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압도적으로 우세한 붉은 군대는 왜 작은 이웃 앞에서 105일을 흘렸는가?
겨울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해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조약으로 끝난 105일간의 소련-핀란드 전쟁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로 핀란드를 자국 세력권에 넣은 소련은 레닌그라드 방위를 이유로 카렐리야 지협의 국경 이동과 항코 반도 조차를 요구했고, 핀란드가 거부하자 마이닐라 포격 사건을 구실로 공격했다. 병력과 장비는 압도적이었으나 대숙청으로 지휘부가 무너진 붉은 군대는 겨울 삼림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수오무살미에서 사단째 포위·궤멸당하며 만네르헤임 선 앞에 멈춰 섰다.
레닌그라드에서 32킬로미터: 두 나라, 두 공포
1939년 여름, 핀란드만 북쪽 해안에서 레닌그라드까지의 거리는 카렐리야 지협의 가장 좁은 곳에서 32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장거리 포병 사정거리 안이었다. 이 짧은 간격 안에 1917년부터 두 개의 서로 맞물리는 공포가 쌓여 있었다.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고, 3주 뒤 볼셰비키 러시아는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곧 내전이 뒤따랐다. 독일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만네르헤임 남작의 백군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적위대를 제압했고, 그 과정에서 약 3만 7천 명의 핀란드인이 죽었다. 승리한 백군은 동카렐리야로 의용군 원정을 보내 소비에트 영토 깊숙이 들어갔다. 1920년 타르투 조약이 국경을 확정했을 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내전으로 약화된 처지에서 페첸가(페트사모)의 북극해 항구를 넘겨주고 레닌그라드에서 32킬로미터까지 국경을 끌어당기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핀란드 측 협상가인 파시키비조차 이를 "지나치게 좋은 평화"라 불렀다. 1919년 만네르헤임은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임무는 "볼셰비즘을 페트로그라드에서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고, 이 말은 모스크바에서 잊히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신뢰는 싹트지 않았다. 1932년 소련-핀란드 불가침조약이 체결됐지만,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중립 노선에 무게를 두었고, 스웨덴과 비밀 군사협력을 모색했으며, 에스토니아와는 핀란드만을 봉쇄하기 위한 합동 작전을 은밀히 연습했다. 지협에는 1920년대에 시작해 1932년에 재개된 요새선이 건설되고 있었는데, 훗날 만네르헤임 선이라 불리게 될 이 방어체계는 1939년 11월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다.
소련 쪽 공포는 더 크고 더 물질적이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군수산업의 심장부였고, 국경에서 당일 행군 거리에 놓여 있었다. 스탈린은 독일(혹은 독일의 동의 아래 영국이나 프랑스)이 핀란드를 징검다리 삼아 레닌그라드를 치는 시나리오를 현실적인 위협으로 보았다. 이는 단지 편집증이 아니었다. 1918년 독일군은 실제로 핀란드 내전에 개입했고, 1930년대 후반 핀란드의 군사정보는 독일·영국·프랑스 3국 모두와 접촉하고 있었다. 1937년 핀란드 대통령 스빈후부드는 베를린에서 "러시아의 적은 언제나 핀란드의 친구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공포가 작동하는 기관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1937-38년 대숙청은 붉은 군대 장교단을 절단했다. 여단장·사단장·군단장의 3분의 2가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전체적으로 약 1만 1천 명의 장교가 숙청되었다. 같은 시기 붉은 군대 병력은 150만에서 330만으로膨胀했다. 중대장이 사단을 지휘하고, 대령이 군단을 맡는 상황이 일상이 되었다. 1939년 6월 참모총장 샤포시니코프가 핀란드 작전 계획을 작성했을 때, 그는 수개월이 걸리는 험난한 전역을 예측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는 그 계획을 조롱하며 물리쳤고, 계획은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에게 넘겨졌다. 메레츠코프는 3주 안에 헬싱키에 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38년 4월 NKVD 요원 보리스 야르체프가 헬싱키를 방문해 핀란드 총리 카얀데르에게 경고했다. 소련은 독일을 신뢰하지 않으며, 전쟁은 두 나라 사이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붉은 군대는 국경 뒤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적을 맞아 전진할 것"이었다. 소련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해 핀란드만의 섬들을 할양하거나 조차할 것을 제안했다. 핀란드는 중립 정책을 고수하며 거부했다. 1년 넘게 이어진 비밀 교섭은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했다.
1939년 8월 23일,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에서 불가침조약에 서명했을 때, 그 비밀의정서는 핀란드를 소련 세력권에 배정했다. 유럽의 외교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순간, 카렐리야 지협의 32킬로미터는 더 이상 외교로 풀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지도 위에 그어진 선, 협상 테이블 위에 놓인 나라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문서에는 공개된 불가침 조문과 함께, 동유럽을 두 제국의 이익권역으로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가 붙어 있었다. 제1조는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를 언급하며 리투아니아 북쪽 경계를 양국의 권역 분할선으로 정했는데, 이는 핀란드가 에스토니아·라트비아와 함께 소련 몫이라는 선언이었다. 불과 한 달 뒤인 9월 28일의 독소 우호·국경 조약은 리투아니아마저 소련 권역으로 넘기며 스탈린의 손을 완전히 풀어 주었다.
발트 3국은 신속히 무너졌다. 에스토니아는 9월 28일, 라트비아는 10월 5일, 리투아니아는 10월 10일에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소련군 기지의 주둔을 받아들였다. 핀란드는 10월 5일 가장 늦게 모스크바로 초청되었다. 스탈린이 협상 테이블에 직접 앉은 것은 그 진지함의 신호였다. 실제로 스탈린은 7차례 회담 중 6차례에 참석했으며, 첫 대면에서 파시키비는 스탈린의 의외로 부드러운 태도에 놀랐다고 술회했다.
10월 12일 시작된 첫 회담에서 소련 측이 제시한 요구는 다섯 가지였다. 상호원조조약 체결, 핀란드만 입구의 섬들 할양, 리바치 반도의 핀란드 구역 양도, 항코 반도에 해군·항공 기지 30년 조차(병력 5천 명), 그리고 레닌그라드에서 불과 32킬로미터 떨어진 카렐리야 지협 국경을 비푸리 방향으로 70여 킬로미터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보상으로 소련은 동카렐리야의 레볼라와 포라얘르비 지역(핀란드가 내놓는 면적의 약 두 배)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레닌그라드는 옮길 수 없으니 국경을 옮겨야 한다.」
핀란드 측은 상호원조조약을 즉각 거부했고, 소련도 이 점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섬들과 리바치 반도는 협상 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항코 기지는 달랐다. 핀란드 본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중립의 포기였고, 만네르헤임조차 「항코를 내주면 핀란드의 전략적 위치는 치명적으로 약화된다」고 보았다. 협상은 세 차례(10월 12~14일, 10월 23~24일, 11월 3~9일)에 걸쳐 이어졌다.
헬싱키 내부는 분열되어 있었다. 만네르헤임은 전쟁이 나면 핀란드군이 2주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타협을 권고했다. 반면 외무장관 에르코는 스탈린의 요구를 허세로 보았고, 자신이 소유한 『헬싱긴 사노마트』를 통해 여론을 강경 쪽으로 이끌었다. 총리 카얀데르도 에르코 편에 섰다. 파시키비와 나중에 협상단에 합류한 재무장관 탄네르는 절충을 모색했지만, 헬싱키의 훈령은 단호했다.
10월 23~24일의 두 번째 회담에서 스탈린은 요구를 다소 낮추었다. 카렐리야 지협에서 요구하는 땅을 줄이고, 항코 주둔 병력을 4천 명으로 감축했으며, 조차 기한을 30년에서 유럽 전쟁 종료 시까지로 단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는 오히려 핀란드 측에 「더 물러날 수 있다」는 신호로 읽혔다. 파시키비가 절충안으로 유사뢰 섬과 이노 요새를 제안했지만 헬싱키는 거부했다.
10월 31일 몰로토프는 최고회의 연설에서 소련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우리의 제안은 극히 소박하며, 소련 안보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에 불과하다.」 공개 천명은 협상의 여지를 극적으로 좁혔다. 더 이상 요구를 낮추면 체면 손상이었기 때문이다. 11월 3~4일 세 번째 회담에서 핀란드 측은 최종 반대안을 내놓았다. 테리요키 일대의 작은 영토와 핀란드만 섬들은 넘기겠지만, 항코 기지와 코이비스토를 포함한 실질적 국경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11월 9일 마지막 회담에서 파시키비가 이를 통보하자, 탄네르의 기록에 따르면 「상대방들의 눈이 커졌다.」 스탈린이 물었다. 「이노조차 내놓지 않겠다는 말인가?」 몰로토프가 덧붙였다. 「당신들은 충돌을 일으키고 싶은 것인가?」 더 이상의 협상은 없었다. 11월 13일 핀란드 대표단은 아무도 배웅하지 않는 모스크바 기차역을 떠났다. 그들은 아직도 협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소련 측은 이미 다른 결론에 도달한 뒤였다. 크렘린은 핀란드가 독일이나 영국과 은밀한 약속을 맺었다고 확신했고, 핀란드는 소련이 애초에 협상할 의사가 없었다고 믿었다. 두 확신 사이에서 105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곱 발의 허구, 그리고 굶주린 이웃을 위한 '빵'
1939년 11월 26일 오후 3시 45분(모스크바 시간), 카렐리야 지협의 소련 국경 마을 마이닐라 인근에서 일곱 발의 포성이 울렸다. 소련은 즉시 핀란드의 도발이라고 발표했고, 몰로토프는 주모스크바 핀란드 대사 위리외코스키넨에게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각서에 따르면 사망 4명(사병 3명과 하사관 1명), 부상 9명이었다. 그러나 핀란드 국경수비대 제4중대의 증언은 정반대였다. 포성은 소련 쪽에서 들렸고 포탄은 국경선에서 약 800미터 소련 내륙에 떨어졌다. 만네르헤임의 사전 명령으로 핀란드 포병은 국경에서 20킬로미터 이상 후퇴한 상태였으며, 마이닐라를 사정거리 안에 둔 포대는 단 한 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핀란드는 즉시 공동조사를 제안했으나, 소련은 거부했다. 1990년대 러시아 역사가 파벨 압테카리가 공개된 소련 군사문서를 분석한 결과, 마이닐라에 주둔하던 제68소총연대의 병력 기록은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단 한 명의 증감도 없었다. 숫자는 매일 같았다: 지휘관 90명, 정치장교 16명, 행정 12명, 기술 8명, 의무 7명, 수의 2명, 하사관 269명, 사병 528명, 합계 3,041명. 제70소총사단과 제19소총군단의 작전일지도 11월 26일 항목에 "변화 없음"이라고 기록했다. 사상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 전투일지 첫 장에 적힌 "핀란드군의 포격으로 3명 전사, 6명 부상"이라는 문구는 한 사람의 필체로, 실제 연대장 코루노프 대령이 아닌 엉뚱한 이름(살리닌 대위)으로 사후 작성된 위조였다. 흐루쇼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 작전을 포병 총책임자 그리고리 쿨리크가 지휘했다고 적었다.
사실 전쟁 명령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제19소총군단의 전투명령 제2호는 11월 23일자로 작성되어 "공격 개시일은 별도 통보한다"는 문구로 끝맺고 있었다. 마이닐라는 구실이었을 뿐, 전쟁은 그 이전에 결정된 것이었다.
11월 28일 소련은 1932년 체결된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29일 몰로토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우리의 목표는 결코 핀란드 영토의 병합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소비에트 카렐리야를 핀란드에 통합해 "하나의 독립된 핀란드 국가"를 이룰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꺼냈다. 다음 날 아침, 붉은 군대는 전 국경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헬싱키 상공에는 폭격기 편대가 나타났다.
11월 30일 헬싱키는 세 차례의 공습을 겪었다. 오전 9시 20분 첫 경보가 울리자 소련 폭격기는 처음에 삐라를 뿌렸다. "핀란드 동지들이여! 우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자본가와 지주의 압제로부터 핀란드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파도는 달랐다. 발트함대 소속 제1기뢰어뢰항공연대 제3비행대의 DB-3 폭격기 8대가 항구의 해안방어함을 찾지 못하자 목표를 헬싱키 시내로 전환했고, 구름 속에서 대형이 흐트러지며 주택가와 시내 중심에 폭탄을 퍼부었다. 공과대학 건물이 파괴되고, 캄피 버스 정류장이 직격당했으며, 히에탈라흐티의 기름 저장고는 이틀간 불탔다. 이날 하루 사망 91명, 부상 240명. 종군기자 마사 겔혼은 이 광경을 두고 "바르셀로나의 3월 같았다"고 썼다.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몰로토프는 라디오에서 소련이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리는 핀란드 이웃에게 빵을 투하하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핀란드인들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소련의 회전분산항공폭탄 RRAB-3를 "몰로토프의 빵바구니"(Molotovin leipäkori)라 불렀고, 곧 소련 전차에 맞설 즉석 화염병에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이름을 붙여 "빵에 곁들일 음료"를 완성했다. 한편 72세의 만네르헤임은 아침 식탁에서 폭음을 듣자마자 국방부로 달려가 "사령관직에 취임한다"고 통보했고, 그날 밤 전국에는 "만네르헤임이 방어를 지휘한다"는 포고가 울려퍼졌다. 미국 기자 허버트 엘리스턴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만네르헤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포고보다 더 신속하게 한 국민을 전투태세로 전환시킨 선언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와의 조약: 테리요키 정부, 세계를 향한 소련의 거짓말
1939년 12월 1일, 붉은 군대가 국경 마을 테리요키를 점령한 지 하루 만에 모스크바 방송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핀란드의 '진정한' 인민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 수반은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패배한 뒤 소련에 망명해 있던 코민테른 간부 오토 빌레 쿠시넨이라는 것이었다. 공식 국호는 '핀란드 민주공화국'이었지만, 모두가 그냥 테리요키 정부라 불렀다.
내각 구성은 허술했다. 쿠시넨을 제외한 각료들은 대부분 소련 시민권자이거나 내전 이후 소련으로 도피한 핀란드계 공산주의자들로, 핀란드 안에서 그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국방장관' 악셀리 안틸라는 핀란드계 소련인이었고, 그 아래 편성된 '핀란드 인민군'은 이른바 제106산악소총사단을 모체로 약 2만 2,500명 규모였으나 실제 전투보다 점령지 치안과 선전 활동에 동원됐다. 소련이 테리요키에서 '정부' 수립을 발표한 바로 그날, 핀란드에서는 아이모 카얀데르 내각이 물러나고 리스토 뤼티가 이끄는 거국내각이 들어섰다. 핀란드 사회는 침략을 목전에 두고 '겨울전쟁의 정신'으로 불릴 만한 단결을 보여주고 있었다.
12월 2일, 쿠시넨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몰로토프와 '상호원조 및 우호 조약'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10월에 헬싱키가 거부했던 것과 거의 같았다. 카렐리야 지협의 국경을 서쪽으로 밀고, 항코 반도를 30년간 조차하며, 핀란드 만의 여러 섬을 넘긴다. 차이가 있다면, 소련은 그 대가로 동카렐리야의 7만 제곱킬로미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12월 4일, 국제연맹이 핀란드의 제소를 심의하려 하자 몰로토프는 사무총장에게 전문을 보내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은 핀란드와 전쟁 상태에 있지 않으며, 핀란드 국민을 전쟁으로 위협하고 있지도 않다.' 소련이 하고 있는 것은 만네르헤임과 탄네르의 '파시스트 도당'에 맞서 싸우는 합법적 쿠시넨 정부를 지원하는 일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테리요키 정부는 침공에 바른 외교적 외투였다.
국제연맹은 이 외투를 벗겼다. 12월 11일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청문을 진행했고, 12월 14일 총회와 이사회는 규약 제16조 4항에 따라 만장일치로 소련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소련은 스스로를 국제연맹 밖에 두었다'고 선언했다. 강대국이 국제연맹에서 제명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소련의 연맹 가입은 불과 5년 전인 1934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때는 절망적이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이미 탈퇴해 버린 연맹은 껍데기였고, 권고 이상의 조치를 취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핀란드는 홀로 싸워야 했다.
테리요키 정부의 또 하나의 기능은 평화의 길목을 막는 것이었다. 12월 내내 스웨덴을 통한 비공식 타진이 오갔지만, 몰로토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소련은 이미 핀란드의 합법 정부와 교섭 중이므로 헬싱키의 뤼티 정부와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쿠시넨 정부를 세운 순간, 소련은 외교적으로 자신의 출구를 봉쇄한 셈이었다. 실패한 전쟁이 수개월 더 끌려야만 마침내 1940년 1월 말, 몰로토프가 스톡홀름의 콜론타이를 통해 뤼티-탄네르 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고 통보했고, 그때서야 비로소 진짜 평화 협상이 시작될 수 있었다. 쿠시넨의 정부는 그렇게 버려졌다.
도로 위의 장작더미: 수오무살미에서 라테까지, 두 사단의 궤멸과 지휘부의 반격
1939년 12월 7일, 소련 제163소총사단은 수오무살미 마을을 점령했다. 목표는 오울루까지 진격해 핀란드를 반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단의 진격은 멈췄다. 도로는 하나뿐이었고, 사단장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12월 20일 철수 허가를 요청했지만 제9군 사령부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제44차량화소총사단이 라테 도로를 따라 지원을 위해 진입했다.
햘마르 실라스부오 대령이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두 사단을 하나씩 처리하기로 했다. 12월 11일 핀란드군은 라테 도로를 차단해 제163사단의 남쪽 보급로를 끊었다. 12월 27일, 증원받은 실라스부오 부대는 팔로바라를 점령해 제662연대를 본대로부터 분리했다. 12월 28일 아침, 카를레 카리가 북서쪽에서 진격하자 소련군 저항은 돌연 무너졌다. 생존자들은 키안타얘르비 호수의 얼음 위로 도망쳤고, 제163사단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제44사단 차례였다. 사단장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는 제163사단이 들리는 거리에서 궤멸되는 동안 방어진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1월 1일부터 7일까지 핀란드군은 30킬로미터에 걸쳐 도로 위에 늘어진 제44사단을 여러 개의 '모티'로 잘라냈다. 소련군의 야전취사차량과 모닥불이 핀란드 저격수들의 표적이 됐고,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굶주린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항복했다. 비노그라도프는 1월 6일 밤 9시 30분에야 후퇴 명령을 내렸다. 부대원 대부분은 국경에 도달하지 못했다. 제44사단은 병력 1만 3,962명 중 스타프카 조사위원회가 공식 집계한 것만 4,6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비노그라도프와 참모장 볼코프, 정치위원 파호모프는 부대를 버리고 탈출했다가 4일 후 소련 측 전선에 도착해 즉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부대원들 앞에서 총살됐다.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전차 43대, 야포 70문, 트럭 278대, 소총 6,000정 등 방대한 장비를 노획했다. 소련군이 승리를 확신해 승전 퍼레이드용 악대까지 대동했다는 사실은 패배의 상징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연이은 참패에 스탈린은 더 이상 보로실로프를 신뢰하지 않았다. 12월 말 전선의 모든 정면 공격이 중단됐고, 1940년 1월 7일 세묜 티모셴코가 핀란드 작전 총지휘관에 임명됐다.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참모총장이 처음 제안했으나 스탈린이 묵살했던 계획, 즉 카렐리야 지협 단일 전선에 전력을 집중해 정면 돌파한다는 구상이 복원됐다. 티모셴코는 60만 병력을 2개 군(제7군과 제13군)으로 재편하고 7개 사단을 예비대로 확보했다. 북부의 우회 기동은 포기됐다. '숲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심층 작전'에서 '포병과 물량으로 요새를 갈아내는 소모전'으로 전략이 전환된 것이다.
티모셴코는 자신의 전략을 이렇게 요약했다: '정면 공격에서는 그 어떤 적도 우리와 견줄 수 없다. 연속적인 직접 공격으로 적의 피를 말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작전은 무모한 인해전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포병총국장 니콜라이 보로노프는 카렐리야 지협에 포문을 집중했고, 제123소총사단은 실물 크기 모형으로 만네르헤임 선 돌파 훈련을 반복했다. 탱크는 더 이상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지 않고 보병과 함께 소규모로 움직였다. 2월 1일, 소련군은 첫 24시간 동안 30만 발의 포탄을 핀란드 진지에 퍼부으며 총공세를 시작했다. 2월 11일, 숨마 전선에서 만네르헤임 선이 마침내 뚫렸다.
'이 손이 썩어라': 피로 쓴 조약과 4월의 결산
1940년 3월 5일, 붉은 군대는 만네르헤임 선을 넘어 비푸리(비보르크) 교외에 진입했고 핀란드군은 탄약이 바닥나고 있었다. 만네르헤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정부에 알렸다. 핀란드는 3월 6일 휴전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거절했다: 군사적 우위가 강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핀란드 대표단이 3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스탈린은 협상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굴욕적인 전쟁의 얼굴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몰로토프가 제시한 조건은 전쟁 전 요구보다 훨씬 가혹했다. 카렐리야 지협 전체에 비푸리, 라도가 호수 서·북부 해안, 살라 지역, 리바치 반도와 피스키 곶의 일부, 핀란드 만의 섬들, 그리고 항코 반도의 30년 조차: 총 국토의 약 9%, 산업 자산의 13%에 달했다. 소련이 전쟁 전에 제안했던 영토 교환, 즉 동카렐리야의 더 넓은 땅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패배한 쪽이 내놓는 것이었고, 승자는 더 많이 가져갔다.
리스토 뤼티 총리와 파시키비가 이끄는 핀란드 대표단은 3월 12일 저녁 조약에 서명했다.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는 서명을 승인하며 "이 괴물 같은 조약에 서명하는 손이여, 썩어라!"라는 말을 남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여름 그의 오른팔은 실제로 마비되었다. 42만 명이 넘는 카렐리야 주민, 핀란드 인구의 12%가 고향을 떠나 새로운 국경 안쪽으로 피난했다. 총격은 3월 13일 정오(레닌그라드 시간)에 멈췄다.
소련 군부 내부에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책임 공방이 시작됐다. 1940년 4월, 중앙위원회는 전쟁의 교훈을 결산하는 회의를 열었고, 스탈린 앞에서 지휘관들은 서로를 비난했다. 보로실로프는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다"고 변명했지만, 15년간 국방인민위원으로 있으면서 대숙청을 주도하고 훈련·장비·전술을 방치한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5월 8일, 그는 해임되고 티모셴코가 그 자리를 이었다.
회의는 구체적인 개혁을 명령했다. 전선 정치위원의 권한이 축소되어 지휘관의 단일 명령권이 회복되었고, 차르 시절의 계급 체계와 엄격한 규율이 부활했다. 겨울 작전을 위한 의복과 장비가 개선되었으며, 기계화 부대의 편제와 훈련이 재검토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14개월뿐이었다: 바르바로사가 시작될 때까지 개혁은 완료되지 못했다.
한편, GRU 국장 이반 프로스쿠로프는 회의에서 스탈린이 정보 실패 탓으로 책임을 돌리려 하자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프로스쿠로프는 정보 보고가 핀란드의 방어 준비와 지형의 어려움을 정확히 전달했지만 정치 지도부가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7월에 해임되었고, 이듬해 처형되었다. 겨울전쟁의 교훈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군사 개혁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치적 투쟁이기도 했다.
망각 속으로 간 15개월: 왜 핀란드는 나치 독일 편에 섰는가
모스크바 강화조약이 조인된 1940년 3월 13일, 핀란드인들은 국기를 조기로 내렸다. 영토의 9%, 공업력의 5분의 1, 제2의 도시 비푸리를 잃은 상실감은 국가 전체를 덮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시 상태는 유지됐고, 검열은 풀리지 않았으며, 군사비는 1941년 국가예산의 45%까지 치솟았다. 42만 명의 피난민은 잃어버린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핀란드인들이 이 15개월을 '잠정평화'(Välirauha)라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련의 압력은 조약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1940년 6월 14일, 소련 전투기가 탈린발 헬싱키행 핀란드 여객기 칼레바호를 격추해 탑승자 9명 전원이 사망했다. 같은 달, 몰로토프는 페차모 니켈 광산의 채굴권을 소련에 넘기거나 소련-핀란드 합작회사를 세우라고 요구했다. 7월에는 한코 기지로 향하는 소련군의 철도 통행권을, 8월에는 올란드 제도의 요새 철거를 요구했다. 주헬싱키 소련대사 이반 조토프는 핀란드 내각의 구성까지 문제 삼으며 반소 인사로 찍힌 배이뇌 탄네르 외무장관의 사임을 요구했고, 탄네르는 8월 15일 물러났다. 같은 시기 발트 3국이 소련에 병합되는 광경을 지켜본 핀란드 지도부에게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압력 이상으로 읽혔다. 파시키비는 1940년 7월 22일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발트 3국의 운명과 그들이 소비에트 제국에 종속된 방식을 생각하면, 밤새도록 이 중대한 문제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핀란드가 독일 쪽으로 기운 것은 이 절박함 속에서였다. 1940년 8월 18일, 괴링의 사자 요제프 펠트옌스가 헬싱키에 도착해 뤼티·만네르헤임과 만났다. 독일은 노르웨이 북부로 가는 병력 통과권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무기를 풀었다. 9월 22일 첫 독일군 수송대가 바사 항에 도착했다. 몰로토프가 11월 베를린을 방문해 "핀란드 문제를 베사라비아처럼 처리하겠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가 거부권을 행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히틀러는 1940년 12월 18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재가했고, 만네르헤임의 개인적 특사 파보 탈벨라 소장은 이미 베를린에서 할더·괴링과 만나 독일의 대소전 계획을 전해 듣고 있었다.
1941년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핀란드 참모장교단이 잘츠부르크와 베를린에서 독일 국방군과 작전 조율 회의를 가졌다. 에리크 하인리히스 장군이 이끄는 핀란드 측은 병력 동원 시기(6월 15일), 작전 구역 분할, 독일 제163보병사단의 핀란드 배속을 합의했다. 핀란드 의회와 내각 대부분은 6월 9일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전쟁 결정은 뤼티·만네르헤임·랑겔 총리 등 극소수만이 알고 내린 것이었다.
6월 22일 바르바로사가 개시되자 핀란드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지만, 독일군은 이미 핀란드 영토에서 출격하고 있었다. 6월 25일 소련 공군이 핀란드 18개 비행장을 폭격하자 랑겔 총리는 의회에서 "핀란드는 전쟁 상태에 있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이 전쟁을 '계속전쟁'(Jatkosota)이라 명명했다. 이 이름은 정치적 선택이었다. 겨울전쟁이 소련의 침략으로 시작된 방어전쟁이었다면, 계속전쟁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는 서사였다. 실제로 만네르헤임은 1941년 7월 10일 유명한 '칼집 명령'에서 1918년 내전 당시의 선언을 다시 꺼내 들었다: "핀란드와 비엔나 카렐리야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칼을 칼집에 넣지 않겠다." 이것은 국경 회복을 넘어 동카렐리야 병합이라는 더 넓은 전쟁 목표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전후 핀란드 역사학계는 이 전쟁을 독일과의 '별도전쟁'(erillissota)으로 서술해 왔다. 핀란드는 추축국 삼국동맹에 서명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독일의 동맹국이 아니라 '공동교전국'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08년 헬싱긴 사노마트가 핀란드 역사학자 2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16명이 "핀란드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고 답했고, 1947년 파리 강화조약은 핀란드를 "히틀러 독일의 동맹국"으로 명시했다. 라우리 한니카이넨의 2020년 국제법 분석은 더 단호하다: 핀란드군이 1939년 국경을 넘어 동카렐리야를 점령하고 병합을 시도한 순간, 계속전쟁은 국제법상 침략전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정하듯, 1940년 여름 소련의 포위 속에서 핀란드에게 독일 외에는 현실적 선택지가 없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질문은 남고, 답은 갈린다: 겨울전쟁이 80년 넘게 남긴 논쟁들
겨울전쟁은 1940년 3월에 끝났지만, 그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2025년까지도 진행 중이다. 세 질문이 역사가들을 가장 오래 갈라놓았다.
첫째, 스탈린은 핀란드 전체를 삼키려 했는가. 대다수 역사가는 그렇다고 본다. 테리요키 괴뢰정부 수립, 즈다노프가 쇼스타코비치에게 의뢰한 〈핀란드 모음곡〉(헬싱키 입성 행진곡용), 그리고 12월 21일 이전 완전 항복을 요구한 작전 계획은 단순한 국경 조정 이상을 말해 준다. 러시아 역사가 유리 킬린은 스탈린이 협상 타결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영토 교환 제안은 체제 변경을 위한 시간벌기였다고 주장했다. 반대편에서는 윌리엄 트로터가 "스탈린은 1940년에도, 1944년에도 손쉽게 핀란드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스티븐 코트킨은 발트 3국과의 차이를 지적한다: 소련은 발트 3국에 상호원조조약을 강요해 결국 합병했지만, 핀란드에는 제한적 영토 양보만 요구했고 그 대가로 땅까지 제안했는데, 이는 전면 합병 시나리오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2년 A. 추바랸은 핀란드 합병 계획을 입증할 문서가 러시아 기록보관소에 단 한 건도 없다고 밝혔다. 코트킨은 스탈린의 궁극적 의도가 내부 문건에 기록되지 않았기에 협상에서의 발언과 행동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인다.
둘째, 희생자 수. 1940년 3월 몰로토프가 최고회의에 보고한 소련군 전사자는 48,745명이었다. 이 숫자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공식 수치였다. 1989년 미하일 세미랴가는 『오고뇨크』에 처음으로 53,522명이라는 다른 숫자를 발표했다.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의 1993년 기밀해제 연구는 회복 불가능 손실 126,875명, 총 손실 391,783명을 제시했다. 유리 킬린은 1991년 63,990명에서 2012년 138,533명으로 추정치를 수정했다. 2013년 파벨 페트로프는 이름·생년월일·계급이 확인된 전사·실종자 167,976명이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 있다고 보고했다. 4만 8천에서 16만 8천까지, 같은 전쟁을 두고 이만큼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록 관리의 정치적 성격을 말해 준다.
셋째, 핀란드가 양보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발트 3국과의 비교는 이 질문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39년 가을 소련의 기지 요구를 수용했고, 1년 뒤 합병·소비에트화되었다. 핀란드 역사가 티모 비하바이넨은 스탈린이 조약을 신뢰하지 않았고 오직 붉은 군대만 믿었으며, 중립은 소련의 이해와 충돌할 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반박한다. 이반 코네프 원수는 개전 무렵 스탈린이 "핀란드 인구는 레닌그라드보다 적으니, 재정착은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 논쟁들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핀란드에서 '별개의 전쟁' 테제는 수십 년간 공식 기억을 지배했고,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은 1973년 겨울전쟁이 "불필요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1989년 전쟁 50주기와 영화 〈탈비소타〉 개봉, 그리고 모스크바 문서보관소 개방은 핀란드의 기억 풍경을 바꾸었다. 2004년 TV 프로그램 〈위대한 핀란드인〉에서는 만네르헤임이 1위, 겨울전쟁기 총리 리스토 뤼티가 2위에 올랐다. 소련 쪽에서도 1994년 보리스 옐친이 겨울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은 중요한 전환이었다.
겨울전쟁이 무엇을 해결했는지도 완전하지 않다. 레닌그라드 방위는 달성되었으나 1941년 독일군은 몇 주 만에 레닌그라드에 도달했다. 붉은 군대 개혁은 시작되었지만 바르바로사까지 14개월뿐이었고 상당 부분이 완료되지 못했다. 핀란드는 독립을 지켰지만 잃은 영토는 1941년의 선택을 낳았고, 그 선택은 다시 1944년의 패배로 이어졌다. 105일의 겨울은 그 어떤 교과서적 '완결'도 허락하지 않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80년의 평결
겨울전쟁은 누가 이겼는가? 표면적으로는 소련이다. 모스크바 강화조약으로 핀란드가 잃은 영토는 11%, 소련이 얻은 것은 애초 요구보다 넓었다. 그러나 대가는 너무 컸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 이렇게 남겼다: "이 정도 대가를 치른 승리는 사실상 도덕적 패배였다. 우리 모두는, 스탈린부터 맨 먼저, 그 승리 속에서 핀란드인들에게 진 패배를 느꼈다."
핀란드는 땅을 잃었으나 나라는 살았다. 발트 3국이 1940년 여름 소련에 완전히 병합된 것과 달리, 핀란드는 독립을 지켰고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교전국 중 점령을 겪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42만 명이 고향을 떠났고 비푸리는 핀란드 제2의 도시에서 소련 변경 도시로 바뀌었지만, 그 대가는 이후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 3억 달러의 배상금으로 이어졌다.
사상자 통계는 진실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1940년 몰로토프가 발표한 소련 전사자는 48,745명. 이 숫자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공식 기록이었다. 1989년 역사학자 미하일 세미랴가가 《오고뇨크》에 53,522명을 공개하며 균열이 시작됐다. 1993년 크리보셰예프의 연구팀은 126,875명을, 2012년 유리 킬린 교수는 138,533명을 보고했다. 2013년 파벨 페트로프가 러시아 군사기록보관소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한 숫자는 167,976명이었다. 하나의 전사자 숫자조차 아직 닫히지 않았다.
더 깊은 논쟁은 전쟁의 불가피성이다. 소련 측 논리는 단순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국경까지 32킬로미터는 방어에 턱없이 짧았다. 2013년 푸틴은 겨울전쟁이 "1917년 이후 국경 획정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반대편에서는 테리요키 괴뢰정부와 독소 비밀의정서를 근거로, 소련의 목표가 국경 조정이 아니라 정권 교체와 전면 점령이었다고 본다. 스티븐 코트킨 같은 역사가는 소련이 발트 3국과 달리 핀란드에는 영토 교환을 제안했고 스탈린이 직접 협상장에 일곱 차례나 출석한 점을 들어 전면 병합 의도는 없었다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양측 다 기록으로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전쟁의 판결은 시대를 타고 바뀌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핀란드 반동 세력의 도발'이었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미국과 서방이 조종한 대소련 책동'이었다. 1994년 옐친이 헬싱키에서 "스탈린의 침략전쟁"이라 부르며 처음으로 사과했다. 푸틴 정권은 다시 '필요했던 전쟁' 프레임을 복원하면서도, 동시에 "이 피비린내 나는 에피소드가 왜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 되는지 보여 주는 본보기"라고 했다. 역사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굴절되는 전형이다.
아이러니는 최종 명부에 있다. 소련은 겨울전쟁에서 얻은 교훈, 즉 겨울 장비와 지휘관 자율성 회복, 포병과 전차의 집중 운용을 1941년 바르바로사에 맞서는 데 썼다. 핀란드 쪽에서는 "겨울전쟁의 정신"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 1944년 재침공을 다시 막아내는 힘이 되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양측이 각자 필요한 것을 얻었으나, 얻은 것보다 더 많이 지불한. 105일의 총성이 남긴 물음은 아직도 하나의 답으로 모이지 않는다.
결과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조약으로 핀란드는 비푸리(비보르크)와 카렐리야 지협을 포함한 영토의 약 11%를 잃고 42만 명이 고향을 떠났으나 독립과 체제는 지켰다. 소련은 침략국으로 국제연맹에서 제명됐고, 12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드러난 무능은 히틀러에게 「썩은 문을 걷어차면 무너진다」는 확신을 주었다. 안으로는 보로실로프가 국방인민위원에서 물러나고 티모셴코 아래 군 재편이 시작됐지만, 시간은 1년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잃은 땅을 되찾으려는 핀란드는 1941년 독일 편에서 계속전쟁에 나섰다.
연표
- 1939.08.23비밀의정서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가 핀란드·발트 3국·동폴란드를 소련의 세력권으로 나눴다.
- 1939.10모스크바 교섭과 결렬
소련은 레닌그라드 방위를 이유로 카렐리야 지협 국경의 후퇴와 항코 반도 조차를, 그 대가로 동카렐리야의 더 넓은 땅을 제안했다. 핀란드 대표단은 이를 거부했다.
- 1939.11.26마이닐라 포격 사건
국경 마을 마이닐라에 포격이 가해지자 소련은 핀란드의 도발이라 주장하며 불가침조약을 파기했다. 포격은 소련 측이 스스로 벌인 구실이었다.
- 1939.11.30침공과 헬싱키 폭격
붉은 군대가 전 국경에서 진격을 시작하고 헬싱키가 폭격당했다. 몰로토프는 투하된 것이 폭탄이 아니라 굶주린 이웃에게 보내는 식량이라고 했고, 핀란드인들은 그 화염병에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1939.12.01테리요키 정부
점령지 테리요키에 쿠시넨을 수반으로 한 「핀란드 민주공화국」이 세워졌다. 소련은 이 정부를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해 교섭 상대를 지웠으나, 핀란드 안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 1939.12.14국제연맹 제명
국제연맹은 소련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제명했다.
- 1939.12–1940.01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
핀란드군은 도로에 묶인 소련군 종대를 잘라 포위하는 「모티」 전술로 제163·제44 사단을 궤멸시켰다. 제44사단장 비노그라도프는 부대 앞에서 총살됐다.
- 1940.01–02지휘 개편과 총공세
티모셴코의 북서전선군이 편성되어 포병과 물량을 집중한 정면 돌파로 방식을 바꿨다. 2월 중순 만네르헤임 선이 숨마에서 뚫렸다.
- 1940.03.12모스크바 강화조약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과 비푸리, 라도가 카렐리야를 넘기고 항코를 조차해 주었다. 테리요키 정부는 조용히 사라졌다.
- 1940.04–05교훈의 회의
중앙위 회의가 전쟁의 교훈을 결산했고, 보로실로프 대신 티모셴코가 국방인민위원이 되어 훈련·규율·기계화 개편에 착수했다.
- 1941.06계속전쟁
핀란드는 독일의 소련 침공에 발맞춰 잃은 땅을 되찾는 계속전쟁에 들어갔다. 겨울전쟁이 만든 적대는 그렇게 대조국전쟁의 북쪽 전선이 됐다.
관련 인물 57명
주도 · 집행6
개전을 낙관하고 준비 없는 공세를 승인한 국방수장으로, 초기 참패의 책임을 지고 1940년 5월 티모셴코에게 자리를 넘겼다.
제7군 사령관 · 만네르헤임 선 돌파키릴 메레츠코프1897–1968레닌그라드 군관구와 제7군을 이끌고 지협 정면을 맡아 초기 정체를 겪었으나, 재편 뒤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북서전선군 사령관 · 2월 총공세세묜 티모셴코1895–19701940년 1월 편성된 북서전선군을 맡아 포병과 물량을 집중한 돌파로 전황을 뒤집었고, 그 공으로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국방인민위원이 됐다.
군 정치총국장 · 전선의 책임 추궁레프 메흘리스1889–1953정치총국장으로 전선에 나가 패배의 책임을 추궁했다. 포위 궤멸된 제44사단의 지휘부 처형이 그 방식을 보여 준다.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마이닐라 포격 도발 지휘그리고리 쿨리크1890–1950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이 핀란드 침공 구실로 삼은 마이닐라 포격 사건을 쿨리크가 직접 지휘했다. 전쟁 후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포병 준비는 형편없었다.
NKVD 특별과 근무표트르 이바슈틴1909–2002지도부18
핀란드가 요구를 거부하자 짧고 손쉬운 전쟁을 예상하고 침공을 승인했다. 예상이 빗나가자 지휘 방식과 책임자를 갈아치웠다.
외교 · 강화조약 서명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가을 교섭에서 국경 이동과 항코 조차를 요구했고, 헬싱키 폭격을 식량 투하라 부른 발언은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1940년 3월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 공군 사령관알렉산드르 노비코프1900–1976참모총장 · 겨울전쟁 기획보리스 샤포시니코프1882–1945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 만네르헤임 선 돌파드미트리 렐류셴코1901–1987제24소총사단장 · 만네르헤임 선 돌파쿠즈마 갈리츠키1897–1973제70소총사단장 · 소련영웅미하일 키르포노스1892–1941제11소총군단장미하일 슈밀로프1895–1975적군 포병 총책임자니콜라이 보로노프1899–1968포병사령관니콜라이 야코블레프1898–19723소총군단장파벨 바토프1897–1985제28소총군단장 · 비보르크 차단파벨 쿠로치킨1900–1989제9군 공군 사령관파벨 리차고프1911–1941만네르헤임 선 돌파블라디미르 크류코프1897–1959겨울전쟁기 총리 · 강화조약 교섭리스토 뤼티1889–1956개전 직후 총리로 취임해 소련이 인정을 거부한 합법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조약을 교섭했다. 전후 핀란드인들 사이에서 만네르헤임 다음의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전쟁 돌입을 선언한 총리유카 랑겔1894–19821941년 6월 25일 의회 연설을 통해 핀란드의 전쟁 돌입을 선언했으며, 전후 전쟁책임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전쟁 초기 총리아이모 카얀데르1879–1943소련의 요구를 허세로 읽은 내각을 이끌며 전쟁 준비 부족을 드러냈다.
전시 대통령퀴외스티 칼리오1873–1940모스크바 강화조약 서명을 승인하고 오른팔 마비를 겪었다.
참여27
레닌그라드의 안전을 명분으로 강경한 대(對)핀란드 노선을 밀어붙였고, 군관구 군사평의회의 일원으로 개전과 작전에 관여했다.
테리요키 정부 수반오토 빌레 쿠시넨1881–1964소련이 세운 「핀란드 민주공화국」의 수반으로 앉아 침공에 정통성의 외피를 씌우는 역할을 맡았으나, 정부는 강화조약과 함께 사라졌다.
GRU 국장 · 정보 실패 책임을 거부하고 해임됨이반 프로스쿠로프1907–1941겨울전쟁 당시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으로 복무했다. 1940년 4월 전후 군사평의회에서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고, 그해 7월 해임되었다.
전투비행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1904–1975전차소대장아나톨리 그리브코프1919–2008자원입대보리스 셰르비나1919–1990참전이반 야코블레프1918–2002전차중대장이반 야쿠봅스키1912–1976참전키릴 모스칼렌코1902–1985특별스키여단 참모장쿠즈마 데레뱐코1904–1954제9군 작전처장미하일 말리닌1899–1960비행중대장파벨 쿠타호프1914–1984전차대대장파벨 로트미스트로프1901–1982군사정치위원바실 므자바나제1902–1988참전예브게니 이바놉스키1918–1991모스크바 교섭 핀란드 대표 · 강화조약 서명유호 쿠스티 파시키비1870–19561939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국경 교섭을 이끌었고, 전쟁이 터진 뒤 무임소장관으로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소련 측 강화조약 서명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895–1977당시 소장으로 참모본부 작전부장을 맡고 있었으며, 몰로토프·즈다노프와 함께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소련 측 전권대표로 서명했다.
핀란드 외무장관 · 모스크바 교섭 강경파엘리아스 에르코1895–19651938년 12월 외무장관에 취임해 소련과의 협상 전권을 장악했고, 스탈린의 영토 요구를 허세로 간주해 타협을 거부했다. 협상 결렬 후 파시키비는 이를 '에르코의 전쟁'이라 불렀다.
외무장관 · 강화 교섭배이뇌 탄네르1881–1966뤼티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모스크바 강화조약을 교섭했다.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를 거부했을 때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보인 놀라움을 기록한 1차 사료의 저자다.
만네르헤임의 베를린 밀사파보 탈벨라1897–1973겨울전쟁 종전 후 만네르헤임의 개인 밀사로 베를린에 파견되었다. 1940~1941년 핀란드와 나치 독일 간의 비밀 군사 협력 협상을 이끌어 계속전쟁의 발판을 마련했다.
패배 후 총살된 제44사단장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1899–1940제44소총사단장으로서 라테 도로에서 참패한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부대원들 앞에서 총살당했다.
핀란드 지원을 추진하다 실각한 프랑스 총리에두아르 달라디에1884–1970영불 원정군 파견을 추진했으나 때를 놓쳤고, 1940년 3월 핀란드 강화 직후 그 책임론으로 물러났다.
카렐리야 군 사령관에리크 하인리히스1890–1965잘츠부르크와 베를린 참모 회담에 참여해 바르바로사 작전과 핀란드 작전을 조율했다.
사상자 수정 연구 책임자유리 킬린1961–2006~2009년 프로젝트를 이끌어 적군 사상자 기록을 수정했고, 2012년 발표한 138,533명 사망자 수가 최신 자료이다.
비밀 접근을 시도한 NKVD 요원보리스 야르체프1899–19471938년 4월, 홀스티와 카얀데르를 만나 적군이 국경에서 기다리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스크바 주재 핀란드 공사아르노 사카리 위리외코스키넨1885–1951마닐라 포격에 관한 몰로토프의 항의를 접수하고 핀란드 답변서를 전달했다.
수오무살미에서 포위된 사단 지휘관안드레이 젤렌초프1896–1941163사단장으로서 돌파를 시도했으나 상부 명령으로 후퇴가 거부되었다.
목격 · 증언5
1994년 핀란드 방문 중 겨울전쟁을 스탈린의 침략전쟁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지도부가 처음으로 취한 역사적 사과였다.
전후 회고록에서 겨울전쟁을 '도덕적 패배'라 평한 소련 지도자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회고록에서 '이 정도 대가를 치른 승리는 사실상 도덕적 패배였다. 우리 국민은 진실을 듣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소련 지도부 내부에서도 겨울전쟁이 재앙이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최초로 실제 전사자를 공개한 사학자미하일 세미랴가1922–20001989년 오고뇨크 지에 겨울전쟁의 실제 전사자가 53,522명이라고 처음 공개하여 소련 공식 주장을 무너뜨렸다.
전쟁 손실 통계 연구 책임자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1929–20191988~1993년 연구를 지휘해 겨울전쟁 불가역 손실 126,875명을 산출했다.
관련 용어
출처: William R. Trotter, A Frozen Hell: The Russo-Finnish Winter War of 1939-40Carl Van Dyke, The Soviet Invasion of Finland, 1939-1940Г. Ф. Кривошеев (ред.), Россия и СССР в войнах XX века: потери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자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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