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본토 항공전
독일은 왜 영국을 바다 건너 침공하지 못했으며, 영국은 어떻게 하늘을 지켜냈는가?
영국 본토 항공전은 1940년 7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이 영국 해협과 영국 본토의 제공권을 두고 벌인 항공전이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의 패배 뒤 독일은 영국을 협상으로 굴복시키거나 침공하려 했고, 이를 위해 영국 전투기지휘부를 무너뜨리고 해협의 제해권을 뒷받침할 제공권을 얻으려 했다. 7월에는 해협 선박과 항구를 공격했고, 8월에는 비행장과 레이더망을 겨냥했으며, 9월 7일부터 런던과 도시들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전환했다. 영국은 레이더, 관측대, 지휘통제망,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결합해 독일의 주간 공습을 막았고, 독일은 1940년 9월 침공을 무기한 미루었다. 야간 폭격은 1941년 5월까지 이어졌지만 영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지는 못했다.
대륙이 무너진 날, 섬의 방어가 시험대에 올랐다
1940년 5월 10일 아침, 영국이 맞은 위기는 단순히 독일 공군이 강해졌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1939년 9월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독일을 봉쇄하고 대륙에서 막아야 했지만, 1940년 봄까지 그 전쟁은 본토의 장기 방공전으로 바뀔 조짐을 보였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전선의 약한 지점을 찔렀고, 전차부대는 뫼즈강을 돌파한 뒤 연합군의 후방과 해협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영국 원정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북쪽에 고립되었고, 됭케르크에서 빠져나오더라도 포병, 차량, 탄약을 남겨야 했다. 프랑스 총리 폴 레노가 5월 15일 윈스턴 처칠에게 전화해 “우리는 패배했다. 전투에서 졌다”고 말한 것은 군대의 사기가 아니라 연합국의 작전 체계가 붕괴하고 있음을 알린 것이었다.
영국은 이때 이미 하늘을 지키기 위한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두었다. 1936년 창설된 전투기지휘부는 휴 다우딩 아래에서 폭격기와 전투기를 같은 방식으로 쓰지 않고, 제한된 전투기를 본토의 결정적 지점에 보존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널리 퍼진 “폭격기는 언제나 뚫고 들어온다”는 믿음에 맞서 다우딩은 조기 경보와 지상 통제가 있으면 전투기를 계속 공중에 띄워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았다. 그의 구상은 단순한 레이더 장비가 아니었다. 해안의 체인 홈과 저고도 탐지망, 자원 관측대가 습격을 찾으면 정보가 벤틀리 프라이어리의 필터실로 모였고, 네 개 집단과 각 구역의 작전실이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무전으로 유도했다. 이 체계는 완성품이 아니었다. 해안을 넘은 폭격기는 레이더의 사각으로 들어갔고 관측 보고는 높이와 규모를 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속 순찰 대신 필요한 순간에 출격하게 해 연료, 기체, 조종사를 아꼈다.
따라서 5월 10일의 정치적 압력은 두 방향에서 왔다. 프랑스와 영국의 지휘부는 대륙을 붙들기 위해 전투기와 폭격기를 프랑스로 보내려 했고, 다우딩은 더 많은 전력을 보내면 영국 본토 방어가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프랑스 전투에서 영국 공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영국은 독일의 해안 기지와 폭격기 앞에 동맹군도 깊이도 부족한 상태로 남았다. 그러나 독일의 승리도 영국을 자동으로 항복시키지는 않았다. 영국 정부가 선택해야 할 것은 대륙 탈환이 아니라, 섬을 전쟁에서 이탈시키려는 다음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방공망과 생산 능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본토 항공전은 바로 이 상반된 요구, 동맹국을 구할 것인가 본토를 지킬 것인가가 만든 조건에서 시작되었다.
구출은 승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싸울 군대를 남겼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벨기에와 프랑스를 공격했을 때, 영국 원정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벨기에 방어선으로 전진했다. 이 선택은 무모한 모험이라기보다 전간기 연합국의 작전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군 주력이 벨기에로 들어오면 그곳에서 맞서 프랑스 본토와 영국을 지키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아르덴을 통과해 뫼즈강을 건넜고, 5월 20일 아브빌에서 해협에 닿아 북부의 영국군, 벨기에군, 프랑스군을 남쪽의 프랑스군과 갈라놓았다. 마지노선이 보장한다고 여겼던 시간과 예비대가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고트는 5월 19일 프랑스 제1군 사령관 가스통 비요트에게서 독일군과 바다 사이에 투입할 프랑스 예비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영국 정부는 남쪽으로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포위된 병력에게 그 명령은 가능한 반격 계획이라기보다 철수 시간을 벌기 위한 정치적 약속에 가까웠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막심 베강은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돌파하는 ‘베강 계획’을 주장했으나, 통신 단절과 지휘 체계 붕괴 속에서 병력은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고트가 됭케르크 방면으로 물러난 것은 프랑스를 버리려는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영국군의 숙련 병력 자체를 보존할 것인가 전부 잃을 것인가를 가르는 판단이었다.
5월 26일 시작된 작전 다이너모에서 해군은 처음 2만에서 3만 명만 구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도버 성 아래의 지휘실에서 버트럼 램지가 조직한 철수에는 군함뿐 아니라 징발된 어선, 유람선, 구명정까지 800척이 넘게 동원되었다. 6월 4일까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합쳐 약 33만 8천 명이 건너왔고, 그중 약 3분의 1은 프랑스군이었다. 그러나 6만 8천 명의 영국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전사·실종·포로가 되었고 전차, 차량, 중포의 대부분은 해변에 남았다. 처칠이 6월 4일 이를 ‘거대한 군사적 재앙’이라 부르면서도 ‘전쟁은 철수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경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됭케르크는 패배를 미화한 기적이 아니라, 장비와 동맹을 잃은 대가로 영국이 본토에서 계속 싸울 핵심 병력을 건져낸 작전이었다.
항복을 거부한 정부와, 시간을 사야 했던 방공망
1940년 6월 18일 영국 정부가 맞닥뜨린 선택은 단순히 용기를 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 독일군은 해협 건너편에 있었고, 영국은 대륙에 남은 군대도 프랑스의 동맹도 거의 잃었다. 외무장관 에드워드 우드는 독일과의 협상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윈스턴 처칠은 협상이 영국의 해상 교통과 제국, 식민지 항구를 독일의 압력 아래 넘기는 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처칠은 하원에서 “프랑스 전투는 끝났다. 이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려 한다”고 말했고, 이어 “필요하다면 해변에서, 상륙지에서, 들판과 거리와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공중전의 결과를 미리 안다는 약속이 아니라, 독일이 영국의 정치적 의지를 먼저 꺾으려는 계산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정책 선언이었다. 동시에 그 선언은 방어 체계가 실제로 버텨야 한다는 부담을 안겼다.
영국 전투기지휘부 총사령관 휴 다우딩이 지켜야 했던 것은 모든 해협 선박이 아니라 전투기와 숙련 조종사의 보존이었다. 프랑스 전투 때 영국 원정군 지원을 위해 전투비행대를 더 보내라는 요구가 반복되자, 다우딩은 1939년 7월 이미 추가 배치가 본토 방어를 “심각하게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계산은 소극적 방관이 아니었다. 전투기를 프랑스 상공에서 소모하면 독일이 영국 남부에 도달했을 때 대체할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레이더 기지, 관측대, 전화선, 지역 작전실이 들어오는 편대를 발견하고 필요한 곳에만 보내는 체계를 완성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RUSI가 설명하듯 이른 경보와 분산된 지휘통제를 결합한 다우딩 체계는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의 성능만으로는 생길 수 없는 전투력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독일의 7월 초 해협 선박 공격은 바로 그 방어를 바깥으로 끌어내려는 시험이었다. 독일 공군은 화물선과 항구를 때려 영국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호위 전투기가 출격하면 매복한 독일 전투기로 영국 조종사를 소모시키려 했다. 7월 4일 화물선 네 척이 침몰하고 세 척이 손상되자 대형 상선의 해협 횡단은 중단되었다. 이 조치는 영국에 실제 비용을 부과했다. 그러나 해협을 닫는 것과 전투기지휘부를 파괴하는 것은 달랐다. 영국은 선박 운항을 조정하고 해안 방어를 유지하면서, 독일이 정한 장소와 시간에 매번 전투기를 내보내는 대신 관측된 습격에 맞춰 제한된 전력을 사용했다. 독일은 영국을 고립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고립을 침공에 필요한 제공권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이 초기 국면의 핵심은 아직 누가 더 많은 폭탄을 떨어뜨렸는가가 아니라, 누가 자신의 전력을 보존하면서 다음 단계의 싸움을 강요할 수 있었는가에 있었다.
바다사자는 상륙작전이 아니라, 먼저 하늘을 빼앗으라는 도박이었다
7월 10일을 항공전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날짜를 정한 행정 절차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 독일은 영국군을 대륙에서 몰아냈지만, 해협을 건너 병력을 보낼 수단과 그 병력을 지켜 줄 제해권은 갖지 못했다. 따라서 헤르만 괴링의 독일 공군은 처음부터 영국 전체를 점령하는 전투가 아니라, 해협의 선박과 항구를 압박하고 영국 전투기지휘부를 출격시켜 소모시키는 전쟁을 먼저 벌여야 했다. 영국 해협을 지나는 대형 상선이 공격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영국의 보급을 흔드는 동시에 영국 전투기를 독일이 정한 장소로 끌어내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독일 폭격기에게도 대가를 요구했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의 비행장에서 출격할 수 있었지만, 영국 상공 깊숙이 들어갈수록 폭격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오래 받을 수 없었고 격추된 승무원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반대로 영국 조종사는 본토의 기지로 돌아와 다시 전투에 투입될 가능성이 컸다.
7월 16일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 지시서 제16호를 내린 까닭은 영국이 협상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시서는 침공을 이미 결정된 작전으로 쓰지 않고, 필요하면 실행할 상륙작전으로 규정했다. 핵심 조건은 명료했다. 영국 공군을 “사기와 실제 전력에서 격파”해 독일군의 해협 도하를 방해할 공격력을 없애고, 상륙 수로의 기뢰를 제거하며, 영국 해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즉 바다사자의 첫 병력은 상륙부대가 아니라 독일 공군이었다. 독일 육군은 프랑스에서 얻은 승리의 속도로 섬도 무너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영국 해군을 상대로 한 수송선단의 취약성을 알고 있었다. 바지선과 예인선, 상선으로 급히 꾸린 함대는 군함이 아니었고, 파도와 날씨에도 의존했다. 그래서 지시서는 침공 명령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군종의 위험을 공군의 성과에 걸어 둔 조건부 도박이었다. 독일이 영국 공군을 단기간에 굴복시키지 못하면, 침공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할 수 없는 물류 문제가 되었다.
독수리는 비행장을 때렸지만, 영국의 전투 체계는 살아남았다
독일 공군이 8월 13일을 ‘독수리의 날’로 정한 것은 상징보다 시간표의 문제였다. 작전명 바다사자를 띄우려면 남부 잉글랜드에서 영국 전투기지휘부를 며칠 안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했다. 독일 지휘부는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넓게 때리면 영국 전투기가 출격할 때마다 소모되고, 곧 방어망에 빈틈이 생길 것이라고 계산했다. 괴링에게 이것은 영국의 항복을 기다리는 폭격전이 아니라 침공을 가능하게 할 짧고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13일의 대규모 공습은 그 계산을 입증하지 못했다. 독일 공군은 열 시간 동안 1,485회 출격했고 전투기지휘부는 727회 출격했다. 폭탄은 남부의 여러 목표에 떨어졌지만, 독일 정보가 전투기 기지로 잘못 식별한 곳도 있었다. 실제로 크게 손상된 이스트처치와 델팅은 해안방공군 기지였고, 오디엄ㆍ판버러ㆍ로치퍼드는 아예 주공의 타격을 피했다. 12일 공격으로 심하게 손상된 와이트섬 벤트너 레이더 기지도 예외적으로 오래 멈췄을 뿐, 다른 레이더 기지들은 다음 날 다시 작동했다. 목표를 많이 맞힌 것과 전투기지휘부를 마비시킨 것은 달랐다.
8월 15일 독일은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찔렀다. 노르웨이의 제5항공함대까지 투입된 이날은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출격이 가장 많았던 날이었다. 북동부를 공격한 폭격기 부대는 영국이 남부에 전투기를 집중할 수 없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먼 거리와 호위 전투기의 연료 한계가 작전의 대가가 되었다. 독일군은 영국 전투기 34대를 파괴했다고 계산했지만, 양쪽의 공중전 집계는 과장되기 쉬웠고 실제 손실과 주장 사이에는 차이가 컸다. 중요한 사실은 숫자의 승패보다 영국의 지휘망이 계속 출격 순서와 집중 지점을 정했다는 점이다.
그 체계의 비용은 영국 조종사와 지상 인원에게 전가되었다. 남부 기지들은 반복해서 폭격당했고 정비와 재급유를 마친 기체를 곧바로 다시 올려보내야 했다. 11그룹 사령관 키스 파크가 9월 6일 보고한 것처럼, 8월 13일부터 이어진 공격은 전방 비행장과 여러 섹터 기지에 ‘전투 효율에 심각한’ 영향을 줄 만큼 실제 피해를 냈다. 그럼에도 8월 13일과 15일의 결과는 독일이 기대한 붕괴가 아니었다. 영국은 기지를 완전히 지키지 못했지만, 레이더와 관측, 작전실, 수리 인력을 하나의 반복 가능한 방어 과정으로 묶어 손상을 전투력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게 했다. 독일이 얻은 것은 격렬한 전투였고, 침공에 필요한 제공권은 아니었다.
런던을 구한 것은 폭격의 약함이 아니라, 목표를 바꾼 독일의 오판이었다
1940년 9월 7일 런던 항만에 쏟아진 폭탄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었다. 독일 공군 지휘부는 남동부의 전투기지휘부 비행장과 통신 시설을 두 주 동안 두드렸고, 영국 전투기들이 수도를 지키러 한꺼번에 올라오면 남은 전투력을 한 번의 결전으로 없앨 수 있다고 계산했다. 런던은 그래서 군사적 표적이면서 동시에 미끼였다. 부두, 울위치 병기창, 벡턴 가스공장과 웨스트햄 발전소가 불탔고, 이스트엔드의 주거지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밤까지 이어진 공습은 도시를 마비시키려는 압력으로 작동했지만, 그 압력은 독일이 가장 필요로 하던 비행장 공격을 멈추게 했다.
독일 쪽의 판단은 내부 논리도 있었다. 영국 정부와 시민이 수도의 파괴를 견디지 못하고 협상으로 기울거나, 전투기지휘부가 런던을 방어하기 위해 남은 항공기를 모두 내놓으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8월 말 영국 공군의 베를린 공습 뒤 아돌프 히틀러가 런던 공격을 요구한 사실은 작전의 방향을 더 정치적이고 보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독일 정보가 전투기지휘부의 손실을 실제보다 크게 보았다는 문제도 남았다. 영국은 폭격으로 공장과 주거지를 잃었지만, 전투기 생산은 계속되었고 조종사와 비행대의 작전 능력은 9월 7일 뒤 회복할 시간을 얻었다.
9월 15일 독일은 이 회복을 인정하지 않은 채 런던을 상대로 두 차례 대규모 주간 공격을 벌였다. 영국 제11전투비행단 사령관 키스 파크는 레이더와 관측 보고를 이용해 필요한 만큼의 비행중대만 순차적으로 올려 폭격기 편대를 표적에 도착하기 전에 깨뜨리는 방식을 택했다. 반대로 제12전투비행단의 트래퍼드 리말로리는 여러 비행중대를 모은 대편대가 더 많은 독일기를 격추해 억제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은 격추 숫자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였다. 리말로리에게 큰 승리는 독일의 의지를 꺾는 것이었고, 파크에게 우선순위는 런던을 모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행장과 지휘망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날 독일 폭격기 편대는 영국 전투기들의 집중 요격을 받아 대형이 흐트러졌고 정확한 폭격을 하지 못했다. 런던과 포틀랜드, 사우샘프턴에 폭탄은 떨어졌지만 제공권을 가져올 결정타는 아니었다. 영국도 조종사와 기체를 잃었고 도시의 민간인은 계속 죽거나 집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9월 15일은 독일의 선택이 실패했음을 양쪽 지휘부가 확인한 날이었다. 독일은 영국이 무너졌다고 믿고 런던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일주일 동안 영국은 전투 체계를 고쳤고, 독일은 침공에 필요한 하늘을 얻지 못했다.
침공을 미룬 뒤에도 폭탄은 멈추지 않았다
1940년 9월 17일의 결정은 영국이 안전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작전명 바다사자는 영국 공군을 격파하고 해협을 통제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졌는데, 독일 공군은 그 조건을 만들지 못했다.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을 상대할 수상함이 부족했고, 바지선 중심의 상륙 선단은 거친 날씨와 해상 포격에 취약했다. 따라서 히틀러가 침공을 무기한 미룬 것은 단순히 결심을 접은 일이 아니라, 실패할 경우 병력과 장비를 한꺼번에 잃을 도박을 피한 조치였다. 동시에 작전은 공식 취소되지 않았다. 독일 지도부는 영국이 언젠가 협상하거나 폭격으로 굴복할 수 있다고 기대하며, 침공의 위협을 항구에 묶어 두었다.
이 선택을 독일 내부에서 보면 목표는 영국 민간인을 무작정 괴롭히는 데만 있지 않았다. 영국의 항구, 군수 생산, 교통을 마비시키면 섬의 전쟁 수행 능력과 정부의 의지가 함께 흔들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비행장과 전투기지휘부를 계속 압박하는 대신 도시 폭격에 무게를 둔 순간, 폭격은 제공권을 얻기 위한 수단에서 장기 봉쇄와 보복의 수단으로 변했다. 독일 공군은 낮에는 영국 전투기의 요격을 감수해야 했고, 밤에는 목표 식별과 피해 측정이 불확실했다. 영국은 파괴된 시설을 분산하고 복구했으며, 폭격이 공업을 멈추게 할 것이라는 독일의 기대는 입증되지 않았다.
그 대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 곳이 코번트리였다. 11월 14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독일군은 문라이트 소나타 작전으로 약 500톤의 고폭탄과 3만 발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코번트리는 자동차와 항공기 부품을 생산하는 군수 도시였지만, 폭격은 공장만 가르지 않고 도심과 주거지를 함께 삼켰다. 568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으며, 중세 성 미카엘 성당이 불탔고 도시의 거의 3분의 1이 파괴되었다. 소방과 통신, 전력망이 마비된 가운데 시민들은 잔해를 치우고 부상자를 옮겼다. 생산은 타격을 받았지만 도시 전체가 전쟁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코번트리를 둘러싼 후대의 대표적 이야기는 영국이 에니그마 해독을 숨기려고 도시를 일부러 희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통신본부의 공개 자료는 11월 11일부터 해독과 포로 심문이 있었음에도 목표가 런던인지 미들랜즈인지 확정하지 못했고, 14일 오후에야 전파 유도의 교차점이 코번트리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한다. 요격 출격 121회가 있었지만 330대 중 11대만 발견되었고 두 대만 교전했다. 이는 냉혹한 희생 명령의 증거라기보다, 불완전한 정보와 야간 방공의 물질적 한계를 보여 준다. 독일은 침공을 미뤘지만 폭격으로 그 빈자리를 채웠고, 코번트리는 영국이 살아남는 일이 폭격을 견디며 생산과 행정을 다시 작동시키는 일임을 드러냈다.
항구를 태운 폭격과, 동쪽으로 빠져나간 공군
1941년 2월 19일 이후 독일 폭격의 표적은 다시 항구로 좁혀졌다. 이것은 단순히 런던 대신 다른 도시를 고른 일이 아니었다. 항구를 마비시키면 대서양에서 들어오는 식량과 원료, 군수품의 하역을 막고 철도와 공장을 함께 흔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영국의 전쟁 수행을 민간인의 공포가 아니라 물자의 흐름에서 끊겠다는, 독일 쪽에서 보면 더 군사적인 선택이었다. 영국 공군박물관의 집계에 따르면 2월 19일부터 5월 12일까지 항구를 겨냥한 공격은 51회였고, 런던·버밍엄·코번트리 같은 내륙 대도시를 직접 겨냥한 것은 일곱 차례뿐이었다. 리버풀, 헐, 브리스틀, 플리머스 같은 항구는 불타는 창고와 부두, 끊긴 철도 때문에 실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항구 폭격은 영국의 수송망 전체를 끊지 못했다. 선박과 하역 시설은 분산되었고, 폭격 뒤 복구가 진행되었으며, 독일 정보는 어떤 산업이 영국 생산을 정말로 결정하는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폭탄의 양이 곧 전략적 마비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 어려운 문제는 밤이었다.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는 낮의 요격에는 뛰어났지만 어둠 속에서는 목표를 찾기 어려웠다. 1940년 11월 코번트리 공습 때 전투기지휘부는 119회 출격했지만 독일 폭격기를 한 대도 격추하지 못했다. 1941년 봄까지 영국은 지상 레이더로 폭격기의 대략적 위치를 포착하고, 지상통제요격소가 전투기를 유도한 뒤, 기체에 장착한 AI Mk IV 레이더가 마지막 접근을 돕는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브리스틀 보파이터처럼 중무장하고 레이더를 실은 야간전투기가 그 결합의 산물이었다. 영국 공군박물관의 기록에 따르면 야간전투기 격추는 1941년 3월 22대, 4월 48대, 5월에는 거의 100대로 늘었다. 이는 폭격을 없앤 것이 아니라, 폭격기가 더는 안전하게 영국의 밤을 누비지 못하게 만든 변화였다.
5월 10일부터 11일 밤의 대공습은 큰 피해를 남겼지만 이 공세의 마지막 절정에 가까웠다. 12일 이후 독일 공군의 주력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소련 침공을 준비하는 작전이 영국 폭격보다 우선순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방어가 모든 폭탄을 막았기 때문도, 독일이 영국 사회를 전혀 흔들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영국은 항구와 도시를 복구하면서 전쟁을 계속했고, 독일은 제공권을 얻지 못한 채 두 전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5월의 종결은 폭격의 인도적 종식이 아니라 전략적 방향 전환이었다. 영국 본토는 파괴된 항구와 주거지를 떠안고도 살아남았고, 독일 공군은 이제 훨씬 더 넓은 전쟁을 위해 그 섬에서 물러났다.
하늘에서 이긴 것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
영국 본토 항공전이 결정한 것은 분명하다. 독일은 영국 전투기지휘부를 제거하지 못했고, 따라서 작전명 바다사자를 안전하게 시작할 제공권을 얻지 못했다. 1940년 7월 31일 회의에서 에리히 레더가 해군의 상륙 준비가 9월 중순 이전에는 끝나기 어렵다고 보고한 뒤, 아돌프 히틀러는 침공을 공중전의 성과에 조건부로 묶었다. 9월 17일 연기는 단순한 달력 조정이 아니라, 독일 지도부가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음을 인정한 결정이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빠지지 않았고, 이후 해상봉쇄에 맞서며 폭격과 정찰의 기지를 제공했다. 이 점에서 항공전은 독일이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목적을 강요하지 못한 패배였다.
그러나 이것이 영국이 하늘을 완전히 지배했다는 뜻은 아니다. 영국의 승리는 전투기 조종사만의 결투가 아니었다. 체인 홈 레이더, 약 3만 명의 관측대원, 벤틀리 프라이어리의 지휘실, 정비공과 생산 노동자가 하나의 방어 체계를 이루었다. 1940년 7월부터 10월까지 전투기지휘부 조종사 544명이 목숨을 잃었고, 영국 공군의 공식 집계는 2,945명의 항공 승무원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본다. 동시에 민간인들은 블리츠에서 4만 3,5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가를 치렀다. ‘소수’의 용기는 실재했지만, 그것만을 승리의 원인으로 만들면 여성 보조요원, 관측대, 공장 노동자, 폭격기지휘부와 해안사령부의 역할이 사라진다.
역사가들이 다투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한 해석은 휴 다우딩의 방공 체계와 영국의 전략적 준비가 독일의 실패를 이긴 핵심이었다고 본다. 다른 해석은 헤르만 괴링의 목표 변경, 짧은 전투기 작전 반경, 독일 정보의 오류와 해군의 취약성이 겹쳐 독일이 애초 지속 가능한 침공 조건을 만들지 못했다고 강조한다. 후자의 주장은 영국의 승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스핏파이어가 침공을 단독으로 막았다’는 신화에서 떼어 내는 작업이다. 또 하나는 가상 역사에 관한 논쟁이다. 독일이 9월에도 비행장을 계속 공격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당시 독일 문서가 요구한 것은 RAF의 실질적 제거였고, 그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확정된 사실은 침공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며, 확정할 수 없는 것은 영국이 폭격만으로 언젠가 항복했을지, 독일이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났을지다.
결과
독일의 제공권 확보 실패는 해상 침공 계획인 작전명 바다사자를 실행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독일이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결정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패배가 되었다. 영국은 항구와 공업도시, 주거지를 폭격당했고 민간인과 방공 인력이 큰 희생을 치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1941년 5월 독일 공군의 주력은 소련 침공 준비를 위해 동부로 이동했고, 영국은 이후 연합국의 폭격과 제2전선 준비를 위한 기지로 남았다. 이 전환의 다음 국면은 이 사이트의 「대조국전쟁」에서 다룬다.
연표와 지도
- 1940.05.10프랑스 전투와 고립
독일의 서부 공세가 시작되고 윈스턴 처칠이 영국 총리가 되었으며,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의 붕괴로 영국은 대륙의 동맹군 없이 남았다.
- 11940.06.04됭케르크 철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했지만 중장비를 잃었고, 영국 본토 방어와 공중전이 전쟁의 다음 결정적 과제가 되었다.
- 21940.06.18항공전의 예고
처칠은 하원에서 프랑스 전투가 끝났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해 항복이 아닌 장기 항전을 정부의 노선으로 제시했다.
- 31940.07.04해협 봉쇄의 시작
독일 공군은 영국 해협을 지나는 선박을 집중 공격해 화물선 네 척을 침몰시키고 세 척을 손상시켰으며, 대형 상선의 해협 횡단은 중단되었다.
- 41940.07.10공식적인 전투 개시
영국이 공식적으로 정한 항공전의 시작일로, 독일 공군은 항구와 선박을 압박하고 영국 전투기지휘부의 출격을 소모시키려 했다.
- 1940.07.16작전명 바다사자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 상륙작전 준비를 명령했으며, 해협을 건널 조건으로 영국 공군을 먼저 무력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 51940.08.13독수리의 날
독일 공군은 영국 남부의 비행장과 방공 기반시설을 무너뜨리려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지만 전투기지휘부를 결정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
- 1940.08.15가장 큰 출격일
독일 공군은 전투 기간 중 가장 많은 출격을 감행했고 영국 전투기 34대를 파괴했지만, 영국의 레이더와 지휘망은 계속 작동했다.
- 61940.09.07런던 대공습
독일은 런던 항만을 시작으로 영국 도시들에 대한 주야간 폭격인 블리츠로 전환했고, 전투기지휘부 비행장에 대한 압박은 완화되었다.
- 71940.09.15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
독일 공군이 런던에 가장 무거운 공습을 가했으나 영국 전투기들이 이를 저지했고, 독일의 제공권 확보 전망은 더욱 약해졌다.
- 1940.09.17침공 무기한 연기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 히틀러는 작전명 바다사자의 실행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상륙 함대와 바지선은 항구에 남았다.
- 81940.11.14코번트리 폭격
독일 공군은 코번트리를 12시간 동안 폭격해 도심과 성당을 파괴했고 560명 이상이 사망했지만, 공장과 도시는 곧 기능을 회복했다.
- 1941.02.19항구로 향한 폭격
히틀러는 폭격의 중심을 항구 시설로 옮겼고, 2월 19일부터 5월 12일까지 그 목표에 대한 공격 51회가 이루어졌다.
- 1941.05.12대규모 공습의 끝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야간 공습이 사실상 끝났고, 독일 공군의 주력은 소련 침공을 준비하는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원문
총통 사령부, 1940. 8. 1.
총통 및 최고사령관
국방군
국방군 최고사령부/국방군 지휘참모부/국방부서(OKW/WFA/L) Nr. 33 210/40
극비 지휘 문서 수뇌부 취급
극비 지휘 문서
수뇌부 취급
장교 전달 한정
10부 작성
제4부
전쟁 수행을 위한 지령 제17호
영국에 대한 항공전 및 해상전
영국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킬 전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나는 영국 본토에 대한 항공전과 해상전을 지금까지보다 더 강도 높은 형태로 계속 수행하고자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 독일 비행부대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가능한 한 빨리 영국 공군을 제압해야 한다. 공격은 일차적으로 비행 부대, 그 지상 조직과 보급 시설을 향해야 하며, 나아가 대공 무기 제조 산업을 포함한 항공 군수 산업을 겨냥해야 한다.
2.) 일시적 또는 국지적 항공 우세를 달성한 후에는 항구, 그중에서도 특히 식량 비축 시설에 대한 항공전을 계속 수행해야 하며, 나아가 내륙의 식량 비축 시설에 대해서도 항공전을 이어가야 한다.
남해안 항구에 대한 공격은 아군이 계획한 작전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실시해야 한다.
3.) 반면 적 군함과 상선에 대한 공중 공격은, 특별히 유리한 순간 표적이거나 제2항의 공격 범위 내에서 추가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경우, 또는 향후 전투 수행을 위한 승무원 훈련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뒤로 미룰 수 있다.
4.) 강화된 항공전은 해상 작전을 지원하여 유리한 순간 표적을 타격할 때 공군이 언제든 충분히 강력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수행해야 한다. 또한 공군은 「바다사자」 작전을 위해 전투력을 갖춘 상태로 대기해야 한다.
5. 보복으로서의 테러 공격은 내 권한으로 유보한다.
6.) 항공전 강화는 8월 5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정확한 시점은 준비 완료 상황과 기상 조건에 따라 공군이 직접 선택해야 한다.
해군에게는 예정된 해상전 조치 강화를 동시에 허가한다.
(서명) 아돌프 히틀러
[P] 카이텔
배포처:
공군 총사령관 제1부
해군 총사령관 제2부
육군 총사령관 제3부
국방군 최고사령부 국방군 지휘참모부장(OKW Chef WFA) 제4부
군수경제국장(Chef WiRüAmt) 제5부
국방부서장(Chef L) 제6부
공군반(IL) 제7부
해군반(IK) 제8부
육군반(IH) 제9부
전쟁일지(KTB) 제10부
[P] 바를리몬트
관련 인물 15명
지도부4
집행 · 지휘4
제12전투비행단을 이끌며 여러 비행중대를 모은 대편대가 독일 폭격 편대에 결정타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해 제11전투비행단의 분산 요격 방식과 논쟁했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알프레트 요들1890–1946영국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하고 작전 준비를 조정했다.
제11그룹 지휘관키스 로드니 파크1892–19751940년 제11그룹을 지휘하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의 전투기 방어를 운용했다.
독일 공군 주간 공습 지휘관알베르트 케셀링1885–1960브리튼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주 주간 전력을 지휘했다.
참여4
반대 · 저항2
관련 용어
출처: Winston S. Churchill, Their Finest Hour, House of Commons speech, 18 June 1940Royal Air Force Museum, History of the Battle of Britain: Operation Sealion, Royal Air Force MuseumRoyal Air Force Museum, History of the Battle of Britain: RADAR, The Battle Winner?, Royal Air Force Museum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Battle of Britain Begins, Holocaust EncyclopediaRichard Overy, The Battle of Britain: The Myth and the Reality, Penguin Books, 2000Francis K. Mason, Battle Over Britain: A History of the German Air Assaults on Great Britain 1940–1941, McWhirter Twin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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