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6월 1일, 하우는 해협함대를 지휘하여 곡물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프랑스 함대를 상대해 7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광의 6월 1일'로 불리는 이 해전은 사이트의 프랑스 혁명 전쟁 사건 문서와 직접 연결된다.
영국 왕립해군 장교이자 정치인. 172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고 7년 전쟁 중 1759년 키브롱 만 해전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기에는 북아메리카 방면 해군 사령관 겸 평화위원을 지냈다. 1783년과 1783년 12월부터 1788년까지 해군본부 수석위원을 맡았고,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는 해협함대를 지휘하여 1794년 6월 1일 전투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1797년 스피트헤드 해군 반란에서 진압이 아닌 직접 설득으로 12시간 만에 평화를 회복했다. 1799년 8월 5일 사망했다.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의 요청으로 중부군을 이끌고 합류해 서쪽 구릉에 포병을 배치했다. 탄약 마차 폭발로 동요한 보병을 안정시키고 'Vive la Nation'을 외쳐 사기를 결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철수했다.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작센 출신 가문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1750년(또는 1752년) 왕립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했고, 1788년 준장이 되어 구체제에서 장성이 된 유일한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89년 혁명에 호의적이었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중부군을 이끌어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공로로 '발미의 승리자'로 불렸다. 1793년 11월 불충성 혐의로 13개월 수감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석방·복직했다. 1804년 제국 원수, 1808년 발미 공작이 되었고 1814년 상원에서 나폴레옹 퇴위에 찬성한 뒤 루이 18세 치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792년 발미와 즈마프의 승리로 혁명을 구했으나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을 기도했고, 국민공회가 보낸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에 인도한 뒤 전향했다. 그 전향은 지롱드파를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정치인. 왕정 시대 왕군 장교로 7년 전쟁에 참전하고 셰르부르 항만 책임자를 지냈다. 혁명 후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지롱드파의 지지로 1792년 3월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겸했다. 루이 16세와 갈등해 사임한 뒤 북부군 사령관으로 켈레르만과 함께 발미(1792년 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즈마프(1792년 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과 국민공회 해산,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정 복고를 기도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서 사망했고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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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캉브레에서 출생. 출처에 따라 1월 25일·26일·27일로 생년월일 기록이 갈린다.
1792지롱드파 지지로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지냈다.
1793년 공안위원회의 병력·부대 이동 담당 위원으로 14개 군을 창설하고 1793년 가을 북부전선의 프랑스 부대를 지휘해 주르당의 와티니 승리에 기여했으며, 군대를 1793년 중반 약 64만 5천 명에서 1794년 9월 약 150만 명으로 늘렸다.
1753년 부르고뉴의 놀레에서 태어나 1823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죽은 프랑스의 수학자·군인·정치가다. 1791년 입법의회에, 1792년 9월 국민공회에 선출되었고, 1793년부터 공안위원회에서 병력과 부대 이동을 맡아 1793~94년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을 이끌어 '승리의 조직자'로 불렸다. 정직한 행정가이자 확고한 공화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고, 1794년 테르미도르에 로베스피에르와 결별해 그의 몰락에 가담했으며 총재정부의 초기 총재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97년 18일 프뤽티도르 쿠데타로 축출되어 망명했고, 1800년 잠시 전쟁장관을 지냈으며 제정 즉위에는 반대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백일천하 때 내무장관을 맡았으며, 왕정복고 뒤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죽었다.
1798년 8월 아부키르만에서 청색기 소장으로 영국 함대를 지휘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호송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프랑스 기함 오리앙이 폭발하고 교전한 17척 중 전열함 2척과 프리깃 2척만이 달아났다.
영국 해군 제독. 1758년 노퍽주 번햄소프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삼촌 모리스 서클링의 후원으로 해군에 들어갔고, 서인도와 지중해에서 복무하며 1794년 칼비에서 한쪽 눈을, 1797년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1798년 8월 1~3일 아부키르만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해 이집트의 나폴레옹 군을 고립시켰고, 1801년 코펜하겐에서 덴마크를 꺾었으며 1805년 트라팔가르에서 전사했다.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헬베티아 방면군을 이끌고 코르사코프의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격파했고, 1800년 제노바를 약 60일간 방어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묶어 보나파르트의 마렝고 승리를 도왔다.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사령관. 1758년 5월 6일 니스(당시 사르데냐 왕국 니스 백작령)에서 출생명 안드레아 마세나로 태어났다. 구체제 왕립 이탈리아 연대의 사병으로 출발해 1784년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부사관 계급에 이르렀고, 1793년 8월 여단장, 같은 해 12월 20일 사단장이 되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창설한 최초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고, 1808년 리볼리 공작, 에슬링 대공 작위는 1809년(일부 문헌은 1810년 1월)에 받았다. 1817년 4월 4일 파리에서 58세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1794년 2월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했고, 1794년 12월–1795년 1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 위트레흐트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기병이 얼음 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사로잡았다.
1778–1804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드르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왕당파로 돌아섰고,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에서 카옌으로 유배되었으며, 런던으로 도피한 뒤 1799년 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804년 4월 감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이 혁명기의 대표적 순간이다. 1798년에는 오백인회에서 동료 의원 피에르 델브렐과 함께 20~25세의 독신·무자녀 남성을 징병하는 주르당법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복무했고 1804년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62년 리모주에서 외과의사 로크 주르당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혁명 전쟁에서 북부군을 이끌어 1793년 10월 와티니에서 승리하고 마우보주 포위를 깼다. 이어 삼브르에뫼즈군을 지휘해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총재정부 시기 자코뱅 정치인으로서 오백인회 의원(1797~1799)으로 일했고, 1798년 징병법(주르당법)을 입안했다.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했으나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했고, 사망할 때까지 앵발리드 총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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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1783보조루아 연대에 입대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 1779년 서배너와 서인도 제도에서 복무
17935월 27일 준장으로 진급하고 두 달 뒤 사단장이 되었으며, 9월 22일 북부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0월 와티니에서 승리
1794삼브르에뫼즈군(6월 29일 정식 편성)을 이끌고 6월 26일 플뢰뤼스에서 승리
1797–1799오백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798년 징병법을 발의·통과시켰고, 1799년 오스트라흐와 슈토카흐에서 패배
1804–1815나폴레옹에게 원수와 백작 작위를 받고 피에몬테 총독을 지냈으며, 1808년 스페인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참모장을 맡고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
1816–18331815년 이후 부르봉 왕가에 충성해 1816년 그르노블 총독, 1819년 프랑스 상원의원이 되었고,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해 잠시 외무를 맡은 뒤 앵발리드 총독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임
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
1800년 3월 유럽으로 돌아와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고, 6월 14일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우세하던 시점에 도착해 세 연대를 적 중앙에 투입했다. 승리 직전에 총탄에 맞아 죽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장군이다. 1768년 오베르뉴의 아야쉬르시울에서 태어나 에피아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왕립군에서 복무했다. 1792년 가족 대부분이 이민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라인군에 들어갔으며, 라우터부르크 전투의 공로로 준장이 되었다. 라인군과 1795~1796년 원정에서 복무하며 모로의 퇴각을 엄호했고, 잉글랜드 방면군 사령관을 지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맘루크의 공격을 맞았고 상이집트 원정으로 현지 주민에게 '정의의 술탄'이라 불렸다. 1800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마렝고에서 부데 사단과 함께 반격을 이끌었고 승리 직전에 전사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위대한 장군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이 과들루프에 파견한 원정군 사령관.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했으나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고, 반란은 1804년까지 이어졌다.
1770년 메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복무하던 콩티 용기병연대에 5세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혁명을 지지했고 1791년 소위, 1793년 대위, 1794년 기병대장을 거쳐 1796년 클레베르에 의해 준장으로 승진했다. 오슈 휘하에서 라인·삼브르뫼즈 군에서 복무하며 네우비트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1800년 모로의 라인 군에서 사단을 지휘해 12월 3일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우회 기습해 승리를 결정지었다. 1801년 라인 군 해산 뒤 바타비아 공화국 기병 총감독이 되었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은 그를 과들루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한 뒤 노예제 강제 재도입을 집행했다.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다.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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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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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