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협정
소련의 최대 외교적 승리로 기획된 헬싱키 협정은 왜 동구권 체제를 뒤흔드는 무기가 되었는가?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
평화조약도, 승인된 국경도 없던 유럽
헬싱키 협정의 뿌리는 1954년이 아니라 1945년의 미완성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에는 패전국 독일과의 평화조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승 4대국은 독일을 네 개 점령지대로 나누고 관리만 합의했을 뿐, 최종적인 영토와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 이는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이 폴란드에 넘긴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영토, 곧 슐레지엔과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남부는 소련의 주도로 정해졌지만 서방은 이를 임시 경계로만 취급했고, 서독은 이 국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프로이센 북부의 쾨니히스베르크는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소련 영토에 편입되었다. 소련이 전쟁에서 얻은 이 모든 전리품은 법적으로, 혹은 국제적으로 최종 승인을 받지 못한 채 9년을 버텨 왔다. 독일이 언젠가 통일되면 이 영토의 소유권이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소련 지도부가 늘 의식해야 할 불안 요소였다.
이 불안을 더 키운 것은 서방의 움직임이었다. 1949년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고, 같은 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결성되자 서방은 서독의 재무장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1952년 체결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은 서독 군대를 유럽군에 통합시키려는 계획이었고, 이것이 발효되면 분단은 사실상 고착되고 독일의 서쪽 절반이 서방 군사동맹에 묶이게 되었다. 소련에는 두 가지 두려움이 겹쳤다. 서방이 자기 영향권을 영구화하려 한다는 두려움과, 재무장한 독일이 언젠가 잃어버린 동부 영토를 되찾으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이 지점에서 소련은 공세로 돌아선다. 1954년 2월 베를린 외상회의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미국을 배제한 범유럽 집단안보 조약을 제안하며, 나치가 남긴 독일 문제를 소련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묶으려 했다. 서방이 자유 총선거를 통한 독일 통일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하자, 몰로토프는 이 제안을 무기화하는 법을 배운다. 한 달 뒤 그는 미국의 정식 참여를 허용하고, 나아가 소련이 NATO 가입을 검토할 의사가 있다는 각서까지 작성해 서방에 보냈다. 목적은 서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이 유럽 안보를 진지하게 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퍼뜨리고 각국의 반대 여론을 갈라놓는 것이었다. 이 캠페인은 1955년 제네바 외상회의까지 이어졌고, 그 다음 해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재추진을 거쳐, 20년 뒤 헬싱키에서 소련이 가장 오래 기다렸던 것, 곧 전후 유럽 국경의 공식 승인을 요구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국경을 종이에 새기려는 20년
1954년 2월 10일, 베를린 4대국 외상회의에서 몰로토프가 「전유럽 집단안보조약」 초안을 내놓았다. 사회제도를 불문하고 모든 유럽 국가에 열려 있으며, 유럽에서 다른 나라들을 겨냥한 집단 결성 자체를 금지한다는 구상이었다. 당장의 표적은 서독의 재무장이었다. 프랑스 의회가 유럽방위공동체(EDC) 비준에 주저하자, 소련은 서독을 이 틀에 묶어 두어 EDC를 무력화하려 했던 것이다. 문제는 초안에 미국이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참가국이 아니라 관찰자로 밀려나 있었다. 이든과 덜레스, 비도는 그 자리에서 제안을 거부했다. 반대의 핵심은 하나였다. 미국 없는 유럽 안보란 곧 NATO의 청산이며, 소련이 대륙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는 구도를 뜻했다. 소련은 굴복해서 미국의 참여를 허용하겠다고 하고, 나아가 소련의 NATO 가입까지 논의할 뜻을 밝혔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즈메이의 표현대로, 서방 눈에는 뉘우치지 않는 도둑이 경찰에 합류를 청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이 회의 구상에 매달린 이유는 서독 재무장 저지에 그치지 않았다. 전후 독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탓에 동구권 국경은 국제법상 사실상의 선에 머물렀고, 서방은 1952년 스탈린 노트조차 중립화는 곧 소련화라는 논리로 묻어 두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은 회의 그 자체를 승리로 계산했다. 서방이 유럽 각국과 한 테이블에 앉는 순간, 그 테이블을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기존 국경의 확인이 될 터였다. 이 구상은 10년 가까이 잠들었다가 새 조건에서 깨어났다. 베를린 위기(1961)와 쿠바 위기(1962)는 양 초강대국 모두 자국 세력권 밖을 넓힐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고, 확장보다 공고화가 양 진영의 공통 현실이 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축출되자 자신감을 되찾은 소련 지도부는 같은 해 12월 유엔에서 폴란드 외무장관 라파츠키가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하도록 하고, 뒤이어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이 안건을 조직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1966년 7월 부쿠레슈티에서 채택된 정치협의위원회 선언은 기존 국경의 승인과 두 진영의 동시 해체를 요구했다. 다만 여기에는 미국의 유럽 철수, 서독군 감축, 비핵지대화 같은 항목들이 뒤섞여 있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고, 서방 어느 정부도 협상의 기초로 삼지 않았다. 소련이 바란 것은 현상의 확인이었고, 서방이 그 대가로 요구한 것은 현상의 변형이었다. 이 간극이 헬싱키까지 이어졌다.
서방이 문을 연 까닭, 그리고 디폴리에서 정해진 설계도
1972년 11월 22일 헬싱키 인근 디폴리에서 35개국 대표가 모였을 때, 이 자리가 열린 것 자체가 이미 소련의 20년 숙원에 대한 서방의 답이었다. 모스크바는 1966년 부쿠레슈티 선언과 1969년 부다페스트 호소로 계속 회의를 요구했지만 서방은 한결같이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는 단순했다. 회의가 어떤 내용을 담든, 열린다는 사실 그 자체가 소련의 승리가 될 터였다. 동유럽 국가들이 주권이 평등한 참가국으로 유럽의 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붉은 군대의 승리와 무력에 의한 체제 이식으로 생겨난 국경과 정권을 서방이 사실상 인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동독의 국가성을 국제사회가 확인해 주는 것 자체가 모스크바에는 목표의 절반이었다.
그러자 서방이 태도를 바꾼 쪽은 회의 자체의 매력 덕분이 아니라, 회의 밖에서 일어난 일 덕분이었다. 1969년 말 브란트의 서독 사민당·자민당 연정이 집권하며 '동방정책'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1970년 모스크바·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고 1971년 9월에는 베를린 4국 협정이 서명되었다. 서독 의회가 이 조약들을 1972년 봄에 비준하자, 서방은 비로소 '협정을 맺었으니 이제 회의에 응할 명분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소련이 회의를 국경의 국제적 승인으로 쓰려 했던 만큼, 서방은 회의 개최의 전제로 독일 문제의 잠정적 해결과 베를린의 지위 확정을 내걸었다. 회의는 소련이 원한 축하연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양보의 뒤에 따라오는 수순이 되었다.
디폴리의 예비협의는 6개월 가까이 이어지며 이 기계의 톱니를 하나씩 맞췄다. 가장 먼저 다툰 것은 이름이었다. 소련 진영의 '유럽 안전보장 회의'라는 명칭은 '안보'라는 단어로 미국을 자동 배제하려는 속셈이었고, 서방은 '유럽의 안보와 협력'이라는 명칭을 관철해 미국과 캐나다의 참가를 못박았다. 이것이 결정적인 승부였다. 소련은 회의가 순수한 유럽 문제여서 소련은 끼되 미국은 빠지는 구도, 즉 북미를 대서양 건너로 밀어내는 구도를 원했다. 서방은 거꾸로 대서양 양안 35개국이 모두 앉는 자리를 고집했고, 끝내 관철했다. 이어 의제를 세 갈래로 짜는 데 합의했다. 정치·군사 문제, 경제·과학·기술 협력, 그리고 인도적 협력이 그것이다. 셋째 갈래에서 소련은 '인권'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버티며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과 정보 교환을 '내정 간섭'으로 규정하려 했고, 서방은 거꾸로 이 갈래를 넣는 것을 회의 참가의 대가로 요구했다. 이 첫 인권 줄다리기가 바로 2년 뒤 제네바 실무 협상의 최대 쟁점이 될 예고였다.
1973년 7월 3일 외무장관급 1단계 회의가 열리기까지는 유럽 어디서도 큰 기대가 없었다. 서방 외교관들의 속내는 '별 의미 없는 문서에 서명하러 가는 자리'에 가까웠고, 소련측은 성과의 본질이 문서의 내용이 아니라 참가국들의 자리배치 그 자체에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디폴리에서 정해진 것은 둘 다 모르는 사이에 서로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뻗어 나갈 기계의 설계도였다. 소련이 요구한 이름 대신 얻은 이름은 미국을 들여왔고, 소련이 가장 두려워한 인권이 의제의 한 축으로 못박혔다. 회의를 국경 승인의 승리로 만들려던 설계자들이, 자신들의 서명이 반체제 운동의 무기가 될 씨앗을 이 첫 단계에서 이미 뿌리고 있었다.
제네바에서 벌어진 바구니 교환
1973년 9월 18일 제네바에서 시작된 2단계 실무 협상은 그 이름과 달리 단 하나의 회담이 아니었다. 약 2년 동안 35개국이 전문위원회별로 초안을 다듬는, 냉전기 다자 외교 사상 가장 길고 지루한 문서 작업이 펼쳐졌다.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양 진영이 같은 테이블에서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을 정하는 싸움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소련은 애초에 이 회의를 자신이 벌였다. 그런데 개시되고 보니 소련 쪽이 가장 조급해졌다. 브레즈네프는 1974년 3월 키신저를 무척이나 맞으면서 '회의가 3년째 질질 끌린다, 끝이 안 보인다'고 불평했고, 그로미코는 닉슨의 모스크바 방문 전에 문서라도 가조인해 두자고 졸랐다.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련이 원한 것은 제1바스켓 한 조항이었다. 국경의 불가침성을 문서에 박아 넣는 일, 다시 말해 전후 국경이 앞으로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서약을 서방의 서명으로 받아내는 일이었다. 이 한 문장을 얻는 대가로 소련은 나머지 전부를 치르고 있었다.
그 대가의 중심이 제3바스켓이었다. 서유럽 각국, 특히 노동당이 들어선 영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인권과 인적 교류에 뭔가 실질적인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고 버텼다. 소련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지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로미코가 키신저에게 건넨 말이 그 태도를 압축한다. 제3바스켓 관련 서류 더미에 대해 '10배로 부풀린다고 해도 대부분 휴지조각'이라 했고, 키신저는 '모스크바에 네덜란드 카바레 하나 연다고 소련 체제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받아쳤다. 양쪽 다 인권 조항을 허울로 봤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차이는 그 허울을 어떻게 다듬느냐였다. 소련은 문화·인도적 사안은 어디까지나 '국내 입법과 일치하는' 한도에서만 수용한다는 단서를 끝까지 고집했고, 키신저는 국내 입법과의 관계를 문구에 박아 주는 대신 서방이 제3바스켓에 내용을 채워 넣는 절충을 제안했다. 미국은 스스로 구체적 안 하나 내놓지 않으면서 말이다.
국경 불가침 문구마저 곧 텅 빈 채로 정해지지 않았다. 그로미코는 평화적 국경 변경 언급이 어디에 들어가느냐를 놓고 제네바 대표단의 '맨 언급 하나'까지 실시간으로 챙기며, 그 문구가 불가침 조항 맥락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는 모스크바-키신저 간 합의를 제안했다. 소련이 승리로 여긴 국경 조항은 이렇게 세공된 문장들의 총합이었다. 그리고 그 세공의 총액을 치르면서 소련은, 자신이 한 번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던 인권 의제를 최종문서 한가운데, 국경 조항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안았다. 애초 동구권 지배의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던 회의가 1975년 7월의 문서로 완성될 때, 그 문서가 결국 무엇의 발판이 될지는 제네바의 그 누구도, 특히 가장 이기고 있다고 믿었던 쪽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약이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발판이 되다
브레즈네프는 1975년 8월 1일 헬싱키에서 자신이 20년 넘게 밀어온 목표를 손에 쥐었다고 믿었다. 최종의정서 제1바스켓에는 국경 불가침, 영토 보전, 내정 불간섭이 적혀 있었고, 이는 전후 국경을 서방 스스로 문서로 승인한 것으로 읽혔다. 소련 언론은 이를 브레즈네프 개인의 승리로 선전했고,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을 두고 '휴지조각'이라 일축했다. 소련 지도부의 계산은 하나였다. 협정은 조약이 아니어서 비준도, 구속력도, 외부의 감독도 없으니, 인권 문구는 국내법에 부합하는 범위에서만 효력이 있고 따라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구속력 없는 종이'라는 성격이 무기를 만들었다. 정부가 국내에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기에, 반체제 인사는 아무 기관의 허가도 없이 스스로 감시자가 될 수 있었다.
물리학자 유리 오를로프가 그 점을 가장 빨리 읽어냈다. 그는 15년 넘게 이어져 온 반체제 운동의 경험 위에서,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문구를 인용해 되묻는 일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고 있었다. 1976년 5월 12일, 오를로프는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련 내 헬싱키 협정 이행 촉진 공공그룹'(훗날 모스크바헬싱키그룹)의 창립을 발표했다. 창립 성명은 서명국 정부들과 세계 여론에 협정 조항의 '직접적 위반 사례'를 알리겠다고 선언했고, 시민 누구에게서나 위반 제보를 받아 문서로 편찬하겠다고 밝혔다.
운동 방식 자체가 헬싱키 협정의 논리를 정면으로 빌렸다. 그룹은 검증을 거친 보고서마다 35부를 복사해 모스크바 주재 34개 서명국 대사관과 브레즈네프 본인에게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소련 정부가 '35개국이 함께 한 약속'이라 내세운 문서를, 이제 반체제 인사가 '그 35개국에 대한 보고'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서방 기자와 보이스오브아메리카, 라디오리버티가 그 소식을 실어 나르자, 소련 전역에서 시민들이 서면 제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창립 멤버는 오를로프 외에도 아나톨리 샤란스키, 류드밀라 알렉세예바, 엘레나 보네르, 알렉산드르 긴즈부르크, 아나톨리 마르첸코, 표트르 그리고렌코 등 11명이었고, 인권·이민 거부자(레퓨즈니크)·소수민족·종교·노동 문제를 다루던 각 갈래의 반체제 운동을 한데 잇는 다리 역할을 의도했다.
KGB는 즉각 반응했다. 1977년 초 그룹 지도부에 대한 체포가 시작됐고, 1978년 오를로프는 '반소 선동·선전'(러시아형법 70조)으로 중노동수용소 7년과 국내유형 5년을 선고받았다. 1982년까지 원년 멤버 중 자유의 몸은 엘레나 보네르, 소피아 칼리스트라토바, 나움 메이만 세 명뿐이었고, 그해 9월 해산이 선언됐다. 그러나 6년 동안 그룹이 뽑아낸 문서는 195건에 이르렀고, 이는 1977년 베오그라드 후속회의와 1980년 마드리드 회의의 심사 서류로 넘어갔다. 브레즈네프가 '아무 구속력 없는 종이'로 여긴 문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감시하는 기구를 낳았고, 그 기구의 보고서는 소련이 통제할 수 없는 국제 회의의 장으로 흘러들어갔다. 6년 뒤 모스크바헬싱키그룹은 해산했지만, 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그루지야·아르메니아의 감시 그룹은 이미 그 자리에서 이어받고 있었다.
헬싱키를 부정한 대통령, 헬싱키를 요구한 시민들
1976년 10월 6일 미국 대선 토론에서 헬싱키 최종의정서는 협상 테이블의 문구가 아니라 선거 쟁점이 되었다. 사회자 맥스 프랭클이 동유럽이 소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제럴드 포드는 “동유럽에 소련의 지배는 없다”고 답했고, 폴란드인과 루마니아인도 지배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포드가 말하려던 바는 달랐다. 그는 협정을 영토 양보가 아니라 긴장을 낮추고, 미국이 협상과 군사력을 함께 사용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점령군, 일당 지배, 모스크바의 결정권이라는 현실을 부정한 말은 동유럽의 자결을 팔아넘겼다는 공화당 내부의 비판을 되살렸다. 포드는 다음 날부터 해명했지만, 협정의 제1바스켓이 국경의 현상 유지를 인정한 것처럼 보였다는 불안과 제3바스켓이 정부의 행동을 심판할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긴장이 한 문장에 압축됐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그 기준이 추상적이지 않았다. 1976년 9월 프라하의 록 밴드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의 단원들이 공연과 외모를 이유로 체포되어 8개월에서 18개월의 형을 받자, 작가·철학자·전직 개혁 공산주의자들이 공동 대응을 시작했다. 1977년 1월 1일 발표된 「'77 헌장 선언문」은 정당이나 비밀 조직을 자처하지 않았다. 선언문은 자신들을 “느슨하고 비공식적이며 개방된 연합”이라 부르며, 체코슬로바키아 헌법, 유엔 인권규약, 1975년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적힌 권리를 정부가 실제로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이 선택은 체제 전복을 공개 선언하는 것보다 좁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정부가 서명한 문서의 언어로 정부를 고발할 수 있었다.
대가는 즉시 돌아왔다. 국가보안부는 1월 6일 바츨라프 하벨, 루드비크 바출리크, 파벨 란도프스키가 연방의회에 선언문을 전달하러 가던 차를 세우고 원본을 압수했으며, 서명자들을 심문했다. 당국은 선언문을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문서라고 규정했고, 해고·자녀 교육 제한·강제 망명·구금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미 서방 언론에 전달된 사본은 1월 7일 여러 신문에 실렸다. 포드가 미국에서 헬싱키의 정치적 의미를 실언으로 드러냈다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명자들은 그 문서가 약속한 권리를 일상의 탄압 사건에 적용했다. 소련과 동맹국이 국경의 승인으로 읽은 최종의정서는, 시민들에게는 국가가 스스로 받아든 의무 목록이 되었다.
서명한 약속을 심판대에 올린 회의, 회의에서 기구로
1977년 10월 4일 베오그라드에 모인 35개국 대표에게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새 문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서명한 문서를 자기 나라가 지켰는지 대답하는 일이었다. 베오그라드 후속 회의는 1978년 3월 9일까지 약 다섯 달 계속되었고,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은 제3바스켓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 조항을 의제의 중심에 놓았다. 동구권 대표들은 최종의정서가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이 아니며 국내 문제에 간섭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맞섰다. 그들에게 헬싱키의 실익은 군사적 긴장을 낮추고 국경과 경제 교류를 관리하는 데 있었지, 서방 정부가 사회주의 국가의 치안과 재판을 심사하는 데 있지 않았다. 반대로 서방과 비동맹국 일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77 헌장, 소련의 헬싱키 감시 활동 같은 사례를 들며, 인권을 외교적 장식으로 돌려놓으면 문서 전체가 공허해진다고 주장했다. 회의는 합의제였고 비공개였으며, 대부분의 토론은 속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따라서 베오그라드는 위반국을 판결하는 재판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헬싱키위원회가 남긴 평가처럼, 이 회의의 핵심 성과는 인권 이행을 데탕트의 정당한 검토 대상, 곧 국가가 국제적으로 설명해야 할 행위로 만든 데 있었다. 소련은 서방의 비난을 담은 강한 결론을 막았지만, 그 대가로 '국내 관할'이라는 방패만으로 후속 검토를 끝낼 수 없다는 선례를 허용했다. 이후 마드리드와 빈 회의는 이 관행을 이어갔고, 감시단체와 망명 활동가들은 회의장 밖에서 자료와 증언을 공급했다.
냉전이 끝나자 같은 과정의 성격도 바뀌었다. 1990년 11월 21일 서명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은 민주주의, 법치, 인권을 유럽의 공동 기반으로 선언하고 CSCE를 단순한 정상회담의 연쇄에서 상설 제도 쪽으로 밀어냈다. 전쟁과 국가 붕괴가 이어진 1990년대에는 선거 감시, 소수자 문제, 분쟁 예방과 현장 임무가 필요해졌고, 회의라는 이름만으로는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 정상회의에서 참가국들은 1995년 1월 1일부터 CSCE를 유럽안보협력기구, OSCE로 부르기로 했다.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사무국, 상설 협의 구조, 분쟁예방센터와 자유선거사무소를 갖춘 조직으로 헬싱키의 후속 절차를 운용할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다만 부다페스트 문서는 명칭 변경이 약속의 성격이나 CSCE와 그 기관들의 지위를 바꾸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이 조항은 헬싱키의 역설을 보존했다. 처음에는 조약이 아니어서 소련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정치적 약속이, 나중에는 서명국의 행위를 계속 비교하고 공개적으로 추궁하는 제도적 기준이 된 것이다.
승리였는가, 역전된 약속이었는가
헬싱키 최종의정서가 실제로 해결한 것은 전쟁 뒤 유럽의 질서를 하나의 조약으로 확정한 일이 아니었다. 이 문서는 의회의 비준을 거치는 국제조약이 아니었고, 법정에서 곧바로 집행할 의무도 만들지 않았다. 대신 35개국이 합의로 채택한 정치적 약속의 묶음이었다. 제1바스켓은 주권 평등, 무력 사용 금지, 영토 보전, 국경의 불가침과 평화적 변경을 함께 적었다. 따라서 소련이 원한 전후 현실의 인정은 얻었지만, 국경을 영원히 동결한다는 승인까지 얻은 것은 아니었다. 1975년의 문구는 국경을 평화적 수단으로 바꿀 가능성을 닫지 않았고, 발트 3국 병합을 합법화한다는 서방의 해석도 각국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더 컸다. 동유럽에 주둔한 소련군의 철수도, 각국 시민이 자기 정부를 바꿀 권리도, 서명국의 위반을 판결할 재판소도 최종의정서에는 없었다. 그래서 소련 지도부가 이를 영토와 세력권의 외교적 확인으로 읽은 것은 근거 없는 오독만은 아니었다. 브레즈네프에게 문서의 가치는 전후 국경을 둘러싼 서방의 수정주의를 누그러뜨리고, 경제·과학 교류를 얻으며, 데탕트를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반대로 서방 정부와 동유럽 반체제 세력은 제3바스켓의 가족 재결합, 여행, 정보와 인권에 관한 문장을 정부가 공개적으로 떠맡은 약속으로 읽었다. 법적 제재는 없었지만, 감시단은 그 약속과 실제 체포, 검열, 출국 거부를 나란히 놓아 국제적 비용을 만들 수 있었다.
역사가들이 아직 합의하지 못한 지점은 헬싱키가 공산주의 붕괴의 원인이었는가,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인 경제·정치 위기를 증폭한 통로였는가이다. 다니엘 토머스 같은 연구자는 반복되는 후속 회의와 초국적 감시가 국가 행동의 기준을 바꾸어 1980년대 시민운동에 힘을 주었다고 본다. 반면 외교사 연구자들은 군사적 균형, 경제 침체, 폴란드의 연대 운동, 고르바초프의 선택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며, 헬싱키는 그 결과를 연결하고 정당화한 언어였다고 강조한다. 두 해석은 반드시 양자택일일 필요가 없다. 최종의정서는 체제를 무너뜨릴 집행기관을 만들지 않았지만, 체제의 통치자들이 스스로 서명한 기준을 시민과 외부 관찰자가 반복해서 인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므로 헬싱키의 정착된 유산은 국경의 영구 승인도, 즉각적인 해방도 아니다. 서로 다른 안보 원칙과 인권 원칙을 한 문서에 묶어, 그 모순을 장기간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 만든 과정이다.
결과
헬싱키 협정은 구속력 있는 조약이 아닌 정치적 선언이었으나, 그 파급력은 실로 컸다. 제3바스켓을 감시하기 위해 1976년 모스크바헬싱키그룹(유리 오를로프,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이 결성되었고, 이어 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그루지야에 헬싱키 감시 그룹이, 1977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77 헌장'이 등장했다. 서방에서는 헬싱키워치(이후 휴먼라이츠워치)가 설립되었다. 카터 행정부는 1977년부터 인권을 대소련 외교의 핵심 의제로 삼았다. 협정은 1995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가 동구권 지배의 국제적 승인으로 여겼던 문서는, 장기적으로 그 지배를 무너뜨리는 규범적 무기가 되었다.
연표
- 1954소련, 유럽안보회의 첫 제안
소련은 제네바 외상회의에서 유럽안보회의를 처음 제안했다. 전후 국경의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는 의도였으나, 서방은 소련의 입지 강화를 우려해 거부했다.
- 1965바르샤바조약기구, 유럽안보회의 재추진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은 유럽안보협력회의 소집을 공식 제안했다. 이후 몇 년간 동서 간 예비 접촉이 이어졌다.
- 1972.11헬싱키 사전 협의 개시
35개국 대표가 핀란드 헬싱키에 모여 본회의 의제와 절차를 협의했다.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서방의 태도가 바뀐 결과였다.
- 1973.07.031단계: 헬싱키 외상회의
외무장관급 회의가 7월 3일부터 7일까지 열려 협상의 기본 틀을 승인했다. 35개 참가국 모두가 참여하는 3단계 구조에 합의했다.
- 1973.09.182단계: 제네바 실무 협상
실무 협상이 제네바에서 시작되어 1975년 7월 21일까지 거의 2년간 이어졌다. 전문위원회가 바스켓별로 초안을 작성했으며, 인권 조항을 둘러싼 동서 간 이견이 가장 첨예했다.
- 1975.07.303단계: 헬싱키 정상회담 개막
35개국 정상이 7월 30일 헬싱키에 모였다. 브레즈네프, 포드, 키신저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의 정상회담이 시작되었다.
- 1975.08.01최종의정서 서명
35개국 정상이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알바니아만이 불참했다. 정치·군사, 경제, 인권의 세 바스켓과 후속 회의 절차가 문서에 담겼다.
- 1976.05.12모스크바헬싱키그룹 결성
물리학자 유리 오를로프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자택에서 모스크바헬싱키그룹을 결성했다. 소련 정부가 서명한 헬싱키 인권 조항의 이행을 감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KGB는 즉시 감시와 탄압에 착수했다.
- 1976.10.06포드의 토론 실언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대선 TV 토론에서 '소련의 동유럽 지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언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헬싱키 협정이 동유럽의 소련 지배를 승인했다는 비판이 공화당 예비선거와 본선거 내내 포드를 괴롭혔다.
- 1977.01체코슬로바키아 '77 헌장'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 등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이 정부가 헬싱키 협정에서 약속한 인권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는 '77 헌장'을 발표했다. 정부는 서명자들을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 1977.10.04베오그라드 후속 회의
헬싱키 협정 이행을 점검하기 위한 첫 후속 회의가 베오그라드에서 열렸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 이행을 의제의 중심에 올렸고, 회의는 이행 감시 체계를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95.01.01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출범
헬싱키 협정과 1990년 파리헌장에 기초하여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상설 기구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전환되었다. 헬싱키 프로세스가 국제기구로 제도화된 것이다.
관련 인물 10명
지도부2
참여7
1954년 베를린 외상회의에서 범유럽 집단안보 조약을 제안하며 소련의 유럽안보회의 캠페인을 시작했고, 이는 헬싱키 협정까지 이어지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 측 실무 수석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제네바에서 국경 불가침 원칙을 밀어붙이는 한편, 제3바스켓 인권 조항을 '휴지조각'이라 일축하며 국내법 일치 조항을 고수했다.
미국 측 협상 주도자헨리 키신저1923–2023CSCE를 '무의미한 연극'이라 평가절하하면서도, 제네바에서 국경 불가침 문구와 제3바스켓 체계를 맞교환하는 실무를 주도했다.
모스크바헬싱키그룹의 터전을 내준 인물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1976년 5월 12일 자신의 자택을 내주어 오를로프의 모스크바헬싱키그룹 창립 기자회견이 열리게 했고, 이후 그룹 활동을 뒷받침하다 탄압을 함께 겪었다.
유럽안보회의 제안자아담 라파츠키1909–19701964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동구권 재추진을 촉발했다.
'77 헌장 공동 대변인바츨라프 하벨1936–20111977년 1월 '77 헌장을 공동 발표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국내 인권법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헬싱키 최종의정서 연계 작업을 돕고 제3대 대변인지리 하예크1913–1993전 외무장관으로서 시민권 투쟁을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연결했다.
관련 용어
출처: Office of the Historian, U.S. Department of State, 'Helsinki Final Act, 1975,' Milestones: 1969–1976.National Security Archive, 'The Moscow Helsinki Group 30th Anniversary: From the Secret Files,' Electronic Briefing Book No. 191, May 12, 2006.Я. Ф. Чернов, «Хельсинкское совещание», Советская военн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Том 8 (Москва, 1980), размещено на Хронос (hrono.ru).OSCE, 'Helsinki Final Act' (full text), osce.org.Wikipedia, 'Helsinki Accords' (en) and 'Хельсинкские соглашения' (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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