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1907)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며 김병로·이인과 함께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불렸다. 1927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되어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냈다. 1946년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 최고인민회의 초대 의장과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에 취임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운동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 조선 근대사의 가교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시험 합격
- 19193·1운동 민족대표 변론, 조선변호사회 회장
- 1927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 1945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
- 1946남조선로동당 위원장
- 1948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만주 항일유격대에서 김일성과 함께 싸운 조선의 혁명군사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조선공산당 입당,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투옥
- 1930중국공산당 입당, 동경성구위 서기
- 1933–1940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4사 정치부 주임, 북만임시성위 서기
- 1942–1945소련 극동 제88국제여단 제3영 정치위원
- 1945–1946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주도, 평양학원 초대 원장
- 1946–1948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
- 1948–1951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겸직
- 1950–1951한국전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중국공산당 입당
- 1934–1935중국 홍군 대장정 참가
- 1937–1940팔로군 포병사령관
- 1942조선의용군 총사령
- 1946북조선로동당 제2비서
- 1948민족보위성 부상 겸 제2지휘소 사령관
- 1950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년대만주 항일 유격대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 1945–1948소련 점령기 북부 조선의 권력 기반 형성
- 1948–1972내각 수상·노동당 지도자
- 1961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 조약
- 1972–199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식민지 군 경력과 전쟁 초기 지휘 실패를 함께 지닌 장성
1950년 6월 28일 새벽, 그의 명령으로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경력을 거쳐 해방 뒤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과 확대에 참여한 장성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전방 경계와 지휘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고, 서울 철수 과정의 한강교 조기 폭파 명령에도 책임이 있었다. 개전 직후 해임된 그는 경남 방어전선에 투입되었고,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일본군 포병 장교 임관
- 1940–1945일본군 포공학교 교관, 육군 조병창 공장장
- 1946군사영어학교 졸업,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
- 1948통위부 참모총장, 국방부 합동참모총장
- 1949제2대 육군총참모장
- 1950.04–06.30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
- 1950.06.30–07.27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 하동 전투에서 전사
백두산 항일 빨치산에서 '3대장군'의 하나로 추앙된 여장군
어느 날 부대가 행군할 때 갈대밭에서 적 5~6명이 장군님을 겨누었다. 김정숙 동지는 몸으로 장군님을 가리고 리볼버로 적을 쓰러뜨렸다.
김정숙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 휘하 여군 부대장으로 복무하며 보천보 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빨치산 투사였다. 1940년 김일성과 결혼하여 소련 극동에서 아들 김정일을 낳았고, 해방 후 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에 기여했으며 1949년 출산 중 사망한 뒤 '백두여장군'으로 추존되어 '3대장군' 백두혈통 정치신화의 핵심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동북항일연군 입대
- 1936김일성 부대 친위전사 및 신갈파부대 여군 부대장
- 1937보천보 전투 참가; 중국공산당 입당
- 1937–1938국내 신파·풍산·단천 등지에서 혁명조직 확대 활동
- 1940김일성과 결혼, 소련으로 이동
- 1945해방 후 평양 귀환
- 1946–1949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 및 여성운동 참여
소련군 출신으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 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3–1940만주 항일유격대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대위 계급
- 1946연변에서 활동 후 귀국,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 지휘
- 1948–1950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 1950.05바실리예프 중장과 남침 작전계획 완성
- 1950.06–09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전선 지휘
소련 출생 기록과 백두산 신화 사이의 후계자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17년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유일한 공개 육성이었다.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공고화된 그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권력을 승계하여, 소련 붕괴 뒤의 고립과 경제위기 속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를 이끌며 17년간 국가를 통치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2소련 출생 기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서사의 갈림
- 1964–1974조선노동당 중앙위에서 승진
- 1980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후계자로 공고화
- 1991–1994인민군 최고사령관·국가 권력 승계 준비
- 1994–201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 2000첫 남북 정상회담
독립운동가이자 언어학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를 지낸 연안파 지도자
1948년 7월,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채택한 날, 김두봉이 직접 태극기를 내리고 새 국기를 게양했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소련 장군에게 태극기의 철학적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주시경 문하의 한글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로,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에 올랐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고, 1958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실종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1916주시경 문하에서 한글 연구, 《말모이》 편찬 참여
- 19193·1 운동 참가 후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 1920–1930년대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언어학 연구 병행
- 1942–1945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 옌안파 지도
- 1946.2–1946.8조선신민당 위원장
- 1946.8–1949.6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9–1957.9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초대 국가원수
- 1957–19588월 종파 사건 연루로 모든 직위 해임, 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