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러시아

191 명

해당 인물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

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11–1848 ○ 폐결핵으로 사망

러시아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 문학 비평가

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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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 1847고골의 『친구와의 왕복서한선』을 규탄하는 공개서한 작성, 필사본으로 전국 유포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게르첸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2–1870 ○ 폐렴

러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창시자, 《종》의 발행인

「우리는 해방하는 자와 함께, 그가 해방하는 한 함께 간다」 —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을 환영하며 《종》에 게재한 논설에서.

러시아의 작가·철학자이자 '러시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농민 공동체(오브시나)에 기초해 자본주의를 우회하는 사회주의 이행론을 정립했다. 런던 망명 중 발행한 《종》(콜로콜)은 개혁기 여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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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수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835–1842반정부 모임 혐의로 체포, 페름·뱟카·블라디미르·노브고로드 유형
  • 1842–1847모스크바에서 서구파 지식인으로 활동, 소설 《누구의 죄인가》 발표
  • 1847러시아를 영구히 떠나 유럽 망명
  • 1852런던 정착, 자유 러시아 인쇄소 설립
  • 1855–1868연감 《북극성》 발행, 푸시킨·레르몬토프의 금지시와 자유주의 논설 수록
  • 1857–1867주간지 《종》(콜로콜) 발행, 러시아 개혁 여론 주도
  • 1864–1870제네바에서 망명 출판 지속, 만년의 《과거와 사색》 집필 완성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 오가료프

Николай Платонович Огар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3–1877 ○ 망명 중 사망

게르첸과 함께 《종》을 편집한 러시아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론가

「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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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 1856–1867런던 망명, 게르첸과 자유 러시아 인쇄소·《종》·《북극성》 공동 운영
  • 1861–1863비밀결사 '토지와 자유' 공동 창설, 폴란드 봉기 지지
  • 1865–1877제네바 이주 후 런던 귀환, 바쿠닌 협력, 그리니치에서 사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14–1876 ○ 병사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분열의 중심

1869년 바젤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혁명가도 절대 권력을 쥐면 1년 안에 차르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국가와 무정부』

트베리 귀족 출신,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축출되었고, 『국가와 무정부』(1873)로 무국가 연방주의를 체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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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5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 소위 임관 후 상관 모독으로 면직, 모스크바 스탄케비치 서클 합류
  • 1840–1842베를린 대학 — 헤겔 좌파 합류, 가명 쥘 엘리자르로 「독일에서의 반동」 발표
  • 1843–1847파리·브뤼셀 — 프루동·마르크스와 교류, 폴란드 독립 연설로 프랑스 추방
  • 1848–1849프라하 범슬라브 대회, 프라하·드레스덴 봉기 지도 — 작센·오스트리아 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851–1861러시아 송환 — 페트로파블롭스크·슐리셀부르크 6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미국 경유 탈출
  • 1861–1864런던 망명 — 게르첸 『콜로콜』 편집 참여, 폴란드 봉기(1863) 지원 원정 실패
  • 1864–1868이탈리아 —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결성, 『혁명적 카테키즘』(1865–66) 집필, 국제형제단 창설
  • 1868–1872제1인터내셔널 가입,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조직 — 마르크스와 투쟁, 1872년 헤이그 대회 축출
  • 1872–1876루가노·로카르노 — 『국가와 무정부』(1873), 미완성 『신과 국가』 집필, 베른에서 병사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밀류틴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6–1912 ○ 자연사

20년간 전쟁장관으로 러시아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탈바꿈시킨 대개혁의 군사 설계자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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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5근위대 장교, 캅카스 전쟁 참전, 중상
  • 1845–1856육군대학 교수, 『1799년 전쟁사』(5권)로 데미도프상
  • 1856–1860캅카스군 주임참모, 샤밀 체포 작전 수행
  • 1861–1881전쟁장관: 전군 징병제, 군관구제, 사관학교 근대화, 병사 기초교육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플레브나 포위 지속 주장, 승리 견인
  • 1878백작 수여, 전후 부패 조사 위원회 설치
  • 1881–1912알렉산드르 3세 즉위 후 사임, 시메이즈에서 회고록 집필
  • 1898제국 최후의 야전원수 진급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2세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II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8–1881 ✕ 인민의 의지에 의한 암살

농노해방과 대개혁으로 구체제를 위로부터 현대화하려 했던 차르, 혁명가들의 표적이 되다

1856년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한 연설: "현행 농노 소유 질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래로부터 저절로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1855년 크림전쟁의 패배 속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아래로부터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다'며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젬스트보 자치·사법 개혁·병역 개혁을 차례로 단행했다. '해방자 차르'로 불렸으나, 개혁은 급진파에게는 불충분했고 보수파에게는 지나쳤으며, 1866년 암살 미수 이후 반동으로 기울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 헌법 초안에 서명한 바로 그날,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대개혁 시대의 종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적 테러를 러시아 정치의 결정적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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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5아버지 니콜라이 1세 즉위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55차르 즉위; 크림전쟁 패배 속에 즉위
  • 1856파리 조약으로 크림전쟁 종결; 대관식에서 정치범 사면
  • 1861농노해방령 — 2,300만 농노 해방
  • 1863–64폴란드 봉기 진압; 핀란드 의회 재소집
  • 1864젬스트보(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
  • 1874전계급 징병제 도입 — 군제 개혁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불가리아 해방
  • 1880로리스멜리코프에게 헌법 초안 위임
  • 1881.3.13인민의 의지(나로드나야 볼랴) 소속 이그나치 그리네비츠키의 폭탄에 치명상, 겨울궁전에서 사망

미하일 니키포로비치 카트코프

Михаил Никифорович Кат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8–1887 ○ 자연사

『러시아 통보』와 『모스크바 소식』으로 여론과 조정을 움직인 '러시아의 천둥소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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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8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졸업
  • 1840–1841베를린 대학 수학, 셸링 철학 강의 수강
  • 1845–1850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조교수
  • 1851–1855『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초대 편집자
  • 1856–1887『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자 겸 발행인
  • 1863–1887『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편집자 겸 임차인
  • 1868차레비치 니콜라이 기념 리체움 공동 설립
  • 1882추밀원 의원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Некрасов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21–1878 ○ 장암

농민의 고통을 노래하고 《동시대인》을 혁명적 문학의 중심으로 만든 시인·출판인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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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 1873–1876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 집필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다닐렙스키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Даниле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2–1885 ○ 심장마비로 사망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러시아 문명의 독자성을 논증한 범슬라브주의 철학자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와 유럽』을 '모든 러시아인의 책상 위 필독서'라 불렀다.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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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표트르 라브로비치 라브로프

Пётр Лаврович Лавр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3–1900 ○ 자연사

『역사적 편지』로 인텔리겐치아의 '민중에 대한 빚'을 선언한 나로드니키 철학의 기초적 이론가

『러시아 혁명 청년에게』(1874): "러시아 사회의 재건은 인민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대중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우리 사상의 승리는 준비와 현 시점에서 가능한 것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포병장교이자 수학 교수로 출발하여 1860년대 혁명운동에 투신, 카라코조프 사건으로 유형된 볼로그다에서 『역사적 편지』(1868–69)를 집필했다. 이 저작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이 민중에 대한 지적 빚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870년대 '민중 속으로' 운동의 사상적 도화선이 되었다. 망명 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파리코뮌을 목격했으며, 제네바에서 『브페료트!』지를 발행하여 바쿠닌의 급진적 봉기론 및 트카초프의 음모적 전위당론과 논쟁하며 점진적 선전·교육 노선을 체계화했다. 후기에는 인민의지파와 협력하고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으며, '의식적 역사적 연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회학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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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7–1842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수석 입학·졸업, 수학 재능으로 오스트로그라츠키의 최우수 제자로 꼽힘
  • 1844–1866미하일롭스크 포병아카데미 수학 교수 — 1858년 대령 진급, 『실천철학 제문제 연구』(1860) 출간
  • 1862–1866첫 번째 '토지와 자유' 참여, 체르니솁스키와 교류, 학생운동 지원 — 카라코조프 사건 후 체포
  • 1867–1870볼로그다 유형 — 가명 '미르토프'로 『역사적 편지』(1868–69) 집필, 로파틴 도움으로 파리 탈출
  • 1870–1872파리 망명 — 제1인터내셔널 가입, 파리코뮌 목격,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회견
  • 1873–1877제네바·런던에서 『브페료트!』 잡지·신문 발행 — '라브리즘'(선전 중심 점진주의) 체계화, 바쿠닌·트카초프와 논쟁
  • 1883–1886인민의지파와 협력, 티호미로프와 『인민의지 회보』 공동 편집
  • 1889–1900제2인터내셔널에서 흐느착당 대표, 파리 사회주의 살롱 주재, 『사상사 주요 계기들』 저술 — 몽파르나스 묘지 안장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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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미하일 예브그라포비치 살티코프-셰드린

Михаил Евграфович Салтыков-Щедрин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26–1889 ○ 뇌졸중으로 사망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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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8군부성 문서국 관리
  • 1848–1855뱟카 유배, 지방 관료
  • 1858–1860랴잔 부지사
  • 1860–1862트베리 부지사
  • 1863–1864《동시대인》 기고
  • 1864–1868펜자·툴라·랴잔 재무국장
  • 1868–1884《조국의 수기》 편집장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27–1907 ○ 자연사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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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니솁스키

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8–1889 ○ 뇌출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레닌 세대를 만든 혁명적 민주주의자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2판 후기에서 체르니솁스키를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라고 불렀고, 엥겔스는 그와 도브롤류보프를 '사회주의적 레싱들'이라 칭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가로, 『소브레멘니크』를 이끌며 유물론 미학과 농업사회주의를 정립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쓴 『무엇을 할 것인가?』(1863)는 두 세대 혁명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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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3『오체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등에 첫 글 게재
  • 1855–1862『소브레멘니크』 실질적 편집장 — 혁명적 민주주의 기관지로 전환
  • 1855석사논문 『예술의 현실에 대한 미학적 관계』 — 유물론적 미학 선언
  • 1860『철학에서의 인류학적 원리』 — 포이어바흐적 유물론의 전개
  • 1862–1864체포·수감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집필
  • 1864민사처형 후 7년 카토르가형, 평생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864–1883카다야·알렉산드롭스키 자보트 카토르가, 빌류이스크 유형 — 『프롤로그』 집필
  • 1883–1889아스트라한 귀환 허가, 사라토프 이주 — 만년 저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828–1910 ○ 폐렴

『전쟁과 평화』의 작가이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국가와 교회에 맞선 백작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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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 1862–1869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 집필 완성
  • 1873–1878『안나 카레니나』 발표
  • 1879–1882영적 위기와 회심 — 『참회』 집필, 정교회 교리·국가·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시작
  • 1884–1899『내 안의 하느님 나라』『부활』 등 발표, 기독교 아나키스트·평화주의자로 국제적 명성
  • 1901–1910정교회 파문, 간디와 서신 교환, 1910년 10월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아스타포보에서 사망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Фёдор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9–1903 ○ 병사

죽은 자의 부활을 과학의 공동 과업으로 제시한 러시아 코스미즘의 창시자

톨스토이가 "나는 이 도서관에서 책 몇십 권만 남기고 다 버리겠소"라고 하자, 표도로프는 "나는 바보를 많이 봤지만 이런 바보는 처음이오"라고 응수했다.

러시아 코스미즘 창시자. 과학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선조를 부활시키자는 '공동 과업'을 주창했다. 치올콥스키를 가르쳤고,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에게 '모스크바의 소크라테스'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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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9–1851오데사 리슐리외 리체움 수학 — 숙부 사망으로 중퇴
  • 1854–1868리페츠크·보롭스크·보고로츠크·우글리치 등지의 군(郡) 학교에서 역사·지리 교사
  • 1869–1874체르트코프 도서관 보조 사서 — 치올콥스키와 만나 지도
  • 1874–1899루먄체프 박물관 사서 — 최초의 체계적 도서 목록 편성, 일요일 토론 클럽 운영
  • 1880s–1890s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솔로비요프와 교류하며 「공동 과업」 구상 전파
  • 1903모스크바 빈민 숙소에서 폐렴으로 사망, 제자들이 유고를 모아 『공동 과업의 철학』 출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도브롤류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обролюб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36–1861 ○ 결핵

25세 요절로 러시아 혁명 세대 전체의 스승이 된 문학비평가

엥겔스는 1884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라는 두 사회주의적 레싱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가. 체르니솁스키와 『소브레멘니크』에서 문학비평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만들었다. 엥겔스가 '사회주의적 레싱'이라 부른 그는 25세 요절 후에도 혁명 세대의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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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3페테르부르크 중앙교육학원 입학 — 지하 민주주의 서클 조직
  • 1854–1855부모 사망 후 급진적 반군주제·반농노제 시와 수기신문 『슬루히』 발행
  • 1856체르니솁스키·네크라소프와 만남 — 『상트페테르부르크 통보』에 첫 기사 게재
  • 1857–1861『소브레멘니크』 비평·서지부장 — 풍자란 「스비스토크」 주재
  • 1859「오블로모프주의란 무엇인가?」 — 곤차로프 소설을 사회비판의 도구로 전환
  • 1860「한 줄기 빛」·「진정한 날」 —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의 정점
  • 1860–1861결핵 치료차 유럽 체류 — 이탈리아 통일운동 취재, 귀국 후 사망

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39–1917 ✕ 강도에게 피살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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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 1891법무차관
  •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 1916제1급 추밀고문(제국 최후의 수훈자), 해임
  • 1917.12소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됨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피사레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Писар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40–1868 ✕ 익사 (27세)

부숴야 할 것은 부숴야 한다고 선언한 러시아 허무주의의 기수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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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8–1861여성잡지 『라스베트』(Рассвет) 서평 기고
  • 1860–1862『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 비평가·사실상의 주필
  • 1862–1866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옥중 집필
  • 1866–1868『델로』(Дело)·『조국의 수기』(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 기고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미하일롭스키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ихайл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42–1904 ○ 자연사

나로드니키 지식인의 '사상의 지배자', 주관적 사회학과 영웅-군중론의 창시자

그는 '사실의 진리(правда-истина)'와 '정의의 진리(правда-справедливость)'를 구별하며 이렇게 썼다: '이론적 하늘의 진리가, 실천적 대지의 정의와 분리되는 것—나는 언제나 여기에 상처받았다.'

나로드니키 이론가이자 문예비평가.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과 영웅-군중론을 정립하고, 자유롭게 선택된 이상이 역사를 바꾼다고 주장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 평론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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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2–56코스트로마 김나지움 수학
  • 1856–62페테르부르크 광산기술대학, 학생 소요로 퇴학
  • 1860잡지 《라스베트》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68–84《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필자, 네크라소프 사후 공동 편집인
  • 1879나로드나야 볼랴와 접촉, 기관지에 기고
  • 1882, 1891혁명적 연계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
  • 1892–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공동 편집인 (코롤렌코와 함께)
  • 1890s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

표트르 니키티치 트카초프

Пётр Никитич Ткач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44–1886 ○ 병사

혁명적 전위당 독재를 최초로 체계화한 러시아 자코뱅파 나로드니키 이론가

레닌의 비서 본치-브루예비치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은 바쿠닌·라브로프·트카초프를 거론하며 "그들 중 우리 볼셰비키에게 가장 잘 맞은 것은 바로 트카초프였다"고 말했다.

러시아 자코뱅파 나로드니키 이론가. 바쿠닌·라브로프와 결별하고 비밀결사의 권력 장악과 혁명적 소수독재를 주창했다. 제네바에서 『나바트』를 발행했고, 전위당 개념은 레닌의 당 조직론에 결정적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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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1862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입학, 학생 소요 참여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862–1869『루스코예 슬로보』 · 『델로』 기고 — 급진 문학 비평, 경제 통계, 마르크스 소개
  • 1868–1869네차예프와 함께 페테르부르크 학생 소요의 급진 소수파 지도
  • 1869–1873체포·재판 — 1년 4개월형 후 시브초보 유형, 1873년 12월 해외 탈출
  • 1875–1881제네바에서 기관지 『나바트』(Набат) 발행 — 러시아 블랑키즘의 강령 완성
  • 1877K. M. 투르스키와 「인민해방협회」 창설 (러시아 내 활동은 미미)
  • 1882–1886정신 질환 발병 — 파리 정신병원 입원, 41세로 사망

예카테리나 콘스탄티노브나 브레시코-브레시콥스카야

Екатерин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Брешко-Брешковская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44–1934 ○ 망명 중 자연사

44년간 감옥과 유형을 견딘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 사회주의혁명당 공동 창립자

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주의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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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 1901–1903사회주의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3세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III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45–1894 ○ 신장염으로 사망

부친의 대개혁을 되돌리고 전제정치를 재확립한 '평화를 만드는 자'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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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으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66포베도노스체프에게 법률 교육을 받기 시작하다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루슈크 분견대 지휘
  • 1881.3.13부친 암살 후 즉위
  • 1881.4.29'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공포, 반개혁 시작
  • 1889토지대장(zemsky nachalnik) 제도 도입으로 농촌 귀족 통제 강화
  • 1892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5–1912 ○ 지병으로 사망

모스크바 12월 봉기를 포격으로 진압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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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해군사관학교 졸업
  • 1877기뢰정으로 터키 장갑함 격침, 성 게오르기 4급 훈장 수훈
  • 1897–1899태평양함대 사령관, 뤼순항 점령
  • 1901–1905해군기술위원회 의장
  • 1905–1906모스크바 총독, 12월 무장봉기 진압
  • 1906국가평의회 위원;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생존하고 해군 대장 진급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두르노보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Дурнов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45–1915 ○ 병사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세계대전의 파국을 예견한 제정 내무장관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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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해군사관학교 졸업, 태평양·발트 함대 복무
  • 1870군사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검사보로 전임
  • 1884–1893내무성 경찰국장
  • 1893–1900원로원 의원
  • 1900–1905내무차관 (우편·전신 담당)
  • 1905.10–1906.04내무장관 (비테 내각)
  • 1906–1915국무회의 의원, 우파 그룹 지도자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폰 플레베

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계) 1846–1904 ✕ 암살

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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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세르게이 겐나디예비치 네차예프

Сергей Геннадиевич Неча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47–1882 ○ 옥사

『혁명가의 교리문답』 저자,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허무주의 혁명가

「혁명가는 파멸된 인간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이익도, 사업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이름조차도 없다. 그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 하나의 사상, 하나의 열정 — 혁명에 삼켜졌다」 — 『혁명가의 교리문답』 서두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집필한 허무주의 혁명가.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을 조직했으나 동료 살해로 추방당했다.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그의 '네차예프시나'는 혁명 조직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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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1866모스크바로 이주, 역사가 포고딘의 사무원으로 근무; 교사 시험 응시했으나 실패
  • 1867–1868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교사 자격 취득 후 교구학교 교사로 근무; 대학 청강생으로 급진 학생운동 참여
  • 1869.4–8자작 체포극을 꾸민 후 스위스로 망명; 바쿠닌·오가료프와 교류, '바흐메테프 기금' 1만 프랑을 확보; 『혁명가의 교리문답』 집필
  • 1869.9–11모스크바 귀환 후 비밀결사 '인민의 보복' 조직, 5인조 체계와 철저한 규율 도입; 자신에게 불복종한 학생 이바노프를 직접 살해
  • 1870–1872재차 해외 도주; 제네바에서 잡지 『인민의 보복』·『공동체』 발행;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됨
  • 1872–1873취리히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정부에 범죄인 인도; 모스크바 배심재판에서 20년 카토르가형 선고
  • 1873–188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알렉세이옙스크 라벨린에 독방 수감; 수비병 40여 명을 포섭하고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와 비밀 연락망 구축
  • 1882.12.3수종과 괴혈병 합병증으로 옥사, 35세; 시신은 니콜라옙스카야 철도 프레오브라젠스카야 역 인근에 매장(정확한 위치 미상)

니콜라이 예고로비치 주콥스키

Николай Егорович Жук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47–1921 ○ 병사

러시아 항공의 아버지, 유체역학의 수학적 토대를 세우고 TsAGI를 만든 과학자

당대 과학자들이 인간 비행을 비웃을 때, 주콥스키는 1891년 강연 「새의 비상에 관하여」에서 글라이더의 '죽음의 루프' 가능성을 수학으로 증명했고, 22년 후 네스테로프가 하늘에서 그 증명을 완성했다.

러시아 항공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유체역학의 아버지. 새의 비행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양력의 순환이론을 정립했고, 1902년 모스크바대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건설했다.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쿠치노에 세웠고, 1918년에는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소련 항공·우주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제자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등이 소련 항공 산업을 이끌었으며, 치올콥스키의 고립된 이론을 국가적 연구 역량으로 전환시킨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콥스키의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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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응용역학 전공 졸업
  • 1872제국모스크바기술학교 교수, 분석역학 담당, 1920년까지 재직
  • 1885모스크바대학 교수, 유체역학 및 응용역학 강의
  • 1902모스크바대학에 러시아 최초의 흡입식 풍동 건설 지휘
  • 1904쿠치노에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 설립, 소장 취임
  • 1908모스크바기술학교에 항공동호회 창설, 훗날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배출
  • 1918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 창설, 초대 소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8–1909 ○ 심장마비로 사망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함대를 이끈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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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 1906군법회의에서 부상으로 인한 무죄 판결, 퇴역
  • 1909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그루지야 1849–1915 ○ 자연사

차르가 미워한 구원투수

1888년, 측근들 앞에서 "화물 기관차 두 대로 황실 열차를 끌면 위험하다"고 직언했다. 며칠 후 보르키 탈선 사고.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국철 책임자로 발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금본위제를 주도한 제국 근대화의 설계자. 1905년 일본과 강화를 맺고 10월 선언을 받아냈으나, 차르는 위기를 넘겨준 그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한직에서 회고록을 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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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03재무장관, 금본위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업화 드라이브
  • 1905.9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 협상 타결
  • 1905.10초대 총리, 10월 선언 기초
  • 1906.4해임, 이후 국가평의회 한직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무롬체프

Сергей Андреевич Муромц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0–1910 ○ 심장마비

러시아 최초의 헌법적 의회를 이끈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지도자

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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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모스크바 대학 로마법 도첸트
  • 1877법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교수
  • 1880–1892《법률 회보》 편집자, 모스크바 법률학회 회장
  • 1905.10입헌민주당(카데트) 공동 창립, 중앙위원
  • 1906.4–7제1대 국가두마 의장
  • 1908비보르크 호소 서명으로 3개월 수감
  • 1910사망; 장례식이 대규모 반체제 시위로

마르크 안드레예비치 나탄손

Марк Андреевич Натансо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리투아니아 유대계 러시아인 1850–1919 ○ 자연사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좌파 에스에르까지, 반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위대한 결집자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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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차이콥스키 서클 공동 창립
  • 1876플레하노프와 카잔 광장 시위 조직; '토지와 자유' 결성 주도
  • 1893'인민의 권리'당 창립
  • 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 선출
  • 1915–1916치메르발트·킨탈 회의 참가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 1918혁명적 공산당 공동 창립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골리친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Голицы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0–1925 ✕ 총살

스스로 무능을 고백한 제국의 마지막 총리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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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1879내무부 관료, 폴란드령에서 농민 담당
  • 1879–1885아르한겔스크 부지사,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
  • 1885–1903아르한겔스크·칼루가·트베리 지사
  • 1903–1915원로원 의원, 국가평의회 의원
  • 1915–1916러시아 포로구호위원회 의장
  • 1917.01–03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트

Павел Борисович Аксельрод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0–1928 ○ 자연사

대중 노동자 정당의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패배한 논쟁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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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 1876–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 1881–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 1900–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 1903–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 1906–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 1917귀국,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10월 혁명 반대하고 재망명
  • 1918–28멘셰비키 망명 지도부; 반볼셰비키 노선 견지; 베를린에서 사망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랴보프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Желяб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1–1881 ✕ 처형

황제 암살을 조직한 인민의 의지당 실질적 지도자, 경찰 대열을 향해 당의 신념을 선포한 혁명가

「나는 인민 해방의 대의에 봉사해왔다. 이것이 내 유일한 직업이며, 나는 오랜 세월 전 존재를 바쳐 이에 헌신해왔다」 — 1881년 예심 조사에서.

농노 출신으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실질적 지도자였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총괄 기획했고, 체포 이틀 뒤 암살이 성공했다. 법정에서 인민 해방의 신념을 선언한 뒤 1881년 4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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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1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대학 법학부 입학, 학생 소요 주도로 제적·추방
  • 1873–1877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민중 속으로' 선전운동 참가, 체포 후 '193인 재판'에서 무죄
  • 1879.6리페츠크 대회 참석,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창립 멤버
  • 1879.11알렉산드롭스크에서 황제 열차 폭파 미수
  • 1880.2스테판 할투린의 겨울궁전 폭파 기획 지휘
  • 1880–1881집행위원회 실질적 수장, 노동자·학생·군대 조직망 구축, 황제 암살 계획 총괄
  • 1881.2.27암살 이틀 전 체포, 사건 합류 자청
  • 1881.4.3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집행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스테프냐크-크라프친스키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пняк-Кравчи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1–1895 ✕ 열차 사고사

차르 헌병대장을 단검으로 처단하고 펜으로 서구에 러시아 혁명을 소개한 나로드니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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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키발치치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ибальчич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3–1881 ✕ 교수형

차르 암살 폭탄을 설계하고 감옥에서 최초의 유인 로켓을 구상한 인민의 의지당 기술자

「나는 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믿으며, 이 믿음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지탱한다… 내 생각이 나와 함께 죽지 않고 인류와 함께 남을 것을 알며 평온히 죽음을 맞으리라」 — 1881년 3월, 감옥에서 작성한 유언 편지.

러시아 혁명가이자 '인민의 의지'의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을 설계·제조했다. 사형을 앞둔 감옥에서 분말 추진제, 짐벌식 추력 제어, 안정 날개를 갖춘 세계 최초의 유인 로켓 비행 장치를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1918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공개되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선배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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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페테르부르크 철도공병대학 입학
  • 1873페테르부르크 의과외과대학 편입, 로켓 추진 실험 착수
  • 1875–1878금서 유포 혐의로 키예프 루키야놉스카야 감옥 수감
  • 1879'인민의 의지' 가입,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활동
  • 1881.2「정치혁명과 경제문제」를 『나로드나야 볼랴』지에 발표
  • 1881.3.1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 4기 제조
  • 1881.3.23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서 유인 로켓 비행 장치 설계 완성
  • 1881.4.3다른 페르보마르톱치들과 함께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소피야 리보브나 페롭스카야

Софья Львовна Перовская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3–1881 ✕ 처형

흰 손수건으로 차르 암살을 지휘한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 러시아 첫 여성 정치범 사형수

「우리는 위대한 대의를 시작했다. 어쩌면 두 세대가 이 위에 누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한다」 — 동지들에게 남긴 말.

귀족 출신, 17세에 가문을 떠나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1881년 젤랴보프 체포 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지휘, 흰 손수건으로 폭탄 신호를 보냈다. 동지 밝히지 않고 27세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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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0알라르친 여성 과정 입학, 자주학습 서클 참여; 17세에 아버지와 결별하고 자택 이탈
  • 1871–1873나로드니키 서클 결성, 나탄손 서클과 합류; 『자본론』 번역 참여; 차이콥스키 서클 가입, 노동자 계몽과 '민중 속으로' 운동
  • 1874–1878첫 체포·6개월 수감 후 석방; 펠처 자격 취득; '193인 재판' 무죄; 민스킨 탈옥 지원 실패; 올로네츠 유형 도중 볼호보역 탈주, 지하운동 전념
  • 1879.6리페츠크·보로네시 대회 참석, '토지와 자유' 분열 저지 노력;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공동 창립
  • 1879.11모스크바 인근 황제 열차 폭파 기도 — '선로감시원 수호루코프의 아내'로 위장
  • 1880오데사 황제 암살 기도 참여; 젤랴보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노동자서클 조직 (300여 명)
  • 1881.3.1젤랴보프 체포(2.27) 후 작전 지휘 인수; 예카테리나 운하에서 흰 손수건 신호로 투척수들에게 폭탄 투척 지시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 1881.3.10–4.3넵스키 대로서 체포, 특별심판 사형 선고,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교수형 — 러시아 최초 여성 정치범 사형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Сахар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1853–1920 ✕ 녹색군에 체포 · 처형

브루실로프 공세의 11군 사령관이자 백군에 합류한 기병대장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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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8육군 입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0–1897군사학교 교관, 참모직, 기병연대장 역임
  • 1900–1901의화단 진압 작전 중 북만주 주둔군 사령관
  • 1904–1905러일전쟁: 만주군 야전참모장, 총사령관 참모장
  • 1906–1914제7군단장, 제11군단장, 기병대장 진급 (1908)
  • 1914–1915제11군단 이끌고 갈리치아 전투 및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참전
  • 1915–1916제11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브로디 점령
  • 1916–1917두너이군 사령관, 루마니아 전선 총사령관 보좌관
  • 19172월 혁명 후 구치코프에 의해 해임
  • 1918–1920백군에 가담, 크림반도에서 녹색군에게 체포·처형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Владимир Галактионович Короленко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1 ○ 폐렴으로 사망

제정도 볼셰비키도 거부한 러시아 문학의 양심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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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 1917–1921볼셰비키 테러 비판 — 루나차르스키 서한, 기근 구호 활동 중 사망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6 ○ 심장마비로 사망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 혁명 후 붉은 군대에 합류한 제정 러시아 최후의 명장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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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5트베리 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아르다한·카르스 공략에서 두각
  • 1902–1906기병장교학교 교장, 러시아 기병 교육의 중심 인물
  • 1914–1916제8군 사령관 → 남서전선 총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 지휘
  • 1917.5–7러시아군 최고사령관, 6월 공세 실패 후 경질
  • 1920–1924붉은 군대 기병 감찰관, 혁명군사평의회 특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즈스키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з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4–1918 ✕ 적군에 인질 살해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강요한 북부전선 사령관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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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 1917.04임시정부와의 군기 유지 갈등으로 사임, 캅카스 광천으로 이주

표도르 이즈마일로비치 로디체프

Фёдор Измайлович Родич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4–1933 ○ 망명 중 사망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로 교수대를 고발한 카데트의 두마 연사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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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세르비아-튀르크 전쟁 의용군 참전
  • 1877–1895트베리 현 젬스트보 활동가, 베세곤스크 현 귀족 대표(1879–1891)
  • 1898–1904페테르부르크 변호사, 학생 시위 항의 서명으로 추방
  • 1904–1905젬스트보 대회·연회 캠페인 공동 조직,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참여
  • 1906–1917제1~4차 국가두마 카데트 의원, 중앙위원
  • 1917.03–05임시정부 핀란드 담당 위원
  • 1918–1920백군 진영 참여, 세르비아·폴란드 파견 대표
  • 1920–1933망명: 파리, 이후 로잔에서 여생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트레포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5–1906 ○ 심부전으로 사망

진압 명령과 개혁 약속을 한 손에 쥔 1905년의 얼굴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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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기마연대 배속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텔리시 전투에서 부상
  • 1896–1905모스크바 경찰총감
  • 1900소장 진급
  • 1905.1–10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비상대권)
  • 1905.5–10내무차관, 경찰·헌병대 사령관
  • 1905.10–1906.9황실 궁정 경비사령관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

Георгий Валентинович Плеха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6–1918 ○ 자연사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제자들의 혁명에 반대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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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80「토지와 자유」 활동가, 망명
  • 1883제네바에서 「노동해방단」 창립: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시작
  • 1889–1914제2인터내셔널의 러시아 대표 이론가
  • 1903당 분열에서 점차 멘셰비키 쪽으로
  • 191737년 만의 귀국, 10월 봉기 반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6–1929 ○ 망명 중 병사

차르 앞에서 권총을 꺼내 입헌군주제를 강요한 대공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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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884근위 후사르 연대장
  • 1895–1905기병 총감
  • 1905군사독재 거부, 니콜라이 2세에게 10월 선언 수용 촉구
  • 1905–14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14–15제1차 세계대전 최고사령관
  • 1915–17캅카스 총독 겸 캅카스 전선 사령관
  • 1922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전러시아 황제로 추대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Пётр Дмитрие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7–1914 ○ 자연사

"신뢰의 시대"를 약속했으나 피의 일요일로 끝난 비운의 내무장관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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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펜자 주지사
  • 1897–1900예카테리노슬라프 주지사
  • 1900–1902내무차관 겸 헌병단장
  • 1902–1904빌나·코브노·그로드노 총독
  • 1904.8–1905.1내무장관, '신뢰의 시대'
  • 1905.1피의 일요일 후 사임, 정계 은퇴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알렉세예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е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7–1918 ○ 심장마비 사망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백군 의용군의 기초를 놓은 차르의 마지막 참모총장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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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 1890–1904참모본부 근무, 니콜라이 아카데미 교수
  • 1904–1905제3 만주군 병참총감 (러일전쟁)
  • 1908–1912키예프 군관구 참모장
  • 1912–1914제13 군단장
  • 1914–1915남서전선 참모장 (갈리치아 공세 입안)
  • 1915북서전선 총사령관, 대후퇴 조직적 지휘
  • 1915–1917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 — 전 러시아군 실질적 총지휘
  • 1917 3–5월임시정부 최고사령관
  • 1917–1918의용군(알렉세예프 조직) 창설자·최고지도자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하발로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Хаба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오세티야계) 1858–1929 ○ 빈곤 속 사망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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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6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 졸업, 근위대 참모 근무
  • 1903–1905모스크바 군사학교 교장
  • 1905–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
  • 1914–1916우랄주 군사령관 겸 우랄 코사크군 아타만
  • 1916–1917.02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17.02시위 진압 명령 수행 중 수비대 통제력 상실, 체포
  • 1917.10–1929석방 후 남러시아에서 생활, 예센투키에서 사망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망명 중 빈곤 속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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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칼레딘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Калед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1–1918 ✕ 권총 자살

돈에서 첫 백군 거점을 연 카자크 아타만

1918년 2월 11일, 마지막 정부회의에서 방어를 위한 총검이 147자루뿐임을 듣고 사임한 그날, 알렉세예프에게 남긴 유서: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을 맡아 루츠크를 돌파한 제국 육군 기병대장. 1917년 6월 돈 카자크 최초의 선출 아타만이 되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을 전면 거부하며 돈 지역을 독립시켜 남부 백군의 첫 거점을 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카자크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의용군마저 돈을 떠나려 하자 「카자크가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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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06노보체르카스크 카자크 사관학교장
  • 1912–15제12기병사단장,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지휘
  • 1915–16제12군단장, 제8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돌파
  • 1916–17기병대장 승진, 제8군 사령관직 유지
  • 1917.6돈 카자크 아타만에 선출 (1709년 이후 첫 선거)
  • 1917.10–11소비에트 권력 불인정, 돈 지역 독립 선포, 백군 장교 수용
  • 1918.1–2카자크 중립 선언으로 전선 붕괴, 사임 후 권총 자살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1–1925 ○ 망명 중 빈곤 속 사망

류리크 왕조의 후예, 제국의 마지막 자유주의 총리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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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3툴라 현 젬스트보, 기근 구호 활동
  • 1900–1906툴라 현 젬스트보 행정위원회 의장
  • 1904–1905러일전쟁: 젬스트보 의료여단 조직·지휘, 전국적 영웅
  • 1906제1대 국가두마 의원(카데트), 의료·식량위원회 위원장
  • 1914–1917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 의장, 육군 의료·보급망
  • 1915–1917젬고르 공동위원회 지도자, 전시 군수·구호 총괄
  • 1917.3–7임시정부 총리 겸 내무장관: 보통선거·사형폐지 등 개혁
  • 1918–1925체포·탈출, 미국 거쳐 파리 망명, 회고록 집필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독일 1862–1911 ✕ 암살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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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2–1933 ○ 폐결핵

캅카스 전선을 승리로 이끌고 백군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제국 러시아의 마지막 명장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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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1–87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제18소총연대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산데푸·무크덴 전투에서 부상
  • 1913–15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 캅카스군 참모장 → 보병대장 진급 및 캅카스군 사령관
  • 1916에르주룸·트레비존드·에르진잔 점령,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
  • 1917.5캅카스 전선 총사령관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불복종'으로 해임
  • 1919.6–10북서군 총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 공세,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 후 패퇴
  • 1920.1북서군 해산 명령, 에스토니아에서 체포 후 석방, 프랑스로 망명

세르게이 예피모비치 크리자놉스키

Сергей Ефимович Крыжан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62–1935 ○ 망명 중 자연사

1907년 「뻔뻔한」 선거법으로 두마를 길들인 제국의 법률 설계사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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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1896내무성 경제국 과장
  • 1904–1906내무성 지방경제총국 부국장
  • 1906–1911내무차관 (스톨리핀의 오른팔)
  • 1907상원의원 · 추밀고문관
  • 1911–1917제국 국무장관 (마지막 재임자)
  • 1917국가평의회 의원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구치코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уч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2–1936 ○ 망명 중 사망

차르의 퇴위를 받아낸 옥토브리스트 지도자, 보어전쟁 의용군에서 임시정부 장관까지

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는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의 황실 열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로부터 퇴위 조서를 받았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그 열차 안에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10월 17일 동맹'(옥토브리스트)을 이끌며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 개혁을 지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제3대 두마 의장과 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라스푸틴과 궁정을 공개 비판하며 니콜라이 2세의 적이 되었다. 1917년 3월 2일 바실리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받아냈으며, 임시정부 초대 육군해군장관이 되었으나 4월 위기로 사임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백군을 후원했다. 보어전쟁 의용군, 티베트 여행, 수차례 결투로 점철된 모험가적 삶을 살았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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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2보어전쟁 의용군, 부상 후 영국군 포로
  • 1906'10월 17일 동맹' 중앙위원회 의장
  • 1907–1912제3대 두마 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
  • 1910–1911제3대 국가두마 의장
  • 1915–1917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
  • 1917.3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7.3–4임시정부 육군해군장관
  • 1919–1936백군 후원, 파리 망명

블라디미르 리보비치 부르체프

Владимир Львович Бурц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2–1942 ○ 패혈증, 파리

차르 비밀경찰의 도발자들을 연쇄 폭로한 '혁명의 셜록 홈스'

10월 혁명 당일 밤, 트로츠키가 보낸 체포대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자택 문을 두드렸다. 부르체프는 반볼셰비키 신문 《나셰 옵셰예 델로》를 그날 아침 발행한 직후였다.

나로드나야 볼랴 출신의 혁명가이자 출판인으로, 예브노 아제프를 비롯한 오흐라나의 도발자들을 연쇄적으로 폭로하여 '러시아 혁명의 셜록 홈스'로 불렸다. 역사 저널 《빌로예(Былое)》를 창간해 19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기록을 체계화했으며, 베른 재판에서 《시온 장로 의정서》가 오흐라나의 조작임을 증언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일 트로츠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의 첫 정치범이 되었고, 이후 망명지 파리에서 반볼셰비키·반파시즘 투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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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1885페테르부르크·카잔 대학 수학, 나로드나야 볼랴 서클 참여
  • 1885–1888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후 이르쿠츠크 유형
  • 1888–1904망명, 《스보보드나야 로시야》《나로도볼레츠》 발행, 런던서 《비록 100년》 출간
  • 1900–1907역사 저널 《빌로예》 창간·편집 (런던 및 페테르부르크)
  • 1906–1909오흐라나 도발자 연쇄 폭로 — 아제프, 하르팅 등
  • 1911–1914파리서 《부두셰예》 발행
  • 1914–1917귀국 후 체포·투루한스크 유형, 사면 후 반볼셰비키 《옵셰예 델로》 발행
  • 1918–1942파리 망명, 반볼셰비키·반파시즘 활동, 베른 재판 증언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볼로고츠키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Вологодский
반혁명 세력 러시아인 러시아인 1863–1925 ○ 망명 중 자연사

타협으로 백색 시베리아를 묶은 변호사 정치가

콜차크에게 그는 군 지휘관의 자의와 정부의 무능으로 권위가 시간마다 떨어진다고 직언했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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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7시베리아 사법기관 서기관·판사·검사보
  • 1897–1917톰스크 변호사, 도시 두마 의원
  • 1902–1907톰스크 사회혁명당 조직과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 지도자
  • 1917톰스크 губер니야 комиссар, 옴스크 사법원장
  • 1918.01–06자치 시베리아 임시정부 외무장관
  • 1918.06–11시베리아 임시정부 의장
  • 1918.11–1919.11러시아 정부 각료회의 의장
  • 1920–1925중국 망명, 법률·교민 업무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4–1917 ✕ 퇴위 소식에 권총 자살

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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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치헤이제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Чхеидзе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그루지야 1864–1926 ✕ 자살 · 파리

이중권력 시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혁명적 수호주의의 얼굴

「인민과의 직접적 소통을 잃자 그는 저항력을 상실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폭풍에 뽑혀 자양분을 공급하던 흙에서 분리되면 시든다. 치헤이제도 그렇게 갔다」 — 이라클리 체레텔리, 1926년 장례식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 멘셰비키. 『공산당 선언』을 그루지야어로 처음 옮겼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이중권력을 주재했으나 10월혁명에 반대했고, 그루지야 독립을 이끌며 파리 망명정부 수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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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메사메다시 가입, 『공산당 선언』 그루지야어 초역
  • 1898–1907바투미 시의회 의원·시 병원 감독관, RSDLP 입당(1898), 멘셰비키(1903~)
  • 1907–173·4대 두마 의원(티플리스 현), 멘셰비키 원내대표
  • 1917.2–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VTsIK 의장(6월~)
  • 1918–21자캅카스 세임 의장, 그루지야 제헌의회 의장, 독립선언 서명
  • 1919파리 강화회의 그루지야 대표
  • 1921–26프랑스 망명, 그루지야 망명정부 수반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키시킨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ишк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4–1930 ○ 자연사

10월 혁명 당일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전권자로 임명된 카데트 장관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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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미하일 이바노비치 투간-바라놉스키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Туган-Баран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1865–1919 ○ 심장마비로 사망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윤리적 사회주의로: 공황주기론을 개척한 경제학자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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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하리코프 대학 졸업, 자연과학 후보학위 취득
  • 1894『현대 영국의 공업위기』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 1895–189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치경제학 강사(사도첸트)
  • 1898『러시아 공장의 과거와 현재』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1900『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 참여 (프스코프)
  • 1901–1905폴타바 지역 젬스트보 활동, 『정치경제학 최근사 개요』 집필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및 폴리테크니크 강사·교수
  • 1909–1917『협동조합 통보』(Вестник кооперации) 편집장
  • 1917.8–11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서기)
  • 191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 사회경제부문 책임자

티혼 총대주교

Тихо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65–1925 ○ 자연사

혁명기의 교회를 이끈 총대주교

1922년 교회 귀중품 논쟁에서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와 성물의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티혼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이자 1917년 복원된 총대주교직의 첫 보유자로, 혁명 뒤 교회와 새 국가의 충돌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1921~1922년 기근 구호를 호소했지만, 1922년 2월 법령 뒤 성물의 일괄 인도가 교회법을 침해한다고 보아 자발적 기부와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이 입장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방어였지만, 성직자 탄압과 교회 재산 압수로 이어지는 대립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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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교수
  • 1897류블린 주교
  • 1898–1907알류샨·북아메리카 주교, 대주교
  • 1907–1913야로슬라블·로스토프 대주교
  • 1917모스크바 대주교, 모스크바 총대주교
  • 1917–1925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총살 (부토보)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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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8–1905.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s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Улья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66–1887 ✕ 교수형

레닌의 형, 벌레를 연구하던 금메달 동물학도에서 차르 암살을 기도한 혁명가

어머니의 사면 청원 권유에: "결투를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한쪽은 이미 총을 쐈습니다. 아직 쏘지 않은 상대에게 총을 쓰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레닌의 친형.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촉망받는 동물학도였으나, 1886년 돌연 혁명에 투신하여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 분파'를 조직하고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의 주모자가 되었다. 1887년 3월 1일('제2의 3월 1일') 암살 미수로 체포되어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17세 동생 블라디미르(훗날 레닌)를 혁명의 길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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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심비르스크 고전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3–1886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 수상
  • 1886인민의 의지당 가입, '테러 분파' 조직: 이념가이자 폭탄 제조자
  • 1887.02테러 분파 강령 작성, 알렉산드르 3세 암살용 폭탄 준비
  • 1887.03–053월 1일 체포, 4월 15–19일 재판,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6–1918 ✕ 체카에 처형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관료 경력 없이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도 혁명의 위협을 부정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에 무능했으며, 각료와 총리의 거듭된 사임 요구를 무시했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체포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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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4–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9–1917.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발크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Балк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6–1957 ○ 망명 중 사망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시장, 2월 혁명의 물결 앞에 선 경찰 관료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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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 1945–1957브라질 이주, 상파울루 근교 오자스쿠의 수도원 양로원에서 사망

표트르 페트로비치 시미트

Пётр Петрович Шмидт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67–1906 ✕ 총살

흑해함대에 적기를 올리고 차르에게 헌법을 요구한 혁명적 해군 장교

시미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 「…각하께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며, 더 이상 각하의 대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함대 사령관 P. 시미트.」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세바스토폴 해군 봉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순양함 오차코프에 적기를 올리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봉기는 90분 만에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베레잔 섬에서 총살당했지만, 그 이름은 소비에트 전역의 거리·함선·기념비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통해 '시미트 중위'로 불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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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해군사관학교 졸업, 미치만 임관
  • 1888–92사임, 파리에서 기구 비행 훈련 등 민간 생활
  • 1892해군 재입대
  • 1895중위 진급
  • 1904러일전쟁으로 현역 재소집
  • 1905.10세바스토폴 혁명 연설로 체포, 군중 압력으로 석방
  • 1905.11순양함 오차코프 봉기 지휘,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 선언
  • 1906.3.19베레잔 섬에서 총살형

블라디미르 제노노비치 마이-마옙스키

Владимир Зенонович Май-Мае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7–1920 ✕ 철수 중 권총 자살

의용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무리한 전선과 알코올 의존으로 무너진 백군 장군

1919년 여름, 영국 사절단은 '하리코프 장군'에게 수여하라는 훈장을 들고 의용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하리코프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고, 세인트마이클·세인트조지 훈장은 하리코프 주둔 사령관인 마이-마옙스키에게 주어졌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정 러시아 중장으로, 1918년 의용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뒤 빠르게 사단장으로 올랐고 1919년 5월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세에서 하리코프·쿠르스크·오룔을 연이어 점령하며 백군 중 가장 깊숙이 볼셰비키 수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과 돈군과의 협조 실패, 후방의 마흐노 봉기로 공세는 붕괴했고, 악화된 알코올 의존 탓에 1919년 11월 데니킨브란겔로 교체했다. 1920년 11월 크림 철수 중 세바스토폴에서 사망했으며, 권총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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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96제1사관학교·니콜라옙스크 공병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대령 진급
  • 1914–17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1근위군단 지휘, 중장 진급
  • 1918의용군 사병 입대, 드로즈돕스키 사후 제3소총사단장 취임
  • 1919.5의용군 사령관 임명, 하리코프 점령 후 지역 총사령관 겸임
  • 1919.6–10모스크바 공세 주도, 쿠르스크·오룔 점령
  • 1919.11공세 붕괴로 해임, 브란겔이 승계
  • 1920크림에서 후위부대 지휘, 세바스토폴 철수 중 사망

알렉산드르 리보비치 파르부스

Александр Львович Парвус
이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7–1924 ○ 심장마비

영구혁명론을 공동 창안하고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한 '혁명의 상인'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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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바젤대 박사학위, 독일 사민당 입당
  • 1894–1897『디 노이에 차이트』 필진, '파르부스' 필명 채택
  • 1897–1898『젝지셰 아르바이터차이퉁』 편집장
  • 1900레닌·마르토프와 『이스크라』 창간 지원
  • 1904–1905트로츠키와 영구혁명론 공동 정식화
  • 1905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전략가, 「재무선언」 기초
  • 1915독일 외무부에 러시아 혁명 계획 제출, 코펜하겐 작전망 구축
  • 1917레닌의 '봉인열차' 귀환 주선

예브게니 카를로비치 밀레르

Евгений Карлович Миллер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발트 독일계 러시아인 1867–1939 ✕ 모스크바에서 총살

북부 백군을 지휘하고 파리에서 NKVD에 납치된 발트 독일계 제정 러시아 장군

나는 그들에게 분노도 복수심도 없으며, 그저 무엇에든 선동될 수 있는 불쌍한 회색 무리일 뿐이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의 제정 러시아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올랐다. 내전기에는 아르한겔스크 북부정부의 수반 겸 북부 백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미국 간섭군의 지원을 받으며 볼셰비키에 맞섰으나, 연합군 철수 후 홀로 싸우다 1920년 2월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으로 반소 활동을 이끌었으며, 1937년 파리에서 NKVD 요원 니콜라이 스코블린의 함정에 빠져 납치되어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1939년 5월 NKVD 내부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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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브뤼셀·헤이그 주재 무관
  • 1901이탈리아 주재 무관
  • 1914–1916제5군·제12군 참모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제26군단장, 루마니아 전선
  • 1919–1920북부정부 수반 겸 북부군 총사령관
  • 1920–1930프랑스 망명, 브란겔 장군 휘하 참모장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
  • 1937파리에서 NKVD에 납치

빅토르 콘스탄티노비치 쿠르나톱스키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натов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68–1912 ○ 망명 중 사망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시작해 치타 공화국을 이끈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한 사람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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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 1906–1912사형 선고 후 종신 카토르가 감형, 일본 탈출, 파리 망명 중 사망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8–1918 ✕ 처형

전제(專制)를 신이 맡긴 의무로 믿은 마지막 차르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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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차르 즉위
  • 1904–05러일전쟁 패배, 1905년 혁명
  • 1906기본법 공포, 제한된 두마 체제 출범
  • 1915총사령관을 자임하고 전선으로, 패전 책임이 왕좌로 직결
  • 1917.3퇴위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이오시프 솔로모노비치 블레이흐만

Иосиф Соломонович Блейхма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러시아 러시아 제국, 유대계 1868–1921 ○ 병사

1917년 위기의 무정부주의적 도화선

“거리가 우리를 조직할 것이다.”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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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혁명운동 참가
  • 1904미국에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수용
  • 1906드빈스크 무정부주의 그룹 조직
  • 1913–1914페테르부르크 노동조합 선동가
  • 1917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자연맹 서기·《코뮌》 편집자
  • 19177월 시위 때 제1기관총연대 선동가
  • 1917–1919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그룹연맹 서기
  • 1920–1921모스크바 노동조합 평의회 활동가, 체포되어 강제노동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리티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иттих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발트 독일계) 1868–1930 ○ 망명 중 사망

곡물 강제 징발로 빵 위기를 폭발시킨 마지막 차르 체제 농업장관

1917년 2월 17일 두마 연단에서 곡물 징발의 정당성을 역설했으나 야당의 냉소만 샀다. 닷새 뒤 페트로그라드의 빵 가게 앞에 선 여성들이 혁명을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농업장관으로, 1916년 11월 29일 곡물 강제 징발령(продразвёрстка)에 서명했고 1917년 1월 말 페트로그라드의 제분소 공급을 하루 3만 5천 푸드로 제한했다. 이는 빵 부족과 줄서기 공황을 촉발해 2월 혁명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원래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핵심 설계자였던 유능한 관료였으나, 전시 경제의 수송 붕괴와 인플레이션 앞에서 도구를 잘못 쥔 개혁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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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알렉산드르 관립학교(리체이) 금메달 졸업
  • 1888–1905내무성 지방국·경찰국·이주관리국 근무, 농업문제 특별회의 서기
  • 1905–1912토지정리·농업총국 국유지부장, 스톨리핀 개혁 입법 설계
  • 1912–1916농업차관, 궁정 시종장(1913), 원로원 의원(1916)
  • 1916.11–1917.02농업장관 — 곡물 징발령 서명(11.29), 페트로그라드 제분 제한(1917.1)
  • 1919–1930영국 망명, 런던 소재 러시아 은행장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ут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16 ✕ 살해

제국의 침실까지 들어온 시베리아의 「성자」

1905년 11월 1일,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시에 세르기옙카로 갔다. 밀리차 및 스타나와 차를 마셨다. 하느님의 사람 — 토볼스크 출신 그리고리와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 신비가. 황태자의 혈우병을 진정시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고, 전시에 장관 인사까지 좌우했다. 1916년 12월 군주제를 구하려던 귀족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왕조는 두 달 뒤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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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시베리아 순례자에서 페테르부르크 살롱으로
  • 1905–07황실에 소개되어 황태자의 발작을 진정
  • 1911–16인사 개입 스캔들, 전시의 「장관 도약」
  • 1916.12유수포프 저택에서 살해

예브노 피셸레비치 아제프

Евно Фишелевич Азеф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유대계) 1869–1918 ○ 신부전, 베를린

오흐라나의 월급을 받으며 혁명 테러를 지휘한 이중간첩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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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9독일에서 전기공학 수학, 오흐라나 정보원 활동 시작
  • 1899러시아로 귀국, 사회주의혁명당 운동에 합류
  • 1901–1902통합 SR당 창립 참여, 게르슈니의 부관으로 전투조직 합류
  • 1903–1908SR 전투조직 수장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조직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조직
  • 1906가폰 신부 암살 지시
  • 1908부르체프에게 정체 폭로, 독일로 도주
  • 1909–1918베를린에서 알렉산더 노이마이어 가명으로 은거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47 ✕ 교수형

반볼셰비키 돈 카자크 국가를 세우고 나치와 협력한 백군 아타만이자 노벨상 후보 작가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장군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8년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반볼셰비키 국가 '전대돈군주'를 세웠다. 망명 후 다작 소설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대항하는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다가 종전 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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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아타만 연대 복무, 러일전쟁 종군기자, 제10돈 코사크 연대장
  • 1914–1917제2복합 코사크 사단장 겸 제3기병군단장, 루츠크 돌파 주도, 소장 진급
  • 1917.10–11케렌스키-크라스노프 봉기: 700명의 카자크로 페트로그라드 진격, 실패 후 체포되었다가 트로츠키에 의해 석방
  • 1918.5–1919.2돈 카자크 아타만 당선, 독일 지원으로 돈 군대 조직, '전대돈군주' 수립
  • 1919–1936도임 후 북서군 신문 편집, 독일·프랑스 망명, 반소비에트 망명 정치 활동
  • 1921–1939『쌍두독수리에서 붉은 기까지』 3부작 등 20여 편 집필,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43–1945나치 동부점령지부 카자크 중앙관리국장, 대소련 카자크 부대 조직
  • 1945–1947영국군에 체포되어 소련 송환,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1947년 1월 16일 교수형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쿠스코바

Екатерина Дмитриевна Кускова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인 1869–1958 → 추방 뒤 망명 중 사망

개혁적 사회주의와 반당주의를 오간 공론가

1921년 기근 속에서 그녀는 폼골의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듬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예카테리나 쿠스코바는 혁명적 인민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주의를 거쳐 자유주의적 개혁사회주의로 이동한 정치활동가·저술가였다. 1899년의 《크레도》는 노동운동의 경제투쟁과 민주적 개혁을 앞세우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1905년 이후 그녀는 해방동맹, 협동조합 운동, 여성 평등 운동과 여러 신문을 통해 정당 독점에 맞선 민주적 연합을 모색했고, 1917년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코르닐로프 세력을 비판했다. 1921년 기근 때에는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함께 폼골의 비볼셰비키 구호 활동을 조직했으나, 위원회가 해산된 뒤 체포·추방되어 망명지에서 글을 계속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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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s–1893인민주의 지하모임 참여, 체포와 니즈니노브고로드 유형
  • 1895–1899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결혼, 해외 사회민주주의·경제주의 활동
  • 1903–1905해방동맹 창립 참여, 《우리의 삶》 편집
  • 1906–1914《제목 없음》 발행, 협동조합·여성 평등 운동
  • 1917《인민의 권력》 발행, 민주회의·임시공화국회의 대표
  • 1921전러시아 기근 구호 위원회 폼골의 비볼셰비키측 조직자
  • 1922–1958추방 뒤 베를린·프라하·제네바에서 망명 언론 활동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

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0–1906 ✕ 살해

행진을 이끈 신부, 이중 첩자로 끝나다

피의 일요일 직후 가폰은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 오늘 피의 강이 차르와 러시아 민중을 갈라놓았다. 이제 러시아 노동자는 차르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1905년 1월 9일, 15만 노동자의 겨울궁전 청원 행진을 이끌었으나 군대가 발포했다. 살아남아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는 격문을 남겼지만, 경찰과의 이중 관계가 드러나 이듬해 SR 전투단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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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04경찰 후원 합법 노동회(주바토프식) 「공장노동자회」 조직
  • 1905.1.9겨울궁전 청원 행진 인솔, 피의 일요일
  • 1905–06망명, 혁명 정당들과 접촉
  • 1906경찰 내통이 드러나 SR 전투단에 처형
등장 장면 피의 일요일

그리고리 안드레예비치 게르슈니

Григорий Андреевич Гершуни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유대계) 1870–1908 ○ 폐육종, 취리히

사회주의혁명당 전투조직을 창설한 '혁명의 호랑이'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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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 1901–1902분산된 에스에르 그룹들을 단일 사회주의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 1904–1906슐리셀부르크 요새 복역 후 아카투이 카토르가 이감
  • 1906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 중국·일본·미국 경유 유럽 귀환
  • 1907–1908SR 중앙위원 선출, 탄포르페 당대회 의장, 취리히에서 사망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카자흐스탄 1870–1918 ✕ 전사

「강한 손」을 자처한 장군

1914년 11월 야간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직접 이끈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 포로 1,200명과 함께 사로잡힌 라프트 장군: 「코르닐로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오.」

카자크 병사의 아들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의 군인. 1917년 8월 소비에트를 부수러 수도로 군단을 보냈으나, 철도 노동자와 선동가들 앞에서 군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녹았다. 내전 초기 백군 의용군을 이끌다 1918년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포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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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6사단장, 오스트리아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전국적 명성
  • 1917.3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황후의 연금을 집행
  • 1917.7총사령관 임명
  • 1917.8수도로 군단 이동, 실패, 비호프 수도원 연금
  • 1917.11–1918.4탈출, 백군 의용군 창설,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전사

블라디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푸리슈케비치

Владимир Митрофанович Пуришкевич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0–1920 ○ 발진티푸스

두마 연단에서 물컵을 던지고 라스푸틴을 쏜 극우 군주주의자

1916년 11월 19일 두마 연설에서: "라스푸틴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 직후 유수포프 공작이 암살 음모를 제안했다.

흑백당과 '미하일 대천사 동맹'을 창립한 제정 러시아의 대표적 극우 군주주의 정치인. 2·3·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반유대주의·반의회주의 연설과 의사당 내 물리적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1916년 12월 궁정의 '어둠의 세력'을 제거해 군주제를 구하려는 신념으로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했고, 직접 권총을 발사했다. 혁명 후 백군에 합류해 반볼셰비키 지하조직을 이끌다 체포·사면되었으며, 노보로시스크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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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흑백당 조직, '러시아 인민동맹' 공동 창립
  • 1907–19172·3·4대 국가두마 의원 (베사라비아·쿠르스크)
  • 1908'러시아 인민동맹'에서 분리, '미하일 대천사 동맹' 창립
  • 1914–19171차대전 중 위생열차 조직·지휘
  • 1916.12라스푸틴 암살 공모, 직접 발포
  • 1917–1918반볼셰비키 지하조직 결성, 체포·사면
  • 1919–1920백군 지역에서 군주제 선전활동, 『블라고베스트』 발행

알렉산드르 오시포비치 베르크만

Александр Осипович Беркма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0–1936 ✕ 니스에서 자살

프릭 암살 미수로 14년 복역하고 소비에트를 떠난 아나키스트 작가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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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미국 이주, 요한 모스트의 『프라이하이트』 식자공으로 아나키스트 운동 합류
  • 1892홈스테드 파업 중 프릭 암살 미수 — 22년형 선고, 14년 복역
  • 1907–1915『마더 어스』 편집자, 미국 최대 아나키스트 잡지로 성장
  • 1916샌프란시스코에서 자체 잡지 『더 블래스트』 창간
  • 1917징병 반대 활동으로 2년 수감,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
  •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목격 후 볼셰비키와 결별, 러시아 탈출
  • 1925『볼셰비키 신화』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일기체 비판서
  • 1929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 출간

니콜라이 예브그라포비치 페도세예프

Николай Евграфович Федосеев
이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1–1898 ✕ 유형지에서 자살 (27세)

볼가 지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러시아 혁명가

“페도세예프는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비상한 호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시대 혁명가의 전형이었다” — 레닌, 1922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1888년 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해 젊은 레닌과 고리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레닌과 이론 서신을 교환했으며, 농노제 붕괴의 경제적 원인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과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령 초안을 집필했다. 나로드니키 이론가 미하일롭스키와의 논쟁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나로드니키 논쟁의 장을 열었고, 그의 강령은 레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평했지만,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동료의 중상에 시달리다 27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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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889.7불법 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 1890–1892카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레스티' 감옥 수감
  • 1892.9모로조프 공장 파업에서 노동자 조직 — 다시 체포됨
  • 1893.11솔비체고츠크로 3년 유형
  • 1895.7동시베리아로 5년 유형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리모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ым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계 1871–1917 ✕ 자살

질서의 회복을 군사력에서 찾은 기병 장군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크리모프는 숙소로 돌아가 가슴에 권총을 쏘았다.

알렉산드르 크리모프는 러시아 제국군의 기병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7년 혁명 뒤 그는 군대의 규율과 강한 국가 권력을 중시하는 장교 진영에 섰고, 임시정부와 두마 야권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개입에도 연루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명령으로 제3기병군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향했지만 병사들의 동요와 철도 노동자들의 저지로 진군은 무너졌다.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체포와 굴욕을 피하려고 자살했으며, 그의 죽음은 군부의 질서 회복 시도가 혁명의 이중권력과 충돌한 결과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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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2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생도, 졸업 후 포병 장교
  • 1902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4시베리아군단 사령부 복무
  • 1911–1913자바이칼 카자크군 제1아르군 연대 지휘
  • 1915–1916우수리 기병여단과 우수리 기병사단 지휘
  • 1917제3기병군단장,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 지휘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불가코프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71–1944 ○ 망명 중 사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버리고 소피아론 신학을 세운 사제 철학자

네 살배기 아들 이반의 장례식에서 불가코프는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깨달았다'고 기록했고, 이 신비체험을 정교회 귀환의 결정적 계기로 삼았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법적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출발해 관념론을 거쳐 사제 서품에 이르는 20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대표적 전향 궤적을 그렸다. 1890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나, 《자본주의와 농업》(1900)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칸트와 솔로비요프 철학을 경유해 교회로 복귀했다. 1909년 《이정표》에 기고한 「영웅주의와 금욕주의」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무신론적 혁명주의를 비판했고,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된 후 파리에서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을 공동 설립하여 소피아론 신학 체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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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정치경제학 강사
  • 1895–1900법적 마르크스주의 대표 저술가, 카우츠키·베벨·플레하노프와 교류
  • 1901–1906키예프 공대 교수, 키예프대학 사강사
  • 1903《마르크스주의에서 관념론으로》 출간
  • 1906–1918모스크바대학 사강사, 모스크바 상업대학 교수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오룔현, 무소속 기독교 사회주의자)
  • 1909《이정표》에 「영웅주의와 금욕주의」 기고
  • 1917–1918전러시아 공의회 위원, 최고교회평의회 위원, 사제 서품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
  • 1925–1944파리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 공동 설립자·교수

파벨 니콜라예비치 페레베르제프

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Переверз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1–1944 ○ 망명 중 자연사

혁명의 위기에서 법과 정치의 경계를 넘은 법률가

1917년 7월 4일, 그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겨냥한 반역 혐의 자료의 언론 공개를 승인했다.

파벨 페레베르제프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사건을 변호한 법률가로, 혁명기에는 법무 행정과 임시정부의 질서를 맡았다. 그는 1917년 7월 볼셰비키와 독일의 연계를 주장하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해 정치적 탄압의 분위기를 키웠고, 자료의 신뢰성과 해석은 이후에도 논쟁으로 남았다. 공개가 정부와 조율되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 사임한 뒤 내전과 망명을 거쳐 프랑스에서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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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01선서 변호사로 활동 시작
  • 1915제4차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들의 변호인
  • 1917.03페트로그라드 사법재판소 검찰관
  • 1917.05–07임시정부 법무장관
  • 1920–1921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튀니스에서 망명 생활
  • 1927–1944프랑스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서 활동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프로코포비치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Прокопович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인 1871–1955 ○ 망명 중 자연사

시장과 국가 통제 사이를 분석한 경제학자

“소매상은 예전에도 투기했고 지금도 투기하지만, 예전에는 물가가 높지 않았고 지금은 높다.”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는 통계와 정치경제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농업·노동·협동조합 문제를 연구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수정주의적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로 이동했지만, 국가가 시장을 조절해야 한다고 보며 노동과 농민의 생활 문제를 계속 다뤘다. 1917년 임시정부의 식량장관으로서 전시 동원, 운송 혼란, 농촌의 곡물 유보가 겹친 위기 속에서 고정가격과 국가 곡물독점의 한계를 마주했다. 이후 기근 구호 활동으로 체포·추방되었고, 망명지에서 소련 경제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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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해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동맹 참여
  • 1899브뤼셀대학교 졸업 후 러시아 귀환
  • 1904–1905해방동맹 참여, 1905년 혁명기에 입헌민주당 중앙위원
  • 1906–1916경제 통계·농업·노동 연구와 협동조합 활동
  • 1917임시정부 통상·공업장관, 이어 식량장관
  • 1921전러시아 기근구호위원회 조직·지도
  • 1922–1955추방 뒤 베를린·프라하·스위스에서 경제 연구와 출판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한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Ханж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1–1961 ○ 수용소 10년, 사후 복권

콜차크군의 볼가 진격을 이끌고 프룬제에게 무너진 포병 장군

1915년 7월 7일, 후퇴하던 12보병사단의 전열에 균열이 생기자 한진은 직접 예비 대대를 이끌고 틈새로 달려가 후퇴하는 부대를 멈춰 세웠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포병 장교로, 루소-일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포병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의 우랄 군단을 창설하고 콜차크 휘하 서부군 사령관으로 1919년 3월 전략적 돌파를 이끌어 볼가 강 30km 앞까지 진격했으나, 과신장된 전선이 프룬제의 남부군집단 반격에 노출되어 부굴마·부구루슬란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었다. 실각 후 콜차크 정부의 마지막 군무장관을 지냈고, 중국 망명을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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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3오렌부르크 사관학교 →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코룬지 임관
  • 1899미하일롭스카야 포병 아카데미 수석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제3 동시베리아 포병여단 제4포대장,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제19포병여단장 → 제12보병사단장 → 제8군 포병감, 브루실로프 공세 포병 기획 주도
  • 1918–1919우랄 군단장 → 콜차크 서부군 사령관, 볼가 진격 → 부구루슬란 패배 후 경질. 포병대장 진급
  • 1919–1920콜차크 정부 군무장관, '3인 위원회' 일원으로 옴스크 붕괴 수습
  • 1920–1945중국 망명 (다롄·상하이·창춘), ROVS 극동부장 역임
  • 1945–1961SMERSH 체포, 10년형 → 1955년 석방, 잠불에서 사망. 1992년 사후 복권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독일 1872–1918 ✕ 처형

라스푸틴에 의존해 제정 말기 정치를 좌우한 마지막 황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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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니콜라이 2세와 결혼, 러시아 황후
  • 1904황태자 알렉세이 출산
  • 1905라스푸틴과 첫 만남
  • 1915–17니콜라이 2세 부재 중 라스푸틴과 함께 내정 통제
  • 1917.3가택연금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Антон Иванович Деник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2–1947 ○ 심장마비

볼셰비키 정권을 모스크바 400km 앞까지 몰아붙인 백군 최대 규모 군대의 총사령관

1899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부당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자 황제에게 탄원했다. 주변에서 청원을 취하하면 조용히 배려해 주겠다고 했을 때의 답: "나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내 권리인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국 육군 중장으로, '철의 여단'을 이끌며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에 섰다. 1918년 코르닐로프 사후 의용군 사령관을 이어받아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백위대 최대 병력을 지휘했고, 1919년 여름 모스크바 공세로 오룔까지 진격해 소비에트 정권을 가장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라는 경직된 구호로 민족·농민 문제에 실패했고, 통제 불능의 포그롬은 국제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망명 후 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를 집필해 혁명과 내전의 기초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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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05러일전쟁 참전, 참모 장교로 무공을 세워 대령 진급
  • 1914–16제4소총 '철의 여단'(후 사단) 지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2회 점령
  • 1917.4–5최고사령관 알렉세예프의 참모장, 군의 민주화에 반대
  • 1917.8–11코르닐로프 지지로 체포, 비호프 수도원에 수감
  • 1918.4코르닐로프 전사 후 의용군 사령관 승계
  • 1919.1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백군 최대 병력 편성
  • 1919.7–10모스크바 공세, 오룔 점령 후 적군 반격으로 패퇴
  • 1920.4브란겔에게 지휘권 이양, 망명길에 오름
  • 1923–27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 출간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 바우만

Николай Эрнестович Баума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독일 1873–1905 ✕ 살해

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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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이반 바실리예비치 바부시킨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Бабушк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3–1906 ✕ 처형

이스크라가 가장 신뢰한 노동자 조직가, 볼셰비키 노동자 전형의 원형

1902년, 알렉산드롭스크 감옥 창살을 톱으로 잘라 탈옥한 그는 외국어 하나 모르는 채 런던으로 향했다. '이스크라' 편집부와 당면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의 노동자 서클에서 성장한 혁명가. 《이스크라》 특파원으로 오레호보-보고로츠크 조직을 건설했고 체포·유형·탈옥을 거듭했다. 1905년 치타 무장봉기를 지도했고 이듬해 무기 호송 중 체포·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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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91크론슈타트 어뢰 작업장 견습공
  • 1891–96페테르부르크 세먀니코프 공장 기계공
  • 1894–95레닌의 노동자 마르크스주의 서클 참여, '투쟁동맹'에서 서클·도서관 조직
  • 1896–97체포, 예카테리노슬라프 유형 ― 현지 '투쟁동맹'·RSDDP 위원회·《유즈니 라보치》 창간
  • 1900–01《이스크라》 특파원·배포책 ― 오레호보-보고로츠크 RSDDP 조직 건설
  • 1902–03체포·탈옥·런던 망명·귀국. 재체포 후 베르호얀스크 유형
  • 1905사면, 이르쿠츠크·치타 위원 ―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치타 무장봉기 지도
  • 1906.1무기 호송 중 슬류뎬카 역 체포, 미소바야 역에서 즉결 총살

모이세이 솔로모노비치 우리츠키

Мои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кий
국가보안 기관 러시아 러시아 1873–1918 ✕ 암살

붉은 테러를 막으려 했으나 그 방아쇠가 된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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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897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군 복무 중 선동 혐의 체포
  • 1901–05야쿠티야 올료크민스크 8년형 유형, 1905년 탈출
  • 1906–14볼로그다·아르한겔스크 유형, 1912년 빈 SD 회의 참가
  • 1914–17망명: 『나셰 슬로보』 특파원, 스톡홀름 체류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 1917.10–12군사혁명당중앙·VRK 위원, 제헌의회 선거관리위원
  • 1918.3–8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 내무위원 겸임

베냐민 파블로비치 카잔스키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Каза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3–1922 ✕ 총살, 1992년 시성

기근 구호와 성물 수호 사이에서 교회를 이끈 수도대주교

“기근 구호를 위해 기부할 수 있지만, 성전의 성물은 건드리지 말라.”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대주교이자 페트로그라드 교구의 지도자로, 혁명 뒤 교회의 교육과 신자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백색운동과 거리를 두면서도 국가가 교회의 자율성과 성물을 침해하는 데에는 맞섰다. 1922년 볼가 기근 때 성물이 아닌 교회 재산의 자발적 기부와 교회가 통제하는 구호를 제안했지만, 당국이 강제 몰수로 전환하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죄 판결 뒤 처형되었고 1992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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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리가 신학교 성서학 교사
  • 1898–1899홀름 신학교 감독관
  • 1899–1902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감독관
  • 1902–1905사마라 신학교 학장
  • 1905–1910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학장
  • 1910–1917그도프 주교,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 보좌
  • 1917–1922페트로그라드·그도프 수도대주교
  • 1922페트로그라드 재판 피고, 처형

세묜 레온티예비치 마슬로프

Семён Леонтьевич Мас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3–1938 ✕ 총살, 1988년 복권

농민 협동조합을 꿈꾼 에스에르 농업정책가

“우리는 너무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세묜 레온티예비치 마슬로프는 에스에르 계열의 농업경제학자이자 농민 협동조합 운동의 조직가였다. 그는 토지개혁을 지지했지만 농민의 지주지 무단 점거에는 반대하며 법적 개혁과 농촌 자치를 결합하려 했다. 1917년 10월 농업장관으로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시간을 맞았고,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뒤에도 제헌의회와 협동조합의 길을 지지했다. 훗날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옹호한 그는 1938년 처형되었다가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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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으로 유배된 뒤 카잔대학교 법학부를 졸업
  • 1902–1913카잔 젬스트보 통계가, 농민 신문 편집자, 에스에르 출판 활동가
  • 1913–1917모스크바 농업협동조합과 중앙아마재배자조합에서 활동
  • 1917.04–10주요 토지위원회 부위원장,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
  • 1917.10.03–25임시정부 농업장관
  • 1917.10–1918겨울궁전에서 체포, 석방 뒤 비밀 임시정부와 제헌의회에 참여
  • 1921–1929셀스코소유즈 의장, 교수, 전러시아 협동조합 연구소 부총장
  • 1930–1938강제유배와 재체포를 겪은 뒤 1938년 총살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르노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Чер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3–1952 → 망명 · 뉴욕

사회혁명당의 창립자이자 수석 이론가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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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나로드니키 서클에서 활동, 1894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00농업사회주의동맹 공동 창립, 농민 대상 불법 출판물 배포
  • 1902사회혁명당(PSR) 공동 창립, 중앙위원, 기관지 《혁명 러시아》 편집자
  • 1905–07제1차 당 대회 주도, 제2두마 에스에르 원내대표, 혁명 진압 후 재망명
  • 1917.5–8임시정부 농업장관, 토지개혁 지연으로 농민 불만 고조
  • 1918.1제헌의회 의장 선출, 토지 사회화법 통과, 볼셰비키에 의해 의회 강제 해산
  • 1918–20반볼셰비키 투쟁, 사마라 코무치, 모스크바 지하 활동
  • 1920–52에스토니아·독일·프랑스·미국 망명, 회고록 《폭풍 전야》 집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20 ✕ 총살형

북극에서 총살형장까지, 제정의 마지막 무장 방어자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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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해군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00–1902러시아 북극 탐험대 수문학자 겸 지도제작자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구축함 세르디티 함장 → 뤼순 포대 지휘, 부상·포로
  • 1906콘스탄틴 메달 수상, 해군 참모본부 근무
  • 1914–1915발트함대 작전부장 → 기뢰부대 사령관,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6–1917흑해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 1918–1919전러시아 최고 통치자 겸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옴스크)
  • 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넘겨져 이르쿠츠크에서 총살

미하일 콘스탄티노비치 디테릭스

Михаил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Дитерихс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37 ○ 망명 중 사망

콜차크의 참모장이자 로마노프 일가 수사 책임자, 백색 프리아무르의 마지막 통치자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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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 1922프리아무르 젬스키 소보르 소집,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 → 패배 후 상하이 망명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극동부 의장

알렉산드르 알렉세예비치 반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еевич Ваннов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인 1874–1967 ○ 자연사

혁명가에서 일본 문학·철학 연구자로 변모한 사상가

그는 셰익스피어를 거쳐 마르크스에서 그리스도에게로 갔다고 자신의 사상적 전환을 표현했다.

알렉산드르 반놉스키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초기 조직가이자 일본 문학과 철학을 연구한 문학연구자였다. 그는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을 대표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에 참가했고, 이후 불법 인쇄소와 군사기술 활동으로 혁명운동을 조직했다. 1912년 당을 떠난 뒤에는 혁명적 이상과 그 결과를 기독교 사상으로 성찰하며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과 일본 신화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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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모스크바 제국기술학교 학생, 혁명운동에 가담
  • 1898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대표,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 대표
  • 1898–1900체포와 솔비체고츠크 유형
  • 1903–1905‘의지’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리빈스크와 야로슬라블의 불법 인쇄소 운영
  • 1905–1906키예프 공병 봉기와 모스크바 12월 봉기 참여, 모스크바 군사기술국 활동
  • 1910s–1960s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 강의, 일본 신화와 셰익스피어 연구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нова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5–1949 ○ 자연사 · 파리

9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자본가, 차르 체제를 뒤흔든 진보블록의 설계자

1917년 5월 16일, 군산업위원회 대회 연설에서 그는 경고했다: "반국가적 경향이, 대중을 최면에 빠뜨리는 구호로 자신의 본질을 위장하며, 러시아를 거대한 걸음으로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섬유 자본가 중 한 명으로, 1900년에 이미 9시간 노동제와 노동자 주택·학교·병원을 도입한 선구적 산업가였다. 진보당 창립자이자 4대 두마 부의장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진보블록을 조직하여 차르 체제에 맞선 의회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고, 마지막 내각에서는 케렌스키의 부총리로서 10월 혁명 당일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밀류코프의 『최신소식』 발행을 이끌며 러시아 망명 사회의 좌파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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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5가업인 콘스탄틴 직물 공장 경영, 1900년 9시간 노동제·노동자 주택·학교·병원 도입
  • 1905–12통상산업당 공동 창립, 모스크바 증권거래소 부위원장
  • 1912–14진보당 공동 창립, 4대 두마 의원(코스트로마), 두마 부의장
  • 1915–17.2중앙군산업위원회 부의장, 진보블록 조직, 두마 임시위원회 위원
  • 1917.3–5임시정부 통상산업부 장관(1차), 노사 타협 추진하다 사임
  • 1917.9–10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 10월 25일 겨울궁전에서 각료 회의 주재 중 체포
  • 1918–40프랑스 망명, 『최신소식』 이사회 의장, 진보적 망명 단체 지도
  • 1941–49미국 거주 후 파리 귀환, 1949년 사망

로만 바츨라보비치 말리놉스키

Роман Вацлаво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폴란드 1876–1918 ✕ 총살형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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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콘코르디야 니콜라예브나 사모일로바

Конкордия Николаевна Самойлова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876–1921 ○ 콜레라

『라보트니차』를 창간하고 러시아 첫 여성의 날을 조직한 볼셰비키 여성 운동의 설계자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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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 1907런던 RSDLP 제5차 대회 대의원
  • 1912–14『프라우다』 편집서기
  • 1913.02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 집회 조직,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 동원
  • 1914.02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 창간 — 발간 직전 체포
  • 19172월 혁명 후 『라보트니차』 복간, 11월 제1차 여성노동자회의 조직
  • 1918.01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대회 공동 조직
  • 1919–20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제8차 당대회 대의원
  • 1920–21『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 볼가 선전선 「붉은 별」 정치부장

그리고리 니키티치 바쿨렌추크

Григорий Никитич Вакуленчук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7–1905 ✕ 봉기 중 사살

장교의 총탄에 쓰러져 포툠킨 반란을 촉발하고, 장례는 오데사 혁명 시위가 된 수병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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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흑해함대 징집
  • 1900기뢰·포술학교 졸업, 전함 포툠킨 포수 배치
  • 1903RSDLP 입당, 세바스토폴 수병 첸트랄카 결성 참여
  • 1905.06.27포툠킨 반란 중 기량롭스키 부함장에 치명상, 함상에서 사망

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

Иван Платонович Каля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7–1905 ✕ 교수형 (, 슐리셀부르크)

폭탄을 든 혁명 시인, 마차 속 가족을 보고 폭탄을 거둔 '윤리적 테러리스트'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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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 1899학생 파업 주도로 예카테리노슬라프 유배
  • 1902베를린에서 혁명 문헌 운반 중 체포, 러시아로 송환되어 야로슬라블 유배
  • 1903제네바에서 SR 전투조직 가입 (아제프 휘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작전 감시팀 참여
  • 1905.2.4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세르게이 대공 폭탄 암살
  • 1905.4.5원로원 특별재판에서 전제정치 고발 연설, 사형 선고
  • 1905.5.23슐리셀부르크 요새 교수형 집행

게오르기 스테파노비치 흐루스탈료프-노사리

Георгий Степанович Носарь
반혁명 세력 러시아 러시아 1877–1919 ✕ 혁명위원회에 의해 처형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무소속 노동 변호사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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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11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 14일 만장일치 선출
  • 1905.11–1906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시베리아 탈출, 런던 당대회 참석 후 망명
  • 1909–1914RSDLP 탈당, 파리에서 신디칼리즘·출판 활동
  • 1915–1917귀국 후 체포, 3년 카토르가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8–1919페레야슬라프 공화국 지도자, 반볼셰비키 활동

보그단 미르자자노비치 크누냔츠

Богдан Мирзаджанович Кнунянц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1 ○ 옥사

제2차 대회의 이스크라 다수파, 감옥에서 스러진 캅카스 볼셰비키 선구자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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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 1907–1910바쿠 지하 활동
  • 1910.09체포, 바일로프 감옥 수감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8–1918 ✕ 체카에 피살

하루 동안의 차르가 될 수 있었으나 제헌의회에 양보한 마지막 로마노프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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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3기병 총감
  •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 1918.3–6페름 유형, 체카에 납치·살해됨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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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1918.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브란겔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8–1928 ○ 급사 · 독살 의혹

'흑남작', 이미 진 전쟁을 넘겨받아 개혁으로 돌파를 시도한 백군 최후의 총사령관

"주여, 군대를 구원하소서" — 1928년 4월 브뤼셀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남긴 마지막 말.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광산 기사로 출발했으나, 러일전쟁에 지원 입대하며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카우셴 전투의 기병 돌격을 이끌어 전쟁 최초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917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0년 데니킨의 뒤를 이어 남러시아 백군 총사령관이 되어 '러시아군'으로 재편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적군에 패배한 뒤 14만 5천 명 이상을 크림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대규모 대피 작전을 조직했으며,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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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광산기사 졸업, 기마친위대 지원입대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아르군 코사크 연대 복무, 훈장 수훈
  • 1910–1914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기마친위대 중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4카우셴 전투에서 기병 돌격 지휘,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5–1917제1네르친스크 코사크 연대장 → 소장, 제7기병사단장 → 통합기병군단장
  • 1918–1919의용군 입대, 제1기병사단장 → 캅카스 의용군 사령관, 차리친 점령
  • 1920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러시아군'으로 재편, 크림 철수 작전
  • 1924–1928러시아 전군연합(ROVS) 창설, 망명 백군 운동 지도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압크센티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Авксенть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8–1943 ○ 콜차크에 축출, 망명 중 사망

SR당 창건자이자 콜차크에게 전복된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마지막 의장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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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SR 분파 지도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07SR 중앙위원 선출; 오브도르스크 유형 후 해외 탈출
  • 1907–1917파리 망명 중 SR 기관지 《즈나먀 트루다》 편집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7전러시아 민주회의·예비의회(임시평의회) 의장
  • 1918우파 국가회의 의장,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수반
  • 1918–1940파리 망명, 프리메이슨 활동, 《소브레멘니예 자피스키》 발행
  • 1940–1943뉴욕에서 잡지 《자 스보보두》 발행

바실리 비탈리예비치 슐긴

Василий Витальевич Шульг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무국적) 러시아 1878–1976 ○ 자연사

차르의 퇴위를 직접 받아내고 백군 이데올로그가 된 두마의 군주제 보수주의자

프스코프 역의 차르 전용 열차에서, 나흘째 면도도 씻지도 않은 슐긴에게 황제의 측근이 말했다: '이 피자크 차림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오.'

바실리 슐긴은 러시아 제국 말기 두마(II·III·IV대)의 핵심 보수정치인이자 《키예블랴닌》 편집자로, 강력한 러시아 민족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했다. 1917년 3월 알렉산드르 구치코프와 함께 프스코프로 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직접 받아냈으나, 혁명의 파국을 막지는 못했다. 남북전쟁기 백군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으며, 1944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12년간 수감되었다. 1956년 사면 후 소련에 남아 회고록을 집필하고 1965년 다큐멘터리 《역사의 심판》에 출연하여, 패배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구체제의 산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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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II·III·IV대 두마 의원 (볼린현)
  • 1913–1917《키예블랴닌》 편집자
  • 1915진보블록 공동창설, '진보적 민족주의자' 그룹 지도
  • 1917.3구치코프와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8–1920백군 운동 선전가·이데올로그, 《로시야》·《벨리카야 로시야》 편집
  • 1920–1944유고슬라비아 망명, 회고록 《날들》·《삼도시》 집필
  • 1947–1956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25년형 수감 (12년 복역)
  • 1956–1976사면 후 블라디미르 거주, 《레닌의 실험》 집필, 영화 《역사의 심판》 출연

아파나시 니콜라예비치 마튜셴코

Афанасий Николаевич Матюшенко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9–1907 ✕ 교수형

포툠킨 반란을 지휘하고 루마니아로 망명한 흑해함대 병참장

포툠킨이 콘스탄차에 입항했을 때 라코프스키를 맞으며 말했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하르코프 근교의 전농노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구두 수선을 시작했다. 1905년 전함 포툠킨에서 썩은 고기에 항의하다 무장봉기로 전환해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일간 붉은 기 아래 흑해를 항해하며 오데사에서 혁명 접합을 시도했다. 루마니아 망명 후 스위스, 미국, 프랑스를 전전하며 레닌과 고리키를 만났으나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았고,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왔다가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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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징집, 흑해함대 복무
  • 1902전함 포툠킨 기뢰 병참장
  • 1905.06포툠킨 반란 주도, 함상위원회 의장
  • 1905.06–1907.06루마니아·스위스·미국·프랑스 망명
  • 1907.06러시아 귀국, 체포
  • 1907.11.02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 집행

알렉산드르 일리치 두토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Дут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9–1921 ✕ 체카 요원에 암살

오렌부르크 카자크를 이끌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투르키스탄 사이를 차단한 백군 아타만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고 있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아타만이자 백군 중장. 1917년 11월 소비에트 권력을 불인정한 최초의 군사 지도자로서 오렌부르크-타슈켄트 철도를 차단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20개월간 갈라놓았다. 콜차크 휘하에서 오렌부르크 독립군을 지휘했고, 패배 후 '기아 행군'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1921년 체카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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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콜라이 기병학교 졸업,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배속
  • 1908총참모부 아카데미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지휘
  • 1917.09오렌부르크 카자크군 아타만에 선출
  • 1917.11볼셰비키 권력 불인정, 무장봉기 주도
  • 1918–1919콜차크 휘하 오렌부르크 독립군 사령관
  • 1919–1920악토베 패배 후 '기아 행군', 중국 망명

지노비 야코블레비치 리트빈-세도이

Зиновий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Седо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계 1879–1947 ○ 자연사

프레냐 노동자 전투부대의 조직자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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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혁명운동에 참가
  • 189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
  • 1905모스크바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
  • 1906스베아보르그 수병 봉기에 참여
  • 1917–1918키예프 소비에트와 항공부대 당 조직에서 활동
  • 1919–1921군사교통 중앙관리국과 교통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1939모스크바 12월 봉기 기념 면방직 기술학교 교장
  • 1939–1947연금 생활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알렉신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Алекси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9–1967 ○ 망명 중 자연사

혁명적 국제주의에서 전시 애국주의로 선회한 논객

1917년 7월, 그는 《Живое слово》에 레닌의 독일 간첩설 자료를 실었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는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가이자 제2국가두마 의원으로 부상했지만, 전쟁과 혁명의 압박 속에서 사회애국주의로 급선회했다. 1917년 그는 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에 합류해 볼셰비키를 공격했고, 7월에는 에르몰렌코의 불충분한 증언을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주장으로 포장해 대중 언론에 올렸다. 이 폭로는 군대와 소비에트 안에서 반볼셰비키 정치를 강화했지만, 그가 혁명가에서 반볼셰비키 망명자로 바뀐 경로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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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모스크바대학교 학생, 학생운동 참가
  • 1905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선동가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볼셰비키 출판물 필자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사회민주파 볼셰비키계 연설자
  • 1909–1914좌익 볼셰비키계 《전진》 그룹 지도자
  • 1914–1917전쟁 지지 사회민주주의자, 파리 《호소》 공동 편집자
  • 1917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 지도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
  • 1919–1967러시아 망명 정치가·논객, 파리 러시아 평의회 의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ок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0–1921 ○ 병사

10월 혁명을 받아들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열둘』을 완성한 뒤 일기에 '오늘 나는 천재다'라고 적었다.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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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 출간
  • 1906희곡 『꼭두각시극』 발표
  • 1917임시정부 차르 대신 특별조사위원회 편집자
  • 1918『열둘』과 『스키타이인』 발표, 사회주의 아카데미 참여
  • 1921푸시킨 추모 연설 「시인의 소명에 관하여」

미하일 이사코비치 리베르

Михаил Исаакович Либер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계 유대인 1880–1937 ✕ 총살, 1958년 사후 복권

혁명을 지키려다 혁명의 방향과 충돌한 멘셰비키

1917년 6월 위기 뒤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며 혁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미하일 리베르는 본명 미하일 골드만으로, 유대인 노동운동의 조직인 분트에서 성장해 멘셰비키의 주요 지도자가 된 혁명가였다. 그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분트의 조직 자율성을 주장했고, 1917년에는 혁명적 방어주의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임시정부와의 연립을 옹호했으며, 6월 10일 시위 위기 뒤 볼셰비키에 대한 강경 조치를 요구하는 다수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0월 봉기와 볼셰비키와의 협상에 반대한 그는 이후 체포와 유배를 거듭했고, 1937년 처형된 뒤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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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
  • 1897–1902분트 창립 세대의 활동가, 1902년 중앙위원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분트 대표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노동자대표 집행위원
  • 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 1917.02–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분트 우파 지도자
  • 1917.06–10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상임위원회 위원·부의장
  • 1917.09–10러시아 공화국 임시평의회, 예비의회 위원
  • 1922–1923멘셰비키 중앙위원회 국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젠지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ензи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0–1953 ○ 자연사

망명과 기록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킨 사회혁명가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간부이자 언론인, 북극 시베리아를 기록한 민족지학자였다. 그는 1905년 혁명부터 1917년 혁명까지 반복된 체포와 유배를 겪었고, 유배지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를 책으로 남겼다. 1918년 사마라의 제헌의회 의원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했으며, 11월 옴스크 쿠데타 때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파리와 뉴욕의 사회주의 망명 언론에서 활동하며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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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사회혁명당 입당
  • 1905–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 활동, 모스크바 봉기 참여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
  • 1917–1918제헌의회 의원, 사마라 제헌의회 의원위원회 위원
  • 1918우파 디렉토리 위원
  • 1918–1919옴스크 쿠데타 뒤 체포·중국 추방
  • 1919–1939유럽 사회주의 망명 언론 활동
  • 1940–1953뉴욕에서 망명 언론인·회고록 작가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1–1970 → 망명 · 뉴욕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려 나간 웅변가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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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7두마 의원(트루도비키), 정치재판 변호사로 명성
  • 1917.3임시정부 법무장관, 정치범 사면, 사형 폐지
  • 1917.5육해군장관, 6월 공세 강행과 실패
  • 1917.7–10총리, 코르닐로프 사건, 10월에 실각
  • 1918–70파리·뉴욕 망명, 저술과 강연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주린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зур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82–1906 ✕ 교수형 (군법회의, )

모스크바 무장봉기 전투지휘자이자 최대주의자당의 창립 지도자

타간카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마지막 말: "어머니께 내가 평온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게."

사회주의혁명당(PSR)에서 분리된 급진좌파 '최대주의자'(SSRM)의 창립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당시 카잔 철도의 전투부대를 지휘했으며, 1906년 3월 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에서 87만 5천 루블을 탈취한 유명한 '엑스'를 주도했다. 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학생으로 1904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월 선언 사면으로 풀려나 즉시 무장투쟁에 복귀했으며, PSR의 단계적 혁명론을 거부하고 전면적 사회화와 '노동자 공화국'을 요구한 최대주의자들의 실천적 핵심이었다. 1906년 8월 체포 시 무장 저항하다 중상을 입고 며칠 만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24세의 나이로 타간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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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4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사회주의혁명당(PSR) 입당
  • 1904모스크바 선전활동으로 체포, 7년형 선고
  • 1905.1010월 선언 사면으로 석방
  • 1905.12모스크바 무장봉기 — 카잔 철도 전투부대 지휘, 치스티예 프루디·프레스냐 전투 참가
  • 1906.3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 탈취 작전 지휘 (87만 5천 루블)
  • 1906사회주의혁명당-최대주의자 동맹(SSRM) 공동 창립
  • 1906.8–9아크바리움 정원 인근에서 체포 시 무장저항·중상, 군법회의 사형선고, 타간카 감옥 교수형

아브람 라파일로비치 고츠

Абрам Рафаилович Гоц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2–1940 ○ 1922년 사형, 수용소 사망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를 이끈 지도자, 4월 위기에 마리인스키 궁전으로 파견된 혁명적 방어주의자

수하노프는 그를 두고 '탁월한 기술자, 조직가, 행정가일지는 몰라도 정치가는 전혀 아니었다'고 평했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유대계 차 상인 집안 출신으로, 형 미하일을 따라 사회혁명당에 합류해 1906년 전투조직에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4월 위기 때 스코벨레프와 함께 마리인스키 궁전 앞 시위 병사들을 설득하러 파견되었으나 실패했고, 6월 VTsIK 의장에 올랐다. 10월 혁명 후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으로 무장 저항을 이끌었고, 1922년 쇼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거듭하다 1940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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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R 전투조직 가입, 테러 계획 참여
  • 1907체포, 8년 카토르가(중노동형) 선고
  • 1915–1917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 유형지 정착, '시베리아 치머발트파' 활동
  • 1917.03–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 지도자, 집행위원
  • 1917.06–10제1차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의장
  • 1917.10–1918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 융커 봉기 지휘
  • 1918–1920내전기 SR 무장분대 조직, 볼셰비키·백군 양면 전선
  • 1922SR 재판 주피고인, 사형 선고 후 감형
  • 1925–1937심비르스크(울리야놉스크) 유형, 경제계획 업무
  • 1937–1940대숙청 중 체포, 25년형 선고,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시미트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Шмит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83–1907 ✕ 부티르카 옥중 의문사

프레스냐 봉기의 심장이 된 가구공장의 젊은 상속인

체포된 시미트는 세묘놉스키 연대 진영으로 끌려가 벽 앞에 총살 위협을 받았고, 며칠 밤잠 못 이루는 심문 끝에 마침내 자백했다.

모스크바 가구공장을 물려받은 청년 사업가로, 1905년 혁명에 투신해 공장을 노동자 전투대의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바꾸고 프레스냐 무장봉기의 물적 거점을 제공했다. 9시간 노동제와 임금 인상을 도입했으며,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을 쾌척했다. 12월 봉기 진압 뒤 체포되어 고문 끝에 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했으며, 유산 약 28만 루블은 볼셰비키의 핵심 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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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부친 사망, 가구공장 상속
  • 190421세로 공장 경영권 인수
  • 19059시간 노동제·임금 인상 도입,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 기부, 공장을 혁명 거점으로 전환
  • 1905.12프레스냐 무장봉기: 공장이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기능, 세묘놉스키 연대 포격으로 파괴됨
  • 1905.12.18체포되어 고문과 협박 받음
  • 1907.02.13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

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스웨덴계) 1883–1920 ○ 동상 · 폐렴 사망

백군 최고의 '병사들의 장군', 얼음 행군을 이끌다 사라진 카잔의 정복자

“병사들에게 전하라, 내가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죽는 것이 그 증거라고.”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에 참여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맞서 코무치 인민군 소규모 의용대를 이끌고 기동전으로 카잔을 점령, 적군의 동부전선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으며 '작은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콜차크 휘하에서 동부전선 총사령관이 된 후, 붕괴하는 전선을 수습하며 바이칼까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을 이끌었고, 도중 동상과 폐렴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관은 부하들의 손에 끝까지 운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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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니콜라옙스크 기병학교 졸업, 제54용기병연대 코르네트
  • 1913니콜라옙스크 참모아카데미 1등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 참여, 중령
  • 1918.6코무치 인민군 제1의용대 지휘관
  • 1918.7–8시즈란·심비르스크·카잔 점령, 대령 진급
  • 1918.11소장 진급
  • 1919제1볼가군단장 → 볼가집단사령관 → 제3군사령관 (콜차크군)
  • 1919.12–1920.1동부전선 총사령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 지휘

표도르 세르게예프 (아르툠 안드레예비치 동지)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국가원수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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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883–1945 ○ 폐암

망명에서 돌아와 스탈린 문학의 기둥이 된 붉은 백작

“소비에트 정부 외에 러시아의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 — 전시 연설, 1941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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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 1939소련 과학원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41–1943스탈린상 2회 수상; 상금 10만 루블로 전차 건조 기부
  • 1941–1945종군기자로 60여 편의 전선 에세이, 「러시아인의 성격」 발표
  • 1945『이반 뇌제』 희곡으로 사후 스탈린상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일리인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Ильин
이론가 러시아 제국 (1923년 박탈, 이후 무국적·스위스) 러시아 1883–1954 ○ 망명 중 자연사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백군 이민 사상으로 전향한 헤겔주의 법철학자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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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사립강사
  • 1918모스크바대학 법학 교수, 헤겔 연구로 석·박사 학위 취득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에서 추방, 베를린 망명
  • 1923–1934베를린 러시아 학술연구소 교수
  • 1927–1930『루스키 콜로콜』(러시아의 종) 편집자·발행인
  • 1938나치 독일 떠나 스위스 정착, 라흐마니노프 재정 지원
  • 1948–1954사후 『우리의 과업』으로 묶인 정치 에세이 집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조선 1885–1918 ✕ 처형

러시아 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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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지부 서기 겸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 1918.4한인사회당(이후 조선공산당의 전신) 공동 창당
  • 1918.6–8조선인 적위대 및 국제 적위대 조직, 백군·일본군에 맞서 전투
  • 1918.9.4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됨
  • 1918.9.16하바롭스크에서 백군 코사크에 의해 처형됨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Виктор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5–1920 ✕ 총살형

콜차크 독재를 설계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선 카데트 정치인

1919년 9월 22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녹스 장군이 내게 왔다. 처칠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지원하라고 훈령했다.」 붕괴 직전의 정권 내막을 기록한 총리의 목소리다.

제정 러시아의 카데트당 소속 두마 의원으로, 1918년 11월 옴스크에서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차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붕괴 직전의 백색 정부를 이끌었고, 정권의 유일한 충성파 정치인으로서 최후까지 콜차크 곁에 남았다. 1920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정치중앙에 넘겨졌고, 2월 7일 새벽 레닌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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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카데트당 소속 제4대 국가두마 의원 (톰스크현)
  • 1914–1917제3 시베리아 위생·급식대 대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02–05임시정부 크론시타트 항구 사령관 겸 정부위원
  • 1918.08–11시베리아에서 군사독재 수립 운동 주도, 옴스크 쿠데타 조직
  • 1918.12–1919.05콜차크 정부 경찰국장 → 내무차관
  • 1919.05–11콜차크 정부 내무장관
  • 1919.11–1920.01각료회의 의장 (총리)
  • 1920.01–02체코군단에 넘겨져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수감, 총살

야코프 알렉산드로비치 슬라시초프

Яко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лащё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85–1929 ✕ 피살

페레코프를 지킨 백군 장군

1921년 귀환을 호소하며 말했다. “소련 정권은 러시아와 그 인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권이다.”

야코프 슬라시초프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백군 장군으로, 남러시아 내전에서 크림 방어를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말 페레코프 지협의 방어선을 장악하고 1920년 초 붉은 군대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 열세한 병력으로 브랑겔의 크림 거점을 지탱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벌어진 가혹한 진압과 약탈 의혹은 군사적 역량과 함께 백군 통치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망명 뒤 소련으로 돌아가 전술을 가르치며, 패배한 진영의 군사 지식이 새 국가에 흡수되는 역설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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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핀란드 연대 소위
  • 1911–1917니콜라이 군사참모 아카데미 수학, 파제스 군단에서 전술 교육
  • 1917모스크바 근위연대 지휘관
  • 1918의용군 합류, 슈쿠로 유격대 참모장 및 쿠반 부대 지휘
  • 1919제4보병사단장, 남러시아군 제3군단장
  • 1919–1920크림 방어 지휘관, 페레코프 지협 방어선 운용
  • 1922–1929소련 군사학교 ‘비스트렐’ 전술 강사

미하일 이바노비치 스코벨레프

Матвей Иванович Скобел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5–1938 ✕ 총살 · 모스크바

4월 위기 속 군중을 달래러 보내진 멘셰비키 노동장관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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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바쿠 노동자 파업 지도
  • 1906–1912빈 망명,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 빈 공과대학 졸업(1912)
  • 1912–1917제4두마 의원(자캅카스 러시아인 대표), 멘셰비키파
  • 1917.2–5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 집행위원
  • 1917.5–9임시정부 노동장관, VTsIK 부의장(6월~)
  • 1919–1920바쿠 거주, 적군 식량 지원 활동
  • 1920–1925프랑스·영국 망명, 비공식 소련 무역대표
  • 1925–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국가계획위원회·전연방라디오위원회 근무

막심 막시밀리아노비치 필로넨코

Максимилиан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Филоне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85–1960 ○ 망명 중 자연사

혁명 정부의 질서 회복을 밀어붙인 에스에르 관료

막심 필로넨코는 변호사 출신의 에스에르 정치인으로, 1917년 혁명 정부가 군대의 붕괴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압박한 인물이다. 전선과 최고사령부의 정부 комиссар로서 코르닐로프사빈코프와 협력해 사형제 부활과 군율 강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7월의 억압적 전환을 상징했다.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했지만 결국 코르닐로프 봉기 국면에는 케렌스키 편에 섰다. 10월 이후에는 반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망명 뒤에는 변호사와 법학 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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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조선학과 수학
  • 1914제1차 세계대전 참전, 근위 척탄병연대 소위
  • 1917.06제8군 임시정부 комиссар
  • 1917.07–08코르닐로프 휘하 최고사령관부 정부 комиссар
  • 1917.08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의 중재 시도, 이후 케렌스키 지지
  • 1917–1918페트로그라드 반볼셰비키 지하조직 참여
  • 1918–1919아르한겔스크 북부 지역 임시정부의 시의원
  • 1933–1940브뤼셀대학교 로마법 교수

블라디미르 사벨리예비치 보이트인스키

Владимир Савельевич Войти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계 1885–1960 ○ 자연사

혁명과 경제학 사이에서 방향을 바꾼 사회민주주의자

북부전선에서 병사들이 더는 공세를 원하지 않는 현실을 케렌스키에게 보고했다.

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 노동운동과 시장 이론을 함께 탐구했다.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과 시베리아 유형을 거쳐 1917년에는 멘셰비키로 전향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을 모색했다. 북부전선 위원으로서 6월 공세 준비에 관여했지만, 병사들의 전쟁 피로와 명령 거부를 직접 마주하며 혁명적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10월 이후 망명한 그는 국제 노동·경제 연구자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길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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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위원회 활동, 실업자 소비에트 조직
  • 1908–1912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체포, 강제노동형과 시베리아 유형
  • 1914–1916시베리아 짐머발트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활동
  • 1917.04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위원회 기관지 편집진
  • 1917.06–10북부전선 위원, 6월 공세 준비와 전선 정치 업무 담당
  • 1918–1935그루지야 민주공화국 대표·유럽 사회주의 언론인, 국제노동기구 활동
  • 1935–1960미국 인구조사국·사회보장위원회 등에서 경제·노동 연구
  • 1960워싱턴에서 사망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

Николай Степанович Гумилёв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6–1921 ✕ 체카에 의해 처형

아크메이즘을 창시하고 체카의 총에 쓰러진 실버 에이지의 시인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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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첫 시집 『정복자들의 길』 출간
  • 1908『낭만의 꽃』 출간; 파리서 잡지 『시리우스』 발행
  • 1909–1910잡지 『아폴론』 공동 창간; 첫 아프리카 탐험
  • 1911–1912고로데츠키와 『시인들의 길드』 결성, 아크메이즘 선언; 『진주』와 『낯선 하늘』 출간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기병으로 자원 입대, 성 게오르기 훈장 2회 수훈
  • 1918–1920『모닥불』·『천막』 출간; 고리키의 『세계문학』 출판사 근무; 전러시아 시인연합 의장
  • 1921『불기둥』 출간; 8월 3일 체포, 8월 26일 처형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Роман Фёдорович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발트 독일인 (러시아 제국) 1886–1921 ✕ 총살형

몽골을 해방하고 칭기즈 칸 제국의 부활을 꿈꾼 백군의 광신적 군벌

나의 이름은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있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의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믿은 백군 장군. 시베리아에서 그리고리 세묘노프 휘하의 아시아 기병사단을 이끌며 붉은 군대와 싸우다 1920년 몽골로 넘어갔다. 1921년 2월 중국 점령군을 몰아내고 복드 칸의 신정 군주제를 복원시켜 '다르한 호쇼이 친 왕'의 작위를 받았으나, 유대인과 볼셰비키 동조자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공포 통치를 펼쳤다. 같은 해 8월 몽골인 부대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넘겨진 뒤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6시간의 재판 끝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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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아르군 코사크 연대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5회 부상,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918그리고리 세묘노프와 함께 특별만주부대 결성
  • 1918.11소장 진급, 다우리아에 아시아 기병사단 창설
  • 1921.02우르가 점령, 중국군 축출, 복드 칸 복위
  • 1921.02복드 칸으로부터 '다르한 호쇼이 친 왕' 작위 수여
  • 1921.08몽골인 부대에 체포되어 붉은 군대에 인도됨
  • 1921.09.15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공개 재판 후 총살형

알렉산드르 스테파노비치 안토노프

Александр Степанович Анто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인 1889–1922 ✕ GPU와 총격전 중 사살

봉기의 이름이 된 사나이: 탐보프 '안토놉시나'의 사회혁명당 지도자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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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사회혁명당 입당, 무장 강탈(엑스) 참여
  • 1908인자비노 역 급습 및 다수의 무장 강탈
  • 1909체포,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 감형 — 슐리셀부르크·블라디미르 중앙형무소
  • 1917사면 석방 — 탐보프 시 민병대 부책임자 →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
  • 1918–1920지하로 잠적, 볼셰비키 당국에 맞서 전투부대 편성
  • 1920–1921탐보프 봉기 주작전참모장 — 2개 군, 약 20개 연대 지휘
  • 1921–1922봉기 패배 후 은신; GPU에 포위되어 사살

무스타파 쇼카이

Мустафа Шока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카자흐 1890–1941 ○ 의문사

투르키스탄 독립을 꿈꾸고 코칸트 자치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자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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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
  • 1917투르키스탄 민족평의회 의장
  • 1917투르키스탄 임시정부 위원
  • 1917–1918코칸트 자치 정부 외무장관, 후임 수반
  • 1918–1919알라쉬 오르다 정부 위원
  • 1921–1941망명 언론인·편집자, 《야쉬 투르키스탄》 편집장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세묘노프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90–1946 ✕ 교수형

일본군에 기대어 자바이칼을 지배하고 콜차크와 맞선 백군 아타만

「…태동하는 내전의 조건에서, 모든 온정과 인간애는 버려져야 한다」: 회고록 『나 자신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백색 테러 정책을 정당화한 말.

자바이칼 코사크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유능한 기병 장교였다. 1917년 말 특별만주부대(OMO)를 조직해 시베리아 내전의 첫 전선을 열었고, 일본군의 군사·재정 지원을 등에 업고 자바이칼 지역을 장악해 '동부 변경' 정부를 수립했다. 콜차크의 권위를 거부하며 독자 세력화했고, 그의 통치 아래 자행된 대규모 백색 테러는 미군 정보 당국의 조사 대상이 될 정도로 잔혹했다. 1920년 패주 후에도 일본의 후원 아래 만주에서 반소 활동을 이어가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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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1오렌부르크 코사크 사관학교 졸업,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4급·게오르기 무기 수훈, 에사울 진급
  • 1917.12–1918특별만주부대(OMO) 조직, 자바이칼에서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18–1919치타 점령, 자바이칼 코사크 군 아타만 선출, 콜차크와 충돌 후 화해
  • 1920.1–10러시아 동부 변경 전권 통치자, 극동군 편성 → 10월 패주, 비행기로 만주 도피
  • 1921–1945일본·만주 망명, 일본군과 협력, BREM 의장(1943–1945)
  • 1945.8–1946.8소련군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교수형

V. 볼로다르스키 (모이세이 마르코비치 골드시테인)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이념 · 선전 러시아 러시아 1891–1918 ✕ 암살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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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6–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아르카디 마슬로프

Аркадий Масл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91–1941 ✕ 의문사 (NKVD 암살 추정)

KPD의 초좌익 전환을 이끈 피아니스트 출신 혁명가,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영원한 이단아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기에 독일로 이주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아인슈타인과 플랑크 아래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나, 1차대전을 겪으며 정치에 뛰어들어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랐고,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여 초좌익 전환을 이끌었으나 대량 이탈도 초래했다. 1926년 스탈린과 텔만에 의해 제명된 뒤, 레닌분트·트로츠키 협력·국제그룹을 오가며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독자적 길을 찾아 헤맸다. 1941년 아바나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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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 1924–1925KPD 의장 — 당의 '볼셰비키화'와 초좌익 전환 주도
  • 1924–1926독일 당국 체포·4년형 수감 — 1926년 7월 건강 악화로 조기 석방
  • 1926KPD 제명 — 스탈린과 텔만에 반대,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공동 창립 — 우르반스·피셔와 결성, 곧 탈퇴
  • 1934–1937트로츠키와 협력 — 제4인터내셔널 운동 참여, 국제사무국 활동
  • 1937–1941파리-쿠바 망명 — 트로츠키와 결별 후 국제그룹 결성, 쿠바로 피신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폴리카르포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중공업 · 군수공업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92–1944 ○ 위암으로 사망

10년간 소련 전투기 전력을 지배한 '전투기 왕'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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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아나톨리 그리고리예비치 젤레즈냐코프

Анато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Железняк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95–1919 ✕ 전사 · 24세

"경호대는 피곤하다" 한마디로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아나키스트 수병: 24세에 전사한 혁명의 아이콘

1918년 1월 5일 새벽 4시, 타브리다궁전. "경호대는 피곤하다. 회의를 중지하고 전원 퇴장하라." 이 한마디로 13시간 동안 이어진 제헌의회는 영원히 문을 닫았다.

발트함대 수병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 1917년 10월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했고, 1918년 1월 5일 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으로서 "경호대는 피곤하다"는 한마디로 러시아 제헌의회를 해산시켜 혁명의 신화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기관총 사수와 장갑열차 지휘관으로 돈·크라스노프·데니킨 부대와 싸웠으며,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19년 7월 데니킨군 포격에 전사한 뒤 소련 문화에서 노래·시·영화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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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제2발트함대 승무원으로 징집, 기관학교 입학
  • 1916체포 우려로 탈영, 흑해 상선에서 가명으로 화부·기관조수로 근무
  • 1917.5제1차 발트함대 대회(중앙발트) 대표 선출
  • 1917.6두르노보 저택 방어전 가담, 체포되어 14년형 선고; 9월 크레스티 교도소 탈옥
  • 1917.10해군혁명위원회 위원, 겨울궁전 습격 및 아드미랄테이스트보 점령 지휘
  • 1918.1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 — 제헌의회 해산
  • 1918.3비르줄라 요새화 지구 사령관, 오스트리아-독일군과 교전
  • 1918.6–9키크비제 사단 예하 제1옐란스키 보병연대장, 차리친 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 1918.10–1919.4오데사 지하활동(빅토르스 가명), 봉기 후 상선노조 위원장
  • 1919.5–7장갑열차 후댜코프호 지휘관;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데니킨 전선 전투 중 포격 전사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로샬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Рошаль
정부 수반 러시아 러시아 1896–1917 ✕ 살해

크론시타트 수병을 혁명으로 이끈 21세의 인민위원

10월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를 저지하는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를 이끈 젊은 혁명가로, 발트함대 수병을 혁명 편으로 돌려세웠다. 10월혁명 당일 감옥에서 풀려나 케렌스키 반격 저지에 투입되었고, 연말 루마니아 전선에서 백색장교단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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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10번 김나지움 혁명 서클 활동, 전교생 조직 회의 참가로 퇴학
  • 1914볼셰비키 입당, 나르바 구역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조직
  • 1915북부전선 징집, 전선 선전 활동으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수감
  • 1917.3–1917.7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시당위원장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 — 발트함대 수병 조직
  • 1917.7–1917.107월 사건 후 체포, 트로츠키·라스콜니코프 등과 함께 크레스티 재수감
  • 1917.1010월혁명 당일 석방,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 스타프카 점령 참여
  • 1917.12레닌 파견으로 루마니아 전선 인민위원회 대표 — 체포, 비밀장교단에 의해 살해

드미트리 세르게예비치 리하초프

Дмитрий Сергеевич Лихач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906–1999 ○ 자연사

솔로프키를 살아남은 고대루스 문학의 세계적 권위자, 후기 소련의 도덕적 양심

1929년 가을 솔로프키. 체포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장작더미 속에 숨어 밤새 총성을 들었다. 날이 밝자 깨달았다. "내 대신 죽은 이를 위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문헌학자·문화사가. 1928년 반혁명 활동으로 솔로프키 수용소에서 4년간 복역했다. 석방 후 푸시킨관에서 고대루스 문학을 연구했으며, 『이고리 원정기』 연구와 『고대루스 문학 기념물』 총서 편찬을 주도했다. 1970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6년 소비에트 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평생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사하로프 제명에 반대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인민대표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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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2반혁명 활동 혐의 체포, 솔로프키 수용소 및 벨발트라그 복역
  • 1938소련 과학아카데미 러시아문학연구소(푸시킨관) 연구원
  • 1947문헌학 박사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6–1993소비에트(러시아) 문화재단 이사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그리신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러시아 1914–1992 ○ 자연사

18년간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연금 재신청 중 사망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얼굴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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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8측량기사, 기관차 차량기지 부책임자
  • 1941–50세르푸호프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50–52모스크바 주당 기계제조부장 → 제2서기
  • 1956–67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의장 · 세계노조연맹 부의장
  • 1967.06–1985.12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71.04–1986.02정치국 정위원 (1961년부터 후보위원)
  • 1980모스크바 올림픽 인프라 건설 총괄
  • 1986–8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국가고문, 이후 연금 생활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테레빌로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Теребилов
이론가 소련, 이후 러시아 러시아인 1916–2004 ○ 자연사

사라졌던 법무부를 되살려 소비에트 법전 편찬을 지휘한 법률가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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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주 파르골로보 지구 검사
  • 1941노동자 분견대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
  • 1945레닌그라드 프리모르스키 지구 검사
  • 1949전연방 범죄수사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7소련 검찰총장 수석보좌관·수사국 부국장
  • 1962소련 대법원 부원장
  • 1970소련 법무장관
  • 1984소련 대법원장
  • 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 도첸트

바실리 파블로비치 미신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Миш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러시아 러시아 1917–2001 ○ 자연사

코롤료프를 이어 소유즈·살류트·N-1을 책임진 실천적 우주설계자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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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35ЦАГИ 공장 견습공, 야간반 거쳐 МАИ 입학
  • 1941–45볼호비티노프 항공설계국: 첫 로켓전투기 БИ-1 무장 설계
  • 1945–46독일 파견, V-2 조사단에서 코롤료프와 평생의 동료가 됨
  • 1946–66OKB-1 제1부수석설계자: Р-1부터 Р-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까지
  • 1956Р-5 개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66–74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 소유즈, 살류트, N-1 달로켓
  • 1974N-1 실패와 내부 서한으로 해임, 달탐사 계획 폐기
  • 1974–2001МАИ 교수·학과장, 교과서 《장거리유도탄탄도학》 등 저술

구리 이바노비치 마르추크

Гурий Иванович Марчу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25–2013 ○ 자연사

소련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이자 시베리아 계산수학의 개척자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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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피직스에너지연구소 수학부장 (오브닌스크)
  • 1964–1980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계산센터 소장
  • 1975–1980시베리아 지부 의장 ·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0–1986GKNT 의장 ·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91–2013RAS 상임간부회 명예위원 · 계산수학연구소 소장/명예소장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쿠르노소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рносов
연구자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6–1998 ○ 자연사

체르노빌 4호기를 봉인한 '대피호'의 저자이자 기술 책임자

그는 파괴된 원자로를 조사하기 위해 기중기 갈고리에 매달린 '바티스카프'에 직접 올라탔다.

탐보프 출신의 소련 원자력 건설 기술자로, 1953년 레닌그라드 공학건설연구소를 졸업한 뒤 ВНИПИЭТ에 입사해 평생 한 연구소에서 일했다. 1957년 키시팀 사고 수습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1986년 체르노빌에서는 불과 206일 만에 4호기를 봉인하는 '대피호'(석관) 프로젝트의 저자 겸 기술 책임자로서, 방사능 현장을 직접 '바티스카프'에 매달려 조사하며 세계 유례없는 공학적 해법을 설계했다. 훗날 ВНИПИЭТ의 총책임자(1989~1998)로 재직하며 아르자마스 사고와 키로바칸 지진 복구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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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ВНИПИЭТ 입사, 엔지니어로 시작
  • 1957키시팀 사고(첼랴빈스크-65) 수습 프로젝트 책임자
  • 1985–1989ВНИПИЭТ 주임기사
  • 1986체르노빌 4호기 '대피호'(석관) 프로젝트 저자 겸 기술 책임자
  • 1989–1998ВНИПИЭТ 총책임자(원장)
  • 1996러시아 연방 공훈건설자 칭호 수여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푸르센코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урсенко
연구자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7–2008 ○ 사망

소련 기록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를 처음 재구성한 역사가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번스는 그를 '20세기 미국사에 관한 가장 유능한 소련 전문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전후 세대 최초로 소련에서 미국사 연구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역사가. 레닌그라드대학에서 국제관계사를 전공하고 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에서 평생 연구하며 석유정치, 미국 혁명, 미소 관계를 아우르는 300여 편의 저작을 남겼다. 티머시 나프탈리와 함께 소련 공산당·크렘린 문서고를 처음 열어 쿠바 미사일 위기의 내막을 밝힌 『One Hell of a Gamble』(1997)은 냉전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어진 『Khrushchev's Cold War』(2006)로 영국 왕립연합군사연구소의 올해의 군사사 서적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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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역사학 후보학위 취득
  • 1954–1988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 선임·주임 연구원
  • 1966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8–2008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 세계사 부장
  • 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96–2002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역사부 아카데미크 서기

율리 미하일로비치 보론초프

Ю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оронцов
외교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9–2007 ○ 자연사

소련군 아프간 철수를 외교로 마무리한 군축 협상가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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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소련 외무부 유럽부·국제기구부, 유엔 대표부
  • 1966–1977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워싱턴 대사대리
  • 1978–1983주인도 소련 대사
  • 1983–1986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86–1990소련 외무부 제1차관, INF 조약 수석협상가
  • 1988–1989주아프가니스탄 대사 겸임, 소련군 철수 외교
  • 1990–1994유엔 주재 소련·러시아 상임대표
  • 1994–1998주미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정부 수반 러시아 러시아 1929–2024 ↓ 퇴임 1991

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으며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상품 부족과 배급제가 일상이 된 시점에서 이 장면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우랄 공업 관리자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총리가 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를 이끌었지만, 시장개혁과 계획경제 보존 사이에서 흔들렸다. 체르노빌 사고 수습과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진두지휘했으나, 재임 말기 공산품 부족과 배급제가 도입되는 경제 위기를 맞았다. 1991년 초 심장발작으로 물러난 뒤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이후 20년간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2024년 9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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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91.1각료회의 의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라표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Лавё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6 ○ 자연사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마지막 책임자이자 우라늄 지질학자

2009년 글로벌에너지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항상 냉각기와 온난기를 오갔으며,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아주 짧은 순간만 살아왔다."

소련의 지질학자이자 과학행정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전역의 우라늄 광상을 연구하여 소련 핵연료 자원 기반을 구축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988년부터 소련 해체 후 2013년까지 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을 지내며 지구과학 부문을 이끌었고, 방사성폐기물 지층처분과 북극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700편 이상의 논문과 28권의 단행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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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이겜 RAS 우라늄광상연구실 선임연구원 → 실장
  • 1966–1972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 부국장
  • 1968–1972전연방 지질기금(ВГФ) 국장
  • 1972–1983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1989키르기스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8–2013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1소련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91소련 총리 부의장 겸 과학기술부 장관
  • 1991–2016이겜 RAS 소장 → 과학지도자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우크라이나 1932–1994 ↓ 당 해체 1991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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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야블로코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Яблок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33–2017

체르노빌의 장기 피해를 추적한 생태학자

그가 편집한 체르노빌 연구서는 6,000여 개 자료를 검토해 장기 피해를 추산하며 공식 사망자 수 중심의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동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생물학자이자 환경정책가였다. 그는 체르노빌의 장기적 건강·환경 피해를 강조하며 공공 논쟁에 참여했고, 공동 저술서의 높은 사망 추정치는 재난 피해 규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 극단을 이루었다. 과학 연구와 환경운동, 의회·대통령 자문 활동을 오가며 생태 문제를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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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생물·토양학부 졸업
  • 1966생물학 박사 취득, 세베르초프 동물 형태학 연구소 선임연구원
  • 1969–1989콜초프 발달생물학연구소 연구실장 및 선임연구원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correspondent 선출
  • 1988–1991그린피스 소련 창립자·공동의장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최고회의 생태위원회 부위원장
  • 1992–1997러시아 대통령 환경·보건 자문 및 환경안보 부처간위원회 의장
  • 2007–2009『체르노빌: 사람과 환경에 미친 재난의 결과』 공동 편집·저술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933–2017 ○ 자연사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 스타디움을 채운 해빙기 시인의 빛과 그림자

「바비 야르」는 '바비 야르 위에는 아무 기념비도 서 있지 않다'로 시작해, 홀로코스트를 집단적 소련 시민의 희생으로만 말하던 국가 서사에 정면으로 균열을 냈다.

해빙기 대표 시인. 「바비 야르」(1961)로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깼다. 스타디움을 채운 낭독회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는 시구로 문학의 공적 사명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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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비에트 스포츠〉지에 첫 시 발표
  • 1952첫 시집 『미래의 정찰병들』 출간, 최연소 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52–1957고리키 문학대학 수학, 두딘체프 옹호로 제적
  • 1961「바비 야르」 발표 —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깨다
  • 1962「스탈린의 후계자들」을 『프라우다』에 발표
  • 1962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에 가사 제공, 초연
  • 1968「프라하로 진격하는 탱크」 발표 후 공연 금지·해외여행 제한
  • 1986–1991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89–1991하리코프 선거구 소련 인민대의원
  • 1991–2017미국 털사대학 교수로 러시아·유럽 시와 영화사 강의

예브게니 그리고리예비치 야신

Евг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Ясин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계 1934–2023 ○ 자연사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설계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예브게니 야신은 소련 말기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려는 개혁 구상을 발전시킨 경제학자였다. 그는 샤탈린 그룹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로 참여해 급진적 시장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소련의 해체 뒤에는 러시아의 개혁 국가기구에서 일했다. 옐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서 시장개혁을 추진했지만, 전환의 사회적 비용과 국가 역량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자유주의 노선을 대표했다. 이후 고등경제대학과 자유주의 사상 재단을 이끌며 러시아의 경제정책과 공론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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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데사 수문공학연구소 졸업, 교량 건설기사
  • 1963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 1964–1973중앙통계국 연구소 부서장·연구실장
  • 1973–1989소련 과학아카데미 중앙경제수학연구소 연구실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서장,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
  • 1994–1997러시아 연방 경제부 장관
  • 1998–2021고등경제대학 학술감독
  • 2000–2019자유주의 사명 재단 대표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솝차크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ча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러시아 러시아 1937–2000 ○ 심장마비

제헌회의 의장을 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초대 민선 시장

「볼로댜, 청동으로 굳어지지 말게」 — 푸틴에게 남긴 마지막 말, 2000년 2월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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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 1989–1990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 1990–1991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
  • 1991–1996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 1993제헌회의 의장 (러시아 연방 헌법 공동 초안)
  • 1997–1999파리 망명

유리 니콜라예비치 주코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Жук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38–2023 ○ 자연사

기록보관소에서 스탈린 시대의 책임을 다시 물은 역사가

그의 연구는 해빙의 공식 기억 뒤에 가려진 가해자의 책임을 다시 기록보관소로 돌려놓았다.

유리 주코프는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가로, 러시아 역사연구소에서 스탈린 시대와 소비에트 정치사를 연구했다. 그는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를 대숙청의 집행자이자 책임 있는 정치가로 재평가하는 논의를 제기했다. 동시에 스탈린의 대중 탄압 책임을 축소하는 ‘다른 스탈린’ 해석으로 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작업은 탈스탈린화 이후의 역사 기억이 지닌 정치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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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모스크바 국립역사·기록보관학연구소 졸업
  • 1962–1973노보스티 통신사 기자
  • 1976역사학 후보학위 취득
  • 1981–2023러시아 역사연구소 연구원, 수석연구원
  • 1992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93『에르미타시 작전』 출간
  • 2003『다른 스탈린』 출간
  • 2022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연구 출간

루슬란 이므라노비치 하스불라토프

Руслан Имранович Хасбулатов
국가원수 러시아 체첸계 1942–2023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최고소비에트 의장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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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70–1990모스크바 국민경제연구소(플레하노프) 교수, 국제경제관계학과장
  • 1990.03그로즈니 선거구에서 RSFSR 인민대의원으로 선출
  • 1990.06–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91.07–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권한대행
  • 1991.10–1993.10RSFSR/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4–2023플레하노프 러시아 경제대학교 세계경제학과장

알렉산드르 안토노비치 랴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нтонович Ляховский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6–2009 ○ 자연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기록한 장군 역사가

그는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에서 소련군의 전투와 철군을 내부 자료와 참가자 증언으로 다시 묶었다.

알렉산드르 랴홉스키는 소련군 장교이자 군사 저술가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작전과 정책 결정을 내부 경험과 문서 자료로 기록했다. 그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 국방부 작전집단에서 복무하며 발렌틴 바렌니코프의 보좌관으로 철군 국면을 지켜보았다. 1995년 출간한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은 개입 결정의 오류와 전쟁의 복합적 결과를 분석해, 소련의 패배 여부를 둘러싼 수정주의적 논쟁의 핵심 러시아어 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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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바쿠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소련군 장교로 임관
  • 1968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군 작전에 참가
  • 197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총참모부 작전총국 선임 장교
  • 1985–1987보로실로프 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87–1989아프가니스탄 소련 국방부 작전집단 근무, 바렌니코프의 수석 보좌관
  • 1990소련 지상군 총참모부 작전국 제1부국장
  • 1995『아프간의 비극과 용맹』 출간
  • 2002예편

루스템 마흐무토비치 누레예프

Рустем Махмутович Нурее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 (타타르계) 1950–2023 ○ 별세

코시긴 개혁 50년 논쟁을 한 권의 표제로 수렴한 제도경제학자

1977년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을 때, 심사 기관인 CPSU 중앙위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평가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 태생 타타르계 제도경제학자로, MSU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논쟁적 박사논문으로 주목받았다. 1993년 쿠즈미노프와 함께 고등경제대학(ВШЭ) 설립에 참여해 초대 경제학과장과 초대 부총장을 지냈고, 러시아 제도경제학파의 핵심 구축자로 자리잡았다. 2017년 출간된 집단 논문집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의 책임편집자로서,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양극화된 평가를 표제 하나로 응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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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MSU 경제학부 우등 졸업
  • 1975–1993MSU 경제학부 정치경제학 강좌 부교수
  • 1993–1996ВШЭ 초대 부총장 겸 경제이론학과장
  • 1997–2013ВШЭ 정교수, 제도경제학 및 경제분석 학과장
  • 2013–2017러시아 정부 금융대학 경제이론 학과장
  • 2017『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 책임편집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피지코프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ыжик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65–2019 ○ 자연사

해빙기의 소련 정치를 파고든 역사학자

피지코프는 제22차 당대회 결의에서 반당 그룹에 대한 언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거의 네 배 많았다고 지적했다.

알렉산드르 피지코프는 1950~1960년대 소련의 정치 변동을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국가 관료였다. 그는 스탈린 격하와 흐루쇼프 시기의 권력투쟁을 다룬 연구로, 1957년 반당 그룹의 패배가 당 정치의 언어와 경계를 어떻게 재편했는지 추적했다. 그의 분석은 제22차 당대회 결의가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반당 그룹 공격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을 짚어, 탈스탈린화가 단순한 과거 청산이 아니라 현재 권력의 정당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학술 활동과 함께 교육부 차관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러시아 역사에 관한 논쟁적인 문명론적 주장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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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모스크바주 교육대학 역사학부 졸업
  • 1990년대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연구원
  • 19981953~1964년 소련 사회의 사회정치 발전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991950~1960년대 소련 사회의 정치개혁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2000러시아 연방 통신정보부 장관 보좌관
  • 2000–2003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보좌관
  • 2003–2004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
  • 2010년대모스크바 국립교육대학교 현대 러시아사 교수

겐나디 바실리예비치 코스티르첸코

Геннад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стырченко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54–

스탈린 시대 국가 반유대주의를 기록으로 실증한 역사가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은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은 것이 되었다: 많은 이가 봤다고 하나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도 제시된 적 없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스탈린 시대 연구자로, 소련 국가 반유대주의의 기록을 발굴해 학계의 표준을 세웠다. 그의 저서 『붉은 파라오의 포로』(1994)와 『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2001)는 의사들의 음모와 반세계주의 캠페인을 포함한 스탈린 말기 유대인 탄압의 전모를 기록으로 실증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2003년 '데포르타치야: 미스티피카치야' 논문에서 스탈린이 유대인 대량 추방을 계획했다는 통설에 대해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다'고 비판하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입장은 브렌트·나우모프의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와 대비되는 대표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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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항공산업 인민위원회에 관한 후보자 학위논문 심사 통과
  • 1994『붉은 파라오의 포로』 출간
  • 2001『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 출간 (2003년 개정판)
  • 2003러시아 유대인공동체연맹 '올해의 인물 5762' 선정
  • 2008박사학위 논문 심사 통과: 소련 정치 지도부와 유대계 인텔리겐치야(1936–1953)
  • 2015『스탈린의 비밀 정책』 신판(전2권, 1,176쪽) 출간
  • 현재러시아과학원 러시아사연구소 수석연구원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스코블린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кобл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93–1937/1938? ✕ 실종, 사망 경위 불명

백군 장군이 된 비밀 협력자

1937년 밀러를 만나게 한 뒤, 스코블린은 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니콜라이 스코블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백군 장교로, 코르닐로프 타격사단을 이끈 젊은 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망명 뒤 그는 러시아 전군사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협력자로 포섭되어 백계 러시아인 망명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사건을 둘러싼 독일 측 문서와 정보가 스탈린의 숙청을 촉발했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주도 아래 조작·활용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1937년 예브게니 밀러 납치에 관여한 뒤 사라졌으며, 그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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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7–1918코르닐로프 타격부대 대대장
  • 1918–1920코르닐로프 타격연대·사단 지휘관, 백군 소장
  • 1920–1929갈리폴리·불가리아 망명, 코르닐로프 연대 지휘
  • 1929–1937파리 러시아 전군사연합 코르닐로프 연대장
  • 1935–1937ROVS 내부선 방첩 책임자
  • 1937밀러 납치 작전 협력 뒤 실종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시모노프

Николай Сергеевич Симон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959– ○ 생존

소련 군산복합체의 기록자, 펜으로 VPK를 해부한 역사가

그는 이렇게 썼다: "소련 VPK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 준비의 연속이었고, 바로 그것이 소련 경제 전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련 군산복합체(VPK)의 형성과 작동을 처음 체계적으로 밝혀낸 러시아의 역사가·경제사가. 1996년 출간된 『1920~1950년대 소련의 군산복합체』는 이 분야의 기본 문헌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바버, 마크 해리슨과의 공동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키로프 농촌 출신으로 교사로 일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1988년 CPSU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갔으며, 대통령 행정실 자문과 스베르방크 금융 실무를 거치며 학문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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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키로프주에서 출생
  • 1981키로프 국립사범대학 역사·영어 전공 졸업
  • 1988모스크바 국립대학 역사학 박사 취득
  • 1988–1991CPSU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 1991–1997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러시아사 연구소 선임연구원
  • 1999대통령 행정아카데미서 역사학 국가박사(Dr. hab.) 취득
  • 1998–2000연방평의회 예산위 자문, 대통령 행정실 내부정책총국 고문
  • 2001–2010스베르방크 부국장 등 금융 분야 근무
  • 2011–2017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러시아사 연구소 선임연구원

니키타 유리예비치 피보바로프

Никита Юрьевич Пивовар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현재 ○ 현역 역사학자

소련 산업관리 개혁의 제도적 한계를 추적한 역사가

2025년 연구에서 피보바로프는 산업부 복원이 명목상 중앙집권화였지만 기업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없었다고 밝혔다.

니키타 피보바로프는 소련 경제사와 산업관리 제도의 변화를 연구하는 러시아 역사가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국가경제·행정 아카데미의 응용역사 연구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며, 문서와 제도 설계를 통해 후기 소련 개혁을 분석한다. 2025년 연구에서 그는 코시긴 개혁의 산업부 복원을 추적해,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충돌 속에서 중앙집권화가 처음부터 절충된 형태였고 산업부가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고 논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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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2025「코시긴 개혁과 산업관리 체계의 변화」 발표
  • 현재러시아 대통령 국가경제·행정 아카데미 응용역사 연구센터 선임연구원
  • 현재소련 경제사와 산업관리 제도 연구

레오니드 아나톨리예비치 나우모프

Леонид Анатольевич Наумов

대테러의 지역별 편차를 통계로 읽어 낸 모스크바의 역사 교사

모스크바에서 역사 교사와 학교 운영자로 일하며 대숙청기 국가보안기관을 연구해 온 역사가다. NKVD 지도부 내부 투쟁을 다룬 첫 연구(2006)에 이어 『「피의 난쟁이」 대 인민의 수령: 예조프의 음모』(2009)와 『스탈린과 NKVD』(2013)를 펴냈고, 대테러의 집행을 지역별 통계 편차와 예브도키모프의 '북캅카스파' 같은 체키스트 집단의 인맥 분석으로 재구성한다. 이 서가에 실린 두 연구서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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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936~1938년 NKVD 지도부 내부 투쟁』 출간
  • 2009『「피의 난쟁이」 대 인민의 수령: 예조프의 음모』 출간
  • 2013『스탈린과 NKVD』 출간

레오니트 야노비치 기비안스키

Леонид Янович Гибианский
연구자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36–

아카이브로 스탈린-티토 결별 연구를 다시 쓴 역사학자

소련 역사학자로 유고슬라비아 현대사와 냉전기 동유럽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66년부터 인슬라브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80년대 말 아카이브 개방 이후 스탈린과 유고·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발굴해 스탈린-티토 결별의 기원에 대한 탈냉전기 재평가의 토대를 놓았다. 노먼 네이마크와 공동 편집한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1997)을 비롯한 수백 편의 저작과 코민포름 회의록 출판으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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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남·서슬라브사 전공)
  • 1962–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 연구소 아스피란투라
  • 1966–2022슬라브학 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 국제관계사 부문장(1990–1993), 수석연구원
  • 1987『소비에트 연방과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1941–1947』 출간
  • 1997노먼 네이마크와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 1944–1949』 공동 편집
  • 1998『코민포름 회의, 1947·1948·1949: 문서와 자료』 공동 편집
  • 2014『소련-유고슬라비아 최고위급 회담, 1946–1964』 편집·서문
  • 2021인슬라브 연구소 스레즈넵스키 금메달 수상

발레리 알렉산드로비치 티시코프

Вале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шк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1– ○ 현역 학자

민족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은 민족학자

그는 민족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정치가들이 독점하려 다투는 강력한 은유라고 설명했다.

발레리 티시코프는 민족성·민족주의·민족분쟁을 연구한 러시아 민족학자이자 사회인류학자다. 그는 민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실체라기보다 정치적 행위자와 엘리트가 동원하고 재구성하는 범주로 분석했으며, 이 관점은 저서 『Ethnicity, Nationalism and Conflict in and after the Soviet Union: The Mind Aflame』에 집약됐다. 1992년 민족문제 담당 장관을 지내며 학술적 민족성 논의를 국가의 다민족 현실과 분쟁 예방의 문제에 연결했다. 그의 구성주의적 해석은 민족주의의 자율성과 대중적 경험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과 함께 후기 소련 및 러시아 민족정치 논쟁의 한 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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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모스크바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 1969–1972마가단 국립교육대학 역사·문헌학부 학장
  • 1972–1976소련과학아카데미 세계사연구소 연구원
  • 1976–1981소련과학아카데미 역사분과 학술서기
  • 1989–2015러시아과학아카데미 민족학·인류학연구소 소장
  • 1992러시아연방 민족문제 담당 장관
  • 2015–민족학·인류학연구소 학술 지도자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폴란드계 생몰년 미상 ○ 생몰년 미상

혁명의 첫날 기록에 남은 의장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첫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보구스와프 즈보로프스키는 1905년 혁명기에 활동한 노동운동가로, 상세한 개인 이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첫 의장을 맡았고, 다음 날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에게 자리를 넘겼다. 짧은 재임이었지만 소비에트가 파업 속에서 노동자 대표를 정치적 조직으로 묶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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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페테르부르크 노동운동 활동가
  • 1905.10.13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창립 의장
  • 1905.10.14의장직 교체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쳅스키

Владимир Дмитриевич Кузнечевский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4– ○ 생존

소련사에서 러시아 문제를 추적한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쳅스키는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역사학 박사이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권력과 국가 민족정책을 다룬 저술을 발표했으며, 특히 레닌그라드 사건을 러시아공화국의 지위와 러시아계 지도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은 사건을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소련 체제의 ‘러시아 문제’와 연결해 보려는 논쟁적 역사서술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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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s소련 및 러시아 정치사 연구자
  • 2013『레닌그라드 사건. 소비에트 대 러시아인』 출간
  • 2016러시아전략연구소(RISI)에서 『레닌그라드 사건』 출간
  • 2017『레닌그라드 사건』 개정·확장판 발표
  • 현재소련사와 ‘러시아 문제’에 관한 저술 활동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외국 정치가 러시아 러시아인 1952– ○ 현직 대통령

소련 해체의 상실을 국가 회복의 서사로 재구성한 통치자

“소련의 붕괴는 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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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91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장교
  • 1990–1996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 대외관계위원회 책임자·부시장급 간부
  • 1998–1999연방보안국(FSB) 국장
  • 1999러시아 연방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9–2000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 2000–2008러시아 연방 대통령
  • 2008–2012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 2012–러시아 연방 대통령

블라디슬라프 마르티노비치 주보크

Владислав Мартинович Зубок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 1958–

소련 붕괴를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인재로 해석한 냉전사학자

그는 소련 붕괴의 원인을 이렇게 압축했다: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 소련은 피할 수 없는 몰락이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실기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출신의 냉전사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학 역사학부와 소련 과학아카데미 미국·캐나다연구소에서 수학했으며, 1985년 동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아카이브 연구원을 거쳐 템플대학 교수를 지냈고,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LSE) 국제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출간한 《Collapse: The Fall of the Soviet Union》에서 소련 붕괴는 필연이 아니었으며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가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결과였다고 주장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 책으로 2022년 컨딜 역사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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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1985소련 과학아카데미 미국·캐나다연구소 대학원생
  • 1985–1993소련 과학아카데미 미국·캐나다연구소 연구원
  • 1994–2001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아카이브 연구원
  • 2004–2013템플대학 역사학과 교수
  • 2013–현재런던정경대학(LSE) 국제사 교수, 냉전연구 프로그램장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수로비킨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уровикин
반혁명 세력 러시아 러시아인 1966– ○ 현역 지휘관

명령 수행과 강경전을 오간 러시아 장군

1991년 8월 모스크바 터널에서 그가 지휘한 장갑차 행렬과 시위대의 충돌로 세 명이 사망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소련 말기 장교로 출발해 러시아군 최고위 지휘관으로 올라선 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타만 사단 BMP 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터널에 진입했으며, 충돌로 시위대 세 명이 사망한 뒤 구금됐지만 상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가 취하됐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체첸, 시리아에서 지휘했고,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적 성과와 민간인 피해를 함께 낳은 강경한 작전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국가의 명령 체계가 해체 뒤 러시아의 군사국가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한 경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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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옴스크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타만 근위 자동차화소총사단 소대·중대 지휘관
  • 1989–1991아프가니스탄 복무, 타만 사단 제1자동차화소총대대장
  • 19918월 쿠데타 때 모스크바 투입 BMP 대대 지휘, 터널 충돌 뒤 구금 및 기소 취하
  • 1995–2002프룬제 군사아카데미와 총참모부 아카데미 수학, 타지키스탄·체첸 지휘 보직
  • 2017–2021시리아 러시아군 집단 지휘, 항공우주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진급
  • 2022–202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남부집단군 및 통합군 총사령관
  • 2023–현재통합군 총사령관 대리, 이후 항공우주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국방부 대기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할투린

Степан Николаевич Халтур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6/1857–1882 ✕ 교수형

겨울궁전을 폭파한 목수 혁명가,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창립자

"이 길에서는 돌아올 수 없다"며 눈물로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만류했으나, 스스로 겨울궁전 지하에 다이너마이트를 쌓았다 — 동료의 증언.

뱌트카 출신 목수로, 1878년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을 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창립했다. 1880년 겨울궁전에 목수로 위장 취업해 황제 식당 아래에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폭파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는 지각으로 살아남았다. 1881년 3월 이후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이 되었고, 1882년 오데사에서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에 가담해 체포·처형당했으며, 레닌은 크렘린 사무실에 마르크스와 나란히 할투린의 고부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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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1875뱌트카 사범학교 입학, 성적 불량으로 퇴학; 목수 기술 습득
  • 1875–1877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공장들에서 목수로 일하며 혁명 서클 가입; 카잔 시위(1876) 참가 후 비합법 지위로 전환
  • 1878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 창립, 강령 작성 —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 1879.9스테판 바티시코프라는 가명으로 겨울궁전 목수로 취업, 다이너마이트를 매일 조금씩 반입
  • 1880.2.5겨울궁전 지하실에서 폭탄 폭파 — 귀빈 지각으로 황제는 무사했으나 근위병 11명 사망, 56명 부상
  • 1880–1881모스크바로 도피, 노동자 선전 활동 지속
  • 1881.3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882.3.18오데사에서 니콜라이 젤바코프와 함께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 마부로 위장했으나 체포
  • 1882.3.22오데사에서 가명으로 군사재판 후 교수형 — 겨울궁전 폭파범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처형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마르케비치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Маркевич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77– ○ 생존

러시아 경제사의 계량적 재구성자

2021년 연구는 기근 사망률의 지역 격차가 식량 생산성보다 민족적 편향과 더 밀접하다고 제시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는 러시아 경제사를 통계와 제도 분석으로 재구성해 온 역사경제학자다. 그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국가, 시장, 산업화, 계획을 장기 자료로 분석했으며 러시아신경제학교에서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2021년 나탈리야 나우멘코, 낸시 치안과 함께한 연구는 1932~1933년 기근에서 우크라이나인의 높은 사망률이 식량 생산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민족적 편향이 반영된 조달 정책과 이동 제한이 사망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이 작업은 대규모 지역 자료를 통해 기근의 경제적 메커니즘과 국가 정책의 책임을 함께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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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199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학생
  • 2002러시아과학아카데미 러시아사연구소 역사학 박사(칸디다트)
  • 2005–2007워릭대학교 경제학부 박사후연구원
  • 2011응용경제학 국가상 수상
  • 2012–러시아신경제학교 교수 및 제도경제학과장
  • 2021–Economic Journal 부편집인

안드레이 발레리예비치 수시코프

Андрей Валерьевич Сушк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75–

스탈린 말기 '레닌그라드 사건'의 원인을 지도부의 부패에서 찾은 역사가

안드레이 수시코프는 소련 시기 당·국가 권력체계와 지역 노멘클라투라의 통치 실천을 연구해 온 러시아 역사가다. 우랄 연방관구 기록보존소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문서고에서 발굴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된 동인이 엘리트 간 권력투쟁만이 아니라 레닌그라드 지도부의 만연한 부패와 공적 자원의 사적 유용이었다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했다. 2018년 저서 『'레닌그라드 사건': '혁명의 요람'에 대한 총숙청』은 이 문제를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연구로 평가받으며, 전후 스탈린주의 정치사 연구의 주요 논쟁점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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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1998니즈니타길 국립사범대학 역사학부 학생
  • 1998–2001러시아과학원 우랄분원 역사·고고학연구소 박사과정
  • 2003역사학 후보자 학위 취득 (논문: 1957~1964년 소련공산당 중앙위 간부회 구성)
  • 2003–2004니즈니타길 국립사회사범아카데미 전임강사
  • 2004–2006러시아과학원 우랄분원 역사·고고학연구소 연구원
  • 2007–현재러시아과학원 우랄분원 역사·고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알렉산드르 블라들레노비치 슈빈

Александр Владленович Шубин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65– ○ 생존

소련 해체를 권력투쟁으로 읽은 역사가

그는 소련 해체를 ‘반노멘클라투라 혁명’이 아니라 노멘클라투라의 불일치와 일관성 상실의 결과로 설명했다.

알렉산드르 슈빈은 러시아의 역사가이자 좌파 사회운동에 참여한 공공 지식인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 소련 사회의 역사를 연구해 왔다. 그의 대표작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놓친 가능성과 비공식 운동, 소련의 정치투쟁을 함께 분석하며 체제의 변화가 자동적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었음을 묻는다. 그는 소련 해체를 구조적 필연이라기보다 일관성을 잃은 지배 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과 정치적 선택이 빚은 결과로 해석해, 1980년대 말의 개혁과 당내 갈등을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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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1989모스크바 국립 레닌 교육대학 학생
  • 1985–1991사회주의 운동과 비공식 정치클럽 활동
  • 1989–1992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사연구소 대학원생
  • 1992–2001세계사연구소 연구원
  • 2001–2015세계사연구소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사 센터장
  • 2003–국립 인문대학 교수
  • 2007–2015세계사연구소 수석연구원
  • 2015–세계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코이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러시아 러시아 1947–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러시아 유일의 부통령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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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바르나울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 1980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88아프가니스탄: 제378독립공격항공연대장, 제40군 공군 부사령관
  • 1988소련영웅 칭호 수여
  • 1990RSFSR 인민대의원, 최고소비에트 위원
  • 1990소련군 참모본부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91.7–1993.10RSFSR/러시아연방 부통령
  • 1993.9–10의회에 의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 체포
  • 1996–2000쿠르스크 주지사

알렉세이 바실리예비치 사프로노프

Алексей Васильевич Сафроно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현재 ○ 생존

소련 경제를 개혁의 가능성과 한계로 읽는 역사가

알렉세이 사프로노프는 러시아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로, 소련 경제의 전 시기를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한다. 그는 코시긴 개혁을 자유화와 컴퓨터화의 단순한 대립으로 보지 않고, 경제·수학적 방법과 물질적 유인을 결합하려 한 계획경제 개혁으로 해석한다. 그의 분석은 1965년 개혁의 구상이 당대의 통념보다 보수적이었으며, 실행의 불철저함이 성과와 한계를 함께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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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러시아 대통령 산하 국민경제·행정 아카데미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
  • 2025『코시긴 개혁: 구상에서 축소까지』 발표
  • 2025『대소련 경제: 1917~1991』 저술
  • 2020소련 계획경제의 관리 컴퓨터화 연구 발표
  • 현재소련 경제사 및 개혁 논쟁 연구

알렉세이 폴랸스키

Алексей Полянский
러시아 러시아

예조프 수사 기록을 소설적 재구성과 섞어 공간한 KGB 출신 작가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에드바르트 스타니슬라보비치 라진스키

Эдвард Станиславович Радзинский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 1936– ○ 생존

기록과 극작으로 러시아의 비극을 재구성한 대중 역사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러시아의 역사와 비극적 인물을 대중에게 전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방송인이다. 모스크바 역사기록보관소에서 훈련받은 그는 연극으로 경력을 시작한 뒤 니콜라이 2세, 라스푸틴, 스탈린 등의 전기를 썼다. 1997년 스탈린 전기에서 새로 공개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이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쟁의 한 해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서사적이고 심리적인 역사 서술은 널리 읽혔지만, 사료의 출처와 해석을 둘러싸고 전문 역사가들의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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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 역사기록보관소 졸업
  • 1958–극작가로 활동 시작, 「내 꿈… 인도」 초연
  • 1960년대–「사랑에 관한 104쪽」 등 희곡 발표
  • 1976–러시아 역사 인물에 관한 역사서 집필
  • 1993「마지막 차르」 출간
  • 1997「스탈린」 출간, 비공개 기록과 증언으로 사망 논쟁 제기
  • 1990년대–「역사의 수수께끼」 방송 진행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안드레예프

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Андреев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4–현재 ○ 생존

사망률과 기대수명을 해부한 수리 인구학자

1987년 남성 기대수명이 3.2년 늘어 65세에 이르렀다는 계산은 정책 논쟁을 사망률의 언어로 바꾸었다.

예브게니 안드레예프는 수학적 엄밀성과 통계 실무를 결합해 러시아와 소련의 사망률을 연구한 인구학자다. 그의 기대수명 분해 방법은 연령과 사망 원인이 수명 변화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표준 도구가 되었고, 1980년대 후반 남성 기대수명 반등을 3.2년, 65세까지로 산출한 작업은 금주 정책의 건강 효과를 평가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그는 알코올 관련 사망률을 장기 자료와 방법론의 문제로 다루며, 정책 효과를 단순한 서사로 환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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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수학 전공 졸업
  • 1970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물리·수학 박사 취득
  • 1970–1975소련 국가통계위원회 인구학 부문 선임연구원
  • 1975–2000국가통계 연구기관 인구정보 연구실장
  • 2000–2005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국민경제예측연구소 사망률 분석·예측 연구실장
  • 2005–2011막스플랑크 인구학연구소 연구원
  • 2017–현재국립연구대학교 고등경제대학 국제인구·보건연구실장

올레크 비탈리예비치 흘레브뉴크

Олег Витальевич Хлевнюк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계 1959– ○ 생존

스탈린 시대를 문서로 해부한 역사학자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소련 스탈린 시대의 정치사와 굴라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기록문서 편집자다. 국가기록원 자료와 당·정부 문서를 바탕으로 대숙청을 지역의 자발적 폭발이 아니라 중앙의 결정과 집행 체계가 작동한 사건으로 해명했다. 그의 연구는 스탈린의 지시와 통제가 테러의 방향과 규모를 결정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문서가 남기지 않는 동기와 과정을 신중하게 구분한다. 그는 학술서와 사료집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스탈린 신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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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빈니차 국립교육대 역사학과 졸업
  • 1985–1987소련사연구소 대학원 및 역사학 박사 취득
  • 1990년대–현재러시아 국가기록원 문서 연구·편찬
  • 1997정치국의 권력 메커니즘 연구로 역사학 박사 취득
  • 2011–2017모스크바 국립대 20~21세기 러시아사 교수
  • 2014–현재고등경제대 역사학 교수 및 연구자
  • 2015『스탈린: 한 지도자의 생애』 출간
  • 2023『사기꾼 기업』으로 계몽자상 수상

유리 마르코비치 골란드

Юрий Маркович Голанд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3– ○ 현재 생존

네프 연구로 출발해 코시긴 개혁 논쟁의 프레임을 만든 경제학자

개혁은 좌초되었고, 국가는 정체기에 접어들었으며, 이 정체가 궁극적으로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유리 골란드는 소련 신경제정책(NEP)과 화폐개혁 연구로 출발한 러시아 경제학자다. 모스크바국립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1990년대 경제학으로 전환, 네프와 관련한 논쟁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2010년 알렉산드르 네키펠로프와 함께 발표한 논문 「코시긴 개혁: 놓친 기회인가 신기루인가」는 이 개혁을 둘러싼 탈소비에트 역사학 논쟁의 핵심 질문을 공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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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모스크바국립대 물리학부 졸업
  • 1967–1995소련/러시아 과학원 물리문제연구소 연구원
  • 1991『네프를 파괴한 위기들』 출간
  • 1995–2002러시아 산업가·기업가연합 전문가연구소
  • 2002–2005러시아 과학원 국제경제·정치연구소
  • 2005–러시아 과학원 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 2006『1921~1924년 화폐개혁기 경제정책 논쟁』 출간
  • 2010네키펠로프와 「코시긴 개혁: 놓친 기회인가 신기루인가」 발표

유리 미하일로비치 킬린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Килин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61– ○ 생존

겨울전쟁 사상자 기록을 다시 계산한 역사학자

유리 킬린은 카렐리야와 소련의 대외·군사정책을 연구해 온 페트로자보츠크의 역사학자다. 그는 겨울전쟁에서 국가가 남긴 손실 기록을 비판적으로 대조하는 연구를 이끌었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의 사업은 전사자 집계 문제를 다시 공론화했다. 2012년 그가 제시한 소련군 전사자 13만 8,533명은 이 전쟁의 인명 손실을 둘러싼 주요 수정안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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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카렐리야에서 출생
  • 1983페트로자보츠크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 1983–1986중등학교 역사 교사
  • 1986–1989소련 역사연구소 레닌그라드 분소 대학원생
  • 1989–1992소련 과학아카데미 카렐리야 분소 연구원
  • 1992–현재페트로자보츠크 국립대학교 교수
  • 2000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2006–2009겨울전쟁 붉은군대 손실 기록 수정 사업 주도

키릴 아나톨리예비치 볼돕스키

Кирилл Анатольевич Болдовский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 1963– ○ 생존

레닌그라드 사건의 미해명을 추적하는 역사가

키릴 볼돕스키는 소련 후기와 현대 러시아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러시아 역사학자다. 그는 레닌그라드 사건 전후의 당 apparatus와 봉쇄의 역사를 함께 다루며, 공개된 기록이 밝혀 주는 것과 여전히 남은 공백을 구분한다. 그의 연구는 이 사건을 단순한 숙청의 서사가 아니라 당 권력, 지역 통치, 기억의 충돌로 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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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레닌그라드 출생
  • 2011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 2014러시아 현대사 박사학위 취득
  • 2018『봉쇄의 비서들의 몰락』 출간
  • 현재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 현재레닌그라드 봉쇄사 연구실 책임자

티모페이 이바노비치 키르피치니코프

Тимофей Иванович Кирпичн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92–1917/1918 ✕ 백군 내부에서 처형

제정군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 지도자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겠는가? 나는 가지 않겠다.”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하급지휘자였지만, 전선의 경험과 병사들 사이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명령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했다. 1917년 2월 26일 시위 진압 뒤 부하들에게 노동자에게 발포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다음 날 볼린스키 연대의 봉기를 이끌어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연쇄적인 가담을 촉발했다. 그는 임시정부에게 혁명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으나, 10월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맞섰고 백군 내부의 처형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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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부상
  • 1916–1917페트로그라드 주둔 예비부대, 볼린스키 연대 훈련대 선임 하사관
  • 1917.02.27볼린스키 연대 훈련대의 명령 불복종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봉기 주도
  • 1917.04임시정부에 의해 혁명의 영웅으로 선전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선출
  • 1917.04–05임시정부 지지 병사 시위 조직, подпрапорщик 및 прапорщик으로 승진
  • 1917.10–1918볼셰비키에 맞서 남부로 이동, 백군 진영에서 처형됨

파벨 루슬라노비치 팔라젠코

Павел Русланович Палажченко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9– ○ 현역 활동

정상회담의 언어를 조율한 통역자

그는 통역을 ‘두 언어 사이의 실을 찾아 잇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파벨 팔라젠코는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핵심 대화 현장을 기록한 통역자이자 저술가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통역을 맡아 제네바, 레이캬비크, 몰타 등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회고록은 정상들의 발언뿐 아니라 군축 협상과 신뢰 형성이 작동한 실무 현장을 보여 주며, 평화로운 냉전 종식에 대한 소련 측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후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국제관계와 언론 업무를 맡으며 통역과 정치 분석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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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2모리스 토레즈 모스크바 외국어교육대학에서 통번역을 공부함
  • 1972–1974유엔 통역자 과정 수료 뒤 대학에서 통역과 강의를 함
  • 1974–1979유엔 사무국 러시아어 통역부에서 근무
  • 1980–1985소련 외무부 통역부와 미국·캐나다 부서에서 근무
  • 1985–1991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수석 통역관,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
  • 1991소련 대통령실에서 근무
  • 1992–현재고르바초프 재단 국제관계·언론 업무 책임자 및 분석가
  • 1997《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와 보낸 나의 세월》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