISPO 노동자들 앞에서 전날 바르샤바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회했다.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기계공학 배경 기술관료로 1955년 기계공업부 장관에 올랐다. 1956년 6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포즈난 ZISPO 노동자 대표단에게 임금 인상과 체납 세금의 환급을 약속했다가 이튿날 포즈난 현장에서 이를 번복했고, 이 파기가 6월 28일 봉기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후 계획경제 기구에서 계속 근무하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업 관료로 은퇴했다.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우리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굵은 선으로 가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지식인으로 1958년 독립 월간지 《비엥치》를 창간·주재하고,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즈나크' 가톨릭 의원단 소속으로 의회에서 양심적 반대를 실천한 폴란드의 정치인이다. 1980년 그단스크 파업에서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고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엄령 아래 1년간 억류된 뒤 1989년 원탁회의 협상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1989년 8월 24일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로 취임해 발체로비치 계획을 통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굵은 선'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바웬사에 패배한 뒤 민주연합을 창당해 이끌었다.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후일 회고했다: "나는 분노한 나머지 가구용 칼을 들고 스피커 기둥에 올라가 전선을 끊으려 했다."
스타니스와프 마티야는 포즈난 체겔스키(ZISPO) 공장의 목수로, 동료들의 신임을 얻어 노동자 권리 수호의 대변인이 된 인물이다. 1956년 6월 바르샤바 협상에 나선 27인 대표단의 수장으로서 임금 인상과 세금 환급 약속을 받아 냈으나, 정부가 이를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봉기의 비공식 지도자로 떠올랐다. 진압 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겪고 공장에서 해고당했지만, 1980년 연대노조의 명예 회원이 되어 1981년 포즈난 십자가 추모비를 제막한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마리안 유르치크는 슈체친 조선소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80년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와 협상한 지도자였다. 그는 8월 30일 슈체친 협정에 서명했지만, 단결권 보장을 얻지 못한 채 경제적 양보를 받아들였고, 하루 뒤 그단스크에서 더 폭넓은 합의가 성립하면서 두 지역의 차이가 선명해졌다. 계엄 뒤에는 수감과 재판을 겪었으며, 훗날 레흐 바웬사 진영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노동조합 노선을 이어 갔다.
1981년 12월 13일 그의 체포 소식이 우제크 광산에 전해지자 광부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얀 루드비차크는 광부이자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우제크 광산 사업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의 체포는 광부들이 계엄령에 맞서 파업하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석방 뒤에도 그는 강등과 감시를 견디며 광산 안에서 지하 출판물을 배포했고, 1989년 연대 재건을 준비했다.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폴란드의 농민이자 반체제 정치인으로, 독립 농민노조의 조직화와 민주화 이후 농민정치의 재편을 잇는 인물이었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를 이끌며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했고, 3월 19일 공권력의 진압으로 구타당했다.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이후 의회와 폴란드 농민당을 통해 농촌 기반의 반공 야권을 제도정치로 옮겼다.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을 시작한 그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향해 기업간파업위원회에 합류했다.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전자공학자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1970년대 후반 그단스크의 독립 노동운동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해안 자유노조를 공동 창립하고 지하 출판을 이끌며 국가 통제 밖의 노동자 조직을 준비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에서 그단스크 조선소로 온 그는 기업간파업위원회 지도부에 합류해 21개 요구안을 공동 작성하고 연대의 초기 지도자가 되었다. 계엄령 뒤 투옥과 탄압을 겪은 그는 레흐 바웬사의 협상 노선과 결별하고 원탁회의 타협에 반대한 경쟁적 야당 흐름을 대표했다.
얀 룰레프스키는 폴란드의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비드고시치 지역 자유노조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농민들의 독자적 노동조합 등록 요구를 연대의 의제로 받아들였고, 3월 19일 지방 국민평의회 회의장에서 민병대에게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자유노조가 전국 경고파업을 조직하고 계엄 선포 전의 긴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계엄기에 internment를 겪었으며, 민주화 뒤에는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예지 보로프차크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운동의 문을 연 젊은 노동자였다. 그는 보그단 펠스키와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함께 8월 14일 파업을 시작했고,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과 임금 인상, 1970년 희생자 추모비를 요구했다. 계엄령 뒤에도 저항을 이어 가다 수감과 해고를 겪었으며, 1989년 조선소로 돌아왔다.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80년 8월 15일, 그녀가 발티츠카 오페라 인근에서 전차를 세우자 그단스크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됐다.
헨리카 크지보노스는 그단스크의 전차 운전사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조선소 안팎의 노동자 행동을 연결한 인물이다. 1980년 8월 15일 전차를 세워 대중교통 파업을 촉발했고, 그 소식은 다른 사업장으로 퍼져 도시 전체의 연대 행동을 넓혔다. 그녀는 사업장 간 파업위원회에서 대중교통 노동자를 대표하고 8월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후 계엄 아래에서는 수감자 지원과 지하 출판물 배포에 참여했다. 훗날 가정위탁시설을 운영하고 국회의원이 된 경력은 거리의 노동자 행동과 돌봄·제도 정치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