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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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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당 지도 인물 286명

장폴 마라

Jean-Paul Marat

『인민의 벗』으로 대중 급진주의를 대변한 언론인

의사·과학 저술가로 활동하다 1789년 9월 『인민의 벗』을 창간했다. 1792년 9월 국민공회 의원이 됐고 1793년 4월 혁명재판소 무죄 판결 뒤 지롱드파 축출에 참여했다. 그해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됐다.

의사·과학 저술가 출신으로 혁명기에 신문 『인민의 벗』을 발행했다. 반혁명 혐의자와 지롱드파를 거칠게 공격하며 파리 대중운동과 산악파의 급진적 목소리를 대변했다. 1793년 7월 지롱드파에 가까웠던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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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43–1789의사·과학 저술가로 활동하며 광학·전기·빛에 관한 실험 연구와 『노예의 사슬』(1774) 등 정치 저술을 발표했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7776월 아르투아 백작(훗날 샤를 10세) 친위대 전속 의사로 임명됐다.
  • 17834월 궁정 직을 사임하고 과학 연구에 전념했다.
  • 17891788년 국왕이 삼부회 소집을 결정하자 과학·의학 경력을 버리고 2월 『조국에 바치는 봉헌』을 익명으로 발표하며 혁명 논객으로 나섰다.
  • 17899월 12일 신문 『파리 시민의 벗』을 창간하고 나흘 뒤 제호를 『인민의 벗』으로 바꿨다.
  • 1791샹 드 마르스 학살 이후 급진 언론 탄압이 시작되자 신문 압수와 활판 파괴를 겪었으나 발행을 이어 갔으며, 이 해에 약 500호를 냈다.
  • 17929월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8월 10일 왕정 붕괴 뒤 파리 코뮌 감시위원회의 보좌 행정관으로 임명돼 9월 학살 시기 위원회가 보낸 회람에 서명했고, 회람 초안 작성자로 지목됐다.
  • 17934월 지롱드파의 기소로 혁명재판소에 처음 세워졌으나 변호인 없이 스스로 변론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 17935월 31일–6월 2일 봉기에서 국민공회 의장으로서 체포 대상 의원 명단을 조정하는 등 지롱드파 축출에 적극 가담했다.
  • 17937월 13일 지롱드파에 동조했던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목욕 중 찔려 살해됐다.

에마뉘엘 시에예스

Emmanuel Joseph Sieyès

제3신분의 국민 주권을 이론화한 성직자·정치가

1788~1789년 삼부회 소집을 둘러싸고 제3신분을 국민 전체와 등치시켰고, 이후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끝냈다.

성직자이자 정치사상가로 1789년 팸플릿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제3신분을 국민과 결부했다. 국민의회 성립에 기여했고 국민공회에서는 평원파에 속했다. 총재정부 말기에는 브뤼메르 쿠데타에 참여해 통령정부 수립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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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5–1788트레기에 주교 비서와 대리, 샤르트르 교구장대리로 재직했고 브르타뉴 삼부회 의원으로 특권 신분의 횡포를 목격했다.
  • 1789「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펴냈고 제3신분 대의원으로 국민의회 성립을 추진해 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 1792–1795국민공회 의원으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했고 총재정부 말기에 헤이그에 파견되어 대사 자격으로 활동했다.
  • 17995월 총재로 선출되었고 브뤼메르 쿠데타를 주도해 통령정부의 임시 집정관이 되었다.
  • 1799–1830상원의원(Sénat conservateur)을 지냈고 왕정복고 후 아카데미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로 갔다가 1830년 7월 혁명 후 귀국했다.
  • 1836파리에서 88세로 사망했으며, 유고에서 ‘사회학(sociologie)’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크 루

Jacques Roux
정치·당 지도 프랑스 혁명 진영 프랑스 프랑스 1752–1794 ✕ 옥중 자결

생필품 가격 통제를 요구한 앙라제 성직자

앙라제의 대표적 대변자로 가난한 파리 민중의 생존을 걸고 부유한 자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으며, 1793년 국민공회에서 그 강령을 제출한 뒤 산악파와 자코뱅의 공격 속에 체포되었다.

성직자이자 파리 그라비예 구역의 급진 활동가로 앙라제의 대표 인물이었다. 식량 독점과 투기를 공격하며 강한 가격 통제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했고 1793년 국민공회에 앙라제의 주장을 제출했다. 산악파와 자코뱅의 공격 속에 체포된 뒤 옥중에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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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1793파리에서 식료품 가격 폭등에 반대하는 소요가 일어나자 이러한 자구책을 정당화했다.
  • 1793국민공회에서 생필품 세금 부과와 투기꾼 처벌을 요구하는 앙라제의 강령(6월 25일 연설)을 제출했다.
  • 17938월에 체포되어 석방되었다가 9월 5일 다시 체포되어 생트 펠라지에에 수감되었다.
  • 1794혁명재판소 회부가 결정되자 옥중에서 두 차례 자결을 시도했고 2월 10일 사망했다.

피에르 베르니오

Pierre Victurnien Vergniaud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753–1793 ✕ 처형

지롱드파를 대표한 국민공회의 웅변가

1792년 12월 31일 루이 16세 재판에서 국민에게 상소하자고 제안했으나 실패했고, 그가 서명한 서한이 반역의 증거로 몰렸다.

보르도의 변호사 출신으로 입법의회와 국민공회에서 이름난 연설가가 됐다. 전쟁을 지지하고 지롱드파의 주장을 대변했으며 루이 16세 재판에서는 사형에 표를 던졌다. 1793년 6월 체포된 뒤 다른 지롱드파 의원들과 함께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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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보르도시가 지롱드 주의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 1791.03.29지롱드 주 형사법원 배심원장(직권 재판관)을 맡았다.
  • 1791.08.31지롱드 주에서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1791.10.30입법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792.08.10튈르리 궁전이 함락되던 날 국왕의 권한을 정지시켰다.
  • 1793.01.10국민공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793.01.16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 1793.06.02지롱드파 의원들과 함께 체포령이 내려졌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

Jacques Pierre Brissot

전쟁론을 주도한 지롱드파 언론인·의원

1791~1792년 입법의회에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주도했고, 1792년 4월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1793년 10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언론인이자 입법의회·국민공회 의원으로 노예제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1791~1792년 혁명을 지키고 확산한다는 명분으로 대외전쟁을 강하게 주장했고 지롱드파의 대표 인물이 됐다. 1793년 6월 지롱드파 몰락 뒤 체포되어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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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0년대~1780년대법률 서기로 수학한 뒤 《메르퀴르 드 프랑스》와 《쿠리예 드 레롭》에 기고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 1788년노예제 폐지 단체인 흑인 친우회를 창설하고 서기로 활동했다.
  • 1789년파리 시정부 의원으로 선출되고 《파트리오트 프랑세》를 창간해 1793년까지 편집했다.
  • 1791년 10월~1792년 9월센주 선거구에서 입법의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외교위원회에서 대외정책을 좌우했다.
  • 1792년 9월~1793년 10월국민공회에서 외르에루아르주 의원을 지냈고 1793년 6월 체포돼 10월 처형됐다.

베르트랑 바레르

Bertrand Barère de Vieuzac

평원파와 공안위원회를 연결한 국민공회 의원

공안위원회의 목소리로서 전쟁·총동원·혁명정부에 관한 보고를 국민공회에 제출했다. ‘단두대의 아나크레온’이라 불렸고, 1794년 로베스피에르 실각에 가담한 뒤 공포정치 책임으로 탄핵됐다.

삼부회와 국민공회 의원으로 1792년에는 평원파에 자리했다. 1793년 공안위원회에 들어가 전쟁·총동원·혁명정부의 주요 보고를 국민공회에 제시하는 대변인 역할을 했다. 1794년에는 로베스피에르 실각에 가담했지만 뒤이어 공포정치 책임으로 탄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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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비고르 선거인단에 의해 삼부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 1791–1792신설된 파기원 판사를 지냈다(1791년 10월~1792년 9월).
  • 1792오트피레네주에서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장직을 맡았고, 루이 16세 재판을 주재했다.
  • 1793–1794공안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위원회 존속 기간 내내 재임하며, 전쟁·총동원·혁명정부 보고를 국민공회에 제출했다.
  • 1794테르미도르 반정에 가담해 로베스피에르 실각에 기여했다.
  • 1795공포정치 책임으로 체포·추방이 명령됐고, 올레롱섬과 생트를 거쳐 10월 26일 탈옥해 보르도에 숨었다.
  • 1799나폴레옹의 사면을 받고 제정기에는 문필 활동을 했다.
  • 1815백일천하 동안 하원 의원을 지냈고, 왕정복고 후 국왕 처형 표결을 이유로 종신 추방됐다.
  • 1830–1841프랑스로 돌아와 7월 왕정 아래 루이 필리프를 섬겼고, 1841년 1월 13일 사망했다.

조르주 당통

Georges Jacques Danton

코르들리에와 관용파의 중심이 된 혁명 정치가

코르들리에 클럽의 웅변가에서 1792년 8월 왕정 붕괴 후 법무장관이 되었고, 9월 학살을 둘러싼 책임 논쟁의 당사자다. 1793년 첫 공안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뒤에 공포 완화를 요구하는 관용파로 1794년 4월 처형됐다.

코르들리에 클럽의 유력 인물로 1792년 8월 왕정 붕괴 뒤 법무장관이 됐다. 공화국 방어와 혁명 동원을 촉구했고 1793년 첫 공안위원회에 참여했다. 뒤에는 공포 완화와 정치적 안정을 주장하다 로베스피에르파와 충돌해 1794년 4월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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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1792코르들리에 구의 급진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 ‘천둥’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1790년 코르들리에 클럽 의장을 맡았다.
  • 17928월 10일 왕정 붕괴 뒤 법무장관이 되어 9월 2일 ‘대담함’ 연설로 항전을 호소했다.
  • 17933월 혁명재판소 설치를 지지했고 4월 6일 첫 공안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 1793–17946월 공안위원회 자리를 잃은 뒤 관용파의 대표로 공포 완화를 요구했고, 1794년 4월 반혁명 음모와 부패 혐의로 재판받아 처형됐다.

아드리앵 뒤포르

Adrien Duport

사법 개혁을 추진한 푀양파 정치가

«뒤포르가 생각하고, 바르나브가 말하고, 라메트가 행동한다»던 삼두파의 한 축으로, 1791년 푀양파 분열을 주도하며 혁명의 종결과 헌정 질서의 안정을 주장했다.

파리 고등법원 법관 출신의 국민의회 의원으로 배심제와 형사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바르나브·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1791년 푀양파 결성에 참여했다. 1792년 왕정 붕괴 뒤 망명해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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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8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인가받고 같은 해 고등법원 심사관으로 임명되어 1790년까지 재직했다.
  • 1787–17881787년 '애국자당'을 결성해 국민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1788년에는 삼신분 구분에 반대하는 30인회를 세웠다.
  • 17895월 13일 파리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6월 말 자유주의 귀족 47인과 함께 제3신분에 합류했다.
  • 1789–1791제헌의회에서 바르나브·알렉상드르 드 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형사법위원회 보고자로서 1790년 3월 29일 사법제도 개편안과 1791년 2월 8일 배심제 도입에 기여했다. 1791년 2월 14일부터 26일까지 의회 의장을 지냈다.
  • 17917월 푀양파 분열에 앞장섰고, 9월 27일 유대인 완전 해방령을 주도했으며 24일 자유 유색인 권리 철회에 가담했다.
  • 17928월 10일 왕정 붕괴 뒤 센 형사재판소 소장직을 그만두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잉글랜드와 스위스를 거쳐 망명했다.
  • 1798용기병 반동 쿠데타(1797년 9월 4일) 이후 다시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가이스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카미유 데물랭

Camille Desmoulins

바스티유 봉기와 관용파를 잇는 혁명 언론인

1789년 팔레루아얄에서 무장 봉기를 촉구해 바스티유 습격의 도화선을 놓았고, 『비외 코르들리에』로 관용과 공포 종식을 요구하다 당통과 함께 단두대에 올랐다.

1789년 7월 12일 팔레루아얄에서 무장 행동을 촉구해 바스티유 습격 전야의 동원에 기여했다. 코르들리에의 언론인으로 지롱드파 공격에 앞장섰지만, 1793년 말 『비외 코르들리에』에서 공포 완화와 관용을 요구했다. 당통과 함께 1794년 4월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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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5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등록했으나 말더듬과 인맥 부족으로 활동이 어려웠다
  • 1789『자유 프랑스』, 『파리인의 등불 연설』, 『프랑스와 브라반트 혁명사』로 급진 팸플릿·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 1790코르들리에 클럽에 가입해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 1792당통이 법무장관이 되자 사무총장을 맡았고, 9월 파리 대표로 국민공회 의원에 선출됐다
  • 1793『브리소 폭로사』로 지롱드파 공격을 이끌었고, 12월부터 『비외 코르들리에』를 발행해 공포 완화와 관용을 요구했다
  • 17943월 31일 체포되어 당통파로 재판받고 4월 5일 처형됐다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

Alexandre de Lameth

혁명 초기의 삼두파에서 푀양파로 이동한 정치가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지만 삼두파와 푀양파에서 입헌군주제로 혁명을 안정시키려 했고, 1792년 왕정이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귀족 장교로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고 특권 폐지를 지지했다. 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루다가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푀양파의 지도자가 됐다. 망명과 귀환 뒤 나폴레옹 정부의 지방관,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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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7–1785왕의 친위대에 들어가 근위 기병 장교로 복무했고, 1782년 로샹보 휘하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령으로 참전했다.
  • 1789페론느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제3신분에 합류했고, 8월 4일 밤 특권 폐지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89–1791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뤄 의회 좌파를 이끌었고, 1790년 11월 20일 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 1791–1792자코뱅 클럽 창립 회원이자 푀양파 지도자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고, 1792년 5월 북부군에서 준장이 되었으나 8월 10일 라파예트와 함께 적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에 억류됐다.
  • 1800–1814귀국해 바스알프·라인모젤·뢰르·포 주의 지방관을 지냈고 1810년 제국 남작이 됐으며, 1814년 중장으로서 솜 주 지방관을 맡았다.
  • 1820–1827왕정복고기에 센마리팀과 센에우아즈에서 자유주의 야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빌레르 내각에 맞섰다.

앙투안 바르나브

Antoine Barnave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한 푀양파의 중심 연설가

1791년 7월 15일,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하며 “우리는 혁명을 끝내려 하는가, 다시 시작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왕정이, 평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소유가 파괴된다고 경고했다.

제3신분 대표로 국민의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뒤포르·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다. 바렌 도주 뒤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푀양파를 이끌고 왕실과 비밀 교섭했으며, 왕실 문서가 발견된 뒤 반역죄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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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그르노블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신분 통합과 머릿수별 표결을 주장했다.
  • 1790제헌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그르노블 시장이 되었다.
  • 1791바렌에서 왕 일가를 파리로 호송한 뒤 푀양파를 결성하고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했다.
  • 1792–17931792년 8월 국민의회에서 고발되어 그르노블과 포르바로에 수감됐고, 혁명재판소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793년 11월 파리에서 처형됐다.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Louis Antoine de Saint-Just

혁명정부를 이론화한 공안위원회 의원

국민공회 최연소 의원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최측근으로, 적대 세력의 재산을 빈민에게 몰수·분배하려 했다. 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몰락했다.

국민공회 최연소 의원으로 산악파와 로베스피에르의 핵심 동맹이 됐다. 공안위원회에서 군대 파견 임무를 수행하고 지롱드파·에베르파·당통파를 공격하는 보고를 맡았다. 혁명정부의 강한 집중을 옹호했으며 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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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2.9–1794.7국민공회 의원(엔 주, 최연소 의원)
  • 1792.11–1793지롱드파 규탄 보고와 국왕 처형 요구 연설
  • 1793.5–1794.7공안위원회 위원
  • 1793.11–1794공안위원회 대표로 군대에 파견돼 라인·북부 군대 감독
  • 1794.2국민공회 의장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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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무롬체프

Сергей Андреевич Муромцев
정치·당 지도 입헌민주당 러시아 러시아 1850–1910 ○ 심장마비

러시아 최초의 헌법적 의회를 이끈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지도자

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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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모스크바 대학 로마법 도첸트
  • 1877법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교수
  • 1880–1892《법률 회보》 편집자, 모스크바 법률학회 회장
  • 1905.10입헌민주당(카데트) 공동 창립, 중앙위원
  • 1906.4–7제1대 국가두마 의장
  • 1908비보르크 호소 서명으로 3개월 수감
  • 1910사망; 장례식이 대규모 반체제 시위로

마르크 안드레예비치 나탄손

Марк Андреевич Натансон
정치·당 지도 사회혁명당 러시아 제국 리투아니아 유대계 러시아인 1850–1919 ○ 자연사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좌파 에스에르까지, 반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위대한 결집자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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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차이콥스키 서클 공동 창립
  • 1876플레하노프와 카잔 광장 시위 조직; '토지와 자유' 결성 주도
  • 1893'인민의 권리'당 창립
  • 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 선출
  • 1915–1916치메르발트·킨탈 회의 참가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 1918혁명적 공산당 공동 창립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트

Павел Борисович Аксельрод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50–1928 ○ 자연사

대중 노동자 정당의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패배한 논쟁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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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 1876–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 1881–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 1906–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 1917귀국,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10월 혁명 반대하고 재망명
  • 1918–28멘셰비키 망명 지도부; 반볼셰비키 노선 견지; 베를린에서 사망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50–1937 ○ 자연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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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랴보프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Желябов
정치·당 지도 인민의 의지 러시아 러시아 1851–1881 ✕ 처형

황제 암살을 조직한 인민의 의지당 실질적 지도자, 경찰 대열을 향해 당의 신념을 선포한 혁명가

「나는 인민 해방의 대의에 봉사해왔다. 이것이 내 유일한 직업이며, 나는 오랜 세월 전 존재를 바쳐 이에 헌신해왔다」 — 1881년 예심 조사에서.

농노 출신으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실질적 지도자였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총괄 기획했고, 체포 이틀 뒤 암살이 성공했다. 법정에서 인민 해방의 신념을 선언한 뒤 1881년 4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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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1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대학 법학부 입학, 학생 소요 주도로 제적·추방
  • 1873–1877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민중 속으로' 선전운동 참가, 체포 후 '193인 재판'에서 무죄
  • 1879.6리페츠크 대회 참석,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창립 멤버
  • 1879.11알렉산드롭스크에서 황제 열차 폭파 미수
  • 1880.2스테판 할투린의 겨울궁전 폭파 기획 지휘
  • 1880–1881집행위원회 실질적 수장, 노동자·학생·군대 조직망 구축, 황제 암살 계획 총괄
  • 1881.2.27암살 이틀 전 체포, 사건 합류 자청
  • 1881.4.3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집행

표도르 이즈마일로비치 로디체프

Фёдор Измайлович Родичев
정치·당 지도 입헌민주당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4–1933 ○ 사망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로 교수대를 고발한 카데트의 두마 연사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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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세르비아-튀르크 전쟁 의용군 참전
  • 1877–1895트베리 현 젬스트보 활동가, 베세곤스크 현 귀족 대표(1879–1891)
  • 1898–1904페테르부르크 변호사, 학생 시위 항의 서명으로 추방
  • 1904–1905젬스트보 대회·연회 캠페인 공동 조직,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참여
  • 1906–1917제1~4차 국가두마 카데트 의원, 중앙위원
  • 1917.03–05임시정부 핀란드 담당 위원
  • 1918–1920백군 진영 참여, 세르비아·폴란드 파견 대표
  • 1920–1933망명: 파리, 이후 로잔에서 여생

디미터르 니콜로프 블라고예프

Димитр Николов Благоев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불가리아 불가리아 1856–1924 ○ 자연사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불가리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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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5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결성, 『라보치』 발행
  • 1891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 창립
  • 1897–1923이론지 『노보 브레메』 편집장
  • 1903–1919협소파(테스냐키) 지도자
  • 1905『자본론』 제1권 불가리아어 번역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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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장 조레스

Jean Jaurès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59–1914 ✕ 암살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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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

위안스카이

袁世凯
군사·지휘 북양정부·군벌 중국 중국 1859–1916 ○ 병사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국보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퇴위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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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가타야마 센

片山潜
정치·당 지도 코민테른 일본 일본 1859–1933 ○ 자연사

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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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