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야 체포를 주도하고 부하를 '인민의 적'이라 부른 원수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크렘린의 각료회의와 당 간부회의 합동 회의에서 체포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모스칼렌코가 장교들을 이끌었다고 전하나, 다른 사료는 말렌코프의 책상 버튼 신호로 주코프의 무장 장교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리시노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8월 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 제1대전차여단을 시작으로 제15소총군단과 제6기병군단, 이어 제38·제1전차·제1근위·제40군을 차례로 지휘했으며, 드네프르 도하로 1943년 10월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같은 달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8군을 이끌었다. 1953년 6월 자신이 모은 군인 그룹을 이끌어 베리야 체포를 수행했고, 루덴코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이었다. 1955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2년 4월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78년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흐루쇼프는 그를 '제3의 모스칼렌코, 기회주의자'라고 평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0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20–22적군 제1기병군 복무, 내전 종군
- 1939–41핀란드 전쟁, 이후 제1대전차여단장
- 1942–43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 1943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 영웅 칭호
- 1943–45제38군 사령관, 키예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53베리야 체포 주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55/1960–62소련 원수,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78두 번째 소련 영웅 칭호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내전 종군
- 1939.11–1940.03겨울전쟁참전
- 1941–1945대조국전쟁제1전차군 사령관
- 1942–1943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 전투 지휘관카드에는 1942~43년 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부터 쿠르스크까지 지휘했다고 적혀 있다.
- 1953베리야의 몰락체포조 지휘 및 베리야 구금흐루쇼프의 지시로 권총을 크렘린에 반입해 베리야를 직접 체포했고, 이후 모스크바 방공사령부 벙커에 베리야를 구금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으로 사형 판결에 참여했다.
- 1957반당 그룹 사건중앙위원회 위원
1957년 주코프 규탄
1957년 6월 반당 그룹 사건에서 게오르기 주코프는 흐루쇼프 편에 서서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 그룹을 분쇄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 보상으로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정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뒤인 10월, 흐루쇼프는 주코프가 군대 내 당 정치기관을 약화시키고 '보나파르트주의적' 야심을 품었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0월 총회에서 모스칼렌코는 가장 공격적인 규탄자 중 하나였다. 주코프가 군대를 장악해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고 열정적으로 비난하자, 주코프는 회의장에서 이렇게 받아쳤다. "네가 나를 뭐라고 비난하는 거냐? 네 자신이 내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뭘 보고만 있습니까? 권력을 직접 손에 쥐십시오, 쥐라고요! '" 모스칼렌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주코프를 공격하는 모스칼렌코의 맹렬함에 소름이 끼쳤다"고 적었다.
모스칼렌코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1953년에는 주코프와 함께 베리야 체포에 나섰고, 4년 뒤에는 주코프를 짓밟는 데 앞장섰으며,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인 1962년에는 자신도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흐루쇼프는 모스칼렌코를 가리켜 "제3의 모스칼렌코는 기회주의자이며, 원칙도 없고 비논리적인 인간"이라고 평했다. 주코프는 1999년 러시아 대통령 직속 정치탄압 희생자 재활위원회의 결정으로 모든 혐의가 공식적으로 벗겨졌다.
동시대인이 본 지휘관 모스칼렌코와 탈공산화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모스칼렌코 항목에는 '비판(Критика)' 절이 따로 있어, 동시대인의 평가가 날카롭게 갈렸음을 보여준다. 비판자로는 A. V. 고르바토프 대장이 있다. 그는 하리코프 부근 방어전에서 모스칼렌코가 '같은 지점에 10~15일씩 막대한 대가를 치르며 무의미하고 끊임없는 공격을 감행했다'고 비난했고, S. K. 티모셴코 원수 앞에서(흐루쇼프, 바그라먄, 모스칼렌코 본인이 있는 자리였다) 모스칼렌코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군단장이 아니라 군에 붙은 군더더기, 줄 없는 발랄라이카"라고 말했다. 고르바토프는 사단들이 '군단장의 명령에 반하여 제 판단으로' 움직였고, '군단장의 지휘라는 것은 부하를 무례하게 대하는 것 전부'라며, '당신은 히틀러를 돕고 있다, 파시스트, 반역자'라는 욕설을 레포르토보 감옥의 심문관에게서 들은 말과 견주었다고 전한다. 전선 참전자이자 영화감독·각본가인 I. I. 니콜라예프는 기록문학 《장군》에서 "극히 의심스러운 군사적 재능을 지닌 K. S. 모스칼렌코 장군은 상급 지휘부에는 아첨하고 자기 부대에는 무자비했다"고 썼으며, 부하를 대하는 방식이 '모욕과 히스테리의 결합'이었고 사단장들에게 독자성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가 실패와 '적보다 두세 배 큰 손실'이었다고 보았다.
반대 방향의 평가도 있다. 제38군 사령관으로서의 모스칼렌코에 대한 수훈 사유에서 제1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 I. S. 코네프는 그를 '의지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자기 시간과 건강을 돌보지 않고 많이 일한다'고, '전술적으로 교양이 있다'고 적으면서도 '공격은 방어보다 잘하나 복잡한 상황에서는 안정이 약하다'고 평했다.
다른 평가도 있다. 공군 원수 A. E. 골로바노프는 '전쟁 중에 모스칼렌코는 "패닉 장군"으로 불렸고, 스탈린은 그에게 얼굴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고했으며 주코프가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패닉 장군이 내게 전화했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작가 G. N. 블라디모프는 모스칼렌코 휘하 제40군 군사위원회 위원 P. V. 세바스티야노프 장군의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모스칼렌코가 부크린 교두보에서 자기 군을 소모한 뒤 류테주 교두보로 옮겨 N. E. 치비소프로부터 제38군을 빼앗았고, 그 배경에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는 우크라이나인 군단장이 해방해야 한다'는 모스칼렌코와 흐루쇼프의 판단이 있었다고 썼다. 블라디모프의 소설 《장군과 그의 군대》에서는 '테레셴코 장군'으로 우회적으로 형상화되었다.
흐루쇼프는 1969년 구술 회고록 《시대. 사람들. 권력》에서 가장 포괄적인 평가를 남겼다. 모스칼렌코는 '일에 헌신적'이고 '그럭저럭 싸웠으며' 끈기와 에너지를 보이고 자신을 아꼈으나, 신경질적이고 불균형하며 성급하고 무례했다. 그는 부하를 모욕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 상습 어휘는 '인민의 적! 반역자! 파렴치한! 재판에 넘겨야 한다! 총살해야 한다!'였다. 흐루쇼프는 '여러 모스칼렌코가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전쟁 초기에 정직하게 부대를 지휘하고 그 공로가 정당하게 인정된 한 사람, '진짜 히스테리 환자'인 두 번째 사람, 그리고 '기회주의자이며 비논리적이고 원칙 없는 인간'인 세 번째 모스칼렌코가 있다는 것이다.
탈공산화 국면에서 모스칼렌코의 기억은 다시 정치의 대상이 되었다. 키이우 시의회는 2023년 5월 26일 우크라이나 탈공산화 법률에 따라 그에게서 '키이우 명예시민' 칭호를 박탈했다. 한편 1962년 4월의 해임은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명예직인 국방부 총감독관 자리로 옮겨진 것이었고, 당시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언론인 미셸 타튀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다.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으로서 가장 비밀스러운 무기가 핵탄두를 실은 채 노출된 지역으로 보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는 타튀의 추론이며 확립된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