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08–1940.08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1939년 8월, 소련은 왜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동유럽을 갈랐는가?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집단안보의 몰락: 1939년 5월까지 소련이 마주한 세계

1939년 5월 3일, 스탈린은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를 경질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그 자리에 앉혔다. 단순한 인사 교체가 아니었다. 리트비노프는 1930년 이래 소련 외교의 얼굴이었고, 1934년 국제연맹 가입 이후 줄곧 '집단안보', 즉 파시즘의 팽창을 서방 민주국가들과의 공동 전선으로 저지한다는 노선을 추진해온 인물이었다. 그의 해임은 그 노선 자체가 폐기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리는 신호였다.

왜 집단안보는 실패했는가. 그 답은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쌓여 있다.

히틀러는 집권 직후 독일을 국제연맹에서 탈퇴시키고(1933년 10월) 재군비를 선언했다. 1936년 3월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켰고, 베르사유 체제는 종이조각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군을 지원했고, 소련은 공화국 정부를 지원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불개입 위원회를 조직하여 공화국 정부의 합법적 무기 구매권마저 봉쇄했다. 스페인은 3년 동안 유럽의 축소판이었다: 파시즘과 반파시즘이 총검을 겨누었고, 서방 민주국가들은 '중립'을 표방하며 방관했다.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은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다. 이듬해 이탈리아가 가입했다. 소련은 유럽과 극동 양쪽에서 동시에 포위되는 형국에 놓였다. 실제로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이 본격화되고, 1938년 여름에는 소련-만주국 국경에서 하산 호 전투가 벌어졌다.

결정적 타격은 1938년 9월 뮌헨 협정이었다.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만을 뮌헨에 불러 모았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은 회의장 밖에서 자국 영토의 분할을 기다려야 했다. 소련은 아예 초대받지 못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있었고, 프랑스가 먼저 개입하면 참전할 의사도 있었으나 그러한 선택지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뮌헨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를 동쪽으로, 즉 소련 쪽으로 밀어내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1939년 3월 제18차 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개입 정책은 침략을 묵인하고, 전쟁에 자유로운 손을 주며, 따라서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변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덧붙였다. 소련은 "남의 손으로 밤을 줍는 자들"에게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이 '밤'은 서방 언론이 떠들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진군', 즉 히틀러가 다음 목표로 우크라이나를 삼을 것이라는 보도를 겨냥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그 유혹을 단호히 거부했다.

1939년 봄, 소련의 상황은 이러했다. 서쪽에서는 히틀러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잔여 지역을 점령하고, 3월 23일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클라이페다)을 강탈했으며, 폴란드에 단치히와 '회랑'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마침내 3월 31일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했으나, 소련과의 실질적 군사동맹에는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동쪽에서는 일본 관동군이 1939년 5월 11일 몽골 국경의 할힌골에서 소련-몽골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소련은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더구나 붉은 군대는 1937~1938년 대숙청으로 인해 지휘부가 초토화된 상태였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를 비롯하여 군단장급 이상 장교의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서방은 소련 군사력을 낮게 평가했고,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모스크바와의 동맹에 진지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였다.

1939년 5월 3일은 그 모든 실패가 한 지점에 수렴한 날이었다. 리트비노프의 해임은 집단안보가 더 이상 소련 외교의 전제가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이제 스탈린에게는 두 개의 협상 테이블이 열려 있었다. 하나는 영국·프랑스와의 모스크바 군사협상, 다른 하나는 독일과의 비밀 접촉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리트비노프의 해임과 두 개의 협상 테이블

1939년 5월 3일, 소련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의 집무실로 호출되었다. 스탈린은 "소련 정부는 히틀러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가능하면 협정을 체결할 방침"이라고 통보했고, 유대인이자 반독일 노선의 상징인 리트비노프는 "그 정책의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리트비노프가 탁자를 치며 항의하자 스탈린은 사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밤, NKVD 부대가 외무인민위원부 청사를 포위했다. 독일 대리대사 베르너 폰 티펠스키르히는 베를린에 타전했다: 몰로토프의 임명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리트비노프의 해임은 뒷면의 「연대기」 난에 작은 공지로만 실렸다. 베를린은 이를 주목했다.

리트비노프는 1930년부터 집단안보의 얼굴이었다. 국제연맹에서 반파시즘 연대를 호소하고,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으며,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했다. 뮌헨 협정(1938년 9월)에서 소련이 배제된 순간, 리트비노프의 노선은 치명타를 입었다. 1939년 3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삼키고 메멜을 병합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폴란드·루마니아·그리스에 안전보장을 약속하며 소련에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뮌헨을 잊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리트비노프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유대인 지식인 외교관이 아니라, 러시아인 당 관료였고, 스탈린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협력자'로 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을 겸했다. 5월 20일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와의 첫 면담에서 몰로토프는 통상협상 재개를 위해 "필요한 정치적 기반"이 먼저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표현은 베를린에서 신중하게 해석되었다. 5월 30일, 독일 외무부 차관 바이츠제커는 "이제 우리 대답은: 정치 기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내부 메모에 남겼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독일과의 대화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5월 31일 최고소비에트 연설에서 그는 "독일·이탈리아 같은 나라들과의 실무적 관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면서도, 영불과의 협상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유효한 상호원조조약, 발트 3국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에 대한 공동 보장, 구체적 군사협정. 이는 모스크바가 원했던 진정한 군사동맹의 최소 조건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후 두 달 반 동안 이 조건들을 수용하지 않았다. '간접침략' 정의를 둘러싼 논쟁, 발트 3국 보장 거부, 국제연맹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단서 등이 교착을 이어갔다. 주영 대사 이반 마이스키는 런던에서 외무차관 배니시타트와 협상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6월 7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은 소련의 발트 불안을 현실화했다. 모스크바는 영불이 소련을 독일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면서 정작 자신들은 옆에서 구경하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7월 중순 정치 협상이 사실상 교착되자, 소련은 군사협상의 동시 타결을 요구했다. 영불은 7월 23일 이에 동의했지만, 군사대표단을 상선으로 천천히 보내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것은 8월 9일이었다. 영국 대표단장 드랙스 제독은 서면 협상 권한조차 없이 '시간을 끌라'는 훈령만 받고 있었다.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개시된 군사협상은 소련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가 첫 질문으로 "독일의 침략 시 붉은 군대가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통과할 수 있는가?"를 던지면서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크는 "독일과는 자유를, 소련과는 영혼을 잃는다"며 소련군 통과를 거부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국인 폴란드를 설득하지 않았다.

사흘 만의 결착: 8월 19일부터 23일 밤까지

영불과의 군사협상이 폴란드 통과 문제로 멈춰 선 바로 그 며칠 동안, 독일과의 접촉은 반대 방향으로 가속했다. 히틀러의 시간표가 협상을 몰아붙였다: 폴란드 침공 예정일은 8월 26일이었고, 그 전에 소련의 중립을 확보해야 했다. 8월 19일 독소 통상·차관 협정이 체결되었고(독일이 2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고 소련이 원자재를 공급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 모스크바는 리벤트로프의 방문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8월 21일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 "8월 22일, 늦어도 23일에는" 리벤트로프를 맞아 달라고 요청했고, 스탈린은 두 시간 만에 동의를 회신했다. 같은 날 밤 모스크바의 3국 군사협상은 무기 연기되었다.

8월 23일 오후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크렘린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마주 앉은 첫 회담은 세 시간 만에 골격에 합의했다. 조약 본문은 간단했다: 상호 불가침, 어느 한쪽이 제3국과 교전할 경우의 중립, 유효 기간 10년. 핵심은 함께 서명된 비밀 추가 의정서였다.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와 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아는 소련의 이익권으로,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이익권으로 하고, 폴란드는 나레프·비스와·산 강선으로 나누었다. 의정서 제2항은 "독립 폴란드 국가의 존속이 양측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그 국가의 경계를 어떻게 정할지는 향후의 정치적 전개 과정에서만 최종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고 적었다. 폴란드라는 국가의 존폐 자체를 두 서명국이 처분할 수 있는 문제로 다룬 것이다. 서명은 자정을 넘겨 24일 새벽에 이루어졌으나 문서에는 23일자가 적혔다. 연회에서 스탈린은 히틀러를 위해 잔을 들었다.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독일 국민이 자신들의 총통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9월 17일 새벽: 두 번째 침공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뒤, 베를린은 소련도 약속된 몫으로 진입하라고 거듭 재촉했다. 몰로토프는 서두르지 않았다. 9월 5일 그는 "적절한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답했고, 소련군의 진입에는 명분이 필요하다고 통보했다: 폴란드 국가의 해체로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을 보호할 필요가 생겼다는 명분이다. 바르샤바가 포위되고 9월 16일 할힌골에서 일본과의 휴전이 발효되자 두 조건이 갖추어졌다. 9월 17일 새벽 3시, 외무부인민위원 포템킨은 폴란드 대사 그시보프스키를 불러 각서를 낭독했다: 폴란드 정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을 진입시킨다. 그시보프스키는 각서 수령을 거부했다.

벨로루시 전선과 우크라이나 전선의 소련군이 국경을 넘었다. 폴란드군 주력은 서쪽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있었고, 총사령관 리츠시미그위는 소련군과는 교전하지 말고 무장 해제를 시도할 경우에만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그로드노 등 몇몇 지점의 저항을 빼면 진격은 빨랐다. 9월 19일 빌노가 점령되었고, 22일에는 르부프(리비우)가 소련군에 항복했으며, 같은 날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는 독일군과 교대하는 공동 열병이 열렸다. 소련 측 집계로 전사자는 737명이었고, 폴란드 측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3,000명 이상이 죽었으며 약 23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분할에서 병합으로

9월 28일의 우호·국경 조약으로 분계선이 확정되자, 소련은 점령지의 법적 편입을 서둘렀다. 면적 약 2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약 1,300만의 이 지역에서 10월 22일 서부 우크라이나·서부 벨로루시 '인민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단일 후보 명단에 공개 투표에 가까운 방식이었고, NKVD의 감시 아래 진행되었다. 새로 구성된 두 인민의회는 즉시 소련 가입을 청원했고, 11월 1일과 2일 소련 최고소비에트는 이를 받아들여 두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했다. 11월 29일에는 주민 전원에게 소련 국적이 부여되었다. 빌노와 그 주변은 10월 10일 소련군 기지 주둔을 담은 상호원조조약과 맞바꾸어 리투아니아에 넘겨졌다. 1년도 지나지 않아 리투아니아 자체가 소련에 병합된다.

점령 통치: 추방과 카틴

병합과 함께 소비에트화가 시작되었다. 은행과 공업이 국유화되었고, 폴란드 국가의 관리, 장교, 경찰, 지주, 오사드니크(1920년대에 동부 국경 지대에 정착한 재향군인)가 체포 대상이 되었다. NKVD 문서상 1940년 2월부터 1941년 6월까지 네 차례의 대규모 추방으로 약 32만 명이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북부 지방으로 이송되었다: 1940년 2월 10일 오사드니크와 산림 관리인 약 14만 명, 4월 13일 체포자 가족 약 6만 1,000명, 6월 피난민(다수가 유대인이었다) 약 7만 8,000명, 그리고 1941년 5~6월의 마지막 추방이다. 수송과 정착의 조건은 가혹했고 사망률이 높았다.

포로가 된 폴란드 군인 가운데 장교와 경찰은 코젤스크, 스타로벨스크, 오스타시코프의 특별수용소 세 곳에 집결되었다. 1940년 3월 5일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이들이 "소비에트 권력의 확고부동한 적"이라며, 포로 1만 4,700명과 서부 우크라이나·벨로루시 감옥의 수감자 1만 1,000명을 "개별 소환과 기소장 제시 없이" 특별 절차로 심사해 "최고형, 총살"을 적용하자고 제안했고, 정치국은 같은 날 이를 결정했다. 제안서 첫 장에는 스탈린,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미코얀의 서명이 남아 있다. 그해 4~5월 카틴 숲, 칼리닌(트베리), 하리코프 등지에서 약 2만 1,857명이 총살되었다. 이것이 카틴 학살이다. 소련은 1943년 독일이 카틴의 매장지를 공개한 뒤에도 반세기 동안 독일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1990년 4월 13일에야 NKVD의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

의정서의 나머지 실행: 발트와 베사라비아

폴란드 분할은 시작이었다. 1939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소련은 에스토니아(9월 28일), 라트비아(10월 5일), 리투아니아(10월 10일)에 차례로 상호원조조약을 강요하여 각국에 소련군 기지를 두었다. 명목상 세 나라의 내정은 그대로였고, 몰로토프는 10월 31일 최고소비에트에서 발트 국가들의 소비에트화 운운은 "어리석은 소리"라고 공언했다. 핀란드에도 같은 요구가 갔으나 핀란드는 거부했고, 그 결과가 11월 30일 시작된 겨울전쟁이다.

전환점은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를 무너뜨리며 유럽의 시선이 서쪽에 쏠린 순간이었다.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된 바로 그날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16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뒤를 이었다. 요구는 같았다: 상호원조조약을 성실히 이행할 새 정부의 구성과 소련군 추가 병력의 무제한 주둔. 세 나라는 저항 없이 수용했고, 소련군이 전역을 점령했다. 즈다노프(에스토니아), 비신스키(라트비아), 데카노조프(리투아니아)가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새 정부 구성을 감독했다. 7월 14~15일 단일 명단으로 치러진 선거로 구성된 세 인민의회는 폴란드 점령지에서와 같은 각본대로 소련 가입을 청원했고, 8월 3일 리투아니아, 5일 라트비아, 6일 에스토니아가 소련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미국은 7월 23일 웰스 선언으로 병합 불승인을 공표했고, 이 불승인은 1991년까지 유지된다.

베사라비아 차례는 그 사이에 왔다. 6월 26일 소련은 루마니아에 베사라비아와 함께 북부 부코비나의 할양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베사라비아는 의정서가 소련의 이익권으로 인정한 땅이었지만, 부코비나는 의정서에 없던 추가 요구여서 베를린이 항의했다. 고립된 루마니아는 28일 수용했고, 소련군이 진주했다. 8월 2일 베사라비아 대부분은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조직되었고, 북부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 남부 해안 지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1941년 6월까지 발트와 베사라비아에서도 폴란드 점령지와 같은 국유화, 체포, 추방이 진행되었다. 독일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4일의 발트 대추방으로만 약 4만 명이 이송되었다.

이로써 1941년 여름까지, 비밀 의정서가 소련의 이익권으로 그은 지역 가운데 핀란드를 제외한 전부가 소련 영토가 되었다. 인구로 약 2,300만 명이었다.

이 조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소련의 공식 설명은 1948년 소련 정보국의 소책자 『역사의 위조자들』로 정식화되었다: 서방이 뮌헨에서 히틀러를 동쪽으로 돌리려 한 이상, 조약은 제국주의 진영 사이의 전쟁에서 비켜서서 침공에 대비할 시간을 번 부득이한 방어 조치였다는 것이다. 이 논거에는 실체가 있다. 집단안보 노선은 소련 혼자 폐기한 것이 아니라 뮌헨에서 이미 부서져 있었고, 영불의 협상 태도는 소련의 의심을 정당화할 만큼 미온적이었으며, 조약으로 소련은 22개월의 시간과 수백 킬로미터의 종심을 얻었다.

그러나 학계의 평가는 방어 논리만으로는 설명이 닫히지 않는다는 데 대체로 일치한다. 시간은 독일도 벌었다. 양면 전쟁을 피한 독일은 서유럽을 각개격파했고, 소련산 곡물과 석유는 영국의 봉쇄를 무디게 했다. 새 국경의 종심은 1941년 6월의 방어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비밀 의정서는 불가침의 약속이 아니라 제3국들의 영토를 사전에 분배한 문서였고, 그 실행(폴란드 분할, 발트 병합, 카틴과 추방)은 방어라는 말로 포괄되지 않는다. 1989년 12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스스로가 이 구분을 공식화했다: 불가침조약 자체는 당시 국제 관행의 산물로 볼 수 있으나, 비밀 의정서는 제3국의 주권과 레닌주의 외교 원칙에 반하므로 "서명 시점부터 법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의 논쟁은 조약이 불가피한 대응이었는가 선택된 팽창이었는가를 두고 이어지지만, 어느 쪽이든 이 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조건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결정한 것과 남긴 쟁점

이 조약이 결정한 것은 단순한 중립이 아니었다. 1939년 8월 23일 비밀 추가 의정서는 발트해에서 발트 3국과 핀란드의 장래를 소련의 세력권에, 폴란드의 장래를 나레프강·비스와강·산강 부근의 선을 기준으로 양국의 세력권에 두었다. 문서는 폴란드의 독립국 존속 여부를 “후일의 정치적 발전”에 맡긴다고 썼고, 마지막에는 이를 “엄격히 비밀”로 하자고 명시했다. 즉 공개 조약의 10년 불가침 약속과 별개로, 당사국은 아직 자기 영토가 아닌 나라들의 주권을 협상 대상으로 삼았다. 9월 28일 국경 및 우호 조약과 그 부속 의정서는 이 초안을 실제 국경, 점령, 인구 이동의 장치로 바꾸었다. 독일에는 폴란드를 공격해도 소련과의 전쟁을 걱정하지 않을 조건이, 소련에는 독일군을 서쪽에 묶어 두고 국경을 서쪽으로 옮길 시간과 완충지대가 주어졌다. 소련 지도부의 입장에서 이는 파시스트 침략과 일본군의 위협이 겹친 상황에서 전쟁을 늦추고 국가의 군사적 준비를 계속하려는 계산이었다. 그 계산이 왜 설득력을 가졌는지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을 산 방어 협정’이라는 설명만으로는 폴란드 동부와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강압, 핀란드와의 전쟁, 베사라비아 및 북부 부코비나 점령, 그리고 점령지의 추방과 처형을 설명할 수 없다. 1941년 6월 독일의 배신으로 조약은 끝났지만, 그 이전에 소련이 얻은 영토와 독일이 얻은 공격의 자유는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역사학의 논쟁은 조약이 침략적 결과를 낳았는가에 있지 않다. 그 사실은 문서와 후속 행동이 확인한다. 논쟁은 스탈린이 선택할 수 있었던 폭과 선택의 성격에 있다. 한 해석은 영국과 프랑스가 신뢰할 만한 군사협정을 만들지 못했고 폴란드도 소련군 통과를 거부했으므로, 소련이 혼자 남지 않기 위해 독일과 합의한 것은 가혹하지만 합리적인 국가안보 선택이었다고 본다. 다른 해석은 모스크바가 집단안보 협상을 이용해 조건을 높이는 동시에 이미 동유럽 분할을 흥정했고, 의정서는 방어선이 아니라 제3국을 두 독재국가가 나눠 가진 제국적 거래였다고 본다. 1989년 12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결의는 이 둘을 구분할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 결의는 공개 조약이 전쟁의 위협 속에서 소련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인정했지만, 비밀 의정서는 제3국의 주권과 독립을 침해했고 서명 순간부터 법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 결론은 소련의 안전 추구라는 동기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동기가 타국을 점령할 권리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연구자들은 ‘불가피한 유예’와 ‘기회주의적 분할’ 중 어느 요소에 더 큰 무게를 둘지 다투지만, 두 판단은 양립할 수 있다. 조약은 소련에 시간을 주었고 동시에 동유럽인들에게 그 시간을 강제로 빼앗았다. 바로 그 이중성이 이 사건이 끝내 정리되지 않는 이유다.

결과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9월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직접적 결과를 낳았다. 부크 강을 경계로 한 독소 국경선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즉각적 조건이 되었다. 소련은 이 조약에 기초하여 1939~1940년에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를 합병하고, 핀란드와 겨울전쟁을 치른 뒤 카렐리야 일부를 할양받았으며,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와 북부코비나를 점령했다. 1941년 6월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조약은 파기되었다. 소련은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비밀 의정서의 존재를 부정했으나, 1989년 12월 소련 인민대표대회가 비밀 의정서를 '서명 시점부터 법적으로 무효'라고 공식 규탄했다. 분할된 폴란드 동부 영토는 전후 소련에 그대로 남아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영토가 되었다.

연표

  1. 1939.05.03
    리트비노프 경질, 몰로토프 임명

    스탈린은 집단안보 노선을 상징하던 유대인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를 경질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베를린은 이를 대독일 관계 개선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2. 1939.08.12
    모스크바 3국 군사협상 개시

    소련·영국·프랑스 군사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소련 측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이끌었으나, 영국 대표단은 서면 권한조차 없이 시간을 끌라는 훈령만 받고 있었다.

  3. 1939.08.19
    독소 통상협정 체결

    베를린에서 독소 통상협정이 체결되었다. 독일은 2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차관을 제공하고 소련은 원자재를 공급하기로 했다. 이는 정치적 협상의 관문이었다.

  4. 1939.08.20
    할힌골 전투: 소련군 총반격 개시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몽골군이 일본 관동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했다. 독소 협상이 급물살을 타는 배경에는 일본과의 미해결 전쟁이 있었다.

  5. 1939.08.23
    독소 불가침조약 서명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로 날아와 8월 23일 밤(문서상 23일자, 실제 서명은 24일 새벽) 몰로토프와 조약에 서명했다. 비밀 추가 의정서는 폴란드를 나레프-비스와-산 강선으로, 발트 3국과 핀란드·베사라비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정했다.

  6. 1939.09.01
    독일, 폴란드 침공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나 폴란드에 대한 실질적 군사 지원은 없었다.

  7. 1939.09.16
    할힌골 휴전 협정

    소련과 일본이 할힌골 전투의 휴전에 합의했다. 다음 날 바로 소련군은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8. 1939.09.17
    소련, 폴란드 동부 침공

    몰로토프는 폴란드 정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소련군의 폴란드 진입을 명령했다. 붉은 군대는 45만 이상의 병력과 4,700대의 전차로 국경을 넘었다.

  9. 1939.09.22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공동 군사 퍼레이드

    독일군과 소련군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만나 공동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독일군은 합의된 경계선까지 철수하며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을 소련 측에 인계했다.

  10. 1939.09.28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 체결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나 폴란드 분할을 확정하는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 비밀 의정서 개정으로 리투아니아는 소련 세력권으로 넘어가고,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는 독일 몫이 되었다. 부크 강이 새로운 국경선이 되었다.

  11. 1939.10.05
    폴란드 최후의 저항 종료

    폴란드 정규군의 마지막 대규모 부대가 코츠크 전투에서 항복했다. 폴란드는 독립국으로서 지도에서 사라졌다. 소련 측은 737명 전사, 폴란드 측은 3,000~7,000명이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23만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12. 1939.10.10
    발트 3국에 상호원조조약 강요

    에스토니아(9월 28일), 라트비아(10월 5일), 리투아니아(10월 10일)가 차례로 소련군 기지 주둔을 담은 상호원조조약에 서명했다. 리투아니아는 그 대가로 빌노를 받았다. 같은 요구를 거부한 핀란드와는 11월 30일 겨울전쟁이 시작된다.

  13. 1939.11.01
    동부 폴란드, 소련에 병합

    10월 22일 NKVD 감시 아래 단일 명단으로 치러진 '인민의회' 선거를 거쳐, 두 의회의 가입 청원을 받는 형식으로 11월 1~2일 소련 최고소비에트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를 우크라이나·벨로루시 공화국에 편입했다. 빌노 지역은 10월 10일 소련군 기지 주둔을 담은 상호원조조약과 맞바꾸어 리투아니아에 넘겨졌다.

  14. 1940.02.10
    점령지 첫 대규모 추방

    오사드니크(군인 정착민)와 산림 관리인 약 14만 명이 시베리아와 북부 지방으로 이송되었다. NKVD 문서상 1941년 6월까지 네 차례의 추방으로 약 32만 명이 끌려갔다.

  15. 1940.03.05
    정치국, 폴란드인 포로 총살 결정

    베리야의 제안에 따라 정치국은 폴란드군 장교 포로 1만 4,700명과 서부 우크라이나·벨로루시 감옥 수감자 1만 1,000명의 총살을 결정했다. 4~5월 카틴 숲, 칼리닌, 하리코프 등지에서 약 2만 1,857명이 처형되었다(카틴 학살).

  16. 1940.06.15
    소련군, 발트 3국 점령

    파리 함락에 맞춘 최후통첩(리투아니아 6월 14일, 라트비아·에스토니아 16일)으로 새 정부 구성과 추가 병력의 무제한 주둔을 요구했고, 세 나라는 저항 없이 수용했다. 7월 단일 명단 선거로 구성된 인민의회들이 소련 가입을 청원했다.

  17. 1940.06.28
    베사라비아·북부 부코비나 점령

    6월 26일의 최후통첩을 루마니아가 수용하여 소련군이 진주했다. 베사라비아는 의정서상 소련 이익권이었으나 북부 부코비나는 의정서에 없던 추가 요구였다. 8월 2일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조직되었다.

  18. 1940.08.03
    발트 3국, 소련에 편입

    리투아니아(8월 3일), 라트비아(5일), 에스토니아(6일)가 소련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미국은 7월 23일 웰스 선언으로 병합 불승인을 공표했고, 이 입장은 1991년까지 유지되었다.

  19. 1941.06.22
    독일, 소련 침공: 조약 파기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조약은 22개월 만에 휴지가 되었다. 7월 30일 소련은 폴란드 망명정부와 국교를 회복하고, 1939년 독소 조약들의 영토 조항이 효력을 잃었음을 인정했다(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

  20. 1989.12.24
    소련 인민대표대회, 비밀 의정서 규탄

    제2차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비밀 추가 의정서가 '서명 시점부터 법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당과 정부, 소비에트 국민을 기만하며 개인 권력으로 체결한 것이라고 공식 규탄했다.

  21. 1990.04.13
    소련, 카틴 학살 책임 인정

    TASS 성명으로 소련은 카틴 학살이 'NKVD의 소행'임을 공식 인정했고, 고르바초프는 폴란드 대통령 야루젤스키에게 포로 이송 명단을 전달했다. 1992년 러시아는 1940년 3월 5일 정치국 결정 원본을 폴란드에 전달했다.

관련 인물 7명

관련 용어

출처: Avalon Project (Yale Law School), "Nazi-Soviet Relations 1939-1941: Secret Additional Protocol," text of the 23 August 1939 secret protocol.Хронос (hrono.ru),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ССР. 23 августа 1939 г.," full Russian text of the treaty and secret protocol.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German-Soviet Pact," Holocaust Encyclopedia.Wikisource, "German-Soviet Boundary and Friendship Treaty 28 September 1939," full text with confidential and secret supplementary protocols.Постановление Съезда народных депутатов СССР от 24 декабря 1989 г. № 979-1, "О политической и правовой оценке советско-германского договора о ненападении от 1939 года."Wikipedia (en), "Molotov–Ribbentrop Pact," for timeline and casualty figures.Wikipedia (ru),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 for Soviet historiography and internal politics.Записка Л. П. Берии И. В. Сталину № 794/Б от 5 марта 1940 г. и выписка из протокола Политбюро № 13 (опубл. 1992), факсимиле в: Катынь. Пленники необъявленной войны. Документы. М., 1999.Anna M. Cienciala, Natalia S. Lebedeva, Wojciech Materski (eds.), Katyn: A Crime Without Punishment, Yale University Press, 2007.Wikipedia (en), "Soviet invasion of Poland," "Elections to the People's Assemblies of Western Ukraine and Western Belorussia," and "Soviet deportations from Poland (1939–1941)," for the military course, annexation procedure, and NKVD deportation figures.В. М. Молотов, доклад «О внешней политике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на сессии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31 октября 1939 г.Wikipedia (en), "Occupation of the Baltic states," "1940 Soviet ultimatum to Lithuania," "Soviet occupation of Bessarabia and Northern Bukovina," and "Welles Declaration," for the ultimatums, occupation and incorporation chro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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