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1928

신경제정책(네프)

혁명 권력은 왜 전략적 후퇴를 선택했고, 그 후퇴는 무엇을 살렸으며 어떤 딜레마를 남겼는가?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경제 붕괴와 크론시타트 반란까지 겪은 1921년 봄, 당은 식량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바꾸고 시장과 소경영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했다. 레닌이 전략적 후퇴라 부른 이 전환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곧 스미치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네프 아래에서 경제는 전전 수준을 회복했고, 1920년대의 문화적 개화가 꽃피었다.

무기보다 먼저 온 것들: 전시공산주의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이유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승리한 1920년 말,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장에서는 이겼으나 경제에서는 이미 패배해 있었다. 7년(세계대전, 혁명, 내전)에 걸친 파괴 끝에 대공업 생산은 1913년 수준의 약 7분의 1로 추락했고, 유리·도자기 같은 업종은 전전 생산의 3~5퍼센트에 불과했다. 석탄·석유·철강 같은 기초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철도는 백군의 후퇴와 자재 부족으로 곳곳에서 끊겼고,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60퍼센트가 연료 부족으로 문을 닫았다. 1921년 1월 금 1루블은 이미 2만 6천 종이루블과 맞먹는 초인플레이션 속에서 화폐는 교환 수단으로서 기능을 상실했고, 도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배급은 하루 200~800그램의 검은 빵이 전부였다.

이 상황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전시공산주의 체제 자체였다. 적군과 도시 노동자를 먹이기 위해 도입된 식량할당징발제(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는 1920년까지 거의 모든 농산물로 대상이 확대되었고, 1920~21년 징발량은 3억 6,700만 푸드에 달했다. 레닌도 훗날 "때로는 잉여뿐 아니라 농민에게 필요한 식량 일부까지 가져갔다"고 인정했듯, 종자와 자가소비분까지 징발되는 사례가 일반화되었다. 이에 대한 농민의 대답은 두 가지였다. 파종 면적을 1913년 대비 5분의 3 수준으로 줄이는 소극적 저항과, 무장 봉기였다.

1920년 8월 탐보프 주에서 알렉산드르 안토노프가 이끈 봉기는 1921년 봄까지 약 2만 명의 조직된 유격군으로 성장했고, 서시베리아·볼가 중류·우크라이나에서도 동시다발적인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체카는 1921년 2월 한 달에만 118건의 농민 봉기를 기록했다. 도시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1921년 2월 말 트루보치니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도시 전역으로 번져 계엄령이 선포될 정도였고, 모스크바에서도 식량 배급 삭감에 항의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도시와 농촌을 잇는 공식적인 교환 경로가 붕괴된 가운데, 도시민의 식량 공급에서 절반 이상을 실제로 담당한 것은 불법 거래였다. 이른바 '자루꾼(메쇼치니키)'들이 기차에 매달려 농촌에서 식량을 들여오고 암시장이 번성했으나, 국가는 무장 차단 분견대로 이들을 막으려 했다. 국가가 유통을 독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시장을 통제하지도, 대체하지도 못한 채 암거래를 범죄화하는 데 그친 셈이었다.

1921년 2월 28일, 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수병들이 페트로그라드 파업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돌아와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채택된 15개조 결의안은 "소비에트 권력을, 정당이 아닌 소비에트에!"라는 구호 아래 새로운 선거와 표현의 자유, 농민의 토지 처분 자유를 요구했다. 3월 1일 크론시타트 닻 광장에서 1만 6천 명이 모인 집회는 이 요구를 승인했고, 스테판 페트리첸코가 이끄는 임시혁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17년 10월 겨울궁전을 향해 순양함 오로라 호를 보냈던 바로 그 수병들이 이제 볼셰비키 정권에 총구를 돌린 것이다. 트로츠키 자신이 "혁명의 자랑이자 영광"이라 불렀던 이들이었다.

이 반란은 단순한 무력 도전 이상이었다. 혁명 정권을 떠받쳐 온 가장 믿음직한 사회적 기반(선진 노동자와 발트함대 수병)이 정권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은 전시공산주의가 경제적 파탄만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를 초래했음을 의미했다. 레닌은 나중에 크론시타트를 두고 "데니킨, 유데니치, 콜차크를 합친 것보다 위험했다"고 말했다. 외부의 백군보다 내부의 동맹 균열이 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가 열린 배경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이미 1년 전 트로츠키가 중앙위원회에 현물세 전환을 제안했을 때부터 의문에 부쳐졌으나, 레닌을 비롯한 다수는 그 제안을 11대 4로 기각한 바 있었다. 1921년 2~3월의 사태는 그 유예가 끝났음을 알렸고, 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대체하자는 안건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당대회 앞에 놓였다.

1921년 겨울, 권력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순간

1921년 2월, 전러시아비상위원회는 전국에서 118건의 농민 무장봉기를 집계했다. 탐보프에서는 알렉산드르 안토노프가 이끄는 5만 명의 농민군이 현(縣) 전체를 장악했고, 서시베리아에서는 10만 명 이상이 궐기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2월 23일 트루보치니 공장 노동자들이 배급 인상을 요구하며 바실리예프스키 섬을 행진했고, 이튿날 파업은 라페름 담배공장 등으로 번졌다. 페트로그라드 당위원회는 2월 25일 계엄을 선포하고 약 500명을 체포했고, 당국은 군인과 노동자의 배급을 1.25파운드 빵과 고기 통조림 한 캔으로 올리며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파업의 불길은 핀란드만 건너 크론시타트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2월 26일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와 세바스토폴의 승무원들은 페트로그라드 파업을 조사할 대표단을 파견했고, 이틀 뒤 귀환한 대표단의 보고를 들은 수병들은 15개 조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 핵심은 '당이 아닌 소비에트에 권력을'이었다. 비밀투표에 의한 소비에트 재선거, 노동자·농민·아나키스트·좌파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언론과 집회의 자유, 정치국(政治部) 폐지, 식량 징발 분견대의 즉각 해산, 농민의 토지 처분 자유 등이 그 내용이었다. '당이 아닌 소비에트에'라는 구호는 결의안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15개 조항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었다. 이 결의안은 반대 2표 기권으로 가결되었고, 3월 1일 크론시타트 닻 광장에서 열린 1만 6천 명 규모의 집회에서 승인되었다. 봉기는 3월 2일 임시혁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공식화되었다.

한편 모스크바에서는 3월 8일 제10차 당대회가 개막했다. 레닌은 3월 15일 대회에서 「잉여곡물할당제를 현물세로 대체하는 것에 관한 보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는 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본질은 노동계급과 농민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이어서 농민과의 합의만이 러시아 혁명을 구할 수 있다고 직설했다. "농민은 우리 관계의 형태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이런 형태의 관계를 원하지 않으며, 지금처럼 살기를 계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곡물할당제를 현물세로 대체한다는 발상 자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920년 2월, 남북전쟁에 잠시 소강이 찾아왔을 때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식량 및 토지 정책의 기본 문제'라는 테제를 제출하며 현물세로의 전환을 제안한 바 있다. "평등주의적 할당 징발 정책은 농업을 파괴하고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해체시키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구상에는 시장이 없었다. 세금으로 거둔 곡물에 대해 국가가 제조품을 '발급'한다는 것이 전부였고, 농민의 잉여 처분 자유라는 개념은 들어 있지 않았다. 중앙위원회는 11대 4로 이를 부결시켰고, 레닌도 반대표를 던졌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년 뒤 레닌이 제시한 안은 결정적으로 달랐다. 세액을 파종 전에 고정 공표하고, 납부 후 남은 곡물을 농민이 지역 경제 순환 안에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레닌은 이것이 자유무역, 즉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의미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물었다.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결별하여 자본가와 지주의 지배로 되돌아가는 것이 농민의 이익인가?" 당대회는 레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3월 21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현물세 법령을 공포했다. 같은 날 대회는 「당의 통일에 관하여」 결의안을 채택해 모든 당내 파벌을 금지했다. 경제적 후퇴와 정치적 단속이 한 지붕 아래에서 결정된 것이다. 크론시타트는 3월 18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한 두 번째 공세로 함락되었고, 살아남은 8천 명은 핀란드 얼음을 건너 망명했다.

법령은 나왔지만 빵은 오지 않았다

1921년 3월 21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식량 및 원료 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대체함에 관하여」라는 법령을 공포했다. 농민은 이제 파종하기 전에 국가에 납부해야 할 곡물량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할당징발 시기에는 징발대가 현장에서 결정했고, 농민이 남긴 곡물보다 더 많은 양을 가져가는 일이 흔했다. 현물세는 달랐다. 1920–21년 할당징발로 거둔 곡물은 3억 6,700만 푸드였으나, 1921–22년 현물세는 2억 4,000만 푸드로 책정되었다. 약 35퍼센트가 줄어든 셈이다. 법령 제8조는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모든 식량·원료·사료를 농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고 명시했고, 협동조합과 시장을 통한 '지역적 경제 순환' 안에서의 교환을 허용했다.

법령은 단독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5월 17일 인민위원회의는 두 개의 법령으로 소규모 사적 제조업과 수공업을 합법화했고, 7월 7일에는 국유화되었던 소기업을 이전 소유주에게 임대할 수 있도록 했다. 할당징발의 폐지가 농업 생산의 유인을 되살리는 조치였다면, 후속 조치들은 농민이 잉여 곡물과 교환할 공산품이 실제로 시장에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법령이 공포된 바로 그 봄, 볼가 강 유역 전체를 가뭄이 덮쳤다. 1920년의 흉작에 이은 두 번째 재해였다. 6월 26일 『프라우다』는 처음으로 기근을 인정하는 기사를 실었고, 1891년의 대기근보다 더 심각하며 약 2,500만 명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치는 곧 3,500만 명으로 상향되었다. 7월, 당은 기근 지역의 농민에게 현물세를 면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방 당국에 부여했다. 할당징발을 폐지하여 농민에게 유인을 주겠다는 정책은, 유인을 적용할 곡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는 무의미했다.

기근은 소비에트 권력을 굴욕적인 위치로 몰아넣었다. 외부 세계에 식량을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1921년 7월, 막심 고리키는 레닌의 승인 아래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멘델레예프, 파블로프의 나라에 암울한 날들이 닥쳤다. 빵과 약을 달라." 이 호소는 노르웨이의 탐험가 출신 인도주의자 프리초프 난센을 경유하여 허버트 후버미국 구제청(ARA)에 전달되었다. 8월 20일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ARA와 소비에트 정부는 협정을 체결했고, ARA는 인종·신조·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식량을 배급한다는 조건으로 완전한 자율권을 확보했다. 9월 7일 페트로그라드에 첫 급식소가 문을 열었고, 1년 안에 ARA는 매일 1,000만 명 이상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ARA는 2년간 237척의 선박으로 7억 6,800만 톤 이상의 식량을 수송했고, 1만 6,000개 이상의 병원에 의약품을 공급했다. 그럼에도 약 500만 명이 아사하거나 티푸스·콜레라로 사망했다.

기근 구호가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정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나는 대외 무역을 통한 공업 회복 자금의 확보였다. 1922년과 1923년, 볼가 유역에서 아직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동안에도 소비에트 정부는 외화를 벌기 위해 곡물을 수출했다. 이는 서방의 구호 의지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ARA는 곡물 수출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식량 지원을 중단하지 못하고 선적을 이어갔다. 다른 하나는 1922년 3월 시작된 교회 귀중품 몰수였다. 3월 19일 레닌은 몰로토프를 통해 정치국에 보낸 극비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교회 귀중품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탈취하여 수억 금루블의 기금을 확보해야 한다." 슈야에서 발생한 신자들의 저항을 구실로 레닌은 "반동적 성직자와 부르주아지를 가능한 한 많이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이 캠페인으로 450만 금루블 상당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나, 기근 구호에 실제 사용된 것은 100만 루블에 불과했다. 기근은 교회를 분쇄할 기회였다.

현물세 법령과 기근이 겹친 이 시기는 네프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처음부터 노출했다. 국가는 농민에게 유인을 주어 곡물을 생산하게 해야 했지만, 바로 그 국가가 공업화 자금을 마련해야 할 때는 농민의 잉여를, 때로는 잉여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곡물까지도 빼앗아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법령은 시장을 약속했지만, 시장이 제 기능을 하기도 전에 자연재해와 국가의 우선순위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그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안정된 돈, 마지막 구상

1922년 11월 27일, 소비에트 러시아의 시장에는 새로운 지폐가 등장했다. 국가은행이 발행한 체르보네츠 은행권이었다. 1체르보네츠는 순금 7.74그램, 즉 니콜라이 2세 시대의 10루블 금화와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 지폐에는 "환금 개시 시기는 특별 정부령으로 정한다"라고 인쇄되어 있었고, 실제로 자유 태환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도입 직후 시중에서 제정 금화 한 닢이 소브즈나크 1만 2,500장에 거래될 때, 국가은행은 체르보네츠 1장을 소브즈나크 1만 1,400장으로 평가했다. 인쇄된 숫자보다 시장이 먼저 금 태환을 믿은 셈이었다.

이 개혁을 이끈 사람은 재정인민위원 그리고리 소콜니코프였다. 내전기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소브즈나크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었다. 1922년 10월 기준 소브즈나크의 가치는 전전 루블의 100만 분의 1로 떨어졌고, 임금과 기업 간 결제는 현물로 이루어졌다. 제11차 당대회(1922년 3~4월)는 "경제·재정 정책을 금본위제 회복으로 단호히 지향한다"고 결의했고, 10월 11일 인민위원회의 법령으로 국가은행에 체르보네츠 발행권이 부여되었다. 법령은 발행량의 최소 25%를 귀금속과 외화로 담보할 것을 요구했다.

체르보네츠는 소브즈나크를 즉시 대체하지 않았다. 두 통화는 병행 유통되었고, 1923년 한 해 동안 체르보네츠의 통화량 비중은 3%에서 80%로 치솟았다. 도매 거래와 기업 회계는 체르보네츠를 기준으로 삼았고, 소브즈나크는 일상 소액 거래에 남았다. 1924년 2월 화폐개혁이 완료되면서 소브즈나크는 1체르보네츠당 1923년 발행분 5만 루블의 비율로 교환되어 정리되었다. 이때까지 시중에 풀린 소브즈나크는 809조 루블에 달했다.

통화 안정의 효과는 극적이었다. 물가가 진정되자 예금과 신용이 회복되었고, 현물로만 존재하던 경제에 계산 단위가 생겼다. 1924년 4월부터 체르보네츠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환율이 고시되었고, 밀라노·리가·로마·콘스탄티노플·테헤란·상하이 등지에서도 시세표에 올랐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건전한 통화 중 하나"로 불릴 정도의 신뢰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성공은 역설을 품고 있었다. 당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제정 금화를 찍어내고 있다"는 불만이 나왔다. 실제로 1925~26년 소련 정부는 대외 결제용으로 니콜라이 2세의 초상이 새겨진 10루블 금화를 구주조로 추가 발행해야 했다. 소비에트 문장이 새겨진 금화를 서방 은행들이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무렵, 고리키 마을의 별채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레닌은 1922년 12월 두 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당 중앙위원회가 파견한 의사들의 감시 아래 놓였고, 스탈린은 정치국을 대표해 레닌의 면회와 정보 접근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제한된 조건 속에서 레닌은 1922년 12월 23일부터 1923년 3월 2일까지 속기사에게 일련의 글을 구술했다.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이른바 유언), 「국가계획위원회에 입법 기능을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협동조합에 관하여」, 「우리의 혁명에 관하여」, 「라브크린을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 글이 된 「적게, 그러나 더 좋게」까지.

이 글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하나의 공통된 질문으로 수렴된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시장을 용인하는 나라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 「협동조합에 관하여」에서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협동조합이다. 생산수단이 국가 소유이고 정치권력이 노동계급의 손에 있다면, "인구의 협동조합적 조직화" 자체가 사회주의의 성장과 같다. 문제는 문화다. 문맹률이 60%에 달하는 나라에서 협동조합은 "문화혁명" 없이 뿌리내릴 수 없으며, 그 문화혁명은 한 세대가 걸리는 사업이다.

동시에 레닌은 권력의 문제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스탈린이 총서기로서 "무한한 권력을 손에 집중시켰다"고 지적했고, 1923년 1월 4일 추가분에서는 더 직설적으로 "스탈린은 너무 거칠다"며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당대회에서 읽히지 못했다. 크룹스카야가 1924년 5월 중앙위원회에 전달했을 때, 정치국은 대의원들에게 각 대표단별 비공개 낭독만 허용하고 대회 공식 의제에서는 배제했다. 스탈린은 유임되었다.

체르보네츠 개혁과 레닌의 마지막 구술은 시차를 두고 어긋난 두 개의 시간표 위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1924년 봄에 완결된 화폐 안정화였고, 다른 하나는 1924년 1월 레닌의 죽음으로 중단된 정치적 재편 구상이었다. 시장을 작동시키는 돈은 만들어졌지만, 그 시장을 사회주의로 이끌 정치적 설계는 저자 없이 당대회 앞에 놓였다.

가격 가위가 스미치카를 찢다

1922년과 1923년의 풍작으로 농업은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공업은 따라오지 못했다. 내전으로 파괴된 설비, 부족한 운전자본, 낮은 노동생산성 탓에 공업 생산은 1922년에 겨우 전전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공업 트러스트들은 방어에 나서 판매 신디케이트를 결성해 시장을 지배했고, 국가 기관에 납품하는 가격을 밀어 올렸다. 국가는 곡물의 주요 구매자로서 농민에게 낮은 가격을 강요했다. 1923년 여름부터 공업품과 농산물 가격 사이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1923년 4월 제12차 당대회에서 두 가격 곡선이 벌어지는 모양을 그리고 이를 '가위'라고 불렀다. 10월 정점에서 공업품 가격은 1913년 대비 276퍼센트, 농산물 가격은 89퍼센트였다. 농민은 곡물을 팔아도 공업품을 살 수 없게 되자 시장 출하를 멈추었고, 도시에는 '곡물 파업'에 대한 공포가 퍼졌다. 1923년 8월부터 공업 지대에서는 임금 체불과 실질임금 하락에 항의하는 파업이 번졌다.

10월 8일,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경제정책의 현저한 근본적 오류"를 비판했다. 결정들은 아무런 경제 계획 없이 내려지고 있었고, "전시공산주의식으로 가격을 명령"하려는 시도가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일주일 뒤인 10월 15일, 46명의 당원들이 정치국에 「46인 선언」을 제출했다. 이 문서는 경제 위기가 "중앙위원회의 우연하고 비체계적인 결정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고, 당내 관료제가 당원의 독립적 의견을 질식시키고 있다고 공격했다.

당 지도부는 '가위 위원회'를 구성해 대응했다. 위원회가 숙의하는 사이 10월을 정점으로 공업품 가격은 급락했고, 2년 연속 풍작으로 농산물 시장도 안정되었다. 12월 정치국의 위원회 보고 채택 결의는 교묘한 타협이었다. 도매가격 통제를 소매까지 확대하고, 소금·파라핀·설탕에 법정 최고가격을 설정했다. 공업 트러스트들은 재고를 처분하지 않으면 신용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30만 개의 사적 상점과 노점이 폐쇄되었다. 노동자 소비조합이 네프맨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1924년 4월까지 농산물 가격지수는 92, 공업품은 131로 수렴했고, 가위는 닫혔다.

그러나 위기를 해소한 조치들은 네프의 시장 원리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가격 통제, 신용 제한, 사적 상업 탄압은 국가 권력이 스미치카를 지키기 위해 시장을 외과적으로 절개한 셈이었다. 이 경험은 네프의 근본 딜레마, 곧 시장에 의존하면서도 시장을 신뢰할 수 없는 구조를 여실히 드러냈다.

정치적 결과는 더 깊었다. 중앙위원회는 프라우다 지면을 개방해 한 달 넘게 논쟁을 허용했고, 이는 소비에트 역사상 마지막 공개 논쟁이 되었지만, 그 사이 반트로츠키 캠페인이 본격화되었다. 1924년 1월 당 협의회는 가위 위원회 결의를 승인하고 트로츠키의 공업 우선 주장을 기각했다. 협의회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월 21일, 레닌이 고리키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상에 누운 지 1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 죽음은 당을 근본적으로 다른 국면으로 밀어 넣었다.

당 지도부는 레닌의 죽음을 계기로 '레닌 입당' 운동을 개시했다. 1924년과 1925년 사이 63만 8천 명이 당에 가입했고, 이 중 68.9퍼센트가 생산직 노동자였다. 당원 총수는 1924년 1월 44만 6천 명에서 1926년 1월이면 100만 명을 넘어섰다. 좌익반대파는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3인체제가 순종적인 대중으로 당을 물타기하려 한다고 비판했지만, 공장에서 올라온 이 노동자들은 상급자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덜 순종적이었다. 당의 사회적 구성은 바뀌었고, 레닌이라는 최종 중재자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후계 투쟁이 시작되었다. 가위 위기는 시장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지만, 레닌 없는 당이 스스로를 다루는 법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부하린의 '부유해지라'와 지노비예프의 경고, 그리고 문화가 숨 쉰 짧은 평화

레닌 사후 1년 동안 당의 '3인지도체제'(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버텨 왔다. 그러나 1925년 봄, 네프의 방향을 두고 균열이 시작되었다. 1925년 4월 17일, 부하린은 모스크바 당 활동가 회의에서 농민에게 "부유해지라, 축적하라, 경영을 발전시키라"고 말했다. 지노비예프가 이를 두고 "부농에 대한 양보"라며 공격한 것은 같은 해 4월의 제14차 당협의회 직후부터였다. 부하린은 곧 이 구호를 철회했고, 스탈린도 6월 2일 서한에서 "부유해지라는 우리의 구호가 아니다. 우리의 구호는 사회주의 축적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신반대파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지노비예프는 부농이 농민의 3~4%(약 150만 명)에 불과하지만 경제적 힘은 훨씬 크며, 도시의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인 네프맨, 전문가, 일부 직원들이 부농과 결합하여 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1925년 12월 18일부터 31일까지 크렘린 안드레옙스키 홀에서 열린 제14차 당대회는 이 균열이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자리였다. 표결권 665명, 자문권 641명의 대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탈린은 정치보고에서 자본주의 세계와 소련 사이에 "평화적 공존"의 기간이 도래했으며,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택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소련을 농업국으로 남겨 국제시장에 편입시키자는 경제학자 레프 샤닌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국내 시장을 기반으로 공업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길을 내세웠다. 이로써 '일국사회주의'가 공식 당 노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진짜 폭발은 사흘째부터 시작되었다. 지노비예프는 부하린의 '부유해지라' 구호를 재차 공격하며, "당이 부농 과대평가라는 편향이 부농 과소평가보다 더 위험하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어 라셰비치가 연단에 오르자 다수파의 야유가 쏟아졌다. 결정타는 12월 21일, 5시간 동안 이어진 카메네프의 연설이었다. 그는 "우리는 지도자 이론을 만드는 데 반대한다. 비서국이 정치와 조직을 함께 결합하여 정치기관 위에 서는 것에 반대한다... 스탈린 동지는 볼셰비키 참모를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고 직격했다. E.H. 카의 표현대로 "폭탄이 터진" 순간이었다. 크룹스카야는 논쟁을 억압하는 방식에 항의했지만, 결과는 명백했다: 다수파의 완승. 지노비예프는 정치국 위원으로 남았으나 레닌그라드 당 조직을 잃었고, 카메네프는 모든 요직에서 물러났다. 몰로토프가 보고한 대로 당대회는 "레닌주의로부터의 일탈"과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 정치적 격변과 동시에, 1925년부터 1927년까지는 소비에트 문화가 가장 자유롭게 호흡한 시기이기도 했다. 루나차르스키가 이끄는 교육인민위원부는 당에 적대적이지만 않다면 다양한 예술 흐름을 용인했다. 마야콥스키의 LEF(좌익예술전선)는 시와 광고를 결합해 국영기업 포스터를 만들었다. 로드첸코는 구성주의 사진과 디자인으로 네프의 시각언어를 창조했다. 1925년 12월 21일, 바로 당대회 기간 중,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이 초연되었다. 오데사 계단 장면은 세계 영화의 문법을 다시 썼다. 문학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들(RAPP)과 '동반작가들', 그리고 형식주의 비평가들이 격렬하게 경쟁하면서도 공존했다.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1925), 바벨의 『기병대』, 플라토노프의 초기작이 이 시기에 쓰였다.

그러나 이 '짧은 평화'의 이면에는 깊은 긴장이 도사렸다. 1925년 12월 28일, 농민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 레닌그라드 호텔에서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네프가 농민에게 약속한 길과 혁명이 요구한 길 사이의 간극을 상징했다. 마야콥스키는 후일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삶을 쌓아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네프의 문화적 개화는 당이 아직 문화 전선에서 누가 '우리 편'인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시적인 공존이었다. 1928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이 공존은 끝장난다.

전쟁이 먼저인가, 혁명이 먼저인가: 공업화 논쟁에서 곡물 조달 위기까지

네프가 전전 생산 수준을 회복시킨 바로 그 시점에,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926년,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신경제학』에서 냉철한 결론을 내놓았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설명할 때 '시초축적'이라는 개념을 썼듯이, 사회주의 공업화에도 그에 상응하는 단계, 즉 '사회주의 시초축적'이 필요하며, 그 재원은 80퍼센트의 인구가 종사하는 농업 부문에서 이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농업을 국가 부문의 '내부 식민지'라고까지 불렀고, 공업품 가격을 농산물 가격보다 높게 유지하여 그 차액으로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불균등 교환을 제안했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이 논리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거부했다. 그에게 문제는 농민으로부터 '얼마나 짜낼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까지 짜낼 수 있는가'였다. 스탈린 자신도 1925년에는 '농업은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다'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부하린의 논리는 이랬다: 농민 경제가 성장해야 공업품을 살 수 있는 내수가 생기고, 그래야 공업도 성장한다. 시장을 통한 균형 성장 노선이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는 통합반대파, 즉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프레오브라젠스키를 당에서 축출하며 부하린-스탈린 동맹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축출된 좌파의 강령, 다시 말해 가속화된 공업화, 농업으로부터의 자원 이전, 집단화의 추진은 바로 그 대회의 결의문 속에 싹트고 있었다. 대회는 '농업의 집단화'를 결의하고 제1차 5개년계획 작성 지침을 승인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은 곡물이었다. 1927년 10월부터 국가 곡물 조달량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1927년 1월까지 4억 2,800만 푸드의 곡물을 확보했던 국가가, 1928년 1월까지 확보한 것은 고작 3억 푸드, 1억 2,800만 푸드의 결손이었다. 수확량 자체는 전년보다 약간 적을 뿐이었지만, 농민들은 곡물을 내놓지 않았다. 공업품이 부족해 곡물을 팔아도 살 물건이 없었고, 부농(쿨라크)은 가격이 오를 때까지 비축했다.

1928년 1월,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날아갔다.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 그는 쿨라크의 '사보타주'를 규탄하고, 곳곳에서 곡물 압수 분견대가 조직되었다. 형법 제107조가 투기 혐의로 농민에게 적용되었고, 불법 수색과 강제 수매가 재개되었다. 전시공산주의의 귀환이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도 인정했듯, 실제로 압수된 곡물의 대부분은 중농의 손에서 나왔다.

이 '우랄-시베리아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거두었다. 1928년 1~3월 사이에 조달량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파종 면적은 줄었고, 중농은 소비에트 권력에 등을 돌렸으며, 쿨라크의 영향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1928년 6월, 재정부인민위원 모이세이 프룸킨은 정치국에 편지를 보내 '소수의 빈농을 제외한 농촌 전체가 우리에게 반대하고 있다'고 썼다.

부하린은 1928년 9월 30일 프라우다에 발표한 「한 경제학자의 수첩」에서 마지막으로 반격했다. 그는 '내일의 벽돌로 오늘의 공장을 지을 수는 없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물적 기반을 초과하는 투자 계획을 비판했다. 동시에 '비상조치+배급표'가 노동자-농민 동맹을 대체할 수 있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군사봉건적 농민 착취'라고 불렀다. 그러나 1928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는 '우익 일탈'로 규탄받았고, 1929년에는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스탈린은 프레오브라젠스키의 논리를, 그를 감옥에 넣으면서, 실행하기 시작했다. 네프는 끝났고, 집단화가 시작되었다.

네프는 무엇을 닫고 무엇을 열어 두었는가

네프가 끝난 자리에는 냉정한 대차대조표가 놓인다. 1928년까지 공업과 농업 생산은 대체로 1913년 수준을 회복했고, 체르보네츠는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으며, 문맹률은 급감했다. 무엇보다 네프는 하나의 정치적 사실을 입증했다: 혁명 권력은 후퇴를 명령할 수 있고, 그 후퇴를 관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경험은 후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부터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국가가 시장을 재도입할 때마다 참조되는 선례로 남았다. 덩샤오핑은 1985년 소련의 신경제정책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사회주의 모델'일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네프가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은 그것이 성취한 것만큼이나 무겁다. 첫째, 공업화 자금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대외무역은 1913년 수준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고, 서방과의 기술 격차는 내전과 1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오히려 벌어져 있었다. 농민의 저축에 기대자니 곡물 상품화율은 전전보다 낮았고, 농업 잉여를 강제로 빼내자니 스미치카가 깨진다. 이 모순이 1927-28년 곡물 조달 위기로 폭발했다. 둘째, 네프 사회 자체의 정치적 성격이다. 시장은 네프맨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 냈고, 농촌에서는 쿨라크가 다시 등장했으며, 도시 실업은 수백만에 달했다. 당은 경제에서는 후퇴하면서도 정치에서는 일당 독재를 강화했고, 파벌 금지로 내부 논쟁을 봉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가들의 판단은 갈린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네프 경제에 '시장 원리와 계획 원리 사이의 잠재적 양립 불가능성'이 내재해 있었다고 보았다. 그에게 네프는 세계 경제가 계획화로 수렴해 가는 큰 흐름 속에서 일시적인 후퇴였을 뿐이다. 반면 스티븐 코언을 비롯한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부하린의 노선이 실행 가능한 대안이었다고 주장한다. 농민 경제의 점진적 성장 위에서 균형 잡힌 공업화를 추진하는 길이 스탈린식 강제 집단화보다 인적 비용이 적고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이었다는 것이다. R. W. 데이비스는 중간에 선다. 네프는 1차 세계대전 직전 수준 이상의 고속 성장을 감당할 구조가 아니었지만, 합리적인 가격 정책이 뒷받침되었다면 완만한 성장은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이 논쟁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된다.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이 처한 국제적·군사적 조건 아래서 '완만한 성장'은 과연 용인될 수 있었는가. 독일과 미국은 이미 2차 산업혁명의 절정에 올라 있었고, 전쟁의 위협은 상수였다. 네프가 살릴 수 있었던 것과 살리지 못한 것 사이의 이 간극이, 바로 네프가 역사에 남긴 가장 깊은 딜레마다.

역사가들은 왜 아직도 네프를 두고 싸우는가

1920년대 당내에서 벌어진 네프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로버트 W. 데이비스가 지적했듯, 역사가들은 "1920년대 논쟁을 반복하고 확대하며 경쟁 학파의 옷을 입는다." 네프가 무엇이었고 왜 끝났는지를 두고 적어도 세 입장이 충돌해 왔다.

첫째 입장은 네프 자체가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1928년에 정식화한 이 논리는, 소농 중심의 분산된 농업으로는 급속한 공업화에 필요한 곡물과 노동력을 공급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집단화로의 제도적 전환이 불가피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네프의 종언을 합리적 경제 결정으로 간주한다.

둘째 입장은 정반대다. 네프는 더 완만한 공업화 속도에서도 실제 달성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낼 수 있었고, 집단화가 초래한 가축 도살과 생산성 붕괴 같은 막대한 낭비를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에서 네프의 종언은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권력 투쟁과 정치적 선택의 산물이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소비에트 역사가들이 네프를 "놓친 기회"로 복권한 것은 이 입장에 가깝다. 1985년 덩샤오핑이 "아마도 사회주의의 가장 올바른 모델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신경제정책이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크 해리슨이 제시한 셋째 입장은 이 양극을 거부한다. 네프는 1928년 이후 실제 추진된 정도의 급속한 공업화와는 양립할 수 없었지만, 더 완만한 성장 경로는 가능했다는 것이다. 홀랜드 헌터의 선형계획 모형은 1928년 소비에트 경제가 이미 극도로 팽팽한 상태였으며, 1인당 소비를 유지하면서 5개년계획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보여 준다. 공업화에는 소비 억제와 농업으로부터의 자원 이전이 불가피했고, 문제는 그 속도와 방법이었다.

이 세 입장이 결국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있다. 네프는 사회주의 권력이 시장 도구를 활용해 경제를 회복시키고 농민과의 동맹을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사적 축적에 의존하지 않고 공업화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 곧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제기한 사회주의 시초축적의 딜레마는 네프의 틀 안에서 해소되지 않았다. 1927–28년 곡물 조달 위기는 이 딜레마가 더 이상 연기될 수 없음을 드러냈다.

결국 네프가 남긴 것은 하나의 정책 이상이다. 그것은 혁명 권력이 전략적 후퇴를 관리하고, 시장을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로 활용하며, 회복에서 건설로의 이행을 고민한 최초의 대규모 실험이었다. 그 실험이 낳은 질문, 즉 시장과 계획은 얼마나 오래 공존할 수 있는가, 농민 다수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축적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물음은 20세기 사회주의의 반복되는 질문이 되었다.

결과

1926–27년까지 공업과 농업 생산은 대체로 1913년 수준을 회복했고, 체르보네츠 개혁으로 통화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사적 축적에 기대지 않고 공업화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라는 딜레마는 해소되지 않았고, 1927–28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당은 비상조치와 제1차 5개년계획으로 돌아섰다. 네프는 사회주의 권력이 후퇴와 회복을 관리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경험으로 남았다.

연표

  1. 1921.02–03
    위기의 겨울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대공업 생산은 전전의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탐보프 농민봉기와 페트로그라드 파업에 이어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봉기했다. 전시공산주의의 할당징발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2. 1921.03
    제10차 당대회: 현물세로의 전환

    레닌의 보고에 따라 당대회는 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대체하기로 결의했다. 세금을 내고 남은 농산물을 농민이 처분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장이 되살아날 길이 열렸다.

  3. 1921.03.21
    현물세 법령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가 현물세 법령을 공포했다. 뒤이어 소매 상업, 소기업 임대, 협동조합 활동이 단계적으로 합법화되면서 네프의 골격이 갖추어졌다.

  4. 1921–1922
    기근과 회복의 시작

    볼가 유역의 대기근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고, 국가는 국제 구호를 받아들이며 위기를 넘겼다. 1922년부터 파종 면적과 공업 생산이 뚜렷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5. 1922.11
    체르보네츠: 통화의 안정

    재정인민위원 소콜니코프의 주도로 금을 준거로 한 신통화 체르보네츠가 발행되었다. 1924년 화폐개혁이 완료되면서 초인플레이션이 종식되어 시장 회복의 토대가 되었다.

  6. 1922.12–1923.03
    레닌의 마지막 저작들

    병상의 레닌은 대회에 보내는 편지와 「협동조합에 관하여」 등을 구술하며, 문화혁명과 협동조합을 통해 네프의 러시아가 사회주의 러시아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당 지도부가 분열할 위험도 경고했다.

  7. 1923.10
    협상가격차 위기

    공업품 가격이 농산물 가격보다 크게 벌어지는 협상가격차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다. 국가는 공업품 가격 인하로 대응해 스미치카를 지켰으나, 공업 축적의 어려움이 드러났다.

  8. 1924.01.21
    레닌의 죽음

    레닌이 고리키 마을에서 사망했다. 노동자 수십만 명이 입당한 레닌 입당 운동이 이어졌고, 네프의 앞날을 둘러싼 지도부의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9. 1925.12
    제14차 당대회: 일국사회주의와 스미치카

    당대회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확인했다. 부하린과 리코프가 이끄는 다수파는 농민 경제의 성장 위에서 점진적으로 공업화한다는 노선을 견지했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신반대파는 부농의 위험을 경고하며 맞섰다.

  10. 1925–1927
    1920년대의 문화 개화

    문맹퇴치 운동이 확산되는 한편, 마야콥스키의 좌익예술전선,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구성주의 건축 등 전위 예술이 만개했다. 경쟁하는 문학 유파들이 공존한 이 시기는 소비에트 문화의 실험장이었다.

  11. 1926–1927
    공업화 논쟁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사회주의 시초축적론을 통해 공업화 자금을 농민 경제로부터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하린은 시장을 통한 균형 성장을 옹호했다. 통합반대파는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패배해 축출되었다.

  12. 1928
    곡물 조달 위기와 네프의 종언

    1927–28년 겨울 곡물 조달이 급감하자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비상조치를 지휘했고, 강제 수매와 형법 적용이 재개되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고 부하린 그룹이 패배하면서 네프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관련 인물 83명

참여42

재정인민위원그리고리 소콜니코프1888–1939

체르보네츠 통화개혁을 이끌어 네프의 화폐 안정을 만들어 냈다.

당 서기장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당 기구를 이끌며 부하린과 함께 네프 노선을 방어하다가, 1928년 곡물 위기에서 비상조치로 돌아섰다.

노동조합 지도자미하일 톰스키1880–1936

네프 시기 노동조합을 이끌며 시장 조건 아래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했다.

신반대파 지도자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

3인지도체제의 일원이었다가 1925년부터 부농의 위험을 경고하는 신반대파를 이끌었다.

신반대파 지도자레프 카메네프1883–1936

모스크바 당과 노동방위회의를 이끌었고, 지노비예프와 함께 네프의 부농 위험을 경고했다.

계획화의 주창자레프 트로츠키1879–1940

네프의 틀 안에서 국가 계획과 공업 우선을 요구하며 당 관료화를 비판했다.

문맹퇴치 지도자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

교육인민위원회에서 문맹퇴치 운동과 성인 교육을 이끌어 네프기 문화 건설을 뒷받침했다.

계획경제의 급진적 주창자유리 라린 (미하일 잘마노비치 루리예)1882–1932

고스플란 창립 멤버이자 간부로서 네프의 틀 안에서 화폐 폐지와 전면적 계획화를 주장했고, OZET 의장으로 유대인 농업정착을 추진했다.

대외무역 독점의 설계자레오니트 크라신1870–1926

1921년 3월 영소통상협정을 협상하여 자본주의 열강의 봉쇄를 깨뜨렸고, 네프 시기 전체 대외무역의 틀이 된 국가 독점 체제를 수립했다.

네프 후기 재무인민위원니콜라이 브류하노프1878–1938

1924~1926년 소콜니코프의 재무부인민위원으로 체르보네츠 안정화를 보좌했고, 1926년 후임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네프 말기와 1차 5개년계획 초입의 재정을 관장했다. 1930년 은화 부족 속 니켈 합금 주화 도입을 추진했으나 스탈린의 분노를 사 해임되었다.

통제숫자와 균형법의 설계자블라디미르 그로만1874–1940

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으로서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하여 네프 경제 관리의 통계적·계획적 기초를 구축했고, '회복적 성장' 개념으로 네프기 경제 회복의 패턴을 정식화했다.

전력화·계획 설계자글렙 크르지자놉스키1872–1959

GOELRO 전력화 계획을 이끈 초기 계획의 설계자였다.

농민경제 이론가알렉산드르 차야노프1888–1937

네프기 소농 경제의 논리를 연구한 농업경제학자였다.

농업경제학자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1892–1938

네프기 농업 시장과 경기순환을 연구한 경제학자였다.

네프 말기 고스플란에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하여 계획경제로의 전환 논쟁에 영향그리고리 펠트만1884–1958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자로서 농업경제 정책 수립에 참여이반 테오도로비치1875–1937

농업마르크스주의자로서 고스플란에서 네프 시기 경제 논쟁에 참여레프 크리츠만1890–1938

1926년부터 대내외 상업인민위원으로 네프 무역 정책 실행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기반으로서 네프 유지를 지지니콜라이 우글라노프1886–1937

고스플란 경제학자로서 네프 시기 계획 수립과 통계 작업 주도스타니슬라프 스트루밀린1877–1974

고스플란 경제학자로서 네프 시기 유전적 계획론을 주창블라디미르 바자로프1874–1939

고스플란 부의장으로서 네프 시기 통계와 계획 수립에 기여블라디미르 밀류틴1884–1937

네프 광고 디자인의 얼굴 · 마야콥스키와 함께 국영기업 포스터를 창조한 구성주의자알렉산드르 로드첸코1891–1956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마야콥스키와 함께 모스셀프롬, 굼, 레지노트레스트의 광고 포스터를 제작했고, LEF와 Novy LEF 잡지의 표지와 레이아웃을 디자인하며 네프 시기 소비에트 상업 시각문화를 형성했다.

네프기 우크라이나 문예부흥의 기수미콜라 흐빌로비1893–1933

바플리테(VAPLITE)를 이끌며 네프 시기 문화적 개화의 우크라이나적 전형을 구현했고,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구호로 우크라이나 문학의 독자적 길을 주장했다.

네프의 은행가 · 금태환 체르보네츠로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국가은행 총재아론 셰인만1885–1944

1921년 10월 초대 국가은행 총재로 임명된 후, 그의 주도로 1922년 금으로 태환되는 체르보네츠를 발행하여 네프의 화폐 안정과 시장 회복의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다. 1929년 해외 소환을 거부하며 소비에트 금융 엘리트 최초의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다.

농업인민위원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1877–1938

식량인민위원알렉산드르 추루파1870–1928

대외무역인민위원아르카디 로젠골츠1889–1938

외무인민위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

법이론가예브게니 파슈카니스1891–1937

우즈베크 SSR 총리파이줄라 호자예프1896–1938

식량인민위원모이세이 칼마노비치1888–1937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미콜라 스크리프니크1872–1933

법무인민위원니콜라이 크릴렌코1885–1938

재무인민위원니콜라이 밀류틴1889–1942

보건인민위원니콜라이 세마슈코1874–1949

법이론가페테리스 스투치카1865–1932

문화행정가플라톤 케르젠체프1881–1940

검찰총장표트르 크라시코프1870–1939

노동인민위원바실리 시미트1886–1938

우크라이나 총리블라스 추바리1891–1939

스미치카 파열을 폭로한 재정 부인민위원모이세이 프룸킨1878–1938

1928년 6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극히 일부의 빈농을 제외하고 시골 전체가 우리를 등지고 있다’고 선언하여 네프의 중심 고리인 스미치카가 파열되었음을 폭로했다.

반대 · 저항20

좌파 경제 비판자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1886–1937

사회주의 시초축적론으로 네프의 축적 딜레마를 가장 날카롭게 정식화했다.

좌익 반대파의 시베리아 지도자로서 네프 경제정책에 반대이반 스미르노프1881–1936

좌익 반대파 서기로서 네프 노선에 투쟁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1888–1937

통합 반대파의 군사 지도자로 네프 정책에 반대미하일 라셰비치1884–1928

좌익 반대파 활동가로 네프 경제정책을 비판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1888–1936

좌익 반대파 이론가로서 네프를 비판하고 급속한 공업화 주장게오르기 퍄타코프1890–1937

좌익 반대파 지도부로 네프 정책 논쟁에 참여카를 라데크1885–1939

통합 반대파 지도자로서 네프 노선에 반대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

노동자 반대파 지도자로서 네프 도입 초기부터 시장 정책에 반대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1885–1937

좌익 반대파 활동가로 네프 경제정책에 이의 제기이바르 스밀가1892–1937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로서 네프 관료화를 비판티모페이 사프로노프1887–1937

좌익 반대파 지도부로 네프 경제정책 논쟁에 가담바르바라 야코블레바1884–1941

좌익 반대파 활동가로 네프 시기 반대파 운동에 참여빅토르 세르주1890–1947

좌파공산주의 비판자아마데오 보르디가1889–1970

1921년 네프 도입과 통일전선 전술을 혁명 프로그램의 포기로 간주하고, 좌파공산주의 입장에서 코민테른의 우경화에 반대했다.

좌익반대파보리스 엘친1876–1937

노동자반대파가브릴 먀스니코프1889–1945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니콜라이 오신스키1887–1938

노동자반대파세르게이 메드베데프1885–1937

크론시타트 반란 지도자스테판 페트리첸코1892–1947

좌익반대파블라디슬라프 코시오르1891–1938

목격 · 증언16

시대의 시인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1893–1930

국영기업 광고 시와 풍자로 네프 시대의 활력과 모순을 함께 기록했다.

네프의 풍자가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

네프 시대 모스크바의 모순을 풍자로 기록한 작가였다.

금지된 미래의 작가예브게니 자먀틴1884–1937

네프기의 문학 논쟁 속에서 디스토피아 『우리들』을 쓴 작가였다.

네프의 풍자가일리야 일리프1897–1937

페트로프와 함께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통해 네프 시기 소비에트 사회의 사기꾼, 관료, 소시민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네프기 보조금 중단 속에서 MAT의 유럽·미국 순회공연을 이끈 연출가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

1921년 네프 도입으로 MAT에 대한 국가 보조금이 중단되자,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재정 확보를 위해 1922~1924년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을 계획했다. 이 공연은 MAT의 세계적 명성을 확립했고, 리 스트라스버그 등 미국 연극인들에게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이 전파되는 결정적 통로가 되었다.

영화 감독지가 베르토프1896–1954

영화 감독레프 쿨레쇼프1899–1970

언론인미하일 콜초프1898–1940

영화 감독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1898–1948

연극 연출가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1874–1940

네프 도입기 증인에마 골드만1869–1940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하고, 버크먼과 중재를 시도했으나 거부당한 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정치국 서기 겸 기록자보리스 바자노프1900–1982

1923~1925년 정치국 서기로서 모든 회의를 기록했고, 망명 후 네프 시기 권력 투쟁의 내막을 회고록으로 폭로했다.

네프 실패 3유형론의 제시자마크 해리슨1949–

1981년 논문 「Why Did NEP Fail?」에서 네프 실패의 원인을 합리적 포기, 비합리적·정치적 요인, 제약된 선택이라는 세 가지 입장으로 유형화하여 이후 역사 평가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네프의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을 주장한 역사가E. H. 카1892–1982

그의 저작에서 네프는 ‘신경제정책의 원칙과 계획의 원칙 사이에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진단은 네프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네 가지 주요 역사학적 입장 중 하나를 뒷받침한다.

네프 문화의 비관적 증언자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

1925년 12월에 자살하여 네프 문화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네프 연구 역사가제임스 하인젠20세기–현재

2004년 저서에서 네프 시기 농업 인민위원부를 분석했다.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E. H. Carr, The Interregnum 1923–1924 (1954)Alan Ball, Russia's Last Capitalists: The Nepmen, 1921–1929 (1987)Alexander Erlich, The Soviet Industrialization Debate, 1924–1928 (1960)Sheila Fitzpatrick, The Russian Revolution (4th ed., 2017)Stephen Kotkin, Stalin, vol. 1: Paradoxes of Power, 1878–19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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