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소련 러시아 1879–1940 ✕ 암살 · 멕시코

적군(赤軍)을 만든 웅변가, 얼음도끼에 스러지다

1917년 10월 25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규탄하며 회의장을 걸어나가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선언했다. 「당신들은 파산자입니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905년 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봉기의 연출가, 내전에서는 장갑열차를 타고 다니며 적군을 벼려 낸 전쟁인민위원. 영구혁명론으로 러시아 혁명이 유럽 노동계급의 승리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 기구의 조용한 싸움에서는 번번이 늦었다. 1929년 국외로 추방되어 제4인터내셔널을 세웠고, 1940년 멕시코시티의 서재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얼음도끼에 죽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영구혁명 — 혁명은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1905년 혁명의 경험에서 태어나 1930년대까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한 이론적 축이었다. 초기 정식화는 1906년 《결과와 전망》에서 이루어졌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후진성과 불균등·결합발전을 근거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서유럽 부르주아지와 달리 너무 늦게 태어나 너무 약하게 자랐기에 민주주의 혁명조차 완수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라도 농민을 이끌며 정권을 장악해야 하며, 일단 집권하면 민주주의 과제에 머물지 않고 사유재산을 침범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로츠키에게 혁명의 '영구성'은 국제적 차원에서 완성되었다. 러시아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서유럽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다.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막일 뿐이며, 서구 노동계급이 승리하여 러시아를 지원할 때 비로소 사회주의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그가 '일국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라선 지점이다.

1929년 추방 후 출간된 《영구혁명》(1930)에서 트로츠키는 이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서술하고 스탈린의 '단계론'을 논박했다. 특히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코민테른장제스의 국민당과의 연합을 고집하다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한 사건)는 영구혁명론의 현실적 타당성을 입증하는 비극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도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은 혁명을 끝까지 이끌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민족해방 투쟁의 헤게모니를 쥐어야 한다는 명제가 이로부터 도출되었다.

영구혁명론은 이후 트로츠키주의의 핵심 교리이자 제4인터내셔널(1938)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0세기 후반 쿠바, 알제리 등 제3세계 혁명의 분석에도 적용되며,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일관된 국제주의적 대안으로 남아 있다.

장갑열차 — 내전의 유랑 사령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트로츠키의 기차는 러시아 내전의 유령이었다. 장갑열차 한 대에 인쇄기, 전신국, 무선국, 지도실, 도서관, 그리고 친위대를 실었다. 이 움직이는 사령부는 2년 반 동안 10만 5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 지구를 두 바퀴 반 돈 거리다.

트로츠키는 이 열차 안에서 살았다. 낮에는 신문 사설을 쓰고, 밤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즉결 군법회의를 열었다. 열차가 도착한 전선마다 사기가 올랐고, 후퇴하던 부대는 재정비되었다. 그는 구 짜르 장교 7만 5천 명을 적군에 강제 편입시키고, 정치위원 제도를 창설해 그들을 감시했다.

열차는 또한 혁명의 상징이었다. 갈색 금속판 위에 붉은 별, 도착할 때마다 군악대가 「인터내셔널」을 연주했다. 1920년 내전 승리 후, 장갑열차는 퇴역했지만, 그 이미지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1927년 당에서 축출될 때, 트로츠키의 장갑열차 신화는 오히려 그를 두려운 대안으로 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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