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독립 선언을 실제 국가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적군, 백군, 독일계 무장세력과 싸우며 국가를 세웠다. 핀란드와 영국 함대, 폴란드의 개입이 맞물렸고 1920년의 조약들도 모든 국경 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독립 선언 뒤에도 전쟁이 필요했던 이유
1918년 11월 독일이 패전했다고 발트의 국가권력이 곧바로 독립정부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는 이미 2월에 독립을 선언했고 라트비아는 11월 18일 독립을 선포했지만, 각 정부는 군대와 재정, 실제 통치영역을 확보해야 했다. 후퇴하는 독일군 뒤로 적군이 들어왔고, 러시아 백군과 독일계 부대도 자신들의 전후 질서를 추구했다.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 점령이 만든 조건 속에서 독립전쟁·내전·외국의 개입은 같은 장소에서 겹쳤다.
세 나라를 하나의 전선으로 보는 것도, 각국의 고립된 영웅담으로 보는 것도 불충분하다. 에스토니아군은 라트비아 북부에서 싸웠고 폴란드군은 라트비아와 협력하면서 리투아니아와 충돌했다. 이 문서에서 핀란드는 발트 3국의 하나가 아니라 핀란드만과 동카렐리야를 통해 연결된 이웃으로 다룬다.
에스토니아: 나르바에서 타르투까지
1918년 11월 말 적군이 나르바를 점령하자 얀 안벨트가 이끄는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이 수립됐다. 콘스탄틴 페츠의 임시정부는 요한 라이도네르의 지휘 아래 군대를 정비했다. 영국의 해상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의 참전이 이를 도왔고, 1919년 초 에스토니아군은 반격해 주요 영토에서 적군을 밀어냈다. 국내에서는 토지개혁과 제헌의회 선거가 신생 공화국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빅토르 킹기세프의 공산주의 지하활동은 코뮌의 군사적 패배 뒤에도 계속됐지만, 이를 국가 전체의 의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유데니치의 북서군은 에스토니아를 기지로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했다. 여기에는 조건부 협력과 근본적 불신이 공존했다. 백군의 통일 러시아 구상은 에스토니아의 독립과 충돌했다. 다만 백군이 끝까지 어떤 승인도 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부정확하다. 영국의 압력 아래 1919년 8월 구성된 북서정부는 에스토니아 독립을 인정했지만, 백군 전체가 이를 확실하게 보장할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10월 페트로그라드 공세가 실패하자 후퇴한 북서군은 에스토니아에서 무장해제·억류되었고, 군인과 피란민은 발진티푸스와 열악한 수용 조건에 시달렸다. 부와크-바와호비치처럼 이후 폴란드 전선으로 옮겨간 지휘관도 있었다. 얀 퇴니손 정부 아래 진행된 협상은 1920년 2월 2일 타르투 강화로 끝났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주권 주장을 포기했다. 이것은 전쟁 중 탄생한 국가가 군사적 생존을 조약으로 확인받은 과정이었다.
라트비아: 세 정부와 두 번의 리가 전투
카를리스 울마니스의 정부와 페테리스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는 라트비아의 권력을 다투었다. 소비에트군이 1919년 1월 리가를 차지하자 울마니스 정부는 리예파야로 물러났다. 독일의 폰 데어 골츠가 지휘한 병력과 발트 향토방위군은 적군에 맞섰지만, 울마니스의 독립국 구상에 복무하는 단순한 지원군은 아니었다. 독일계 군인과 지주층의 이해, 라트비아인의 토지개혁 요구가 충돌했다.
4월 16일 리예파야 쿠데타 뒤 울마니스는 배 위로 피신했고, 5월 안드리에우스 니에드라가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5월 22일 독일계 부대와 동맹 부대는 리가에서 소비에트군을 몰아냈다. 스투치카 정권의 적색 테러에 이어 탈환 뒤에도 보복과 처형이 벌어졌다. 반볼셰비키 진영 안의 충돌은 6월 체시스 전투에서 드러났다. 에스토니아군과 북라트비아 부대가 독일계 세력을 격퇴했고 울마니스 정부는 리가로 돌아왔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철수를 거부한 독일 병력 상당수가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의 서러시아 의용군에 합류했다. 이 군대는 반볼셰비키를 표방하면서도 10월 리가를 공격했다. 라트비아군은 영국·프랑스 함정의 지원을 받으며 11월 11일 서안의 적을 밀어냈다. 메이에로비츠의 외교는 군사적 생존을 국제적 인정으로 연결하려는 작업이었다. 1920년 1월 폴란드와 라트비아의 합동 다우가프필스 작전이 라트갈레의 소비에트군을 밀어내는 데 기여했고, 8월 11일 러시아와의 리가 강화가 체결됐다. 이 조약은 폴란드와 소비에트 측이 맺은 1921년 리가 조약과 다르다.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정권의 실패와 빌뉴스 분쟁
스메토나와 볼데마라스가 참여한 리투아니아 국가 건설은 독일 철수와 적군 진입 사이에서 진행됐다. 빈차스 카프수카스와 지그마스 안가리에티스는 소비에트 정권을 추진했고, 1919년에는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공화국인 리트벨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독립정부의 거점은 카우나스에 남았고, 폴란드군은 4월 빌뉴스를 점령했다. 소비에트 국가 건설은 리투아니아 독립운동을 흡수하지 못했다.
1920년 7월 12일 모스크바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빌뉴스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 조약이 폴란드를 구속하거나 현지의 군사적 충돌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적군의 진격과 후퇴 속에서 빌뉴스 문제가 다시 열렸다. 10월 7일 수바우키 협정은 제한된 구역의 정전과 군사분계선을 정했으며 빌뉴스의 최종 귀속을 해결한 평화조약은 아니었다.
협정 발효를 앞둔 10월 9일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빌뉴스를 점령했다.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행동을 항명으로 꾸민 뒤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고, 그 영토는 1922년 폴란드에 편입됐다.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립을 확보한 국가들끼리도 국경과 주민의 정치적 의사를 둘러싸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북쪽 날개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분리되지 않는 이유다.
영국 함대와 핀란드의 선택
월터 코원이 지휘한 영국 함대는 무기 수송, 해안 작전 지원, 소비에트 발트함대의 활동 억제에 관여했다. 1919년 8월 크론시타트 항구를 향한 어뢰정 공격은 이 개입의 대표적 작전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반볼셰비키 목표가 발트 각국과 백군의 이해를 일치시킨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지원한 세력들 사이에서도 독립 승인과 영토를 놓고 갈등이 계속됐다.
핀란드에서는 1918년 내전의 백색 승리 뒤에도 동카렐리야 원정과 러시아와의 국경 문제가 남았다. 핀란드 의용군은 1919년 에스토니아를 지원했지만 핀란드가 유데니치와 함께 전면적으로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10월 14일 핀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는 별도의 타르투 조약을 맺었다. 핀란드는 페차모를 얻고 레폴라와 포라얘르비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에스토니아의 2월 타르투 조약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국경 질서는 훗날 겨울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같은 해의 강화, 서로 다른 국경
1920년의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 조약은 공통의 전쟁 피로와 각 정부의 생존 필요를 반영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주변 전선을 줄일 필요가 있었고, 신생국들은 독립과 실제 통치영역을 보장받으려 했다. 그렇다고 모든 조약이 같은 조건이나 동일한 정치체제를 만든 것은 아니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대러시아 강화 뒤에도 남았다.
독립전쟁은 러시아 내전의 주변 전투이면서 동시에 각국의 국가 수립 과정이었다. 이후 1940년 병합과 1987~1991년 발트 독립 회복을 이해하려면 이 첫 공화국들과 조약의 경험을 먼저 보아야 한다. 군사적 연결의 전체 흐름은 상위 문서인 러시아 내전에서 다룬다.
결과
발트 3국의 독립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조약으로 인정되었다. 핀란드도 별도로 강화했지만 빌뉴스 분쟁은 남았고, 독립의 기억과 조약은 훗날 주권 회복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918.11독일 철수와 적군 진입
국가 수립과 전쟁이 겹쳤다.
- 1919.04.16리예파야 쿠데타
울마니스 정부에 맞선 친독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 1919.06체시스 전투
에스토니아군과 북라트비아 부대가 독일계 세력을 격퇴했다.
- 1919.10–11북서군의 패퇴와 리가 방어
유데니치는 페트로그라드에서 패퇴했고 베르몬트군은 리가에서 격퇴됐다.
- 1920.01다우가프필스 작전
라트비아와 폴란드가 소비에트군에 맞서 협력했다.
- 1920.02.02에스토니아 타르투 강화
러시아가 에스토니아 독립을 인정했다.
- 1920.07.12리투아니아 모스크바 강화
러시아가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빌뉴스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다.
- 1920.08.11라트비아 리가 강화
라트비아와 러시아의 전쟁이 조약으로 끝났다.
- 1920.10.07–09수바우키와 빌뉴스 점령
협정 뒤 젤리고프스키군이 빌뉴스를 점령했다.
- 1920.10.14핀란드 타르투 강화
핀란드와 러시아가 별도의 국경 합의에 서명했다.
관련 인물 22명
지도부17
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 수반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에스토니아를 기지로 삼은 북서군 사령관니콜라이 유데니치1862–1933에스토니아를 기지로 삼은 북서군 사령관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국경 강화의 소비에트 외교 책임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국경 강화의 소비에트 외교 책임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라트비아 협력과 빌뉴스 정책의 폴란드 지도자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라트비아 협력과 빌뉴스 정책의 폴란드 지도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초기 정부 수반콘스탄틴 페츠1874–1956독립전쟁 초기에 에스토니아 정부를 이끌었다. 1934년 라이도네르와 함께 권위주의 체제를 세웠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강제이송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총사령관요한 라이도네르1884–1953에스토니아군의 반격과 북라트비아 작전을 지휘했다. 유데니치군과 조건부로 협력했으며, 1934년 페츠의 쿠데타를 도왔다. 소련에 강제이송된 뒤 감옥에서 사망했다.
타르투 강화기의 에스토니아 총리얀 퇴니손1868–1941?언론인이자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1919~1920년 총리를 지냈다. 그의 정부 아래 러시아와 타르투 강화가 체결됐다. 소련 점령 뒤 체포되어 실종됐으며 1941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트비아 독립전쟁기의 총리카를리스 울마니스1877–19421918년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소비에트군과 친독 정권, 베르몬트군에 맞서 공화국을 지켰다. 1934년 쿠데타로 독재를 수립했으며 소련 점령 뒤 강제이송되어 사망했다.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 수반안드리에우스 니에드라1871–1942목사이자 작가로 1919년 리예파야 쿠데타 뒤 친독 정부를 이끌었다. 체시스 전투 이후 정권이 무너졌으며, 독립 라트비아에서 반역죄로 재판받고 독일로 추방됐다.
핀란드와 발트의 독일군 지휘관뤼디거 폰 데어 골츠1865–1946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지원했다. 1919년에는 라트비아의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했으며 반볼셰비키 전쟁을 독일의 발트 영향력 유지와 결합했다.
리가를 공격한 서러시아 의용군 사령관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1877–1973독일계 병력을 대거 받아들인 서러시아 의용군을 지휘했다. 반볼셰비키를 표방했으나 1919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독립군과 싸웠고 리가 공격 실패 뒤 망명했다.
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안타나스 스메토나1874–1944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으로 1918년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1919년 초대 대통령이 됐다. 1926년 쿠데타 뒤 권위주의 통치를 이끌었으며 소련 점령 뒤 망명해 미국에서 화재로 사망했다.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와 외무장관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1883–19421918년 초대 내각을 이끌고 독립전쟁기에 외무장관으로 활동했다. 1926년 쿠데타 뒤 다시 총리가 됐으나 스메토나와 결별했다. 소련 점령 뒤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리투아니아와 리트벨의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빈차스 카프수카스1880–1935리투아니아 공산주의자로 1918~1919년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를 이끌었다. 군사적 패배 뒤 소비에트 러시아로 옮겨 코민테른에서 활동했다.
빌뉴스를 점령한 폴란드 장군루치안 젤리고프스키1865–1947러시아 제국군 출신으로 폴란드군을 지휘했다. 1920년 10월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해 항명을 가장하고 빌뉴스를 점령한 뒤 중부 리투아니아를 수립했다. 훗날 폴란드 군사장관을 지냈다.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로 옮겨간 반소비에트 지휘관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1883–1940적군에서 백군으로 옮겨 에스토니아 전선에서 싸웠고 이후 폴란드와 협력했다. 1920년 휴전 뒤 독자적으로 벌인 벨로루시 원정은 실패했다. 그의 부대가 자행한 반유대인 폭력도 전쟁 기록의 일부다.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지도자얀 안벨트1884–19371918~1919년 적군의 진입과 함께 세워진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을 이끌었다. 패배 뒤에도 공산주의 운동과 코민테른에서 활동했으며 1937년 소련에서 체포되어 심문 중 사망했다.
참여5
타르투 강화의 소비에트 협상 대표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영국군과 교전하다 포로가 된 해군 지휘관표도르 라스콜니코프1892–1939영국군과 교전하다 포로가 된 해군 지휘관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라트비아 독립 승인을 이끈 외교관지그프리츠 안나 메이에로비츠1887–1925라트비아의 초대 외무장관으로 독립전쟁 동안 연합국의 지원과 국제 승인을 추구했다. 이후 총리도 지냈으며 1925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내무 인민위원지그마스 안가리에티스1882–1940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1918~1919년 소비에트 국가 수립에 참여했다. 망명 뒤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스탈린기 탄압으로 체포되어 1940년 처형됐다.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지하조직 지도자빅토르 킹기세프1888–19221917년 혁명에 참여한 볼셰비키로 독립전쟁기 에스토니아의 공산주의 지하활동을 이끌었다. 독립 공화국의 당국에 체포되어 1922년 처형됐으며 소비에트 시대에 기념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