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alsozialismus · 1919–현재

민족사회주의

National Socialism

민족사회주의는 아돌프 히틀러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이념이다. 1880년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푈키슈(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 운동에 뿌리를 두고 1919년 이후 독자적인 정치 운동이 되었으며, 1933~1945년 독일의 국가 이념이었다. 극단적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초민족주의, 반공주의, 반민주주의를 축으로 인종적으로 정의된 ‘민족공동체’와 동유럽의 생활권 정복을 내세웠고, 그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를 파시즘의 한 형태로 보며, 이 분류가 타당한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상세

이름과 범위

독일어권에서 ‘민족적 사회주의’라는 말은 1860년 무렵부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결합을 가리켰다. 정당 이름으로는 1903년 오스트리아에서 결성되어 1918년 독일 민족사회주의 노동자당(DNSAP)으로 이름을 바꾼 독일 노동자당이 먼저 썼고, 1919년 독일에서 생긴 독일 노동자당(DAP)도 1920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이 되었다. 이 이름으로 새 정당들은 사회민주당·공산당의 국제주의와 옛 보수 정당의 민족주의 양쪽에서 자기를 구별하고, 노동자와 중산층에게 더 나은 대안으로 다가가려 했다. 히틀러는 개인이 민족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을 ‘민족주의’, 공동체가 개인을 책임지는 것을 ‘사회주의’라 불렀으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단호히 거부했다. ‘나치’와 ‘나치즘’이라는 말은 1920년대부터 노동운동 쪽의 반대자들이 쓰기 시작했고, 독일어권 밖에서는 지금도 표준적인 이름이다. 이 항목은 정당인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구별해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민족사회주의를 다룬다.

형성

뿌리는 1880년대 초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자란 푈키슈 운동에 있다. 1879년부터 반유대주의자들이 여러 정당과 단체를 만들었고, 1891년 세워진 범독일연맹은 전쟁을 통한 독일 ‘생활권’ 확대를 주장했으며, 1918년 뮌헨에서 생긴 툴레 협회의 신문은 뒤에 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가 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 뒤에는 러시아 망명자 등을 통해 반공주의 단체가 늘었고, 민족보수 엘리트와 자유군단은 ‘유대 볼셰비즘’이라는 선전 구호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동일시했다. 민족사회주의는 이 흐름들을 하나로 녹였고, 그 가장 강한 연결 고리는 반유대주의였다. 1920년 당 창립 때 채택된 25개조 강령은 대독일 통합과 베르사유 조약 폐기, 유대인의 공직 배제와 함께 ‘불로소득 철폐’, ‘이자 노예제 타파’, 트러스트 국유화 같은 경제 요구를 담고 ‘공익이 사익에 앞선다’는 구호로 끝났다. ‘사회주의’를 둘러싼 당내 논쟁 끝에 1926년 밤베르크 지도자 회의는 이 강령을 ‘변경할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구체적 해석은 정하지 않았다.

이념의 요소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고등 인종과 열등 인종이 서로 싸운다는 명제와 ‘인종 혼합’이 고등 인종을 약화시킨다는 명제를 내세웠고, 영토 확장을 서유럽이나 해외가 아니라 동유럽에서 찾았다. 그 반대 형상은 ‘세계 유대인’이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미국의 ‘금융자본’과도, 그 적인 ‘볼셰비즘’과도 동일시했다. 그에게 『시온 장로 의정서』를 소개한 사람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였고, 히틀러는 1920년부터 유대교와 마르크스주의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당은 처음에 일관된 이념이 없는 집합 운동이었다. 한스 프랑크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민족사회주의자의 수만큼 민족사회주의가 있었다”고 말했고, “우리의 강령은 히틀러다”라는 구호가 쓰였다. 선전과 대중 연출, 일당 지배와 권력 분립 폐지, 군사주의와 제국주의, ‘피와 흙’ 이념, 지배 민족론, 남성 지배와 남성성 숭배가 그 밖의 주요 특징으로 꼽힌다. 독일 국가는 지도자 원리에 따라 조직되었고, 1934년 8월 2일 히틀러는 총통 겸 총리로서 국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경제와 ‘사회주의’라는 이름

당 안에는 반자본주의를 강조한 요제프 괴벨스와 오토 슈트라서 같은 급진파와 보수파가 있었다. 오토 슈트라서는 히틀러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사회주의 목표를 배신했다며 탈당해 ‘검은 전선’을 만들었다. 1929년 이후 당이 세력을 얻자 반공의 방파제를 기대한 부유한 후원자들의 관심이 커지며 보수파의 영향력이 늘었다. 히틀러는 1930년 “우리가 받아들인 ‘사회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고, 1934년 ‘장검의 밤’에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의 급진파를 숙청했다. 경제 체제의 성격은 연구자마다 다르게 본다. 프란츠 노이만은 1944년 『베헤모트』에서 이를 전체주의 국가가 규제하는 사경제, 곧 ‘전체주의적 독점자본주의’라 불렀다. 라이너 치텔만은 히틀러의 사회 혁명 구상을, 괴츠 알리는 사회적 평등을 약속한 ‘호의의 독재’를 강조했고, 볼프강 비퍼만과 마이클 벌리는 이런 해석이 체제의 인종주의적 성격을 가볍게 본다고 반박했다. 디트마어 페치나는 나치 체제가 중앙관리경제와 시장경제 어느 쪽에도 뚜렷이 들지 않는다고 보았다.

공산주의 운동과의 관계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공산주의자와 나치는 거리에서 충돌했고, 나치 준군사 조직은 공산당의 적색전선투사동맹, 반파시스트 행동과 맞섰다.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 뒤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 봉기의 시작이라 선언했고, 이튿날 포고령은 집회·언론의 자유 등 기본권 대부분을 정지시켰다. 나치는 혁명을 준비하고 방화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공산당을 금지했다. 1933년 2월 공산당 간부 4,000명이 체포되었고 그해 말까지 공산주의자 13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39년 8월 23일부터 1941년 6월 22일까지는 독소 불가침조약이 맺어져 있었다. 동방의 생활권 구상은 전쟁 중 ‘동방 총계획’으로 구체화되어 수백만 명의 독일계 정착민을 동유럽으로 옮기고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을 절멸·추방·노예화하는 것을 상정했다. 동구권, 특히 동독에서는 ‘민족사회주의’에 든 ‘사회주의’라는 함의를 피하려고 ‘히틀러 파시즘’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다.

평가와 1945년 이후

민족사회주의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같은 일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아니면 고유한 현상인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다. 마르크스주의 파시즘론은 이를 파시즘의 한 형태로 본다. 에른스트 놀테는 1963년 이를 이탈리아의 ‘정상 파시즘’과 구별해 ‘급진 파시즘’이라 불렀고, 볼프강 벤츠는 2010년 ‘파시즘 이념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라 했다. 1945년 이후 미국과 서독에서는 스탈린주의와 나란히 놓는 전체주의론이 많이 쓰였다. 반면 마이클 벌리와 볼프강 비퍼만은 이런 일반 이론이 핵심인 인종 이념 강령을 놓친다고 보았고, 카를 디트리히 브라허 등은 이를 고유한 현상으로 볼 것을 주장했다. 체제는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약 600만 명의 유럽 유대인을 죽인 홀로코스트와 유럽 신티·로마 학살이 벌어졌으며, 1945년 5월 8일 국방군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그 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 선전과 당시 상징의 사용, 민족사회주의적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이런 사상을 잇는 이들은 신나치라 불린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de.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de.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