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두브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두브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모스크바다. 우리는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무엇을 배우는지 아는가?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어떻게 비트는지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1929년부터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로서 인민전선 노선에 참여했으며, 전후 총리(1946–1948)와 대통령(1948–1953)을 지내며 국가 주도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 1948년 2월 위기에서 비공산당 각료들의 사퇴를 이용해 헌법적 절차 안에서 공산당 주도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상세 이력 보기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두브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두브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1968년 초, 아우에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의사들이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병상에서 팔라흐는 말했다: '내 행동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동료 학생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라고 당부했다.
1969년 1월 16일, 바르샤바조약군 점령 5개월 만에 체코 사회가 체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카렐대학교 학생. 검열 폐지와 소련군 기관지 발행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을 '인간횃불 1호'라 부른 그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20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상화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항의였고, 20년 후 그의 기일 시위는 벨벳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89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급진적 경로를 대표했다. 그는 시민민주당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이끈 뒤 체코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에는 공감했지만 경제적 제3의 길은 거부했으며, 이 입장은 전환기의 ‘수식어 없는 시장경제’와 이후 체코 보수주의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유럽 통합과 기후변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권과 시장의 우위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