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군단
Freikorps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뒤인 1918~1923년 독일에서 제대 군인과 청년, 민족주의자로 꾸려진 우익 의용 준군사부대. 사회민주당 정부가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와 각지의 평의회 공화국 진압에 동원했고, 발트와 슐레지엔에서도 싸웠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고, 1920년 카프 폭동 뒤 대부분 해산되었으며 많은 대원이 나치 돌격대와 친위대로 들어갔다.
상세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은 18세기 의용병 부대와 나폴레옹 전쟁기 뤼초 자유군단 같은 애국 의용대에서 왔다. 1918년 11월 혁명 뒤 그 이름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게 됐다. 해체되어 가던 옛 제국군 대신 공화국 정부가 믿을 수 있는 무력이 필요해지자, 장교들이 제대 군인과 학생, 전쟁을 겪지 못한 청년을 모아 의용 부대를 꾸렸다. 역사가 군터 마이는 바이마르 초기의 자유군단을 약 365개로 헤아렸다. 대원의 4분의 3은 25세 이하의 미혼 남성이었고, 정식 대원만 약 50만 명, 비공식 참가자까지 치면 그보다 훨씬 많았다는 추산도 있다.
1918년 12월 독립사회민주당이 정부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를 맡은 사회민주당의 구스타프 노스케가 「누군가는 피의 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국내의 적에 맞설 주력으로 키웠다. 1919년 1월 자유군단은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진압하며 『포어베르츠』 건물을 중화기로 탈환했고, 1월 15일 근위기병소총사단 장교들은 발데마르 파프스트의 명령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2월에는 브레멘 평의회 공화국을, 5월 초에는 3만 명가량의 자유군단이 정부군과 함께 뮌헨의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이 진압에서 약 600명이 죽었다.
동쪽 국경에서 자유군단은 볼셰비키와 함께 폴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 세력과도 싸웠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이끈 발트의 독일군에는 철사단 같은 자유군단이 가세했고, 라트비아 시민권과 토지를 약속받은 독일 각지의 대원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1919년 6월 체시스 전투에서 에스토니아·라트비아군에 패했다. 슐레지엔에서도 자유군단과 그 후신 조직이 폴란드 봉기에 맞섰다.
1919년 3월 6일 임시 국방군법이 제정되자 부대들은 차례로 국방군에 흡수되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이 병력을 10만 명으로 묶자 남는 부대는 해산 대상이 되었다. 이에 반발한 에르하르트 해병여단이 1920년 3월 카프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총파업과 관료의 불복종 앞에 닷새 만에 무너졌지만, 곧이어 루르 봉기를 진압한 것도 자유군단이었다. 대부분의 부대는 그 뒤 강제로 해산되었다. 해산된 에르하르트 여단 출신들은 비밀결사 「콘술 조직」을 만들어 1921년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1922년 발터 라테나우를 암살했다. 1918~1922년 자유군단 대원이 저지른 살인은 354건으로 집계된다. 남은 대원들은 철모단 같은 우익 단체와 나치 돌격대·친위대로 흘러들었고, 1934년 「장검의 밤」에서는 히틀러가 옛 자유군단 지도자들까지 숙청했다. 혁명을 막으려 사회민주당 정부가 불러낸 이 무력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겨누는 극우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