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야의 몰락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는 어떻게, 왜 그의 동료들에게 제거되었는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는 제1부총리이자 내무부(MVD) 수장으로 사면·탈스탈린화·대외 완화 등 개혁을 주도하며 강력해졌다. 그의 야심과 보안기구 장악을 두려워한 흐루쇼프·말렌코프·몰로토프 등 간부단은 1953년 6월 주코프 휘하 군 장교들의 도움으로 그를 체포했다. 베리야는 12월 재판 뒤 측근들과 함께 처형됐다.
독재자의 마지막 겨울: 1953년 3월의 크렘린
1953년 3월 1일 밤,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소련을 움직이던 사람은 열 명 남짓이었다. 그 열 명은 지난 8년 동안 스탈린이 직접 설계한 공포의 질서 속에서 살아왔다.
전후 스탈린은 정치국 전체 회의를 사실상 폐지했다. 1946년 9월부터 사망까지 공식 정치국 회의는 단 두 차례 열렸다. 대신 스탈린은 말렌코프·베리야·흐루쇼프·불가닌 등 5~7명을 매주 쿤체보 별장으로 불러들여 새벽 4시 넘어까지 이어지는 만찬을 주재했다. 그 자리에서 국가 중대사가 결정됐고, 참석하지 못한 정치국원들에게는 '서면 동의' 형식으로 통보됐다. 동시에 스탈린은 각료회의 산하에 정례적으로 운영되는 전문 위원회들을 구축해 경제·행정 업무를 분산시켰다. 그 위원회들을 실제로 움직인 인물이 말렌코프였고, 거기서 집단적 의사 결정이라는 습관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탈린은 구세대 방식으로 자신이 주인임을 확인시켰다. 1949~50년의 '레닌그라드 사건'에서는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알렉세이 쿠즈네초프를 포함한 즈다노프 계열 간부들을 체포해 총살했다. 1951년 11월에는 베리야의 측근들, 밍그렐리아 출신 그루지야 당 간부들을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을 개시하여 베리야의 후견망을 조이고 그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1949년에는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해 수용소로 보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 대회 직후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미코얀을 공개적으로 공격했고, 흐루쇼프는 훗날 "스탈린이 몇 달만 더 살았더라면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이 대회에서 연설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이 대회에서 정치국은 25명의 확대된 '주석단'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가운데 9명만으로 구성된 비공식 '주석단 뷰로'를 따로 만들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그 9명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후계 구도를 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1953년 초까지도 공포는 식지 않았다. 이른바 '의사 사건'이 진행 중이었다. 크렘린 주치의들(다수가 유대인이었다)이 서방 정보기관의 지시로 소련 지도부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가 1953년 1월 13일 《프라우다》 1면에 실렸다. 이 작품을 밀어붙인 이는 MGB(국가보안성) 장관 세묜 이그나티예프였고, 체포와 고문이 확대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이 사건을 대규모 숙청의 불쏘시개로 삼으려 했다고 여러 사료는 전한다.
보안기구 자체도 분열되어 있었다. 베리야는 1945년 NKVD(내무인민위원부) 장관직을 내려놓은 뒤 '보안기관 감독자'라는 모호한 지위에 머물렀다. 내무성(MVD)은 세르게이 크루글로프가, 국가보안성(MGB)은 빅토르 아바쿠모프(1951년 체포)를 거쳐 이그나티예프가 각각 장악했다. 둘 다 베리야의 사람이 아니었다. 베리야가 직접 통제한 것은 원자폭탄 개발과 해외정보 분야뿐이었다.
스탈린은 74세였다. 1945년 심근경색을 겪었고 중증 고혈압과 동맥경화를 앓았다. 말년의 그는 밤샘 술자리 후 오전까지 잠들고 오후에야 집무를 보는 리듬으로 살았다. 그가 없는 낮 시간 동안 각료회의 뷰로는 사실상의 집단 지도부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깨어나기만 하면 모든 결정은 번복될 수 있었다.
2월 28일 밤에도 스탈린은 베리야·말렌코프·흐루쇼프·불가닌을 크렘린에서 영화를 본 뒤 쿤체보 별장으로 데려가 새벽 5시까지 술자리를 이어갔다. 손님들이 떠난 지 20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침실 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의사를 부르기까지 다시 12시간이 걸렸다. 의사 사건의 여파로 스탈린의 주치의가 루뱐카 지하실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시절, 누구도 독단으로 의사를 부를 용기를 내지 못했다.
베리야의 아내 니나는 스탈린의 죽음이 확정되자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네 자리는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위험해졌다."
죽음의 침상에서 첫 각료회의까지: 1953년 3월 1~6일
1953년 3월 1일 새벽 5시, 스탈린의 쿤체보 다차에서 모인 간부단이 흩어졌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술을 많이 마셨고 기분이 좋았다. 그날 하루 종일 스탈린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방에 움직임 감지 센서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의사 사건의 여파로 스탈린의 주치의마저 루뱐카 지하실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밤 11시가 돼서야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스탈린은 잠옷 차림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의식이 없었으며, 호흡은 가쁘고 실금 상태였다.
흐루쇼프와 불가닌이 가장 먼저 연락을 받았지만, 스탈린의 분노를 두려워한 그들은 감히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불렀다. 베리야는 3월 2일 새벽 3시에 도착했다. 경비 책임자 로즈가초프가 스탈린이 '아프고 의료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하자, 베리야는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마라, 공황 상태를 만들지 마라, 그리고 스탈린 동지를 방해하지 마라!"라고 소리치고는 자리를 떴다. 의사 호출은 무려 12시간 동안 미뤄졌다.
이후 흐루쇼프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광경은 섬뜩했다.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다가가 "스탈린에 대한 증오를 토해내고 조롱했다." 스탈린이 의식의 기미를 보이면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췄다가, 다시 의식을 잃으면 즉시 일어나 침을 뱉었다. 몬테피오레는 이를 두고 "죽은 왕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는 것" 같았다고 적었다.
3월 5일 오후 9시 50분, 스탈린이 사망했다. 베리야는 가장 먼저 시신에 입을 맞추었고, 방을 나서며 자신의 운전사를 큰 소리로 불렀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그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승리의 기운"을 느꼈다. 미코얀이 흐루쇼프에게 "그가 권력을 잡으러 가는군"이라고 중얼거렸고, 두 사람은 황급히 자신들의 리무진을 타고 크렘린으로 달려갔다.
바로 다음 날인 3월 6일, 새 정부 구성이 발표되었다. 말렌코프가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베리야는 그 아래 제1부의장 겸 새롭게 통합된 내무부(MVD)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 통합은 결정적이었다. MGB(국가보안부)가 MVD에 흡수되면서 비밀경찰과 일반 경찰, 그리고 굴라그 전체가 한 사람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1945년 이후로 베리야가 보안기관을 직접 장악한 적은 없었다. 이제 그는 15년 전 NKVD 수장 시절보다도 더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크루글로프가 그의 제1차관으로 임명되었고, 메르쿨로프는 국가통제장관이 되었다.
베리야는 스탈린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준비하던 숙청, 즉 의사 사건과 밍그렐 사건을 즉시 중단시켰다. 4월 3일, MVD는 공식 성명을 통해 의사 사건이 조작이었다고 발표했다. 체포되었던 의사들은 무죄 석방되었고, 사건을 날조한 MGB 수사 책임자 류민은 체포되었다. 이그나티예프는 당 중앙위 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3월 26일 베리야가 초안을 작성한 사면령은 다음 날인 27일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명의로 발표되어, 120만 명 이상의 죄수가 석방되기 시작했다. 굴라그의 거대 건설 프로젝트들, 예컨대 살레하르트-이간카 철도 같은 사업들이 중단되었고, 수용소 체계는 사법부로 이관될 준비가 시작되었다.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베리야는 말렌코프, 몰로토프와 함께 연설했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스탈린의 관 바로 옆이었다. 불과 100일 뒤 같은 자들이 그를 총살형에 처하게 될 줄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1953년 6월 26일: 주석단 회의실에서 지하 벙커까지
베리야는 6월 26일 아무런 의심 없이 크렘린에 들어섰다. 안건은 세묜 이그나티예프, 즉 베리야가 체포 명령을 내린 전 국가보안상의 사건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흐루쇼프가 6월 중순부터 준비한 매복이었다.
흐루쇼프는 베리야 제거 계획을 말렌코프에게 먼저 털어놓았다. "그가 보안기관을 손에 쥐고 있는 한 우리 손은 완전히 묶여 있다"고 설득했다. 말렌코프는 베리야와 오랜 동맹이었지만 동의했다. 흐루쇼프는 이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불가닌을 한 명씩, 도청을 피해 모두 야외 산책 중에 포섭했다. 미코얀만이 베리야를 지방 당직으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됐다. 결정적 계기는 6월 21일이었다: 베리야에게 해임·협박당한 우크라이나 내무성 간부 티모페이 스트로카치가 흐루쇼프를 찾아와 베리야가 특별 내무사단을 모스크바로 이동시켜 쿠데타를 준비 중이며, 곧 "지역 내무국장은 당 비서에게 답변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흐루쇼프는 불가닌을 통해 주코프 원수를 끌어들였고, 모스크바 방공군 사령관 키릴 모스칼렌코가 체포조를 지휘하게 했다. 무장한 장군들을 크렘린 안으로 들이는 것은 불가닌의 몫이었다. 당시 크렘린 출입자는 무기를 코멘다투라에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회의가 시작되자 말렌코프는 의제를 제쳐두고 베리야의 착오, 특히 발트 지역과 우크라이나에서의 인사 정책을 거론하자고 제안했다. 흐루쇼프가 곧바로 "반당적 분파 활동을 하는 제국주의 첩자"라고 포문을 열었고, 몰로토프 등이 가세했다. 베리야는 당황하여 "니키타,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다. 말렌코프가 책상 아래 버튼을 누르자 주코프, 모스칼렌코와 장교들이 권총을 빼들고 뛰어들었다. 주코프가 "손 들어! 일어서! 체포되었다!"라고 외쳤다. 베리야는 반사적으로 창턱 위 서류가방으로 손을 뻗었으나 흐루쇼프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방 안에는 무기가 없었다.
베리야의 부하들이 크렘린 경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된 베리야는 해 질 녘까지 크렘린 내 특별실에 구금된 뒤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반출됐다. 불가닌 국방상의 명령으로 칸테미롭스카야 전차사단과 타만스카야 차량화소총사단이 모스크바로 진입해 베리야 측근의 구출 시도를 봉쇄했다. 베리야는 레포르토보 감옥을 거쳐 모스칼렌코의 모스크바 방공군 지휘부 벙커에 수감됐다. 그해 12월 총살될 때까지 6개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같은 날 저녁, 흐루쇼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이 개자식을 영원히 끝장냈다."
12월의 폐쇄법정: 재판 없는 재판
1953년 12월 10일, 프레지디움은 특별 결의로 베리야 재판의 형식을 확정했다. 1934년 12월 1일 법, 즉 키로프 암살 직후 도입되어 모든 피고인에게 변호인 선임권·상소권·사면 청원권을 박탈하고 사형 선고 즉시 집행을 규정한 특별 절차가 적용되었다. "당사자의 참여 없이 비공개로" 진행하라는 지시는, 베리야가 자신이 수만 명에게 적용했던 바로 그 법적 틀 안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열린 특별재판소는 원수 이반 코네프를 재판장으로 하고, 전직 국가원수 니콜라이 시베르니크, 게오르기 주코프 대신 체포조를 직접 지휘했던 키릴 모스칼렌코 대장, 모스크바 당 책임자 니콜라이 미하일로프, 그리고 MVD 제1차장 콘스탄틴 루네프 등 8인으로 구성되었다. 루네프의 존재는 특히 의미심장했다: 베리야의 옛 기관이 이제 자신의 수장을 단죄하는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 구성은 군부·당·노조·사법부가 한데 모여 비밀경찰을 심판하는 정치적 연출이었으며, 이삭 도이처는 이를 "군대와 정치경찰 간의 결투"라고 표현했다.
기소 내용은 RSFSR 형법 제58조 1항 '나'호(조국 반역), 제8호(테러), 제11호(반소비에트 음모), 그리고 베리야에게만 추가된 제13호(1919년 무사바트 정권 시절의 반혁명 활동)였다. 고발장은 베리야가 "자본주의 복원과 부르주아 지배 회복"을 목표로 음모 집단을 조직했으며, 1919년 바쿠에서 영국 첩보기관의 통제 아래 있던 무사바트 방첩기관에서 비밀 요원으로 근무함으로써 반역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독일 점령 하에 캅카스를 두려는 시도, 대숙청 시기 "정직한 당원에 대한 테러", 집단농장 체계를 저해하려는 사보타주, 그리고 소수민족 공화국에서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부활 시도 등 혐의가 나열되었다.
눈에 띄는 것은 기소장에 없는 내용이었다. 베리야는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핵심 집행자였지만, 검찰은 이 점을 본격적으로 추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피고석 밖에 있었다: 흐루쇼프·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를 비롯한 프레지디움 전원이 바로 그 탄압 정책의 공동 책임자였던 것이다. 니키타 페트로프가 지적하듯, 베리야가 심문에서 "이것은 스탈린의 지시였다"고 반박할 때마다, 그 답변은 법정뿐 아니라 크렘린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피고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유일한 방어선을 취했다: 대숙청 시절의 범죄는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음모 혐의는 부인한 것이다. 베리야는 최후 진술에서 "1937-38년 사회주의 적법성의 왜곡과 과잉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만, 거기에 사적이고 적대적인 목적은 없었다. 내 범죄의 원인은 그 시대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12월 23일, 특별재판소는 7명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메르쿨로프·데카노조프·코불로프·고글리제·메시크·블로지미르스키는 선고 직후 총살되었다. 베리야는 이들과 분리되어 처형되었다. 파벨 바티츠키 대장이 작성한 집행 확인서는 19시 50분에 로만 루덴코 검찰총장과 모스칼렌코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탄이 발사되었다고 기록했다. 베리야는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1940년 자신이 처형한 니콜라이 예조프의 마지막 모습과 닮은 결말이었다. 시신은 돈스코이 화장터에서 소각되었고, 베리야의 개인 문서고는 흐루쇼프의 명령으로 파기되었다. 흐루쇼프 일파는 베리야가 동료들에 대해 수집한 '협박 자료'가 살아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54년 1월, 소련 대백과사전 구독자들은 베리야 항목을 "면도날로 잘라내고" 대신 베링 해협에 관한 확장된 기사를 붙이도록 안내받았다.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남았는가
베리야의 처형은 소련 정치체제에서 두 가지를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첫째, 비밀경찰은 더 이상 당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권력기관이 될 수 없었다. 1954년 3월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신설되면서 보안기구는 명시적으로 당 중앙위원회의 한 부서 지위로 격하됐고, 초대 의장 이반 세로프는 군 출신도 베리야의 측근도 아닌 당료였다. 둘째, 권력투쟁에서 패자가 죽지 않는 선례가 세워졌다. 말렌코프는 1955년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살았고,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1957년 「반당집단」으로 낙인찍혔지만 총살당하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됐다. 주코프도 같은 해 국방장관에서 해임됐으나 목숨은 건졌다. 스탈린기에는 패배가 곧 사형이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도 컸다. 베리야 한 사람과 그 측근 여섯 명을 제거했다고 해서 스탈린주의 체제 전체가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비밀경찰이 당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 통제는 법치가 아니라 당 간부들의 정치적 감독에 의존했고, KGB는 여전히 소련 사회 전체를 감시하고 억압하는 거대한 기구로 남았다. 베리야의 후계자들 가운데 한 명인 유리 안드로포프는 1982년 마침내 당 서기장이 되어 보안기관 출신으로는 베리야 이후 처음으로 국가 최고권력을 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드로포프는 개혁가로 평가받았다. 에이미 나이트(Amy Knight)는 「베리야: 스탈린의 제1부관」(1993)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독재적 통치의 오랜 역사는 소련 이후에도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수년간 정치적 진화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되는 지점이 적지 않다. 가장 오래된 논쟁은 베리야가 언제 죽었느냐다. 공식 기록은 1953년 12월 23일 특별재판부 판결 직후 파벨 바티츠키 장군이 권총으로 처형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는 6월 체포 당일 이미 살해됐다고 평생 주장했고, 이 견해는 일부 역사가들의 지지를 받는다. 에이미 나이트는 이를 기각했지만, 12월 재판의 피고가 베리야 본인이 아니라 대역이었다는 의혹은 여전히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사크 도이처(Isaac Deutscher)는 1954년 2월 이미 재판의 가장 큰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법정을 지배한 것은 군이었고, 피고석에 앉은 것은 경찰뿐이었으며, 피고의 자백도, 대중의 광란도 없었다는 점에서 1930년대의 구경식 재판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논쟁은 베리야의 개혁이 진정한 것이었느냐다. 스탈린 사후 석 달 동안 베리야가 추진한 정책들, 즉 100만 명 이상의 사면, 의사들 사건의 번복, 비러시아계 민족에 대한 자치 확대, 동독 사회주의 건설 포기 가능성 시사는 단순한 권력 장악용 책략이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체제 개혁 구상이었을까.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는 흐루쇼프 일행이 베리야를 제거한 이유가 단지 그가 살인경찰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개혁안이 국가 질서의 안정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베리야만큼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가진 소비에트 지도자는 고르바초프 이전에는 없었다"고 평가했다. 에이미 나이트도 베리야가 흐루쇼프보다 더 빠르고 과감하게 소비에트 체제를 변형시켰을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베리야가 추진한 민족정책의 분권화가 오히려 그가 장악한 MVD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고 반박한다.
베리야의 몰락은 '집단지도체제'라는 이념을 낳았지만, 그 이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흐루쇼프는 1957년 반당집단을 분쇄한 뒤 당 제1서기와 각료회의 의장을 겸임하며 스탈린과 같은 일인집중 체제를 재건했고, 1964년 자신도 그 때문에 축출됐다. 베리야를 제거하며 세운 '패자는 살려둔다'는 원칙은 지켜졌으나, 권력분산의 제도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리야 사건이 끝낸 것은 한 경찰총수의 야망이었지, 일인독재의 구조 자체는 아니었다.
역사가들이 아직도 다투는 것들
베리야의 몰락이 소련 체제에 남긴 흔적은 분명하지만, 그 사건 자체는 여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확실한 것부터 짚자. 1953년 6월 26일 이후, 소련의 보안기구는 다시는 당 위에 서지 못했다. 1954년 3월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창설되면서 비밀경찰은 각료회의 산하 기관으로 격하되었고, 그 의장은 중앙위원회에 보고하는 당 간부로 규정되었다. 흐루쇼프는 베리야의 제거로 집단지도 체제의 가장 위험한 적을 없앴고, 그 자신은 1955년까지 말렌코프를 밀어내며 제1서기로서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패자는 죽는다」는 스탈린주의의 암묵적 원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는 1957년 흐루쇼프에게 패배했지만 총살당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합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적어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베리야의 개혁이 진정성이 있었느냐는 물음이다. 에이미 나이트는 베리야의 사면, 의사 사건 철회, 민족공화국 간부의 현지화 조치가 단순한 권력 공작 이상이었다고 본다. 로버트 서비스는 「흐루쇼프와 그 동료들이 베리야를 제거한 것은 그가 살인 경찰관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제안이 국가 질서의 안정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실제로 베리야는 동독을 「소련군이 있어야만 유지되는 가짜 국가」라고 불렀고, 통일된 중립 독일과 서방 원조를 맞바꾸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 이는 1989년 고르바초프 이전까지 어떤 소련 지도자도 내놓지 않은 수준의 구상이었다. 반대편에서는 베리야의 자유화 조치가 오직 혼란을 조장해 보안기구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술책이었다고 주장한다. 베리야는 스탈린 사망 직후 100만 명 이상을 사면했지만 정치범은 제외했고, 그가 임명한 공화국 내무장관들은 모두 그의 개인적 측근들이었다.
둘째, 베리야가 실제로 언제 죽었느냐는 문제다. 공식 기록은 1953년 12월 23일 특별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하고 파벨 바티츠키가 즉시 집행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은 사건 당일부터 제기되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는 베리야가 체포 직후 살해되었다고 주장했고,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는 6월 26일에 아버지의 사망을 통보받았다고 평생 말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12월의 재판은 이미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사후 합법화였다. 에이미 나이트는 이 주장을 검토한 뒤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지만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아카이브가 완전히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셋째, 이 사건이 스탈린주의와 얼마나 단절되었느냐는 해석의 문제다. 이사크 도이처는 1954년 2월, 베리야 재판이 1930년대의 구식 쇼 재판과 달리 「부끄러울 정도로 간결했다」고 지적하며, 피고인들이 구공개정에서 자백하는 연출을 포기한 것 자체가 변화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재판부 구성이 군부·당·경찰의 정치적 연합체였고, 죄목은 여전히 「외국 스파이」와 「자본주의 복원 음모」라는 낡은 틀을 따랐다고 덧붙였다. 베리야라는 인물은 사라졌지만, 그를 제거한 방식은 스탈린주의 정치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베리야의 몰락은 소련 체제가 대량 테러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였지만, 동시에 권력 투쟁의 규칙이 아직 완전히 다시 쓰이지는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베리야 이후: 권력의 문법이 바뀌다
베리야의 몰락이 소련 정치에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은, 한 사람이 쥘 수 있는 공포의 절대량이 아니라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경로 자체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1953년 6월 26일까지, 소련 보안기구는 한 사람에게 직속된 도구였다. 야고다에서 예조프, 예조프에서 베리야로 넘어가는 동안 그 도구는 주인만 바뀌었을 뿐, 그 자신이 당이나 정부의 통제를 받은 적은 없었다. 베리야를 제거한 간부단이 그 이튿날부터 한 일은 그 도구를 분해하는 것이었다.
1953년 7월, 내무부(MVD)에서 국가보안 기능이 분리되어 1954년 3월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신설되었지만, 이는 더 이상 총수의 개인 도구가 아니었다. KGB 의장은 각료회의 산하에 놓였고, 당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의 감독을 받았으며, 지역 보안 책임자는 해당 지역 당 제1서기에게 보고해야 했다. 이반 세로프가 초대 의장이 되었지만, 1958년 흐루쇼프가 그를 교체할 때도 1930년대식 피의 숙청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안기구의 수장 교체가 더 이상 수장 자신과 그 측근들의 목숨을 요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패자가 죽지 않는」 정치, 곧 집단지도 체제의 실질적 내용이었다. 1957년 흐루쇼프가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 등 「반당 그룹」을 축출할 때도 그들은 중앙위원회 투표로 패배했을 뿐, 총살되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몽골 대사로, 말렌코프는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이후 연금을 받으며 살았다. 1964년 흐루쇼프 자신도 쿠데타로 실각했으나 모스크바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베리야 사건이 닫은 것은 개인 독재자의 손에 보안기구가 직속되던 시대의 문이었고, 연 것은 관료적 집단지도 체제 아래에서 권력 투쟁이 진행되는, 잔혹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새로운 단계였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다투어지는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베리야가 실제로 쿠데타를 계획했는가이다. CIA의 1954년 CAESAR 보고서와 당시 서방 분석은 베리야가 두 개의 MVD 사단을 모스크바로 이동시켰다는 정보를 신중히 기록했으나, 결정적 물증은 없다. 흐루쇼프 회고록은 티모페이 스트로카치의 경고를 결정적 계기로 묘사하지만, 이 역시 흐루쇼프 사후의 진술이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베리야가 쿠데타를 준비했다기보다, 그가 보안기구를 통해 쌓은 정보력과 협박 가능성 자체가 나머지 간부들에게 쿠데타의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고 본다. 둘째, 베리야의 사망 시점이다. 1953년 12월 23일이라는 공식 일자에 대해, 그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체포 당일 사살되었다고 주장했고, 일부 러시아 연구자들은 12월 재판 자체가 이미 사망한 인물을 대상으로 한 위장극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검찰총장 로만 루덴코, 파벨 바티츠키 장군, 키릴 모스칼렌코 원수 등이 남긴 집행 조서와 회고록은 12월 23일 집행설을 뒷받침하며, 대다수 서방 및 러시아 학계도 이 시기를 받아들인다. 셋째, 베리야의 1953년 봄 개혁이 진정한 신념인가 아니면 권력 장악을 위한 포즈인가이다. 독일 통일을 거론하고 발트 3국에 실질적 자치를 제안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모든 제안은 그가 보안기구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나왔다. 1954년 이사크 도이처는 그를 「전체주의 국가의 반자유주의적 경찰 수장」이라는 역설로 표현했고, 에이미 나이트는 그의 1993년 전기에서 개혁을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로 읽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베리야에게 개혁은 목표가 아니라 무기였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베리야가 정치 탄압의 조직자로서 「정치 탄압 희생자 재활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베리야는 러시아와 그루지야 어디에서도 공식적으로 복권된 적이 없다. 그의 몰락이 열어젖힌 것은 개혁의 시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폭력이 더 이상 한 사람의 사적 도구로 작동하지 않는 정치 체제, 불완전하고 위태롭지만 전과는 다른 종류의 소비에트 권력이었다.
역사가 내리지 못한 판결
베리야 사건이 남긴 가장 깊은 질문은 사실관계가 아니라 해석에 관한 것이다.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 사후 114일 동안 추진한 개혁, 즉 백만 명에 가까운 사면, 의사들 사건의 번복, 강제수용소 체계의 법무부 이관, 비러시아 공화국에 대한 토착화 정책, 동독 사회주의 강요 중단과 독일 통일 논의 가능성은 소련 체제가 스탈린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표현대로, "고르바초프 이전까지 그토록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가진 소비에트 지도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 경로를 제시한 사람이 바로 스탈린의 가장 잔혹한 집행자였고, 그를 제거한 사람들이 나중에 그 개혁의 상당 부분을, 더 느리고 덜 위험하게, 자신들의 이름으로 시행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을 단순한 권력투쟁 이상으로 만든다.
이 모순은 소비에트학 역사학을 오랫동안 갈라놓았다. 에이미 나이트는 베리야의 개혁이 기회주의 이상이었다고, 그가 실질적으로 체제의 기본 축을 재편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반대편에서는 베리야가 개혁을 의도적으로 급진화해 혼란을 조성하고, 그 혼란 속에서 보안기구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고 본다. 이사크 도이처는 1954년 2월,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두 달 뒤에 이미 이 역설을 포착했다: "반스탈린주의적 반동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모든 파벌 지도자, 모든 권력 지망자가 이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자유화론자' 행세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열린 질문은 베리야가 정말로 1953년 12월 23일에 재판을 받았는가이다. 특별재판부 판결문은 존재하지만, 재판은 비공개였고, 변호인도 항소권도 없었으며, 베리야의 체포부터 처형까지의 6개월 동안 그의 사진이나 영상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아들 세르고는 평생 아버지가 6월 26일 체포 당일 살해되었다고 믿었다. 1953년 7월 전원회의에서 라자르 카가노비치가 "우리는 이 악당을 단번에 끝장냈다"고 말한 발언은 실수였을까, 아니면 진실이 새어나온 순간이었을까. 세르게이 메드베데프의 2014년 다큐멘터리는 베리야가 말라야 니키츠카야 거리 저택에서 체포조에 의해 즉시 사살되었다는 가설을 진지하게 제기했다. 반면 에이미 나이트는 베리야가 12월 재판에서 실제로 출정했고, 최후 진술에서 "나는 재판부에 내 범죄를 상세히 말했다"고 진술했다는 점을 들어 정식 재판설을 지지한다. 소련 검찰총장 루덴코와 집행자 바티츠키가 서명한 사형 집행 조서도 존재하지만, 조서는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수 있는 종이였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베리야를 정치적 탄압의 조직자로 인정하고 복권을 거부했다. 이 판결은 오늘날의 러시아 국가가 베리야를 어떻게 기억하기로 선택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판결은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보다는, 누가 그 진실을 결정할 권한을 갖는지에 관한 판결이기도 했다. 베리야의 개인 기록보관소는 흐루쇼프의 명령으로 폐기되었고, 그의 동료 간부들에 관한 '타협 자료'는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가 아는 베리야 사건은 증거가 의도적으로 파괴된 사건이며, 바로 그 때문에 마지막 장을 쓸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종착역: 닫힌 것과 열린 것
베리야의 몰락이 결정적으로 닫은 것은 한 가지다. 보안기구가 다시는 당 위에 서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1954년 3월 새로 신설된 국가보안위원회(KGB)는 내무부(MVD)에서 분리되어 각료회의 산하 기관으로 위상이 격하됐고, 그 의장은 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할 의무를 졌다. 스탈린기에는 NKVD 수장이 정치국원을 체포할 수 있었지만, 1954년 이후 KGB 의장은 정치국원이 되기 전까지 정치국원을 건드릴 수 없었다. 이반 세로프가 초대 의장으로 임명된 것은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보안 간부가 기관을 재편한다는 상징이었다. 같은 해 아바쿠모프가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을 받고 총살된 것도, 보안기구가 저지른 범죄을 당이 사후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운 장면이었다.
닫히지 않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베리야가 실제로 언제 죽었는가다. 공식 기록은 1953년 12월 23일 특별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하고 파벨 바티츠키 대장이 권총으로 집행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는 6월 26일 체포 당일에 아버지가 살해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평생 주장했고, 소련 붕괴 후 출간된 회고록들도 6월에서 12월 사이의 행방이 빈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스칼렌코의 회고록은 베리야가 판결문 낭독 전 이미 두려움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그게 살아 있었다는 증거인지 죽음을 앞둔 상태라는 암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째, 베리야가 내놓은 개혁이 진심이었는가, 아니면 권력 장악을 위한 연막이었는가다. 에이미 나이트는 1993년 전기 『베리야: 스탈린의 제1부관』에서 베리야의 사면 조치, 민족어 정책, 동독에 대한 냉소적 평가를 단순한 책략으로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이고 일관된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베리야를 흐루쇼프보다 앞선 탈스탈린화의 선구자로 읽었고, 로버트 서비스도 이에 동조해 "고르바초프 이전까지 그처럼 광범위한 개혁 의제를 가진 소련 지도자는 없었다"고 썼다. 반대편에서는 베리야가 단지 스탈린의 공포 없이는 지탱될 수 없는 체제의 모순을 관리자로서 인식했을 뿐이며, 개혁은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이자 위기를 조장해 보안기구의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이사크 도이처는 이미 1954년 2월에 이 재판이 1930년대의 숙청 재판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졌다고 분석했다. 법정에는 보안경찰 외에 민간인 피고가 한 명도 없었고, 피고들은 자백하지 않았으며, 재판 뒤에 다음 희생자를 예고하는 '사슬 고발'도 없었다. 군 원수 이반 코네프가 재판장을 맡고 육군이 드래곤 슬레이어 역할을 한 것도 전례가 없었다. 도이처는 이것이 '옛날 쇼'의 복원이 아니라, 권력의 새로운 배열을 반영한 정치극이라고 보았다.
가장 근본적인 열린 질문은 '베리야가 승리했다면 소련은 어떻게 됐을까'다. 나이트의 논리를 끝까지 밀면, 1953년 여름에 베리야가 권력을 잡았다면 냉전은 1989년이 아니라 1950년대에 끝났을 수도 있다. 그 반대편에서는 공포에 기반한 권력만을 아는 인물이 집단지도 체제 없이 권력을 독점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됐을지, 그의 전기 전체가 증언하고 있다고 답한다. 베리야는 두 가능성을 모두 자신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가져갔다.
결과
베리야의 몰락으로 비밀경찰은 당의 통제 아래 놓였고, 스탈린주의적 대숙청의 재발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 그것은 「패자가 죽지 않게 되는」 집단지도 체제로 가는 전환점이자, 흐루쇼프가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연표
- 1953.03스탈린의 죽음과 베리야의 부상
베리야가 내무부를 장악하고 사면·개혁을 주도했다.
- 1953.06.26주석단 회의의 체포
주석단 회의에서 흐루쇼프 등이 베리야를 고발하고 주코프 휘하 장교들이 그를 체포했다.
- 1953.12재판과 처형
비밀재판 뒤 베리야와 메르쿨로프·코불로프 등 측근이 처형됐다.
관련 인물 43명
주도 · 집행13
주석단 내에서 베리야 제거를 조직한 핵심 인물이었다.
주석단 의장게오르기 말렌코프1902–1988정부 수반으로 체포를 주재했다.
간부단의 지지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베리야에 반대하는 간부단의 결의를 뒷받침했다.
체포 실행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휘하 군 장교들과 함께 회의장에서 베리야를 직접 체포했다.
간부단 일원니콜라이 불가닌1895–1975흐루쇼프 편에 서서 베리야 제거에 가담했다.
간부단 일원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간부단의 반베리야 결의에 가담했다.
간부단 일원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최종적으로 제거에 동참했다.
체포조 지휘 및 베리야 구금키릴 모스칼렌코1902–1985흐루쇼프의 지시로 권총을 크렘린에 반입해 베리야를 직접 체포했고, 이후 모스크바 방공사령부 벙커에 베리야를 구금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으로 사형 판결에 참여했다.
베리야 사건 수사·기소 총괄로만 루덴코1907–19811953년 6월 베리야 체포 직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베리야와 그 측근들에 대한 수사팀을 실질적으로 지휘했고, 12월 특별재판부에서 국가 공소를 유지했다.
베리야에 맞선 보안 간부이반 세로프1905–1990베리야 체포에 가담하고 그 이듬해 초대 KGB 의장이 된 보안 간부였다.
베리야 체포 직후 그루지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베리야의 후견망을 일소바실 므자바나제1902–19881953년 6월 베리야 체포 직후 흐루쇼프에 의해 그루지야 당 제1서기로 발탁되어 베리야의 측근 알렉산드레 미르츠훌라바를 교체하고, 그루지야 당·국가기구 내 베리야의 후견망을 광범위하게 숙청했다.
사형 집행자파벨 바티츠키1910–19841953년 12월 23일 특별재판부가 베리야에게 사형을 선고한 직후, 바티츠키가 스스로 자청하여 자신의 권총으로 형을 집행했다. 사형 집행 조서에 루덴코, 모스칼렌코와 함께 서명했다.
특별재판부 의장이반 코네프1897–19731953년 12월 베리야와 공동 피고인 6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특별재판부의 재판장을 맡았다.
참여3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어 행정기관, 특히 내무성(MVD)을 감독했다. 6월 베리야 체포 후 그의 집무실을 압수수색하고 개인 금고 문서를 회수했으며, 7월 15일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제거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7월 1일 내무성 제1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사실상 업무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흐루쇼프에게 베리야의 쿠데타를 경고한 내무장관티모페이 스트로카치1903–1963베리야에게 '수용소 먼지'가 되겠다는 위협을 받았으며, 흐루쇼프에게 베리야의 쿠데타 계획을 경고하여 체포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특별재판부의 내무부 대표콘스탄틴 루네프1907–1980특별재판부에 앉아 내무부가 당에 복종함을 보였다.
반대 · 저항1
대상 · 피해22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로 1953년 12월 재판 뒤 처형됐다.
표적브세볼로드 메르쿨로프1895–1953베리야의 측근 보안 간부로 함께 처형됐다.
표적보그단 코불로프1904–1953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으로 함께 처형됐다.
베리야의 최측근 · 체포·처형미르 자파르 바기로프1895–1956베리야의 20년 동맹자로, 1953년 베리야 체포 직후 실각하고 1954년 체포, 1956년 바쿠에서 재판 후 총살되었다.
함께 청산된 보안 수장빅토르 아바쿠모프1908–1954전임 MGB 장관으로, 베리야의 몰락에 이은 스탈린기 보안기구 청산 속에서 1954년 처형됐다.
1953년 12월 함께 총살세르고 고글리제1901–19531953년 7월 3일 동독에서 구금되어 베리야와 함께 특별재판부의 비공개 재판을 받고 12월 23일 당일 총살됐다.
1953년 12월 함께 총살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1898–1953베리야가 그루지야 내무장관에 앉힌 지 석 달 만인 1953년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됐다.
1953년 12월 함께 총살파벨 메시크1910–1953베리야의 민족정책 노선을 집행하던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으로, 1953년 6월 30일 키예프 당 중앙위원회 건물에서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됐다.
1953년 12월 함께 총살레프 블로지미르스키1905–1953베리야가 1953년 3월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시킨 지 넉 달 만인 7월 17일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됐다.
별도 재판 뒤 처형아마야크 코불로프1906–19551953년 6월 27일 동독에서 체포되었으나 베리야 집단과 함께가 아니라 별도로 재판을 받아 1954년 10월 선고, 1955년 2월 총살됐다.
별도 재판 뒤 처형솔로몬 밀시테인1899–1955베리야가 우크라이나 제1부장관으로 보낸 지 넉 달 만인 1953년 7월 3일 체포되어 별도 재판 끝에 1955년 1월 총살됐다.
십오 년형스테판 마물로프1902–1976권력이 절차적이고 파생적이었던 탓에 1953년 12월의 집단이 아니라 1954년 9월 베리야의 각료회의 서기국을 운영한 루드비고프와 함께 재판을 받아 십오 년형을 받고 형기를 다 채웠다.
재판 없이 옥중 사망라브렌티 차나바1900–1955미호엘스 사건을 다시 열던 베리야 자신의 MVD에 1953년 4월 체포되었고, 베리야가 몰락한 뒤에도 기소가 이어졌으나 재판을 받지 못한 채 1955년 10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사망했다.
트빌리시 재판, 1955년압크센티 라파바1899–1955십 년간 그루지야 경찰기구를 운영한 뒤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9월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5일 총살됐다.
트빌리시 재판, 1955년니콜라이 루하제1905–1955베리야의 부하들을 겨눈 「밍그렐리아 사건」을 몰아붙였던 그는 1952년 11월 이미 체포되어 있었고, 결국 그 사건이 아니라 베리야 집단의 일원이라는 혐의로 1955년 총살됐다.
트빌리시 재판, 1955년샬바 체레텔리1894–1955베리야의 은밀한 공작에 동원된 요원으로 지목되어 1953년 8월 체포되었고 1955년 11월 15일 총살됐다.
트빌리시 재판, 1955년콘스탄틴 사비츠키1905–1955보그단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이자 보좌관으로 베리야가 몰락한 며칠 뒤인 1953년 7월 1일 체포되어 대령 계급에 그쳤음에도 사형 피고가 되었다.
트빌리시 재판, 1955년알렉산드르 하잔1906–19551945년 이미 보안기관을 떠나 있었으나 베리야가 몰락한 뒤 체포되어 그루지야 NKVD 수사관 가운데 하나로 재판을 받고 1955년 총살됐다.
트빌리시 재판, 1955년니키타 크리먄1913–19551951년 보안기관에서 물러나 아르메니아 식품공업부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1953년 9월 체포되어 1955년 11월 15일 총살됐다.
십 년형사르디온 나다라야1903–1982베리야의 경호 책임자로 1955년 트빌리시 재판의 여덟 번째 피고가 되었으나 여섯 명의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하고 십 년형을 받아 1965년 석방됐다.
베리야에 의해 기용된 후 체포됨나움 에이팅곤1899–1981베리야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됨파벨 수도플라토프1907–1996목격 · 증언4
1993년 전기 《Beria: Stalin's First Lieutenant》는 베리야가 의외의 자유주의적 개혁가라는 역설을 정립한 영어권 연구의 초석이다.
스탈린 독살론을 제기한 역사가에드바르트 라진스키1936–1997년 스탈린 전기에서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반박론을 제기한 영국 역사가사이먼 시백 몬테피오레1965–현재스탈린 전기에서 독살설을 반박하고, 베리야의 임종 장면 묘사를 인용당했다.
역사 논쟁의 증인로버트 서비스1947–흐루쇼프 일파가 베리야의 개혁 프로그램 때문에 그를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관련 용어
출처: Amy Knight, Beria: Stalin’s First LieutenantEncyclopaedia Britannica: Lavrenty B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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