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망명을 관통한 폴란드 연락장교
1944년 7월 29일 그는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대규모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전했지만, 봉기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얀 노바크예지오란스키는 폴란드 국내군과 런던 망명정부를 잇던 연락장교이자 언론인이었다. 1944년 7월 런던에서 귀환해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지원이 제한적임을 알렸지만 봉기의 결정을 막지 못했고, 봉기 중에는 라디오 방송을 맡았다. 전후에는 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을 이끌며 망명과 반공 정치의 목소리를 냈다. 1989년 귀국한 뒤에도 폴란드의 서방 통합을 주장했다.
다른 이름: 지지스와프 예지오란스키 · 얀 노바크 · 쿠리에르 즈 바르샤비
주요 활동과 소속
- 1952–1976 문학·예술 · 자유유럽방송
경력 연표
- 1936포즈난대학교 경제학 조교
- 1941–1943폴란드 국내군 정보·선전망 활동
- 1943–1944런던 망명정부와 국내군 사이의 연락장교
- 1944.07–10바르샤바 봉기에서 라디오 비츠카비차 방송원·편집자
- 1948–1951BBC 폴란드어 방송 편집진
- 1951–1976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 초대 국장
- 1979–1996미국 폴란드계 미국인회의 전국 사무국장
- 1989–2005귀국 후 폴란드의 대서방 통합을 옹호한 공적 논객
관련 역사 사건
연락장교 시절의 밀파 임무와 유대인 학살 소식 전달
노바크예지오란스키는 1940년대 초부터 국내군 정보·선전망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부터 런던으로 파견되는 밀사 임무를 맡았다. 첫 임무는 1943년 4월 스웨덴행이었다. 그는 화물선에 숨어 단속을 피해 스톡홀름에 도착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국내군 총사령부의 밀사로 다시 스웨덴을 거쳐 12월에 영국에 도착해 폴란드 지하국가의 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전달했다. 런던 체류 중 그는 총사령관과 미코와이치크 총리, 라치키에비치 대통령, 처칠을 만나 이야기했고 영국 하원에서도 발언했다.
그의 임무에서 중요한 부분은 유대인 문제의 소식이었다. 그는 서방 정부에 독일과 소련 점령 아래 폴란드의 처지를 알렸고,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 관해 서방에 처음 알린 인물로 기록되었다. 사망 기사들은 그가 유대인 말살 소식을 런던에 전한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밀파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바르샤바와 런던 사이를 오가며 양방향의 비밀 문서를 운반했다.
1944년 7월 25·26일 밤에는 브린디시 인근에서 출발한 항공 작전으로 폴란드에 낙하했는데, 같은 비행기로 비밀요원 여러 명이 함께 이동했고, 목적 가운데 하나는 국내군 정보부가 확보한 V2 로켓 부품과 관련 정보를 서방으로 빼내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대규모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했지만 봉기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봉기 중에는 영어 방송을 편집했고, 봉기 직전에는 야드비가 볼스카와 결혼했다. 봉기 말기인 1944년 9월 24일 국내군 총사령관의 지시로 부인과 함께 봉기의 기록 문서를 가지고 런던으로 향했으며, 1945년 1월에 런던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