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赤軍)을 만든 웅변가, 얼음도끼에 스러지다
1917년 10월 25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규탄하며 회의장을 걸어나가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선언했다. 「당신들은 파산자입니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905년 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봉기의 연출가, 내전에서는 장갑열차를 타고 다니며 적군을 벼려 낸 전쟁인민위원. 영구혁명론으로 러시아 혁명이 유럽 노동계급의 승리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 기구의 조용한 싸움에서는 번번이 늦었다. 1929년 국외로 추방되어 제4인터내셔널을 세웠고, 1940년 멕시코시티의 서재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얼음도끼에 죽었다.
경력 연표
- 1905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 1906《결과와 전망》 출간 — 영구혁명론의 초기 정식화
- 1907–14망명: 빈·파리에서 언론 활동, 《프라우다》 발행
- 1914–171차대전 반대, 파리·뉴욕 망명, 《나셰 슬로보》·《노비 미르》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볼셰비키·멘셰비키 통합파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9–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군사혁명위, 봉기 설계
- 1918–25전쟁인민위원, 적군 창설, 내전 승리
- 1923–27좌익반대파, 패배, 출당
- 1929–40국외 추방, 제4인터내셔널(1938), 멕시코에서 암살
- 1930자서전 《나의 생애》 출간
- 1930–1932전3권 《러시아 혁명사》 출간
- 1936《배반당한 혁명》 출간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26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지도적 인물로 떠올라 총파업을 이끌었고, 체포된 뒤 재판에서 봉기의 권리를 변론했다.
- 1917.02–072월 혁명소비에트 권력의 연설가5월에 귀환해 메즈라이온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권력을 주장했고, 7월 사태 뒤 체포되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소비에트 의장·봉기 지휘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봉기의 실무를 지휘했고, 초대 외무 인민위원이 되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창설자전쟁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창설하고 장갑열차로 전선을 오가며 전쟁 수행을 지휘했다.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군사인민위원 · 바르샤바 진격에 회의적
- 1922.12소련의 결성레닌의 동맹자레닌이 그루지야 문제를 당대회에서 방어해 달라고 요청했던 정치국의 동맹자였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계획화의 주창자네프의 틀 안에서 국가 계획과 공업 우선을 요구하며 당 관료화를 비판했다.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좌익 반대파의 지도자, 46인 진술서를 촉발한 10월 8일 서한의 필자1923년 10월 8일 중앙위에 당내 관료화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46인 진술서를 촉발. 「신방침」을 집필하고 통합 반대파를 이끌었으며, 1927년 제명 후 1929년 소련에서 추방.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노선의 비판자1934년 『프랑스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2월의 위기를 혁명적 위기로 읽고, 노동자 민병과 자체 권력기관을 세우라고 주장했다. 급진당까지 끌어안는 연합은 노동자를 부르주아 정치에 묶어 둘 뿐이라고 보았다.
- 1934–1938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인민전선 노선의 비판자1936년 6월 9일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썼고, 인민전선을 시작된 혁명을 의회의 틀에 가두어 죽인 계급협조의 기계라고 비판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인민전선 노선의 비판자혁명을 미루는 전략이 패배를 부른다고 주장했고, POUM의 자치정부 참여도 함께 비판했다
- 1937–1938대숙청해외 암살의 표적추방 뒤에도 좌익반대파와 제4인터내셔널을 이끌다가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자객에게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영구혁명 — 혁명은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1905년 혁명의 경험에서 태어나 1930년대까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한 이론적 축이었다. 초기 정식화는 1906년 《결과와 전망》에서 이루어졌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후진성과 불균등·결합발전을 근거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서유럽 부르주아지와 달리 너무 늦게 태어나 너무 약하게 자랐기에 민주주의 혁명조차 완수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라도 농민을 이끌며 정권을 장악해야 하며, 일단 집권하면 민주주의 과제에 머물지 않고 사유재산을 침범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로츠키에게 혁명의 '영구성'은 국제적 차원에서 완성되었다. 러시아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서유럽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다.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막일 뿐이며, 서구 노동계급이 승리하여 러시아를 지원할 때 비로소 사회주의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그가 '일국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라선 지점이다.
1929년 추방 후 출간된 《영구혁명》(1930)에서 트로츠키는 이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서술하고 스탈린의 '단계론'을 논박했다. 특히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코민테른이 장제스의 국민당과의 연합을 고집하다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한 사건)는 영구혁명론의 현실적 타당성을 입증하는 비극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도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은 혁명을 끝까지 이끌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민족해방 투쟁의 헤게모니를 쥐어야 한다는 명제가 이로부터 도출되었다.
영구혁명론은 이후 트로츠키주의의 핵심 교리이자 제4인터내셔널(1938)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0세기 후반 쿠바, 알제리 등 제3세계 혁명의 분석에도 적용되며,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일관된 국제주의적 대안으로 남아 있다.
장갑열차 — 내전의 유랑 사령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트로츠키의 기차는 러시아 내전의 유령이었다. 장갑열차 한 대에 인쇄기, 전신국, 무선국, 지도실, 도서관, 그리고 친위대를 실었다. 이 움직이는 사령부는 2년 반 동안 10만 5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 지구를 두 바퀴 반 돈 거리다.
트로츠키는 이 열차 안에서 살았다. 낮에는 신문 사설을 쓰고, 밤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즉결 군법회의를 열었다. 열차가 도착한 전선마다 사기가 올랐고, 후퇴하던 부대는 재정비되었다. 그는 구 짜르 장교 7만 5천 명을 적군에 강제 편입시키고, 정치위원 제도를 창설해 그들을 감시했다.
열차는 또한 혁명의 상징이었다. 갈색 금속판 위에 붉은 별, 도착할 때마다 군악대가 「인터내셔널」을 연주했다. 1920년 내전 승리 후, 장갑열차는 퇴역했지만, 그 이미지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1927년 당에서 축출될 때, 트로츠키의 장갑열차 신화는 오히려 그를 두려운 대안으로 남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