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소련 볼셰비키에 대한 좌파 비판 1922년까지 러시아, 1922~1932년 소련, 1932년부터 무국적 러시아 제국(헤르손 주 야노프카, 현 우크라이나) 1879–1940 ✕ 암살 · 멕시코

적군(赤軍)을 만든 웅변가, 얼음도끼에 스러지다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에 항의해 퇴장하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선언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879년 11월 7일(구력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주 야노프카의 유대인 농업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2월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를 조인한 뒤 1918~1925년 군사·해군 인민위원으로 적군을 건설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를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밀려 1927년 출당, 1928년 알마아타 유형, 1929년 국외 추방, 1932년 시민권 박탈을 겪었다. 망명지에서 《배반당한 혁명》(1936)으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NKVD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26.10 해임 · 1929년 국외 추방, 1940년 암살

관련 역사 사건

영구혁명 — 혁명은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1905년 혁명의 경험에서 태어나 1930년대까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한 이론적 축이었다. 초기 정식화는 1906년 《결과와 전망》에서 이루어졌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후진성과 불균등·결합발전을 근거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서유럽 부르주아지와 달리 너무 늦게 태어나 너무 약하게 자랐기에 민주주의 혁명조차 완수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라도 농민을 이끌며 정권을 장악해야 하며, 일단 집권하면 민주주의 과제에 머물지 않고 사유재산을 침범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로츠키에게 혁명의 '영구성'은 국제적 차원에서 완성되었다. 러시아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서유럽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다.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막일 뿐이며, 서구 노동계급이 승리하여 러시아를 지원할 때 비로소 사회주의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그가 '일국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라선 지점이다.

1929년 추방 후 출간된 《영구혁명》(1930)에서 트로츠키는 이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서술하고 스탈린의 '단계론'을 논박했다. 특히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코민테른이 장제스의 국민당과의 연합을 고집하다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한 사건)는 영구혁명론의 현실적 타당성을 입증하는 비극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도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은 혁명을 끝까지 이끌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민족해방 투쟁의 헤게모니를 쥐어야 한다는 명제가 이로부터 도출되었다.

영구혁명론은 이후 트로츠키주의의 핵심 교리이자 제4인터내셔널(1938)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0세기 후반 쿠바, 알제리 등 제3세계 혁명의 분석에도 적용되며,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일관된 국제주의적 대안으로 남아 있다.

장갑열차 — 내전의 유랑 사령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트로츠키의 기차는 러시아 내전의 유령이었다. 장갑열차 한 대에 인쇄기, 전신국, 무선국, 지도실, 도서관, 그리고 친위대를 실었다. 이 움직이는 사령부는 2년 반 동안 10만 5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 지구를 두 바퀴 반 돈 거리다.

트로츠키는 이 열차 안에서 살았다. 낮에는 신문 사설을 쓰고, 밤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즉결 군법회의를 열었다. 열차가 도착한 전선마다 사기가 올랐고, 후퇴하던 부대는 재정비되었다. 그는 구 짜르 장교 7만 5천 명을 적군에 강제 편입시키고, 정치위원 제도를 창설해 그들을 감시했다.

열차는 또한 혁명의 상징이었다. 갈색 금속판 위에 붉은 별, 도착할 때마다 군악대가 「인터내셔널」을 연주했다. 1920년 내전 승리 후, 장갑열차는 퇴역했지만, 그 이미지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1927년 당에서 축출될 때, 트로츠키의 장갑열차 신화는 오히려 그를 두려운 대안으로 남게 만들었다.

마지막 망명과 암살: 노르웨이 억류에서 얼음도끼까지

1935년 트로츠키는 노르웨이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았으나 당국의 감시 아래 살았다. 법무장관 트뤼그베 리의 허가로 그는 1935년 6월 18일부터 1936년 9월 2일까지 노르데르호프의 콘라드 크누센 집에 머물렀다. 1936년 8월 5일 파시스트 조직 나슈날 삼링 소속 인물들이 그의 문서고를 노리고 집에 침입했고, 1936년 9월 2일 리는 부부를 후룸의 한 농장으로 옮겨 사실상 가택연금에 두었다. 1936년 9월 모스크바 재판이 시작된 뒤 요한 뉘고르스볼 정부는 그를 후룸에 억류해 외부 세계와 격리하고 출판을 금지했다. 트로츠키는 노르웨이의 '사회주의' 정부가 자신을 침묵시키려 했다고 뒤에 비판했다.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옛 볼셰비키 16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8월 25일 처형), 트로츠키도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12월 19일 그는 노르웨이 유조선 루트 호로 추방되었고, 1937년 1월 9일 멕시코에 도착해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의 망명 허가를 받았다. 멕시코는 소련과 국교가 없어 직접적 압력을 제한할 수 있었고, 미국과의 근접성은 미국 내 지지자들과의 접촉을 쉽게 했다. 그는 코요아칸에 정착해 처음에는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에(1937년 1월~1939년 4월), 이후 1939년 4월부터 아베니다 비엔나의 자택에 살았다. 한편 1937년 3월 트로츠키 변호 미국 위원회는 존 듀이를 위원장으로 한 국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는 그에 대한 기소가 조작되었다며 '무죄' 판정을 발표했다.

말년에 그의 물질적 처지는 악화되어 문서고 일부를 국제사회사연구소 파리 지부에 팔았고, 1940년에는 NKVD 요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문서 대부분을 하버드 대학에 넘겼다. 1940년 5월 24일 그는 NKVD 요원 이오시프 그리굴레비치와 멕시코 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이끈 무장 습격에서 목숨을 건졌다. 14세 손자 브세볼로드 '에스테반' 볼코프가 발에 총을 맞았고, 경호원 로버트 셸던 하르테는 습격자들과 함께 사라졌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그는 「스탈린은 나의 죽음을 노린다」(1940년 6월 8일)를 써서 또 다른 시도가 확실하다고 밝혔다.

1940년 8월 20일, 지지자로 위장해 그의 주변에 접근한 NKVD 요원 라몬 메르카데르가 그가 원고를 읽고 있을 때 코트 아래 숨긴 등산용 얼음도끼로 머리를 내리쳤다. 작전명은 NKVD 내부에서 '우트카'(오리)였다. 타격은 뇌에 약 7센티미터 깊이 들어갔으나 즉사시키지 못했고, 그는 8월 21일 오후 7시 25분경 출혈과 쇼크로 60세에 사망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메르카데르에게 침을 뱉고 격렬히 저항하다 손을 부러뜨렸다. 경호원들이 가해자를 거의 죽일 뻔했으나 트로츠키는 그를 심문하게 해야 한다며 제지했다.

정치적 책임과 여파는 명백하다. 소련 당국은 살해 관여를 공개적으로 부인했지만 메르카데르는 유죄 판결을 받고 레쿰베리 교도소에서 20년을 복역했으며, 1960년 석방 후 모스크바에서 레닌 훈장과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프라우다》는 1940년 8월 24일 '세계적 스파이의 죽음'이라는 기사를 실어 트로츠키를 비난했고, 관련 NKVD 장교 6명은 1941년 훈장을 받았다. 1940년 8월 27일까지 멕시코시티에서 약 30만 명이 관 앞을 지났다.

가족은 1930년대를 넘기지 못했다. 첫 아내 알렉산드라는 1935년 대숙청기에 사라져 1938년 소련 당국에 의해 살해되었고, 딸 니나는 1928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결핵과 우울증을 앓던 딸 지나이다는 아버지를 따라 망명했다가 1933년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반대파 통보》를 맡았던 큰아들 레프 세도프는 1938년 2월 16일 파리에서 수술 후 사망했고, 둘째 아들 세르게이 세도프는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1937).

이 시기에도 트로츠키의 이론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배반당한 혁명》(1936)에서 그는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면서도, 스탈린 관료층의 찬탈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외부 침공에 맞서 방어해야 할 노동자 국가라는 입장을 끝까지 견지했다. 그는 1939년 소독 불가침 조약과 핀란드 침공 이후에도 이 입장을 유지했고, 1939~1940년에는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해 '단일하고 자유로운 독립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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