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의 식민지 리비아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시작된 전쟁은 왜 3년 동안 오가며 이어졌고, 미국의 토치 상륙과 튀니지 항복으로 끝난 이 전역은 연합국의 전쟁과 제2전선 논쟁에서 무엇을 뜻했나?
1940년 6월 이탈리아의 참전으로 시작된 북아프리카 전역은 이집트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이 컴퍼스 작전으로 무너지고, 독일이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보내면서 리비아와 이집트의 사막을 오가는 기동전이 되었다. 토브루크 포위, 가잘라 패배와 토브루크 함락 끝에 1942년 엘알라메인에서 추축군의 진격이 멈췄고, 10~11월 몽고메리의 제8군이 추축군을 무너뜨렸다. 같은 때 미국·영국군이 비시 프랑스령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했고(토치 작전), 다를랑과의 거래로 비시군은 연합국 편으로 돌아섰다. 동서에서 몰린 추축군은 1943년 5월 13일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그 뒤에는 몰타와 지중해 호송선단을 둘러싼 보급전, 암호 해독 전쟁, 그리고 리비아의 식민지 주민과 북아프리카 유대인이 겪은 박해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참전과 이집트 침공
북아프리카 전역의 무대가 된 리비아는 1911~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이탈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은 식민지였다.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해안 지대만 장악했고, 키레나이카에서는 사누시 교단과 연결된 원주민 부대가 1923년부터 우마르 무크타르의 지휘 아래 저항을 이어 갔다.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끈 「평정」 작전은 화학 무기와 군인·민간인 대량 처형을 동원했다. 1930~1931년에만 키레나이카 주민 1만 2천 명이 처형되었고, 북부 키레나이카의 유목민 전체가 저지대의 거대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1933년 9월 수용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수용자 10만 명 가운데 4만 명이 죽었고, 키레나이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베두인 10만 명이 이탈리아 이주민에게 줄 땅에서 쫓겨났다. 1934년 총독 이탈로 발보가 두 식민지를 하나로 묶었고, 1939년 해안 지방은 「제4의 해안」이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편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사막 전투는 이렇게 식민 정복과 학살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땅에서 벌어졌다. 1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서방 공세가 시작되고 프랑스가 무너지기 직전인 6월 10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그는 선전포고에서 이탈리아가 육지나 바다로 맞닿은 다른 민족들을 분쟁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고 밝혀, 영국군이 주둔한 이집트 왕국은 형식상 중립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영국군은 이튿날인 6월 11일부터 리비아의 이탈리아 진지를 습격했고, 6월 14일에는 제11 경기병연대와 왕립전차연대 일부가 국경을 넘어 카푸초 요새를 점령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이 습격으로 시작되어 1943년 5월 13일 튀니지에서 추축군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졌다. 6월 22일 콩피에뉴 휴전으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전체가 비시 정부 아래 남자, 튀니지 국경을 지키던 이탈리아군은 동쪽 키레나이카로 옮겨 제10군을 보강했다. 장비가 낡아 가던 중동 총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은 습격을 멈추고 소규모 차단 부대로 이집트 국경을 지키게 했다. 2
리비아 총독으로 북아프리카 최고사령부를 이끌던 발보가 사고로 죽자, 무솔리니는 원수 그라치아니를 후임으로 보내며 8월 8일까지 이집트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라치아니는 제10군의 장비가 형편없어 공격이 성공할 수 없다고 답했지만 무솔리니는 공격을 강행시켰다. 이탈리아의 전략은 해안을 따라 진격해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는 것이었으나, 수송 차량과 항공기가 모자라 계획은 여러 번 연기되고 축소되었다. 결국 9월 13일 다섯 개 사단이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해 살룸을 지나 약 105킬로미터를 나아갔고, 9월 16일 시디바라니 일대에서 멈춰 요새화된 진지를 쌓았다. 이 진격에서 영국군 전사자는 40명, 이탈리아군은 120명이었다. 제10군은 공병들이 리비아의 발보 도로를 잇는 「승리의 길」을 닦을 때까지 진지에서 기다리며, 약 130킬로미터 동쪽 메르사마트루흐의 영국군 주력을 칠 보급품을 쌓기로 했다. 3 2



컴퍼스 작전과 아프리카 군단의 도착
흩어진 이탈리아군 진지를 하나씩 치는 닷새짜리 습격으로 계획된 컴퍼스 작전은 1940년 12월 7~8일 밤 시작되었다. 리처드 오코너가 지휘한 서부 사막군 약 3만 6천 명은 시디바라니 일대와 키레나이카에 흩어진 이탈리아 제10군 약 15만 명을 상대로 요새 진지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이탈리아군을 이집트 밖으로 몰아낸 뒤 바르디아와 토브루크를 점령했다. 1941년 1월 22일 토브루크의 이탈리아 수비대가 항복했다. 오코너는 제7기갑사단을 사막 너머로 질러 보내 해안을 따라 물러나던 제10군보다 먼저 베다폼에 닿게 했고, 퇴로가 막힌 이탈리아군은 2월 7일 항복했다. 열 주 동안 영국 연방군은 이탈리아군·리비아군 포로 13만~13만 8천 명(출처에 따라 다름)과 전차 수백 대, 대포 천여 문을 얻고 엘아게일라까지 나아갔으며, 손실은 사상자 약 1,900명이었다. 그러나 3월 정예 부대가 그리스 원정으로 빠져나가고 차량이 닳아 진격은 엘아게일라에서 멈췄다. 4 2 5
무솔리니의 지원 요청을 받은 히틀러는 독일군을 리비아로 보냈다. 「존넨블루메(해바라기) 작전」으로 불린 이 파병의 첫 부대는 1941년 2월 11일 나폴리를 떠났고, 에르빈 롬멜은 2월 12일 리비아에 도착했다. 히틀러가 아프리카 군단이라 이름 붙인 이 원정군의 임무는 이탈리아군을 보강해 트리폴리와 트리폴리타니아를 지키는 것이었고, 독일의 투입은 처음 기갑사단 하나, 나중에도 기갑사단 둘과 차량화 사단 하나를 넘지 않았다. 전투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탈리아군이 치렀다. 그러나 롬멜은 방어 명령을 넘어 3월 24일 엘아게일라, 31일 메르사브레가를 공격했고, 영국군은 4월 키레나이카에서 밀려났다. 4월 6일에는 오코너가 독일군 정찰대에 붙잡혀 2년 넘게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웨이벌은 1949년 「이탈리아군을 겪은 뒤라 롬멜까지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고 썼다. 울트라로 해독한 독일 신호가 롬멜에게 공세를 금지한 명령을 알려 준 것도 영국군 지휘부의 방심을 키웠다. 6 2 7
레슬리 모스헤드가 지휘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제9사단이 주축인 수비대는 1941년 4월 10일부터 항구 도시 토브루크에서 독일·이탈리아군에게 포위되었다. 「토브루크의 쥐」라 불린 수비대는 왕립 해군이 밤마다 실어 나르는 보급과 교대 병력에 기대 버텼고, 토브루크를 차지하지 못한 롬멜은 국경의 살룸과 할파야 고개까지 나간 전방 부대를 트리폴리에서 이어지는 긴 보급선으로 먹여야 했다. 영국군은 5월 브레비티 작전, 6월 배틀액스 작전으로 포위를 풀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웨이벌은 배틀액스 실패 뒤 클로드 오킨렉과 자리를 바꿔 인도로 갔다. 한편 남쪽 사막에서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에서 올라온 자유 프랑스군이 1941년 1월 31일부터 3월 1일까지 쿠프라 오아시스를 포위해 이탈리아·리비아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지휘관 르클레르와 부하들은 3월 1일 「우리의 깃발이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휘날리는 날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5 2 8 9




크루세이더에서 토브루크 함락까지
오킨렉 아래서 서부 사막군은 제30군단을 더해 제8군이 되었다. 제8군은 영국군에 오스트레일리아·인도·뉴질랜드·남아프리카 군대와 수단 방위군, 마리피에르 쾨니그의 자유 프랑스 여단이 섞인 영연방과 망명 군대의 연합이었다. 1941년 11월 18일 시작된 크루세이더 작전에서 흩어져 싸운 영국 기갑부대는 처음 닷새 동안 전차 530대를 잃으며 추축군 전차 약 100대를 부쉈고, 11월 23일 시디레제그에서 남아프리카 제5여단이 전멸했다. 롬멜은 24일 영국군 후방을 휘젓는 「철조망으로의 돌진」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영국 기갑부대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11월 27일 뉴질랜드군이 토브루크 수비대와 만나 231일 동안의 포위가 풀렸고, 보급이 바닥난 롬멜은 12월 가잘라를 거쳐 엘아게일라까지 물러났다. 그러나 1942년 1월 21일 트리폴리에서 보급을 받은 추축군이 기습 반격해 제8군은 다시 가잘라 선까지 밀려났다. 2 10 5
1942년 5월 26일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은 북쪽에서 양동 공격을 하는 사이 주력을 가잘라 선의 남쪽 끝으로 돌려 보내는 베네치아 작전을 시작했다. 남쪽 끝의 비르하케임 오아시스에서는 쾨니그가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 제1여단 약 3,600명이 5월 26일부터 6월 11일까지 버텼다. 수비대에는 외인부대와 아프리카 식민지 대대가 섞여 있었고, 탄약이 거의 떨어진 6월 10~11일 밤 영국군이 마련한 접선 지점으로 탈출해 약 2,700명이 빠져나왔다. 이 저항은 추축군의 보급로를 남쪽으로 길게 늘였고, 처칠은 이들을 「싸우는 프랑스」라 불렀다. 롬멜은 영국 지뢰밭에 등을 댄 「가마솥」 진지에서 버티며 영국군의 애버딘 작전을 각개 격파했고, 제8군은 가잘라 선을 버리고 물러났다. 11 12
6월 21일 추축군은 토브루크 동쪽 방어선의 약한 곳을 뚫고 하루 만에 항구를 점령했다. 남아프리카 제2사단장 헨드릭 클로퍼가 지휘하던 수비대 3만 3천 명이 포로가 되었고, 쓸 만한 차량 1천여 대와 식량 5천 톤, 휘발유 1,400톤이 추축군 손에 넘어갔다. 1942년 2월 싱가포르 함락 다음으로 큰 영제국군의 항복이었다. 가잘라 전투는 롬멜 군 경력 최대의 승리로 꼽힌다. 추축군은 이집트로 들어가 제8군을 여러 방어선에서 밀어냈다. 이집트 진격을 위해 몰타 상륙 계획인 헤르쿨레스 작전은 미뤄졌는데, 이 결정이 영국에게 몰타를 다시 리비아행 추축군 수송선단 공격 기지로 살릴 시간을 주었다. 11




보급과 정보의 전쟁: 몰타·울트라·「좋은 정보원」
사막 전투의 승패는 바다를 건너오는 보급에 달려 있었다. 북아프리카 해안에는 천연 항구가 드물었고, 나일 삼각주의 영국군 기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 트리폴리까지는 도로로 약 2,100킬로미터였다. 그 사이에 지중해 한가운데의 영국 식민지 몰타가 있었다. 1941년 5월 롬멜은 「몰타 없이는 추축국이 결국 북아프리카를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독일 공군과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부터 1942년 11월까지 몰타를 굶기고 폭격해 굴복시키려 했고, 2년 동안 3천 차례 폭격으로 그랜드하버 일대에만 6,700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1942년 1월 남부 총사령관으로 시칠리아에 온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한 공습은 몰타의 공격력을 크게 떨어뜨려,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수송선단이 더 자주 도착하게 했다. 그래도 연합군 수송선단과 영국 공군은 섬을 지켰고, 몰타의 항공기와 잠수함은 리비아로 가는 수송선을 공격했다. 엘알라메인과 토치 상륙 뒤 공세로 돌아선 몰타 기지의 연합군은 1943년 5월까지 164일 동안 추축국 선박 230척을 가라앉혔다. 13 11 14
정보전에서는 한동안 추축국이 앞섰다. 카이로 주재 미국 무관 보너 펠러스는 영국군 사령부와 전선을 돌아보며 상세한 보고서를 국무부의 「블랙 코드」로 워싱턴에 보냈는데, 1941년 9월 이탈리아 정보기관이 로마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이 암호책을 몰래 촬영해 돌려놓은 뒤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의 보고를 읽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좋은 정보원」이라 부른 펠러스의 보고는 1942년 1월부터 6월까지 연합군의 병력과 의도를 롬멜에게 알려 주었고, 6월 29일에야 그가 블랙 코드를 쓰지 않게 되었다. 아프리카 군단의 제621 통신대대는 무선 규율이 느슨한 영국군의 교신을 엿들었으나, 1942년 7월 오스트레일리아 제9사단에 붙잡히면서 이 통로도 막혔다. 2 15
연합군 쪽에서는 에니그마로 암호화된 독일 신호를 해독한 울트라가 점점 큰 몫을 했다. 처음에는 정보가 현장 지휘관에게 늦게 닿거나 롬멜의 실제 의도와 어긋나 쓸모가 제한되었지만, 지중해를 건너는 추축국 수송선의 시각과 항로를 알려 주면서 보급로 차단의 핵심이 되었다. 연합군은 해독 사실을 숨기려고 수송선을 공격하기 전에 일부러 정찰기를 띄워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꾸몄다. 추축국 보급선의 40~60퍼센트가 해독 정보 덕에 발견되어 격침되었다는 추정이 있지만, 빈센트 오하라와 엔리코 체르누스키는 2013년 F. H. 힌즐리 같은 역사가들이 울트라의 효과를 크게 부풀렸다고 반박했다. 이들에 따르면 북아프리카로 보낸 군수품·연료·탄약 267만 톤 가운데 224만 톤이 도착했고, 「울트라는 추축군이 나일강에 닿는 데 필요한 보급을 막지 못했다」. 2



엘알라메인
알렉산드리아에서 106킬로미터 떨어진 철도 정거장 엘알라메인 앞에서, 오킨렉이 직접 지휘한 제8군은 1942년 7월 1~27일의 제1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추축군의 이집트 진격을 멈춰 세웠다. 북쪽은 바다, 남쪽은 차량이 지나기 어려운 카타라 저지대로 막힌 좁은 목이었다. 그러나 트리폴리의 기지에서 너무 멀리 나온 추축군도, 지친 제8군도 결정타를 낼 수 없었다. 8월 초 처칠과 제국 참모총장 앨런 브룩은 카이로에 와서 오킨렉을 중동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리고 해럴드 알렉산더를 앉혔다. 제8군 사령관에 오른 윌리엄 고트가 탄 수송기가 독일 전투기에 격추되자 버나드 몽고메리가 그 자리를 이었다. 16 15
8월 30일 롬멜은 제8군을 남쪽에서 감싸 치는 마지막 대공세(브란둥 작전)를 시작했다. 울트라로 공격 방향을 미리 안 몽고메리는 남쪽에 일부러 틈을 두고 기갑부대와 포병을 전선 뒤 32킬로미터의 알람엘할파 능선에 파묻어, 전차를 움직이지 않는 대전차포처럼 쓰게 했다. 능선 공격이 실패하고 연료가 떨어지자 롬멜은 9월 초 물러났다. 롬멜은 이 결과를 영국의 제공권 탓으로 돌렸는데, 울트라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몽고메리는 추격 대신 가을 공세를 위한 병력 증강과 훈련을 택했고, 이 전투로 추축군은 아프리카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병든 롬멜은 9월 23일 요양하러 독일로 떠났고 게오르크 슈투메가 지휘를 맡았다. 17 15
10월 23일 밤 제2차 엘알라메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병력 19만 5천 명과 전차 1,029대의 제8군이 병력 11만 6천 명과 전차 547대의 아프리카 기갑군을 쳤다. 몽고메리의 라이트풋 작전은 북쪽 지뢰밭에 두 통로를 뚫는 것이었고, 첫날 전선을 보러 나간 슈투메가 심장마비로 죽자 히틀러는 롬멜을 요양소에서 돌려보냈다. 공세가 한때 막히자 처칠은 「싸움에서 이길 장군을 찾는 게 정말 불가능한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11월 2일 슈퍼차지 작전으로 돌파가 시작되자 히틀러는 「승리 아니면 죽음 말고 다른 길을 보여 주지 말라」며 사수를 명령했고, 무솔리니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롬멜은 이 명령이 불가능을 요구한다고 보았고, 결국 11월 4일 퇴각했다. 독일군은 전사 1,149명, 부상 3,886명, 포로 8,050명, 이탈리아군은 전사 971명, 부상 933명, 포로 1만 5,552명을 냈고, 11월 11일까지 추축군 포로는 3만 명으로 늘었다(이탈리아 공식 전사와 바이에를라인의 수치는 다르다). 처칠은 11월 10일 「이것은 끝이 아니다. 끝의 시작조차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시작의 끝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15




토치 상륙과 비시 프랑스
프랑스령 북서아프리카 상륙은 연합국 안의 타협이었다. 1942년 7월 30일 런던의 연합참모장회의 뒤에도 미국의 조지 마셜과 어니스트 킹은 계획 승인을 거부하고 그해 안에 북유럽에 상륙하자고 주장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칠이 1942년 안의 북아프리카 상륙을 밀어붙이자 마셜은 루스벨트에게 차라리 「독일 우선」 전략을 버리고 태평양에서 공세에 나서자고 제안했고, 루스벨트는 그것이 러시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며 물리쳤다. 결국 루스벨트는 토치 작전을 다른 모든 작전에 앞세워 되도록 빨리 실행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전쟁 중 그가 군 지휘관들에게 내린 직접 명령 단 두 번 가운데 하나였다. 토치는 영국에게는 북아프리카의 승리를, 미국에게는 제한된 규모로나마 독일과 싸울 기회를 주었고, 오래전부터 제2전선을 요구해 온 스탈린에게는 추축군 일부를 북아프리카로 돌려 붉은 군대의 짐을 얼마간 덜어 주는 의미가 있었다. 2 18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계획은 카사블랑카·오랑·알제 세 곳에 동시에 상륙한 뒤 재빨리 튀니스로 나아가, 이집트에서 서진하는 영국군과 함께 추축군을 동서에서 죄는 것이었다. 조지 S. 패튼이 이끈 서부 기동부대 3만 5천 명은 미국에서 곧바로 대서양을 건너 카사블랑카로, 로이드 프레덴들의 중부 기동부대 1만 8,500명은 오랑으로, 케네스 앤더슨의 동부 기동부대 2만 명은 알제로 갔다. 11월 8일 시작된 상륙에서 미국 영사 로버트 머피의 정보와 달리 비시 프랑스군은 오랑과 모로코에서 거세게 저항했고, 카사블랑카 앞바다에서는 미국 해군이 비시 프랑스·독일 함정과 해전을 벌였다. 알제에서는 8일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쿠데타가 상륙 전에 프랑스 제19군단을 무력화하고 비시 지휘관들을 체포해 도시가 첫날 함락되었다. 18 2
알제에는 마침 비시 프랑스군 총사령관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개인 일로 와 있었다. 사흘 동안의 협상과 위협 끝에 마크 클라크와 아이젠하워는 다를랑과 알퐁스 쥐앵에게 11월 10~11일 오랑과 모로코의 저항을 멈추라고 명령하게 했다. 다를랑은 「행동할 수 없게 된」 페탱을 대신해 북아프리카를 다스리겠다고 선언했고, 그 대가로 북·서아프리카 고등판무관에 앉았으며 비시 관리들도 대부분 자리를 지켰다. 11월 22일 미국과 다를랑이 맺은 클라크-다를랑 협정은 프랑스 식민제국 아프리카에 대한 상당한 통제권을 미국에 넘겼고, 샤를 드골은 이를 프랑스 주권 침해로 보고 반대했다. 연합군 상륙에 대응해 독일은 비시 프랑스의 비점령 지역을 점령했지만(안톤 작전), 툴롱의 프랑스 함대 주력은 스스로 배를 가라앉혀 추축국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다를랑은 12월 24일 스무 살의 왕당파·반비시 청년 페르낭 보니에 드 라샤펠에게 암살되었다. 후임 고등판무관 앙리 지로는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석했고, 3월 비시 체제와 결별하는 연설을 한 뒤 6월 드골과 함께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의 공동 의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드골에게 밀려났다. 2 18 19 20 21





튀니지 전역과 추축군의 항복
토치 상륙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비시군이 물러난 튀니지로 병력을 서둘러 실어 날랐다. 연합군은 비시 당국과 씨름하며 튀니지로 빠르게 나아가지 않았고, 11월 중순에야 사단 하나 규모로 진입했다. 영국 제1군으로 이름을 바꾼 앤더슨의 부대는 튀니스 30킬로미터 앞까지 갔다가 추축군의 제공권에 밀려 멈췄고, 12월 초에는 튀니스와 비제르트를 곧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2월 8일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이 제5기갑군 사령관으로 튀니지에 왔다. 몽고메리의 제8군은 1943년 1월 23일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리비아를 가로질러 물러난 추축군은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침공을 막으려고 쌓았던 튀니지 남부의 마레트선으로 들어갔다. 1월 이 부대는 조반니 메세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제1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 14
2월 19~24일 롬멜이 지휘한 추축군은 튀니지 중서부 아틀라스산맥의 폭 3킬로미터 협곡 카세린 고개에서 미국군과 처음 큰 싸움을 벌였다. 프레덴들의 미국 제2군단은 큰 손실을 입고 파이드 고개 서쪽의 원래 진지에서 80킬로미터 넘게 밀려났고, 영국군도 전차 11대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연료와 탄약, 예비대가 떨어진 롬멜은 연합군 포병의 반격 속에 24일까지 얻은 땅을 모두 내주고 물러났다. 아이젠하워는 프레덴들을 해임했고, 미국 육군은 이 패배의 교훈으로 부대 편제와 전술, 지휘관과 장비 일부를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해럴드 알렉산더의 제18군집단이 세 나라 군대의 작전을 묶었다. 3월 초 제8군이 튀니지 국경에 이르러 롬멜과 아르님은 두 군대의 집게 사이에 갇혔고, 롬멜은 건강을 이유로 독일로 돌아가 다시는 아프리카에 오지 않았다. 22 2
3월 말 제8군은 격전 끝에 마레트선을 우회했고, 4월 중순 튀니지 중부의 제1군이 주공세를 시작했다. 5월 7일 영국 기갑부대가 튀니스에, 미국 제2군단 보병이 비제르트에 들어갔다. 9일 오마르 브래들리의 미국 제2군단이 제5기갑군의 잔존 병력을 몰아넣어 항복을 받았고, 아르님은 영국 로열서식스 연대에 항복했다. 메세는 5월 12일 끝까지 싸우겠다고 본국에 타전했으나 그날 저녁 무솔리니의 항복 명령을 받았다. 5월 13일 정오 무렵 이탈리아 제1군이 제8군에 항복하면서 아프리카의 추축군 저항이 끝났다. 포로 수는 출처에 따라 17만 명 이상(튀니스 함락 뒤 엿새 동안), 26만 명 이상, 27만 5천 명 이상으로 다르며, 아프리카 군단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연합군 사상자는 7만 6,020명으로 영연방군 3만 8,360명, 자유 프랑스군 1만 9,439명, 미군 1만 8,221명이었다. 경험 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잃은 추축국은 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두 달 뒤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14 2

전선 뒤의 사람들: 식민지 주민과 유대인
북아프리카 전역은 오랫동안 「증오 없는 전쟁」, 곧 유럽 곳곳의 빨치산 학살이나 민족 청소 없이 사막에서 군대끼리만 맞붙은 깨끗한 전쟁으로 그려졌다. 최근의 역사가들은 이 상을 반박한다. 이 지역에는 많은 민간인이 살았고, 전역 내내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연합군 포로와 현지의 유대인·베르베르인·아랍인에게 수많은 학대와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파트리크 베른하르트는 2012년 연구에서 북아프리카 전선 뒤에서 벌어진 이탈리아의 잔학 행위와 아랍인·베르베르인·유대인 박해를 다루었다. 전투에 나선 군대도 상당수가 식민지 출신이었다. 이탈리아 제10군에는 리비아 식민지 사단들이 있었고, 제8군의 인도·남아프리카 군대와 비르하케임의 아프리카 식민지 대대, 독일이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끌어낸 독일인 군단병도 이 사막에서 싸웠다. 2 3 12
리비아 유대인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반유대주의 법률과 이탈리아군·독일군의 추방에 시달렸다. 1942년 1월 이탈리아 당국은 무솔리니의 「소개(스폴라멘토)」 명령을 리비아 유대인에게 적용해, 벵가지·데르나·토브루크·바르체 등 키레나이카 도시의 유대인을 서쪽의 수용소로 보냈다. 가장 참혹한 곳은 트리폴리에서 235킬로미터 떨어진 자도(오늘날의 자두) 수용소였다. 1942년 5월부터 1943년 1월 영국군이 해방할 때까지 운영된 이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힌 약 2,600명 가운데 562명이 주로 굶주림과 이 매개 발진티푸스로 죽었다. 자도는 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노동 수용소 가운데 사망자가 가장 많았고, 그 희생자는 무슬림 세계에서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희생자로는 가장 큰 무리를 이룬다. 1942년 벵가지의 유대인 구역을 점령한 독일군은 상점을 약탈하고 유대인 2천여 명을 사막 너머 노동 수용소로 보냈으며, 그 가운데 5분의 1 이상이 죽었다. 23 24
토치 상륙 직후 비시 튀니지를 점령한 독일군은 1942년 11월 23일 튀니스 유대인 공동체 의장 무아즈 뷔르젤과 유력 유대인들을 체포했다. 당시 튀니지에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야드 바솀에 따르면 나치는 노란 배지 착용, 벌금, 재산 몰수를 강요했고, 5천 명이 넘는 유대인을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냈으며 그곳에서 적어도 265명이 살해되었다. 프랑스에 살던 튀니지 유대인 160명은 유럽 대륙의 절멸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전선이 가까워 배와 비행기를 군사 수송에 써야 했던 독일은 튀니지에서 「최종 해결」을 실행하지 못했고, 튀니지 유대인은 유럽에서 벌어진 대량 추방과 학살을 면했다. 마르틴 길버트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유대인 박해를 프랑스 홀로코스트의 일부로 본다. 1943년 1월 23일 영국 통치가 시작될 때 리비아 유대인 공동체는 인종법과 전쟁, 수용소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25 23




평가
북아프리카 전역은 롬멜이라는 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어 왔다. 역사가들이 「롬멜 신화」라 부르는 이 상은 1941년 롬멜 자신이 참여한 나치 선전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전시 언론은 북아프리카에서 거듭 지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롬멜의 천재성을 퍼뜨렸고, 영국군 안의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이들도, 계급 갈등을 누그러뜨리려는 처칠 같은 지도자도 그 이야기를 썼다. 전후 영국은 롬멜을 「좋은 독일인」으로 그리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따랐고, 1950년 데즈먼드 영의 전기와 1953년 『롬멜 문서』가 신화를 굳혔다. 깨끗한 전쟁을 했다는 그의 평판은 냉전기 서독 재무장과 옛 적국 사이의 화해에 쓰였고, 롬멜의 참모였던 한스 슈파이델 같은 이들은 국방군의 명예 회복 없이 서독군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증오 없는 전쟁」이라는 말 자체가 앞 절에서 본 식민지 주민과 유대인의 경험을 지운다는 비판도 같은 맥락이다. 26 2
이 전역이 소련이 요구한 제2전선을 대신했는가는 연합국 안에서도 다투던 문제였다. 영국과 미국 지휘부는 토치를 유럽 상륙 전에 미국군을 실전에 투입하고 지중해 항로를 확보하는 현실적 타협으로 보았지만, 오래전부터 독일군을 붙잡아 둘 제2전선을 요구해 온 스탈린에게 북아프리카가 그 요구를 채웠는지는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이 다루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독일이 사막에 보낸 병력은 처음 기갑사단 하나, 이후에도 기갑사단 둘과 차량화 사단 하나를 넘지 않았다. 그래도 전역의 부담은 작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추축군을 먹이는 데 필요했던 독일 Ju 52 수송기의 절반 이상이 북아프리카 보급에 묶여 있었고, 튀니지 항복으로 추축국은 경험 많은 병력 수십만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이 패배는 두 달 뒤 시칠리아 상륙과 무솔리니 정부의 붕괴로 이어져, 독일은 유럽의 주요 동맹국을 잃었다. 2 14 27
사막의 전투는 보급과 제해권이 전술적 재능을 이긴 사례로도 읽힌다. 롬멜은 가잘라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트리폴리에서 2천 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진 보급선 끝의 엘알라메인에서 멈췄다. 몽고메리의 승리는 셔먼 전차와 6파운드 대전차포, 스핏파이어가 들어오면서 연합군이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 우위를 갖춘 뒤에 왔다. 처칠은 1950년 회고록에서 「엘알라메인 이전에 우리는 승리한 적이 없고, 엘알라메인 이후에는 패배한 적이 없다」고 썼다. 그러나 울트라가 보급 차단에 기여한 정도는 지금도 논쟁 중이고, 몰타와 이탈리아 호송선단의 싸움을 어떻게 볼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수치도 엇갈린다. 컴퍼스 작전의 포로는 13만~13만 8천 명, 튀니지 항복 때의 포로는 17만~27만 5천 명으로 출처마다 다르며, 전역 전체에서 추축군과 연합군 약 40만 명이 손실되거나 다치거나 병으로 죽었다. 15 2 4 14
결과
1943년 5월 13일 튀니지에서 추축군이 항복해 17만~27만 5천 명(출처에 따라 다름)이 포로가 되었고,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모두 잃었다. 리비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통치를 거쳐 1951년 독립했다. 연합군은 두 달 뒤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이탈리아 전역은 무솔리니 정부의 붕괴로 이어졌다.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는 지로와 드골이 경쟁한 끝에 1943년 6월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 아래 묶였다.
연표와 지도
- 1940.06.10이탈리아의 참전
무솔리니가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이튿날 이집트의 영국군이 리비아의 이탈리아 진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 11940.06.14카푸초 요새 점령
영국 제11 경기병연대와 왕립전차연대 일부가 국경을 넘어 카푸초 요새를 점령했다.
- 21940.09.13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
그라치아니의 제10군이 해안 도로를 따라 약 105킬로미터 진격해 16일 시디바라니에서 멈췄다.
- 1940.12.09컴퍼스 작전
오코너의 서부 사막군 약 3만 6천 명이 시디바라니 일대의 이탈리아군 진지를 공격했다.
- 31941.01.22토브루크의 이탈리아군 항복
토브루크의 이탈리아 수비대가 영연방군에 항복했다.
- 41941.02.07베다폼에서 제10군 항복
퇴로가 막힌 이탈리아 제10군의 잔존 병력이 항복했다. 컴퍼스 작전의 포로는 13만~13만 8천 명이었다.
- 51941.02.12롬멜 도착
존넨블루메 작전으로 파견된 아프리카 군단의 지휘관 롬멜이 리비아에 도착했다.
- 61941.03.01쿠프라 점령과 맹세
자유 프랑스군이 쿠프라 오아시스의 항복을 받고, 르클레르와 부하들이 스트라스부르 맹세를 했다.
- 71941.04.10토브루크 포위 시작
오스트레일리아 제9사단이 주축인 수비대가 독일·이탈리아군에게 포위되었다.
- 81941.11.18크루세이더 작전
오킨렉의 제8군이 토브루크 포위를 풀려는 공세를 시작했다.
- 91941.11.27토브루크 포위 해제
뉴질랜드군이 수비대와 만나 231일 동안의 포위가 끝났다.
- 101942.01.21추축군의 반격
보급을 받은 롬멜의 군대가 엘아게일라에서 기습 반격해 제8군을 가잘라까지 밀어냈다.
- 111942.05.26가잘라 전투
아프리카 기갑군이 가잘라 선의 남쪽 끝으로 돌아가는 베네치아 작전을 시작했다.
- 121942.06.11비르하케임 탈출
쾨니그의 자유 프랑스 여단이 보름 넘게 버틴 끝에 포위를 뚫었고, 약 3,600명 가운데 2,700명이 빠져나왔다.
- 131942.06.21토브루크 함락
추축군이 하루 만에 토브루크를 점령하고 수비대 3만 3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 141942.07.01–
27 제1차 엘알라메인 전투오킨렉이 직접 지휘한 제8군이 27일까지 싸워 추축군의 이집트 진격을 멈췄다.
- 151942.08.30알람엘할파 전투
롬멜의 마지막 대공세가 몽고메리의 능선 방어에 막혔다.
- 161942.10.23제2차 엘알라메인 전투
병력 19만 5천 명과 전차 1,029대의 제8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 171942.11.04추축군의 퇴각
히틀러의 사수 명령에도 롬멜이 엘알라메인에서 퇴각했다.
- 181942.11.08토치 상륙
미국·영국군이 카사블랑카·오랑·알제에 상륙했다. 알제에서는 레지스탕스의 쿠데타로 도시가 첫날 함락되었다.
- 191942.11.10다를랑의 휴전 명령
다를랑이 북아프리카 프랑스군에 저항 중지를 명령하고 페탱을 대신해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 201942.11.22클라크-다를랑 협정
미국과 다를랑이 협정을 맺어 프랑스령 아프리카에 대한 상당한 통제권을 미국에 넘겼다.
- 211942.11.23튀니스 유대인 지도자 체포
튀니지를 점령한 독일군이 튀니스 유대인 공동체 의장 뷔르젤과 유력 유대인들을 체포했다.
- 221942.12.24다를랑 암살
스무 살의 왕당파 청년 보니에 드 라샤펠이 알제에서 다를랑을 암살했다. 지로가 고등판무관을 이었다.
- 231943.01.23트리폴리 점령
제8군이 트리폴리를 점령했다. 같은 날 리비아에서 영국 통치가 시작되었다.
- 241943.01자도 수용소 해방
1942년 5월부터 리비아 유대인 약 2,600명이 갇혀 562명이 죽은 자도 수용소가 영국군에게 해방되었다(1943년 1월).
- 251943.02.19–
24 카세린 고개 전투롬멜의 추축군이 24일까지 미국 제2군단을 80킬로미터 넘게 밀어냈다가 물러났다.
- 261943.05.07튀니스·비제르트 함락
영국 기갑부대가 튀니스에, 미국 제2군단 보병이 비제르트에 들어갔다.
- 271943.05.13북아프리카 추축군 항복
메세의 이탈리아 제1군이 제8군에 항복하면서 아프리카의 추축군 저항이 끝났다.
관련 인물 34명
연합국(영국·영연방·미국·자유 프랑스)20명
지도부7
북아프리카 상륙을 밀어붙였고, 1942년 8월 카이로에서 오킨렉을 알렉산더로 교체했다. 엘알라메인 승리 뒤 「시작의 끝」 연설을 했다.
미국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참모진의 반대를 물리치고 토치 작전을 다른 작전에 앞세우라고 직접 명령했다.
토치 작전 연합군 최고사령관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카사블랑카·오랑·알제 상륙을 지휘했고, 다를랑과 거래해 비시군의 저항을 멈추게 했다. 카세린 패배 뒤 프레덴들을 해임했다.
중동 총사령관아치볼드 웨이벌1883–19501940년 국경 방어를 정하고 컴퍼스 작전을 맡겼으나, 1941년 롬멜의 반격과 배틀액스 실패 뒤 오킨렉과 교체되었다.
중동 총사령관·제8군 지휘클로드 오킨렉1884–1981크루세이더 작전으로 토브루크 포위를 풀었고, 제1차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추축군의 이집트 진격을 멈춘 뒤 1942년 8월 경질되었다.
중동 총사령관·제18군집단 사령관해럴드 알렉산더1891–19691942년 8월 오킨렉의 뒤를 이었고, 튀니지에서 영국·미국·프랑스군을 묶은 제18군집단으로 추축군의 항복을 받았다.
제8군 사령관버나드 몽고메리1887–1976알람엘할파에서 롬멜의 마지막 공세를 막고 제2차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추축군을 무너뜨린 뒤 트리폴리와 마레트선까지 추격했다.
집행 · 지휘7
컴퍼스 작전으로 이탈리아 제10군을 무너뜨리고 베다폼에서 퇴로를 끊었다. 1941년 4월 독일군에 붙잡혔다.
자유 프랑스 제1여단장마리피에르 쾨니그1898–19701942년 5월 26일부터 6월 11일까지 비르하케임을 지킨 뒤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쿠프라 점령 지휘관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1902–19471941년 3월 1일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고 쿠프라 오아시스의 항복을 받은 뒤 스트라스부르 맹세를 했다.
서부 기동부대 사령관조지 S. 패튼1885–1945토치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서 곧바로 건너온 3만 5천 명을 이끌고 카사블랑카에 상륙했다.
미국 제2군단장오마르 브래들리1893–19811943년 5월 9일 제5기갑군의 잔존 병력을 몰아넣어 항복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제9사단장 · 토브루크 수비대레슬리 모스헤드1889–19591941년 토브루크 포위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제9사단이 주축인 수비대를 이끌었고, 1942년 제2차 엘알라메인 전투에서도 사단을 지휘했다.
제13군단장 · 제8군 사령관 임명자윌리엄 고트1897–1942사막전 초기부터 제7기갑사단과 제13군단을 이끌었고, 1942년 8월 제8군 사령관에 임명된 직후 수송기가 격추되어 죽어 몽고메리가 그 자리를 이었다.
참여6
아이젠하워와 함께 다를랑과 쥐앵에게 저항 중지를 명령하게 했고, 11월 22일 클라크-다를랑 협정을 맺었다.
알제 주재 미국 영사로버트 머피1894–1978비시군이 싸우지 않으리라는 정보를 연합군에 제공했고, 상륙 당일 쥐앵을 설득하려 했다.
미국 육군 참모총장조지 C. 마셜1880–19591942년 안의 북유럽 상륙을 주장하며 토치 계획 승인을 거부했고, 차라리 태평양 공세를 택하자고 루스벨트에게 제안했다.
제국 참모총장앨런 브룩1883–19631942년 8월 처칠과 함께 카이로에 와서 중동 지휘부를 바꾸었다.
자유 프랑스 지도자샤를 드골1890–1970클라크-다를랑 협정을 프랑스 주권 침해로 보고 반대했고, 1943년 6월 지로와 함께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 공동 의장이 되었다.
북·서아프리카 고등판무관앙리 지로1879–1949다를랑이 암살된 뒤 고등판무관이 되어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석했고, 1943년 3월 비시와 결별했다. 튀니지 승전 열병식에서 아이젠하워·알렉산더와 함께 경례를 받았다.
추축국(이탈리아·독일)9명
지도부4
방어 명령을 넘어 1941년 공세에 나섰고, 가잘라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엘알라메인에서 막혔다. 카세린 고개 전투 뒤 1943년 3월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 총통아돌프 히틀러1889–1945이탈리아를 도우려 아프리카 군단을 보냈고, 엘알라메인에서 「승리 아니면 죽음」의 사수 명령을 내렸다.
이탈리아 총리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1940년 6월 10일 선전포고하고 그라치아니에게 이집트 공격을 강요했다. 1943년 5월 메세에게 항복을 명령했다.
리비아 총독·제10군 지휘로돌포 그라치아니1882–19551930년대 리비아 「평정」을 이끌었고, 1940년 9월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컴퍼스 작전에서 제10군을 잃었다.
집행 · 지휘2
비시 프랑스3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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