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야코블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 1952~53 수감

전시 내내 포병을 책임지고 로켓 시대를 연 군수 원수

1941년 6월 22일 아침, GAU 청사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는 순간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병총국(GAU)장으로서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하고 스탈린에게 140회 호출된 포병원수. 종전 후 독일 V-2 시설을 조사하고 GAU 내 로켓국을 창설했으며, 1948년 R-1 탄도미사일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 로켓 개발의 기초를 세웠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로켓 무기와 방공 체계의 창설자

종전 직후 야코블레프는 소련 로켓 개발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46년 2월 그는 특별위원회를 이끌고 베를린·노르트하우젠·블라이헤로데의 독일 로켓 시설을 조사했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1946년 5월 13일 소련 각료회의는 '반응무기 문제에 관하여'라는 획기적 결정을 채택했다. 이 결정으로 설립된 반응기술 특별위원회(말렌코프 위원장)에 야코블레프는 GAU 대표로 참여했으며, 그의 주도로 GAU 내에 제4관리국(반응무기국)이 창설되어 소콜로프 장군이 초대 국장을 맡았고, 튤린 중령이 이끄는 비행이론부도 신설되었다. 또한 GAU 산하에 제4과학연구소(NII-4)가 조직되어 네스테렌코 장군이 소장을, 가이두코프 장군이 부소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야코블레프는 카푸스틴 야르 시험장에서 독일 V-2 부품으로 조립한 소련 최초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주관하는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기술책임자는 세르게이 코롤료프였다. 이어 1948년 10월에는 최초의 국산 탄도미사일 R-1의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시험을 지휘했다.

1953년 방공군(PVO) 제1부사령관으로 복귀한 야코블레프는 1953년 8월, 소콜롭스키·주코프·바실렙스키·네델린·코네프·베르시닌 등 주요 원수들과 함께 CPSU 중앙위 간부회에 역사적인 서한을 보내 "가까운 장래에 예상되는 적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비해 대탄도미사일(ABM) 방어 체계 개발에 착수할 것"을 촉구했다. 이 서한은 소련 ABM 프로그램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야코블레프는 국방부 대표로 TGU(제3총국) 과학기술위원회의 ABM 문제 심의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모스크바 방공체계 S-25(베르쿠트)의 국가시험에서도 야코블레프는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1954).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약 470발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고, 1955년 5월 S-25는 정식 채택되어 모스크바 주변 2중 환상 배치로 동시 1,000대의 적기를 요격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다채널 대공미사일 방어체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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