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 조만식, 반탁으로 1946년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조선민주당 당수
1945년 12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사령부의 압력 속에서도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고,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김일성 등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만식(曺晩植, 호 고당, 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교육자·개신교 장로·언론인·정치인이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1915년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에 대해서는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노선으로 항일운동을 폈다. 해방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평남 건준과 평남 조공을 통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좌우합작 기구)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고 12월 30일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2월 최용건이 당을 장악했다. 이후 사망은 확정되지 않았다.
다른 이름: 고당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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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6
조선민주당대표
정치·당 지도
경력 연표
- 1913–1915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1915년 교장이 되었으며 민족교육에 종사
- 1920년대–1930년대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로 기독교·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지냄
- 1945.08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좌우합작 기구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 1945.10–11토지개혁·소작제 7·3제 논쟁으로 입장이 드러나 우파 위원들이 위원회를 떠나 월남했고, 11월 24일 명칭에서 ‘정치’가 빠지며 위원회가 좌파 기구로 바뀜
- 1945.11.03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선출되어 반탁 노선을 폄
- 1945.12.30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를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
- 1946.01.05소련군사령부에 의해 고려호텔에 감금되어 정치무대에서 제거됨
- 1946.02최용건이 당을 장악하고 2월 24일 제1차 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됨
- 1948–1950재판 없이 구금이 이어졌고 교환 협상은 결렬됨. 행방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망은 전언·추정으로 시점·경위가 확정되지 않음
관련 역사 사건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시기의 좌우 관계와 기반의 축소
해방 직후 조만식은 1945년 8월 27일 소련군의 영향 아래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와 평남 조선공산당을 통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현준혁과 오윤선이 공동부위원장을 맡아 좌우가 한 기구에 함께 참여했다. 조만식은 이념적 잣대보다 민족의 이익을 기준으로 움직여, 소련군정하에서도 민족의 이익에 부합할 때는 좌익과 협력했다. 그에게 현준혁은 공산당과의 창구였지만 그해 9월 회의를 마치고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괴한의 총격으로 현준혁이 암살되면서 그는 공산당과의 창구 하나를 잃고 인간적 아픔도 겪었다.
기반은 소작제와 토지개혁 문제로 더 좁아졌다. 공산주의 그룹은 소작인 7 대 지주 3의 7·3제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요구했고, 조만식과 비슷한 배경의 우파 민족주의 그룹은 7·3제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조만식은 1945년 10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파국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서, 7·3제만 수용되고 무상몰수·무상분배는 보류되는 선에서 합의를 이끌었다. 이 논쟁은 그의 중재력보다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지주·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입장이 노출되었고, 민족주의자들이 위원회를 이탈해 38선 이남으로 향했으며,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11월 24일 명칭에서 ‘정치’가 빠지면서 좌우합작기구에서 좌파 기구로 바뀌었다.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오윤선도 사실상 사퇴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12월 말 신탁통치 정국에 들어설 때 이미 정치적 자산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조선민주당이 창당 3개월도 안 되어 50만 당원을 확보할 만큼 대중적 영향력은 컸고, 그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신탁통치 문제를 고비로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이 몰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까지는 소련군정·김일성과의 근본적 충돌을 피하며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반면 7·3제와 지주·자본가 이익 대변을 둘러싼 이탈은 그가 소작농·노동자 대중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지점으로, 이후 반탁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전환되지 못한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