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Воро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6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엮어낸 붉은군대 포병의 설계자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가 제64군에 사로잡힌 뒤, 보로노프는 자바리기노의 자크바냐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그를 신문해 저항 중인 북부 집단의 항복 명령을 요구했으나, 파울루스는 자신이 포로라 명령이 무효라며 거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우다 1920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포병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1937년 귀국해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면서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을 밀어붙였으며, 그해 처형된 전임자 로고프스키를 대신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타프카 대표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에 파견되어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감독했고, 1943년 파울루스의 신문에 참여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에 올랐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1968년 2월 악성 종양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스탈린그라드 포위군 소멸: 「콜초」 작전, 1942-43

1942년 12월 19일 스타프카 지령은 보로노프를 스탈린그라드 전선과 돈 전선에 바실렙스키의 부관으로 파견하며, 포위된 적군 소멸을 맡기고 12월 21일까지 그 방어를 깨고 5~6일 안에 소멸시킬 계획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이 지령이 그를 소멸 단계의 스타프카 대표로 세운 출발점이었다. 돈 전선에서 보로노프는 로코소프스키, 참모장 말리닌과 함께 스타프카가 정한 5~6일 기한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세 사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어 포위 집단을 둘로 자른다는 구상에 합의하고, 주타격은 돈 전선이, 조력 타격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넘겨받은 병력이 맡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1943년 1월 10일 강력한 포병 준비 끝에 「콜초」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으로 보로노프는 수보로프 1급 훈장을 받았고, 1월 18일에는 포병 원수로 진급했다. 그의 회고록은 1943년 2월 2일 파울루스의 두 번째 신문을 기록한다. 1월 31일의 신문과 구별되는 이 신문은 보로노프가 로코소프스키, 말리닌, 텔레긴과 함께 진행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소련군 공세를 알지 못했다고 답하며 단지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라 했고, 독일군 정찰의 무능을 탓했으며, 자신은 독일 최고사령부의 의지와 명령을 집행했고 군인으로서 그것을 정확하고 무조건적으로 수행할 의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 회고록은 1943년 2월 2일 16시에 돈 전선이 포위 집단 소멸을 완료해 1400제곱킬로미터를 해방하고 9만 10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적는다. 그중에는 약 2500명의 장교와 24명의 장군이 있었다. 보로노프는 이 수치를 전선 정보부의 8만~9만 추산, 며칠 전 돈 전선 참모부가 보고한 1만과 대조했다. 전투 뒤 보로노프는 스타프카에서 스탈린에게 네 시간 넘게 보고하며 볼가-돈 작전의 교훈을 정리했다. 돌파 구역에서의 다중적 포병 우세와 상대적으로 낮은 전체 포병 밀도, 화력 집중을 위한 새 포병 사단·여단의 가치, 포병 정찰 장비와 정찰·관측 항공기의 개선 필요, 로켓포와 야전 대공포의 집중 사용이 그 내용이었다. 같은 날 칼리닌은 그와 로코소프스키에게 수보로프 1급 훈장 수여령을 읽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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