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식민 지배와 외세에 맞서 독립과 해방을 이끈 지도자와 투사들입니다. 기니비사우의 카브랄, 콩고의 루뭄바, 앙골라·모잠비크의 해방운동, 니카라과의 산디노,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조선의 독립운동가가 여기에 속합니다. 해방운동을 이끈 공산주의자(호찌민)도 넣었고, 그 카드 색은 공산주의 붉은색입니다.
임종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제국 장교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조선 민족해방운동에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접목시킨 공산주의 선구자.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무장독립노선을 추진했으며, 이승만과 결별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을 이끌며 민족해방과 계급혁명의 결합을 추구했다.
1945년 12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사령부의 압력 속에서도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고,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김일성 등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만식(曺晩植, 호 고당, 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교육자·개신교 장로·언론인·정치인이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1915년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에 대해서는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노선으로 항일운동을 폈다. 해방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평남 건준과 평남 조공을 통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좌우합작 기구)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고 12월 30일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2월 최용건이 당을 장악했다. 이후 사망은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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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5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1915년 교장이 되었으며 민족교육에 종사
1920~30년대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로 기독교·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지냄
1945.8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좌우합작 기구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1945.10~11토지개혁·소작제 7·3제 논쟁으로 입장이 드러나 우파 위원들이 위원회를 떠나 월남했고, 11월 24일 명칭에서 '정치'가 빠지며 위원회가 좌파 기구로 바뀜
1945.11.3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선출되어 반탁 노선을 폄
1945.12.30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를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
1946.1.5소련군사령부에 의해 고려호텔에 감금되어 정치무대에서 제거됨
1946.2최용건이 당을 장악하고 2월 24일 제1차 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됨
1948~1950재판 없이 구금이 이어졌고 교환 협상은 결렬됨. 행방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망은 전언·추정으로 시점·경위가 확정되지 않음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고 노동자와 독립운동가의 무료 변론을 도맡은 대표적 항일변호사였다. 1927년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와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을 거쳐 월북하여 조선 근대 민족운동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가교가 되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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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오랜 세월 전 우리는 운명과의 약속을 맺었고, 이제 그 서약을 실현할 시간이 왔습니다. 한밤중, 세계가 잠든 그 시간에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깨어날 것입니다.」(1947년 8월 14일 독립 전야 연설)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1947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에 취임하여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계획경제를 인도 국가의 기초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개척했다. 1954년 티토와의 공동성명에서 '비동맹'을 국제정치 용어로 처음 규정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과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비동맹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 중·인도 국경전쟁의 패배로 국내적 위신이 흔들렸으나, 사후에도 인도 공화국의 설계자로 추앙받았다.
미군기가 산디노 진영을 폭격하는 가운데, 마르티는 타자기를 밀치며 말했다. "역사가 펜으로 쓰이지 못할 때는 총으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소총을 들고 미군기를 향해 사격했다.
엘살바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중미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193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PCS)을 공동 창건하고 1932년 대공황으로 몰락한 농민·원주민의 무장봉기를 이끌었으나 마르티네스 군부의 라 마탄사 학살로 진압·총살당했으며, 사후 그 이름은 FMLN에 계승되어 중미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조국의 배신자가 침략자들의 손에 내 유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 산디노 선언(1927)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미군 점령에 맞서 '국가주권 수호군(EDSN)'을 이끌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소모사가 이끄는 국가경비대에 암살되었고, 그의 유산은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이어져 1979년 소모사 독재를 전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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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미군 개입과 셀레돈 장군 전사 목격 — 반제의식 형성
1921–1926멕시코 망명 — 스탠더드오일 정유공장 노동, 멕시코 혁명 사상 접촉
1926–1927니카라과 귀국 — 금광 노동자 중심 의용군 조직, 입헌전쟁 참전
1927.7에스피노네그로 협정 거부 — 산 알비노 선언으로 대미 게릴라전 개시
1927–1933국가주권 수호군(EDSN) 총사령관 — 미 해병대 상대 6년 게릴라전 지휘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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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우리 당은 혁명의 첫날부터 베트남 인민의 전체 투쟁을 조직하고 통제한 유일한 지도자다.” — 1976년 통일 승리 연설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이론가.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프랑스 식민 감옥을 두 번 거친 후 호치민의 신임을 얻어 남부 조직을 책임졌다. 1956년 〈남으로 가는 길〉을 집필하여 남베트남 무장해방노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제1서기에 선출되어 호치민 사후(1969)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을 완수하고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친소 노선 아래 중월전쟁(1979)을 겪으면서도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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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0혁명청년동맹 가입,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
1931–1945두 차례 투옥 — 8월 혁명으로 석방, 호치민의 신임 획득
1951–1954남부 중앙사무국장 — 항불전쟁 남부 전선 지휘
1956〈남으로 가는 길〉 집필 — 남부 무장투쟁의 이론적 토대 마련
1960–1969베트남노동당 제1서기 — 대미 전쟁의 실질적 최고지휘관
1969–1986당 최고지도자 — 통일(1975), 캄보디아 침공(1978), 중월전쟁(1979)
"마다가스카르 국민은 라치라카를 다음 7년 동안 선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마다가스카르 남부 안탄드로이족의 민족주의 정치가다. 1943년 비밀결사 지니를 조직하고 1947년 반란에 가담해 식민 당국에 투옥된 뒤, 1958년 MONIMA를 창당해 빈곤한 남부 농민을 대변하며 프랑스에 종속된 치라나나 체제에 맞서 1971~72년 로타카 시위를 이끌었다. 라치라카의 혁명전선에 합류했다가 1977년 지방선거를 부정으로 규탄하고 탈퇴해 제2공화국의 대표적 야당 지도자가 됐다.
하노이 사립학교의 젊은 역사 교사 시절, 그는 칠판에 나폴레옹 전역의 상세한 작전도를 그려내곤 했다. 학생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15년 후, 그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정규 군사 교육 없이 게릴라 부대를 창설해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어진 전쟁에서 미국을 물러나게 한 역사 교사 출신 장군. 제국주의 정규군을 야전에서 무너뜨린 최초의 식민지 해방군 사령관으로, 30년간 인민군을 기계화 연합군으로 키우며 정치적 의지를 꺾는 인민전쟁 전략을 완성했다.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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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포르투갈 유학, 코임브라·리스본 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하며 반식민주의 학생운동 참여
1956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창립 당시 초대 의장(사무총장은 비리아투 다 크루스)
1960–1962PIDE에 체포되어 리스본 구금, 1962년 탈출 후 콩고-레오폴드빌로 망명
1962–1974MPLA 대표자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전쟁을 지도하고 소련·쿠바·유고슬라비아와 유대를 구축
1975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 사회주의 노선 선언
1975–1979쿠바 군사 개입과 소련 지원으로 내전 방어, 1977년 니투 알베스의 쿠데타 시도 진압
1977MPLA를 MPLA-노동당(MPLA-PT)으로 재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
1982년 6월 크메르루주·손산의 KPNLF와 함께 반베트남 연합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이 되어 유엔의 캄보디아 대표권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국왕·국가원수·총리를 지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지 아래 즉위해 1953년 독립을 이끌었고 1955년 양위한 뒤 정치에 들어갔다. 1970년 축출됐다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아래 가택 연금됐고, 1982~1991년 크메르루주와 연합한 저항 정부를 이끌었으며 1993년 왕으로 복위해 2004년 다시 양위했다.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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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으로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자 뒤에 베트남 부주석이 된 외교관
196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민족해방전선 대표단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이 되어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사덱 성 출신으로 민족주의 지도자 판쩌우찐의 외손녀다. 1948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1~1953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사이공의 치호아 감옥에 갇혔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을 지냈고, 1969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어 파리 협상 대표단을 이끌었다.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한 유일한 여성이다. 통일 뒤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92~2002년 두 차례 베트남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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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베트남 공산당에 가입하고 풀뿌리 조직가로 활동했다.
1951–1954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치호아 구금시설에 수감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된 채 석방되었다.
1969민족해방전선 파리 대표단 부단장을 맡았고, 뒤이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무장관 겸 파리 대표단장을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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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8리스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해 1952년 졸업하고, 1954년 코임브라 대학에 들어가 물리화학을 배우다 1958년 학업을 중단했다.
1955–1956앙골라 공산당에 입당하고 포르투갈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으며,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했다.
1959정치경찰 PIDE의 추적을 피해 리스본을 떠나 동·서독과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코나크리에 MPLA 최초의 해외 사무소를 마련했다.
1962–19651962년 12월 제1차 전국회의에서 조직·간부 담당 서기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당의 실질적 2인자였다.
1974–19751974년 11월 8일 MPLA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 들어갔고, 1975년 11월 10일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1977–19851977년 12월 10일 MPLA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어 네투에 이어 정치국 서열 2위 및 당 부총재로서 조직과 이데올로기 부문을 맡았고, 1985년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에 의해 정치국에서 제외되어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1979네투 사망 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9월 11일 제2차 MPLA 대회를 소집해 9월 20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선출을 이끌었다.
1975–2003독립 직후부터 2003년까지 앙골라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03년 11월 건강상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방부는 2004년 그를 육군 대장으로 예편시켰으나 본인은 이 계급을 쓰지 않았다.
카레이라는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앙골라 독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FAPLA)을 창설·지휘한, 네투 다음 가는 MPLA 군사 지도자였다.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그는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선언해 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을 증언했다. 1977년 니티스타 봉기 진압과 군사재판을 지휘했으나, 1979년 네투 사망 뒤 실각해 말년엔 조국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