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가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간 4년 내내,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 분의 식탁을 차리게 했다. 훗날 그가 남긴 말 —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볼셰비키 지하신문 『프라우다』 창간부터 1962년 출당까지 56년: 스탈린의 가장 오래된 측근으로서 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을 11년간 지내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지휘했다. 외무인민위원으로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하고 마셜 플랜을 거부했으며, 전시에는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과 유엔 창설을 주도했다. 별명 「돌엉덩이」는 그 완고함에 레닌이 붙였다고 전한다.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갈 때도 스탈린 곁을 지켰고,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해 몽골 대사로 좌천되었다. 96세로 죽는 날까지 스탈린 시대를 후회하지 않았다.
경력 연표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49, 1953–56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1984출당, 그리고 22년 뒤 복당
관련 역사 사건
- 1917.02–072월 혁명수도의 볼셰비키2월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소수의 볼셰비키 지도자로 『프라우다』를 이끌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복무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인민위원회 의장1930년부터 정부 수반으로 계획 집행을 총괄했고, 1932년 우크라이나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었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소련 인민위원회의장, 공출 특사로 우크라이나에 파견1931년 12월 말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공출 할당 완수를 압박했다. 1932년 6월 '굶주림의 망령과 마주하더라도 공출 계획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 1937–1938대숙청정치국 승인자정치국 지도부의 일원으로 숙청 정책과 처형 명단 승인에 관여했다.
- 1939.08–1940.08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리트비노프 후임 외무인민위원, 조약 서명자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를 대신해 외무인민위원에 취임. 영불과의 삼국 협상을 이끌었고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 1939.11–1940.03겨울전쟁외교 · 강화조약 서명가을 교섭에서 국경 이동과 항코 조차를 요구했고, 헬싱키 폭격을 식량 투하라 부른 발언은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1940년 3월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국가방위위원회 부의장6월 22일 개전을 인민에게 알린 라디오 연설을 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반파시즘 연합 외교를 이끌었다.
- 1941–1944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소련 외교 대표1942년 5월 런던과 워싱턴에서 제2전선 개방을 요구하고, 미국의 약속과 영국의 유보를 협상했다.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외무인민위원으로 협상 실무를 총괄했다.
-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소일중립조약 서명자이자 파기 통보자1941년 4월 소일중립조약에 서명했고, 1945년 4월 5일 이를 파기 통보했으며, 8월 8일 사토 나오타케 주소 대사에게 대일 선전포고를 전달했다. 얄타 비밀의정서에도 서명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파리 회담 결렬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 회담에서 퇴장했다.
- 1948–1955티토-스탈린 결별규탄 서한의 공동 명의인스탈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당을 규탄하는 서한에 이름을 올렸다
- 1950–1953한국전쟁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의 일원으로 종전 방침에 동의한 외무상말렌코프·베리야와 함께 3월 19일 각료회의 결의에 참여했으며, 이후 정전 교섭의 외교적 방향을 조율했다.
- 1953베리야의 몰락간부단의 지지베리야에 반대하는 간부단의 결의를 뒷받침했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외무장관, 1939–1949, 1953–1956몰로토프는 파리 협정을 유럽 안보의 직접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미국을 배제한 집단안보로 나토를 무력화하려던 구상이 서방에 거부되면서 바르샤바 조약의 배경이 되었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격하에 반대스탈린 평가와 새 노선에 반대했고, 1957년 반당 그룹으로 몰려 축출됐다.
- 1957반당 그룹 사건반당 그룹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으나 패배해 몽골 대사로 좌천됐다.
- 1975헬싱키 협정최초 제안자1954년 베를린 외상회의에서 범유럽 집단안보 조약을 제안하며 소련의 유럽안보회의 캠페인을 시작했고, 이는 헬싱키 협정까지 이어지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숙청 — 372개의 총살 명단, 가장 많은 서명
1937-38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였다. 그가 서명한 '총살 명단'은 기록상 372개였다. 스탈린(357개)보다도 많다. 명단 한 장에 수백 명의 이름이 올랐고, 정치국 지도부가 차례로 서명했다: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승인과 집행 사이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1938년 한 해에만, 몰로토프 내각의 각료(인민위원) 28명 중 20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자기 부하였던 룬주탁이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직접 확인하고서도, 몰로토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로모프에 대한 체포 건의가 올라오자, 몰로토프는 「저 놈 로모프를 즉시 체포하라」고 직접 적어 넣었다.
후일 흐루쇼프 시대의 시베르니크 보고서는 몰로토프가 스탈린과 함께 '근거 없는 대규모 정치 탄압의 조직과 실행에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명시했다. 말년에 몰로토프는 추예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실수도 있었고, 지나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정책은 옳았다. 나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 — 서명 20분, 대가 4년
1939년 8월 23일 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크렘린에서 나치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맞이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가 같은 탁자에 앉다니.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몰로토프는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비밀 의정서는 동유럽을 분할했다.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베사라비아를 소련과 독일의 세력권으로 나누었다. 서명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이 조약을 인민외교위원으로서의 최대 성과로 여겼다. 소련은 2년간의 전쟁 준비 시간을 벌었고, 서부 국경을 수백 킬로미터 확장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조약을 찢어버렸다.
몰로토프는 평생 이 조약을 정당화했다: 「그것은 불가피했고, 올바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외교의 가장 냉소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전시 외교와 전후 국제질서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뒤 몰로토프는 국가방위위원회에 참여하고, 영국 및 미국과의 전시 동맹을 구축하는 외교를 맡았다. 그는 1941년 7월 영국과의 협정을 시작으로 연합국 협력을 제도화했으며,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소련의 군사·안보 요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이 외교는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면서, 전후 동유럽의 안전보장과 세력권을 둘러싼 경쟁을 동시에 준비하는 성격을 지녔다.
몰로토프는 테헤란, 얄타, 포츠담 회담과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독일의 무장 해제와 배상, 폴란드 국경, 동유럽 정부의 성격을 둘러싼 협상에서 소련의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했고, 유엔 헌장 형성 과정에서는 강대국 간 합의를 지탱하는 외교를 수행했다. 따라서 그의 전시 외교는 단순한 개인적 반서방 노선이 아니라, 소련의 안보를 확보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국제적 지위를 제도화하려는 국가 전략의 실무적 표현이었다. 동시에 그 전략은 동유럽의 자결과 소련의 안보권이 충돌하는 문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