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인종주의 전쟁국가를 만든 독재자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그 결과는 제6군의 포위와 파괴로 이어졌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세습으로 가졌고, 1913년 뮌헨으로 옮겨 스스로 무국적으로 신고했다.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1921년 당수가 되었고,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복역 중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에서 해제되어 1932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까지 무국적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를 구축했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를 겸했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 학살과 민간인·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생애 개관, 1889–1945

아돌프 히틀러(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펠츨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를 지망했으나 빈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 낙방했고, 일찍 부모를 잃은 뒤 빈에서 빈민 수용소와 멜데만슈트라세 숙소에서 생활하며 인종주의·독일 민족주의 언설에 처음 접했다. 그의 반유대주의가 형성된 경위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적이다.

1913년 독일로 옮겨 1914년 8월 바이에른군에 지원 입대했고, 전령병으로 복무하며 솜 전투에서 부상하고 1918년 10월 겨자 가스 공격으로 일시 실명했으며 1급·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전후 독일의 패배를 '등 뒤의 칼' 신화로 받아들였고, 제국군 정보 요원으로 일하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해 디트리히 에카르트를 만났다. 1921년 6~7월 당 내부 위기 끝에 7월 29일 드렉슬러를 대신해 찬성 533 대 반대 1로 당의장이 되어 전권을 얻었다.

1923년 11월 8~9일 루덴도르프와 함께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어 나치 16명과 경찰 4명이 죽었다. 11월 11일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1924년 4월 1일 5년 요새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에밀 마우리체와 루돌프 헤스에게 《나의 투쟁》 1권을 구술했으며, 1924년 12월 20일 석방되었다. 1925년 4월 7일 오스트리아 시민권 포기 신청서를 제출해 4월 30일 승인받아 무국적자가 되었고, 1932년 2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시민권 취득으로 3월 1일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공직 자격이 없었다.

대공황과 브뤼닝 내각의 칙령 통치, 나치의 선거 약진(1930년 9월 18.3%, 1932년 7월 37.3%)을 배경으로 보수 인사들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1933년 1월 30일 수상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 체제를 굳혔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 지위를 겸했다.

그는 1942년 여름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이는 제6군의 포위·괴멸로 귀결되었다. 다만 분할 시점에 대해서는 사료들이 7월 7일설과 총통훈령 제45호설 등으로 엇갈려, 연도 수준의 '1942년 여름' 서술이 가장 방어 가능하다. 1942년 4월 5일 총통훈령 제41호(계획 '블라우')로 남부 주공과 코카서스 석유 확보를 정한 것과, 1942년 6월 1일 폴타바에서 마이코프와 그로즈니를 점령하지 못하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은 별도로 확인된다.

홀로코스트의 책임은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당 지도부에게 있으나, 학살 실행에는 친위대, 국방군, 평범한 독일 시민, 여러 유럽 점령국 협력자들도 가담했다. 1939년 10월 T-4 안락사 살해를 승인했고, 바르바로사 계획 단계에서 아인자츠그루펜 재창설을 승인했으며, 1941년 7월 연설로 동유럽 유대인 학살을 독려하고 1941년 12월 12일 연설에서 유대인 '절멸'을 명시적으로 명령했고,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는 중앙 기획의 증거로 남았다. 책임 문제를 둘러싼 의도주의 대 기능주의 논쟁은 나치 체제의 다원적 구조 속에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배치하는 종합적 설명으로 대체되는 추세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과 다수의 다른 희생자에 대한 집단학살, 그리고 민간인·전쟁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다. 동유럽 생활권(Lebensraum)을 추구하며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과 1941년 6월 소련 침공을 감행하고 1941년 12월 미국에 선전포고했으며, 그의 팽창주의 대외정책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주된 원인으로 평가된다.

1945년 4월 29일 베를린 총통 지하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했고, 소련군이 진격하는 가운데 이튿날 권총 자살로 죽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죽음을 '주문'이 풀린 사건으로 보았고, 당시 독일인 중 애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언 커쇼는 그를 '현대 정치적 악의 화신'으로 평했다. 그의 건강을 둘러싼 파킨슨병, 각성제 중독, 테오도어 모렐의 과잉 투약설 등은 논쟁적 주장이며, 에베를레와 노이만은 질병에도 그가 자신의 결정을 온전히 인식하고 책임질 수 있었다고 본다. 독일의 패배는 유럽사에서 독일이 지배하던 시기의 종언이었고, 이후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여러 유럽 국가가 나치즘 선전과 홀로코스트 부인을 처벌하고 있다. 나치즘의 기원과 성격을 둘러싼 역사서술은 마이네케·트레버로퍼에서 하프너의 반사실적 주장까지 다양하고, 의도주의·기능주의 논쟁도 종합적 설명으로 대체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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