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독립 선언을 실제 국가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18년 11월: 세 정부, 하나의 공백
1918년 11월 독일이 패전했다고 발트의 권력이 곧바로 독립정부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는 이미 2월에 독립을 선언했고 라트비아는 11월 18일 리가에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세 정부 모두 군대와 재정, 실제로 통치하는 영토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1월 11일 콘스탄틴 페츠의 임시정부가 독일 점령 당국에서 권한을 넘겨받았고, 라트비아에서는 카를리스 울마니스가 인민평의회 정부를 이끌었으며, 리투아니아에서는 11월 11일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가 첫 내각을 구성했다. 어느 정부도 몇천 명 이상의 무장 병력을 갖지 못했다.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 점령이 만든 조건 속에서 후퇴하는 독일군 뒤로 세 개의 다른 세력이 들어왔다.
첫째는 붉은 군대였다. 브레스트 조약이 폐기된 11월 13일 소비에트 정부는 서부로의 진격을 결정했다. 명분은 발트 각지의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고, 목표는 독일 혁명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11월 22일 나르바 공격이 실패했지만 11월 28일 나르바가 함락되었고, 다음 날 얀 안벨트를 수반으로 하는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이 선포되었다. 12월 4일 페테리스 스투치카의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가, 12월 16일 빈차스 카프수카스의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정부가 뒤따랐다. 1919년 1월 3일 리가가, 1월 5일 빌뉴스가 붉은 군대의 손에 들어갔다. 12월 말 에스토니아군은 탈린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둘째는 러시아 백군이었다. 프스코프에서 독일군 보호 아래 편성된 북부군단은 11월 25일 프스코프가 떨어진 뒤 에스토니아로 후퇴해 12월 6일 에스토니아군 지휘 아래 들어갔다. 셋째는 독일군 잔류 병력과 발트 독일계 지주층의 무장 조직인 발트 향토방위군이었다. 정전협정 12조는 연합국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독일군이 이 땅에 남도록 했고, 연합국은 볼셰비키를 막을 방벽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세 나라를 하나의 전선으로 보는 것도, 각국의 고립된 영웅담으로 보는 것도 불충분하다. 에스토니아군은 라트비아 북부에서 싸웠고, 폴란드군은 라트비아와 협력하면서 리투아니아와 충돌했으며, 독일 자유군단은 세 나라 모두에 나타났다.
에스토니아: 1919년 1월의 반격과 국가의 형성
전세를 바꾼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영국 함대였다. 12월 12일 알렉산더-싱클레어 제독의 경순양함 편대가 탈린에 들어와 소총 6,500정과 기관총, 야포를 넘겨주었고, 12월 26일과 27일 탈린 앞바다에서 소비에트 구축함 스파르타크와 아프트로일을 나포해 에스토니아 해군에 넘겼다. 스파르타크에 타고 있던 표도르 라스콜니코프는 포로가 되어 이듬해 영국 포로와 교환되었다. 둘째, 12월 23일 총사령관에 임명된 요한 라이도네르였다. 그는 장갑열차와 의용 대대로 기동 부대를 만들고 강제 징집을 관철했다. 셋째, 외국 의용군이었다. 핀란드 의용군 약 3,700명이 1월 초 도착했고 스웨덴과 덴마크 의용대도 뒤따랐다.
1월 7일 시작된 반격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1월 14일 쿠페르야노프의 유격대가 타르투를 되찾았다. 도시를 떠나기 직전 소비에트 측은 신용은행 지하에 가두었던 인질 19명을 처형했고, 그 가운데 정교회 주교 플라톤이 있었다. 1월 19일 나르바가 회복되었고, 1월 31일 파주 전투에서 핀란드 의용군과 함께 싸운 쿠페르야노프가 전사했다. 2월 초 에스토니아 영토 전체에서 붉은 군대가 밀려났다. 2월 사레마 섬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정부군에 진압되었다. 노동 코뮌은 러시아 영토로 물러난 뒤 6월 5일 해산했다.
국가를 만든 것은 전투만이 아니었다. 4월 5일부터 7일까지 전선이 멀지 않은 곳에서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졌고, 사회민주당과 노동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10월 10일 제헌의회가 통과시킨 토지개혁법은 발트 독일계 지주가 소유한 장원 1천여 곳, 나라 농지의 절반이 넘는 땅을 보상 없이 몰수해 소농과 참전 군인에게 나누었다. 유데니치의 백군이 「러시아의 재통합」을 말하고 소비에트가 「노동 코뮌」을 말하는 사이에서, 농민에게 땅을 준 것은 독립 공화국이었다. 이 개혁이 없었다면 병사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빅토르 킹기세프가 이끈 공산주의 지하조직은 이후에도 활동했고 그는 1922년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 활동을 나라 전체의 의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유데니치와 에스토니아: 동맹인가 짐인가
에스토니아 영토에는 러시아 백군이 있었다. 북부군단은 1919년 5월 13일 로잔코의 지휘로 공세에 나서 얌부르크를, 5월 25일에는 스타니슬라프 부와크-바와호비치의 부대가 프스코프를 점령했다. 6월 13일 크라스나야 고르카 요새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6월 콜차크가 북서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니콜라이 유데니치가 도착했고, 부대는 북서군으로 개편되었다. 병력은 최대 1만 8천 명 안팎이었다.
에스토니아와 백군의 관계는 조건부 협력과 근본적 불신의 공존이었다. 백군의 「단일 불가분 러시아」 구상은 에스토니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8월 10일 영국 군사사절단의 마시 장군은 탈린에서 백군 정치인들에게 몇 시간 안에 정부를 구성하라고 통보했고, 다음 날 리아노조프를 수반으로 하는 북서정부가 세워져 에스토니아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유데니치는 이 승인을 「현지 정치인의 일」로 여겼고, 옴스크의 콜차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백군이 끝까지 어떤 승인도 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부정확하다. 승인이 있었으되 그것을 보장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 사이 에스토니아 정부는 9월 17일 프스코프에서 소비에트 측과 첫 강화 예비 회담을 열었다.
10월 10일 북서군은 페트로그라드로 향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했다. 10월 12일 얌부르크, 16일 가치나, 20일 차르스코예 셀로가 떨어지고 풀코보 고지에서 도시의 지붕이 보였다. 에스토니아군 제1사단은 남쪽 측면을 막아 주었지만 페트로그라드 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핀란드도 움직이지 않았다. 트로츠키가 직접 조직한 방어와 붉은 군대 제7군의 반격으로 10월 21일부터 백군은 밀려났다. 11월 14일 얌부르크를 잃은 북서군은 나르바 강으로 후퇴했다. 에스토니아는 이 군대를 자국 영토에서 무장해제하고 억류했다. 발진티푸스가 수용소와 피란민 사이에 번져 수천 명이 죽었다. 1920년 1월 22일 유데니치는 북서군의 해산을 명령했고, 1월 28일 부와크-바와호비치가 그를 잠시 억류하는 소동 끝에 국외로 떠났다. 부와크-바와호비치는 부대와 함께 폴란드 전선으로 옮겨 갔다. 백군은 에스토니아에게 동맹이었다기보다 소비에트와의 강화를 서두르게 만든 짐이었다.
타르투: 첫 조약의 조건
강화 회담은 1919년 12월 5일 타르투에서 시작되었다. 소비에트 대표는 레오니트 크라신이었고 12월 중순부터 아돌프 이오페가 대표단을 이끌었다. 에스토니아 대표단은 외무장관 얀 포스카가 이끌었다. 11월 18일 출범한 얀 퇴니손 정부가 회담을 뒷받침했다. 12월 31일 휴전이 체결되어 1920년 1월 3일 발효되었고, 2월 2일 조약이 서명되었다.
조약 2조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자발적으로, 영원히」 승인하고 에스토니아 영토와 인민에 대한 모든 주권을 포기했다. 국경은 나르바 강 동쪽의 이반고로드 지구와 남동쪽의 페체리 지역을 에스토니아에 포함했다. 러시아는 1,500만 금루블을 지불하고 에스토니아에 100만 데샤티나의 삼림 채벌권을 주었으며,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채무에서 벗어났다. 양국은 상대국을 겨눈 군대와 조직이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 조항으로 북서군 문제는 완전히 끝났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국경을 확정하고 독립을 승인한 첫 조약이었고, 동시에 어떤 국가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조약 당사자로 승인한 첫 사례였다. 레닌이 이 조약을 「유럽으로 난 창」이라 불렀다는 표현이 널리 인용된다. 실제로 1920년과 1921년 탈린은 소비에트의 금이 서방 시장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었다. 이것은 전쟁 중에 태어난 국가가 군사적 생존을 조약으로 확인받은 과정이었다.
라트비아: 세 정부와 두 번의 리가 전투
라트비아의 전쟁은 세 진영이 얽혀 가장 복잡했다. 1919년 1월 3일 붉은 군대가 리가에 들어오자 울마니스 정부는 리예파야로 물러났다. 정부에 남은 병력은 오스카르스 칼파크스가 지휘하는 라트비아 대대 수백 명이 전부였고, 칼파크스는 3월 6일 독일군과의 오인 사격으로 죽었다. 리예파야를 지킨 것은 발트 독일계 지주층이 조직한 향토방위군과 독일에서 새로 모집된 철사단이었다. 12월 29일 울마니스 정부는 4주 이상 싸운 독일 의용병에게 라트비아 시민권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토지 분배 약속으로 번져 독일 각지의 자유군단 병사들이 몰려왔다. 2월 1일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독일 제6예비군단 사령관으로 리예파야에 도착했다. 그는 발트를 독일의 영향권으로 남기려 했고, 라트비아 정부를 그 계획의 장애물로 보았다.
3월 18일 옐가바가 회복되었다. 4월 16일 폰 만토이펠 남작의 향토방위군 돌격대가 리예파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울마니스 내각을 체포하려 했고, 울마니스는 영국 함정의 보호 아래 항구의 배 「사라토프」로 피신했다. 5월 10일 목사이자 작가인 안드리에우스 니에드라가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5월 22일 향토방위군과 철사단은 리가에서 붉은 군대를 몰아냈다. 스투치카 정권 아래 혁명재판소의 처형과 기아가 있었고, 탈환 뒤에는 며칠 동안 처형과 보복이 이어져 그 사망자 역시 수천 명으로 추계된다. 리가를 되찾은 독일계 부대는 북쪽으로 계속 진격해 6월 초 에스토니아군과 마주쳤다. 6월 19일부터 23일까지 체시스 전투에서 에스토니아 제3사단과 제미탄스의 북라트비아 여단은 향토방위군과 철사단을 격파했다. 연합국 사절단의 중재로 7월 3일 스트라즈두무이자에서 휴전이 맺어졌고, 독일군은 리가에서 물러났다. 7월 8일 울마니스가 리가로 돌아왔다. 향토방위군은 영국 장교 해럴드 알렉산더의 지휘 아래 라트비아군에 편입되어 동부 라트갈레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연합국이 골츠의 소환과 독일군 철수를 요구하자, 철수를 거부한 독일 병력 다수가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의 서러시아 의용군에 합류했다. 4만 명 넘는 이 군대는 반볼셰비키 러시아군을 표방했지만, 10월 8일 실제로 공격한 것은 리가였다. 베르몬트군은 다우가바 강 서안의 리가 교외를 점령했다. 라트비아군은 영국·프랑스 함정의 함포 지원을 받아 11월 3일부터 반격했고, 11월 11일 강 서안을 되찾았다. 이날은 라트비아의 라츠플레시스 기념일이 되었다. 베르몬트군은 리투아니아 북부에서도 11월 21일과 22일 라드빌리슈키스에서 리투아니아군에 패했고, 12월 독일로 철수했다. 지그프리츠 메이에로비츠의 외교는 이 군사적 생존을 국제적 승인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1920년 1월 3일 라트비아군과 폴란드군은 합동으로 다우가프필스를 공격해 점령했고, 1월 말까지 라트갈레에서 붉은 군대를 밀어냈다. 2월 1일 휴전이 발효되었고, 8월 11일 리가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라트비아의 독립을 「영원히」 승인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폴란드와 소비에트 측이 맺은 1921년 리가 조약과 다르다. 9월 16일 제헌의회는 장원을 몰수하는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발트 독일계 지배층 700년의 토지 질서가 끝났다.
리투아니아: 리트벨의 실패와 빌뉴스 분쟁
리투아니아의 국가 건설은 독일 철수와 붉은 군대 진입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12월 31일 독일군이 빌뉴스를 떠나자 폴란드계 자위대가 잠시 도시를 장악했고, 1월 5일 붉은 군대가 들어왔다. 카프수카스의 소비에트 정부는 빌뉴스로 옮겼고, 2월 27일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 소비에트 공화국이 합쳐 「리트벨」이 되었다. 안타나스 스메토나가 의장인 국가평의회와 볼데마라스 내각, 그리고 뒤이은 슬레제비추스 내각은 카우나스에 자리 잡았다. 리투아니아군은 1919년 2월 8일부터 10일 케다이니아이에서 독일 작센 의용군의 도움을 받아 붉은 군대를 처음 막아 냈다. 리트벨은 리투아니아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토지 문제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대농장을 국유화해 국영 농장으로 만들었고, 땅을 원하던 농민은 이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소비에트의 국가 건설은 리투아니아 독립운동을 흡수하지 못했다.
빌뉴스는 다른 손에 넘어갔다.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폴란드군이 붉은 군대에서 빌뉴스를 빼앗았고, 피우수트스키는 4월 22일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 주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리투아니아 정부에게 빌뉴스는 헌법에 명시된 수도였고, 폴란드에게는 폴란드어를 쓰는 다수 주민의 도시였다. 8월 카우나스에서 폴란드 군사조직이 리투아니아 정부를 뒤엎으려던 음모가 적발되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서로 적이 되었고, 그 사이 리투아니아군은 북부에서 베르몬트군을 격퇴했다.
1920년 7월 12일 모스크바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빌뉴스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권리를 인정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붉은 군대가 진격하던 때였고, 7월 14일 붉은 군대가 점령한 빌뉴스는 8월 26일 리투아니아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폴란드를 구속하지 않았다. 바르샤바에서 승리한 폴란드군이 동쪽으로 되돌아오면서 빌뉴스 문제가 다시 열렸다. 10월 7일 국제연맹의 중재로 맺은 수바우키 협정은 제한된 구역의 정전과 군사분계선을 정했고, 그 선은 빌뉴스를 리투아니아 쪽에 두었다. 협정 발효를 앞둔 10월 9일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지휘하는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제1사단 약 1만 4천 명이 「항명」을 선언하고 빌뉴스를 점령했다. 피우수트스키와 사전에 협의한 행동을 항명으로 꾸민 것이었다. 젤리고프스키는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고, 11월 기에드라이차이와 시르빈토스에서 리투아니아군에 저지된 뒤 11월 29일 국제연맹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1922년 1월 선거를 거쳐 3월 중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938년 폴란드의 최후통첩까지 두 나라는 외교 관계가 없었다. 독립을 확보한 국가들끼리도 국경과 주민의 정치적 의사를 둘러싸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북쪽 날개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분리되지 않는 이유다.
영국 함대와 핀란드의 선택
1919년 1월부터 월터 코원 제독이 지휘한 영국 발트 편대는 핀란드만의 코이비스토를 기지로 크론시타트의 소비에트 발트함대를 봉쇄했다. 6월 17일 오거스터스 에이거의 어뢰정이 크라스나야 고르카 반란을 지원하던 순양함 올레크를 격침했고, 8월 18일 밤 어뢰정 7척과 코이비스토에서 발진한 항공기의 크론시타트 항구 공습은 전함 안드레이 페르보즈반니를 손상시키고 잠수함 모함 파먀티 아조바를 격침했다. 어뢰정 3척이 격침되고 승조원 다수가 포로가 되었다. 영국은 발트 작전에서 순양함 캐산드라, 구축함 2척, 잠수함 L55 등 함정 열일곱 척과 승조원 백여 명을 잃었다. 그러나 영국의 반볼셰비키 목표가 발트 각국과 백군의 이해를 일치시킨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에스토니아에 무기를 주면서 백군도 지원했고, 라트비아에서는 독일군을 방벽으로 쓰다가 그들을 몰아냈다. 영국이 지원한 세력들 사이에서도 독립 승인과 영토를 놓고 갈등이 계속되었다.
핀란드는 백군 승리 뒤에도 동쪽 국경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18년과 1919년 핀란드 의용대는 동카렐리야와 페차모로 원정을 벌였고,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아우누스 원정은 카렐리야 주민의 봉기를 기대했으나 실패했다. 핀란드 의용군은 1919년 1월 에스토니아를 도왔고 파주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핀란드는 유데니치와 함께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섭정 만네르헤임은 독립 승인과 동카렐리야를 조건으로 참전을 검토했지만 콜차크는 조건을 거부했고, 7월 대통령에 선출된 스톨베리는 개입에 반대했다. 1920년 6월 타르투에서 시작된 협상은 10월 14일 조약으로 끝났다. 핀란드는 북극해로 나가는 페차모를 얻고, 1919년 점령한 동카렐리야의 레폴라와 포라얘르비에서 철수했다. 소비에트 측은 동카렐리야에 자치를 약속했다. 이 조약은 에스토니아의 2월 타르투 조약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만들어진 국경 질서는 1921년 동카렐리야 봉기를 거쳐 1939년 겨울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같은 해의 조약들: 무엇이 확정되고 무엇이 남았는가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에스토니아(2월 2일), 리투아니아(7월 12일), 라트비아(8월 11일), 핀란드(10월 14일)와 잇달아 강화했고, 이듬해 3월 폴란드와 리가 조약을 맺었다. 조약들은 공통의 구조를 가졌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옛 제국의 주권을 포기했고, 각국은 상대를 겨눈 군대의 주둔을 금지했으며, 금과 재산의 정산이 뒤따랐다. 소비에트 측의 동기는 분명했다. 1919년 12월 제7차 소비에트 대회는 모든 이웃 국가에 강화를 제안했고, 데니킨과 콜차크가 무너진 뒤에도 폴란드 전선이 남은 상황에서 북서부의 전선을 닫는 것이 우선이었다. 연합국이 세우려던 봉쇄선은 이 조약들로 첫 구멍이 났다. 신생국들에게 조약은 독립과 실제 통치 영토를 보장받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조약이 같은 조건이나 같은 정치 체제를 만든 것은 아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분쟁은 대러시아 강화 뒤에도 남았다. 발트 독일계 지주층의 토지 질서는 세 나라의 토지개혁으로 끝났고, 이는 독일에서 발트를 「잃은 땅」으로 기억하는 정치의 소재가 되었다. 세 공화국의 의회 민주주의는 1926년 리투아니아, 1934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스메토나, 페츠, 울마니스의 권위주의 체제로 바뀌었다.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과 1940년의 병합은 1920년의 조약을 무효로 만들었지만, 조약 문서 자체는 살아남아 1987년부터 1991년까지의 발트 독립 회복 운동에서 주권 회복 주장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역사 서술에서도 두 갈래가 오래 맞섰다. 소비에트 서술은 발트의 독립을 「협상국의 총검으로 세운 부르주아 정권」으로 그렸고, 발트 각국의 서술은 이를 국가의 건국 전쟁으로 그렸다. 1991년 이후의 연구는 각국의 국경 지대에서 전쟁이 어떻게 국민을 만들었는지에 주목한다. 토마스 발켈리스는 리투아니아를 사례로 전쟁과 혁명이 민족을 「만드는」 과정을 분석했고, 발트 독일계와 라트비아인, 유대인 주민이 같은 도시에서 겪은 1919년을 함께 다루는 연구도 늘었다. 독립전쟁은 러시아 내전의 주변 전투이면서 동시에 각국의 국가 수립 과정이었다. 군사적 연결의 전체 흐름은 상위 문서인 러시아 내전에서 다룬다.
결과
발트 3국의 독립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영원히」 주권을 포기한 조약으로 확인되었고, 핀란드도 10월 타르투에서 별도로 강화했다. 세 나라의 토지개혁은 발트 독일계 지주층 700년의 토지 질서를 끝냈다. 유데니치의 북서군은 해산되었고 연합국의 봉쇄선은 이 조약들로 첫 구멍이 났다. 그러나 빌뉴스 분쟁은 1938년까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국교를 막았고, 세 공화국의 의회 민주주의는 1926년과 1934년의 쿠데타로 끝났다. 1940년 병합 뒤에도 1920년의 조약 문서는 살아남아 1987~1991년 독립 회복 운동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18.11.11–18세 정부의 출발
독일 패전 뒤 에스토니아의 페츠 임시정부와 리투아니아의 볼데마라스 내각이 11월 11일 출범했고, 라트비아는 11월 18일 리가에서 독립을 선포하며 울마니스 정부를 세웠다. 어느 정부도 몇천 명 이상의 병력을 갖지 못했다.
- 21918.11.28–29나르바 함락과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
붉은 군대가 나르바를 점령하고 다음 날 얀 안벨트를 수반으로 하는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이 선포되었다. 12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도 소비에트 정부가 세워졌고, 1919년 1월 초 리가와 빌뉴스가 붉은 군대의 손에 들어갔다.
- 31918.12.12–27영국 함대의 탈린 도착
알렉산더-싱클레어의 경순양함 편대가 소총 6,500정과 야포를 넘겨주고, 12월 26일과 27일 소비에트 구축함 스파르타크와 아프트로일을 나포해 에스토니아 해군에 넘겼다. 스파르타크에 탄 라스콜니코프는 포로가 되었다.
- 41919.01.07–31에스토니아의 반격
라이도네르의 지휘 아래 장갑열차와 핀란드 의용군을 앞세운 에스토니아군이 1월 14일 타르투, 19일 나르바를 되찾았다. 1월 31일 파주 전투에서 쿠페르야노프가 전사했고, 2월 초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붉은 군대가 밀려났다.
- 51919.04.16리예파야 쿠데타
폰 만토이펠의 향토방위군 돌격대가 울마니스 정부를 뒤엎으려 했고, 울마니스는 영국 함정의 보호 아래 배 위로 피신했다. 5월 10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가 세워졌고, 5월 22일 독일계 부대가 리가에서 붉은 군대를 몰아냈다.
- 61919.06.19–23체시스 전투
에스토니아 제3사단과 제미탄스의 북라트비아 여단이 향토방위군과 철사단을 격파했다. 7월 3일 연합국 중재로 휴전이 맺어져 독일군이 리가에서 물러났고, 7월 8일 울마니스가 리가로 돌아왔다.
- 71919.08.11북서정부의 에스토니아 승인
영국 사절단의 압력 아래 하루 만에 구성된 백군의 북서정부가 에스토니아 독립을 인정했다. 유데니치와 콜차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에스토니아는 9월 프스코프에서 소비에트와 첫 강화 예비 회담을 열었다.
- 81919.08.18크론시타트 어뢰정 공습
코원 제독의 영국 편대가 어뢰정 7척과 항공기로 크론시타트 항구를 공격해 전함 안드레이 페르보즈반니를 손상시키고 잠수함 모함을 격침했다. 영국은 발트 작전에서 함정 17척과 백여 명을 잃었다.
- 91919.10.10–11.14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와 패퇴
북서군이 얌부르크와 가치나를 거쳐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트로츠키가 조직한 방어와 제7군의 반격에 밀려났다. 에스토니아군은 측면만 맡았고 핀란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르바로 후퇴한 북서군은 에스토니아에 무장해제되어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수천 명이 죽었다.
- 101919.10.08–11.11베르몬트군의 리가 공격
철수를 거부한 독일 병력이 합류한 베르몬트-아발로프의 서러시아 의용군이 리가 서안 교외를 점령했다. 라트비아군은 영국·프랑스 함정의 지원을 받아 11월 11일 강 서안을 되찾았고, 베르몬트군은 리투아니아에서도 패해 12월 독일로 물러났다.
- 111920.01.03다우가프필스 합동 작전
라트비아군과 폴란드군이 함께 다우가프필스를 공격해 점령하고 1월 말까지 라트갈레에서 붉은 군대를 밀어냈다. 2월 1일 휴전이 발효되었다.
- 121920.02.02에스토니아 타르투 강화
소비에트 러시아가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자발적으로, 영원히」 승인하고 1,500만 금루블을 지불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국경을 확정하고 독립을 승인한 첫 조약이었고, 어떤 국가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조약 당사자로 승인한 첫 사례였다.
- 131920.07.12리투아니아 모스크바 조약
소비에트 러시아가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빌뉴스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다. 붉은 군대가 점령한 빌뉴스는 8월 26일 리투아니아에 인도되었지만, 조약은 폴란드를 구속하지 않았다.
- 141920.08.11라트비아 리가 강화
소비에트 러시아가 라트비아의 독립을 「영원히」 승인했다. 폴란드와 소비에트 측의 1921년 리가 조약과 다른 조약이다. 9월 16일 제헌의회는 장원을 몰수하는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 151920.10.07–09수바우키 협정과 젤리고프스키의 빌뉴스 점령
국제연맹 중재로 맺은 수바우키 협정은 빌뉴스를 리투아니아 쪽에 두는 분계선을 정했다. 발효 전 10월 9일 젤리고프스키의 사단이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1922년 폴란드에 편입되었고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 161920.10.14핀란드 타르투 강화
핀란드가 페차모를 얻고 동카렐리야의 레폴라와 포라얘르비에서 철수하기로 했으며, 소비에트 측은 동카렐리야 자치를 약속했다. 에스토니아의 2월 조약과는 별개의 조약이다. 이 국경 질서는 1939년 겨울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관련 인물 22명
지도부17
1918년 12월부터 1919년 5월까지 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의 수반으로 리가를 통치했고, 국유화와 혁명재판소 정책은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에스토니아를 기지로 삼은 북서군 사령관니콜라이 유데니치1862–1933에스토니아를 기지로 1919년 10월 북서군을 페트로그라드 앞 풀코보 고지까지 이끌었으나 패퇴했고, 에스토니아 독립 승인을 끝내 보장하지 않아 에스토니아가 소비에트와의 강화를 서두르게 했다.
국경 강화의 소비에트 외교 책임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외무인민위원으로 1919년 가을 발트 각국에 강화를 제안하고 1920년 타르투·모스크바·리가 조약으로 이어진 국경 외교를 지휘했다.
라트비아 협력과 빌뉴스 정책의 폴란드 지도자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1920년 1월 라트비아와 합동으로 다우가프필스를 점령했고, 1919년 4월 빌뉴스를 점령한 뒤 1920년 10월 젤리고프스키의 「항명」을 사전에 승인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초기 정부 수반콘스탄틴 페츠1874–19561918년 11월 임시정부 수반으로 권력을 넘겨받아 붉은 군대가 탈린 앞까지 온 첫 겨울에 정부를 지켰고, 라이도네르의 임명과 강제 징집, 영국 함대의 지원을 관철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총사령관요한 라이도네르1884–19531918년 12월 23일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1919년 1월 반격과 6월 체시스 전투를 지휘했고, 유데니치와는 조건부로 협력하되 페트로그라드 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타르투 강화기의 에스토니아 총리얀 퇴니손1868–1941?1919년 11월 총리가 되어 타르투 강화 협상을 뒷받침했고, 1920년 2월 2일 조약이 그의 정부 아래 체결되었다.
라트비아 독립전쟁기의 총리카를리스 울마니스1877–19421918년 11월부터 임시정부 총리로 리예파야로 밀려나고 배 위로 피신하는 위기를 넘겨 1919년 7월 리가로 돌아왔고, 베르몬트군을 격퇴한 뒤 1920년 리가 강화와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 수반안드리에우스 니에드라1871–19421919년 4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5월 10일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6월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다.
핀란드와 발트의 독일군 지휘관뤼디거 폰 데어 골츠1865–19461919년 2월 리예파야에서 독일군과 향토방위군을 지휘해 5월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고, 체시스 패배 뒤 10월 소환되었다.
리가를 공격한 서러시아 의용군 사령관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1877–19731919년 10월 8일 철수를 거부한 독일 병력으로 이루어진 서러시아 의용군을 이끌고 리가를 공격했다가 11월 11일 격퇴되었고 12월 독일로 물러났다.
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안타나스 스메토나1874–19441919년 4월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붉은 군대, 베르몬트군, 폴란드군과 싸우는 첫 정부들을 이끌었다.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와 외무장관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1883–19421918년 11월 초대 총리로 군대 창설을 늦추었다가 사퇴했고, 이후 외무장관으로 파리와 국제연맹에서 빌뉴스 문제를 다투었다.
리투아니아와 리트벨의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빈차스 카프수카스1880–19351918년 12월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반이 되어 1919년 1월 빌뉴스에 들어가고 2월 리트벨을 이끌었으나, 4월 폴란드군의 빌뉴스 점령 뒤 러시아로 물러났다.
빌뉴스를 점령한 폴란드 장군루치안 젤리고프스키1865–1947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워 1922년 폴란드에 편입시켰다.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로 옮겨간 반소비에트 지휘관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1883–19401919년 5월 백군 북부군단의 일원으로 프스코프를 점령했고, 유데니치와 갈라져 에스토니아 편에 섰다가 1920년 부대와 함께 폴란드로 옮겼다.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지도자얀 안벨트1884–19371918년 11월 29일 나르바에서 선포된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으로 두 달 남짓 에스토니아 동부를 통치했고, 1919년 6월 코뮌 해산 때까지 이끌었다.
참여5
1919년 12월부터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어 1920년 2월 2일 에스토니아와의 조약에 서명했고, 이어 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와의 협상도 맡았다.
영국군과 교전하다 포로가 된 해군 지휘관표도르 라스콜니코프1892–19391918년 12월 26일 탈린 앞바다에서 구축함 스파르타크가 영국 함대에 나포될 때 포로가 되었고, 이듬해 영국 포로와 교환되었다.
라트비아 독립 승인을 이끈 외교관지그프리츠 안나 메이에로비츠1887–1925초대 외무장관으로 연합국 사절단을 움직여 독일군 철수를 이끌어 냈고, 1920년 8월 리가 강화와 1921년 연합국의 법적 승인을 얻어 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내무 인민위원지그마스 안가리에티스1882–1940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 정부의 내무 인민위원으로 1918~1919년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지하조직 지도자빅토르 킹기세프1888–1922노동 코뮌 시기부터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지하 조직을 이끌었고, 1922년 5월 탈린에서 체포되어 이틀 뒤 처형되었다.
출처: Tomas Balkelis, War, Revolution, and Nation-Making in Lithuania, 1914–1923 (Oxford University Press, 2018)Andres Kasekamp, A History of the Baltic States (Palgrave Macmillan, 2010), ch. 5Geoffrey Bennett, Cowan's War: The Story of British Naval Operations in the Baltic, 1918–1920 (Collins, 1964)Evan Mawdsley, The Russian Civil War (Allen & Unwin, 1987), 「The Northwest」Alfred Erich Senn, The Emergence of Modern Lithuania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9)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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