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비시 체제 수립과 프랑스 국가기구의 협력

1940년 6월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가 패배하자 페탱 정부는 독일과 휴전했고, 7월 10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페탱에게 헌법 제정 권한을 포함한 전권을 부여했다. 이 결정에는 80명의 의원이 반대했다. 제3공화국 헌정은 중단됐고 비시의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페탱은 공포되지 않은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의회가 전권을 넘긴 사실은 비시 체제를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이지만, 그 뒤 체제를 페탱의 책임에서 분리하지 않는다.

비시 정권은 명목상 프랑스 전체에 적용되는 조치를 만들었지만, 1942년 11월까지 실제로 자율 통치한 곳은 독일 점령 밖의 남부 지역이었다. 정권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독일과 긴밀히 협력했다. 1940년 10월과 1941년 6월의 유대인 지위 법령은 유대인을 공직과 군에서 배제하고 여러 직업 활동을 제한했다. 1941년에는 유대인 문제 총괄위원회를 만들어 반유대인 정책을 조정했고, 유대인 재산을 몰수해 프랑스 국가 소유로 이전하는 이른바 ‘아리아화’도 추진했다. 1942년 프랑스 경찰은 비시 당국의 동의를 받아 점령지와 비점령지 양쪽에서 유대인을 검거했고, 파리에서는 7월 16~17일 약 1만 3천 명을 체포했다. 이런 정책과 조치는 페탱 정부의 독자적 책임과 프랑스 국가기구가 나치 독일의 박해에 가담한 양상을 함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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