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독립사회민주당
Independent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쫓겨난 당원들이 1917년 4월 고타에서 세운 독일의 사회주의 정당. 1918년 11월 혁명 때 인민대표평의회에 참여했고 1920년 국회 선거에서 제2당이 되었으나, 같은 해 코민테른 가입 문제로 갈라져 다수가 독일 공산당과 합쳤다. 남은 당원 대부분은 1922년 사회민주당으로 돌아갔고, 소수파는 1931년까지 남았다.
상세
1914년 8월 사회민주당 의원단은 당 규율에 따라 전쟁공채에 모두 찬성했으나,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시작으로 반대표가 늘었다. 1915년 6월 카를 카우츠키, 후고 하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병합 없는 협상 강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요구」를 발표했다. 1915년 12월 반대표를 던진 의원 18명은 1916년 3월 의원단에서 제명되어 사회민주주의 노동공동체를 만들었고, 1917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이들과 스파르타쿠스단을 당에서 축출했다. 노동공동체는 1917년 4월 6~8일 1875년 통합대회의 도시 고타에서 회의를 열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웠다. 하제와 게오르크 레데부어가 의장이 되었고, 당에는 하제 같은 전통파, 아이스너·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 반전파, 이론가 카우츠키,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파가 함께 있었다.
당원 수는 영어 출처에 따르면 창당 몇 달 뒤 약 12만 명, 독일어 출처에 따르면 창당 해에 약 10만 명이었고, 독일어 출처는 1920년 90만 명 가까이로 정점에 이르렀다고 적는다. 당은 1917년 4월과 1918년 1월의 대규모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8년 11월 혁명 때는 하제, 빌헬름 디트만, 에밀 바르트가 다수파 사회민주당 3명과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루었고, 바이에른에서는 쿠르트 아이스너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군이 인민해병사단을 공격한 크리스마스 위기 뒤 1918년 12월 29일 세 사람은 평의회에서 물러났다. 1919년 1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이 떨어져 나가 독일 공산당을 세웠고, 같은 달 베를린 경찰청장 로베르트 에밀 아이히호른의 해임이 스파르타쿠스 봉기로 이어졌다.
1919년 1월 국민의회 선거에서 당은 7.6%를 얻는 데 그쳤고, 바이마르 헌법 최종 표결에서는 한 명도 찬성하지 않았다. 하제는 1919년 10월 8일 저격을 당해 11월 7일 사망했다. 1919년 11~12월 라이프치히 당대회는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정치적 노동자 평의회로 대체하자는 아르투어 크리스피엔의 행동강령을 채택했고, 크리스피엔과 에른스트 도이믹이 의장이 되었다. 1920년 6월 국회 선거에서 당은 득표율을 17.6%로, 의석을 22석에서 83석으로 늘려 다수파 사회민주당에 이은 제2당이 되었다.
1920년 10월 할레 당대회는 코민테른 가입 21개 조건을 236 대 156으로 받아들였고, 당은 둘로 갈라졌다. 좌파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과 합쳐 통합독일공산당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를 영어 출처는 약 40만 명으로, 독일어 출처는 좌파에 합류한 사람을 최대 약 55만 명, 1921년 1월 통합독일공산당 당원을 약 448,500명으로 적는다. 레데부어와 크리스피엔의 우파는 약 34만 명과 국회의원 4분의 3을 이끌고 당명을 유지했다. 1922년 6월 발터 라테나우 암살 뒤 우파는 9월 24일 뉘른베르크 대회에서 다수파 사회민주당과 다시 합쳤다. 이를 거부한 레데부어와 테오도어 리프크네히트의 소수파는 군소 정당으로 남았다가 1931년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