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우 라라

Lúcio Lara

앙골라 해방운동의 이데올로그, MPLA 창립자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다른 이름: 치웨카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77년 5월 27일 사건과 숙청 책임

1977년 5월 27일, 내무부 장관 니투 알베스에 대한 지지 시위와 뒤이은 쿠데타 시도가 진압된 뒤 앙골라 전역에서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다. 동료심사 논문을 쓴 비달은 쿠데타 시도 직후 ‘대규모의 유혈 숙청’이 있었고 전국에서, 특히 청년 활동가·지식인·간부들이 다수 목숨을 잃었다고 정리한다. 그는 이 숙청을 1977년 6월부터 1979년 중반까지 이어진 ‘분파주의 숙청’으로 부르며, 아고스치뉴 네투가 명령한 사업으로서 체포·투옥·고문·살해의 집행은 하급 간부들이 맡았지만 작전의 지휘는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루디 키사순다, 오남베가 맡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적는다.

사망자 규모는 출처마다 다르다. DW 아프리카는 희생자 수가 확정되지 않았으며 4만 명을 넘었을 수 있다고 전하고, 역사가 달릴라 카브리타 마테우스는 저서 『앙골라의 숙청』에서 같은 취지를 밝혔다. 마테우스는 DW 아프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최고 책임자로 네투·라라·이쿠 카헤이라·루디·오남베를 지목했고, 5월 27일 재단 이사장인 실바 마테우스 장군과 숙청 생존자 프란시스쿠 파스쿠알도 같은 방향의 증언을 남겼다. 반면 니투 측의 『나의 변호를 위한 열세 가지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 ‘마오주의자’로 규정하며 MPLA가 우경화했다고 비판했고, 니투파는 정치국이 라라·카를루스 딜롤루아·이쿠 카헤이라가 이끄는 ‘반소·마오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에 장악됐다는 선전을 폈다. 라라는 숙청의 피해자가 아니라 지휘 체계 안에 있던 인물로 기록되며, 책임의 정도와 사상적 노선을 둘러싼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