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안을 든 비밀경찰 총수
1949년 8월 29일 새벽, 카자흐 초원. 베리야는 참호에서 카운트다운을 지켜보았다. 섬광이 초원을 삼키고 버섯구름이 솟아오르자 그는 쿠르차토프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몇 분 후 "미국인들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며 서방 스파이의 방사능 낙진 샘플 채취 차단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스탈린의 마지막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 그리고 스탈린이 죽자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을 쏟아 낸 사람. 예조프의 대숙청을 마무리 짓고 NKVD를 장악했으며, 1944년 체첸·잉구시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집행했다. 전후에는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소련 핵무기 개발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제1부총리로서 대대적 사면, 동서독 통일 중립화 제안, 민족 간부 우대 등 급진 개혁안을 쏟아냈다. 동료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의 개혁이 아니라 그의 서류함이었다. 1953년 6월 정치국 회의 도중 주코프 원수의 장교들에게 체포되어 12월 총살 — 소련 최고 권력투쟁의 마지막 처형이다.
경력 연표
- 1921–31캅카스 체카·GPU
-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 1945–53원폭 계획 총괄(특별위원회 의장)
- 1953.3–6제1부총리, 사면·복권 등 개혁안 연발
- 1953.6/12체포, 처형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캅카스 체카·GPU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그루지야 당 제1서기
- 1937–1938대숙청후임 수장1938년 말 NKVD를 넘겨받아 예조프 체제의 청산을 지휘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내무인민위원·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전시 보안·군수·민족이주 총괄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보안기구 배후국가보안기구를 통해 사건을 뒷받침했다.
- 1943–1949소련 원자폭탄 개발특별위원회 수반1945년 이후 사업 전체를 관장하며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과 수용자 노동을 동원했다.
- 1952–1953의사들의 음모음모를 끝낸 사람스탈린 사후 사건을 조작으로 발표하고 체포된 의사들을 석방했다.
- 1950–1953한국전쟁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의 일원으로 종전 방침에 동의한 내무상말렌코프·몰로토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트로이카'를 구성했으며, 3월 19일 각료회의 결의로 종전 추진 방침에 동참했다.
- 1953베리야의 몰락숙청의 표적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로 1953년 12월 재판 뒤 처형됐다.
전선 없는 원수 — 대조국전쟁기 국가방위위원회의 베리야
1941년 6월 30일 국가방위위원회(GKO)가 창설되자 베리야는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말렌코프와 함께 다섯 창설 위원에 들었다. 1942년 2월부터 항공기·항공엔진·화기·박격포 생산과 공군 운영을 감독했고, 같은 해 8~9월에는 GKO 전권대표로 캅카스에 파견되어 방어선 조직을 지휘했다. 1942년 12월 작전국 위원이 되면서 석탄산업과 철도까지 맡았고, 1944년 5월에는 GKO 부의장 겸 작전국 의장으로 올라 방위산업·수송·야금·연료·전력 등 전시 경제 전반을 총괄했다. 1943년 9월 '전시의 어려운 조건에서 무기·탄약 생산을 강화한 특별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손이 1941년 10월 18일 슈테른, 스무시케비치, 리차고프 등 25명을 재판 없이 총살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고, 1944년의 민족 강제이주도 그의 지휘였다. 1945년 7월 그는 야전 지휘 경험 없이 소련원수 계급장을 달았다: 전선에 선 적 없는 원수, 그것이 전쟁이 베리야에게 준 자리였다.
1944년 체첸·잉구시 강제이주 — 국가가 민족 전체를 짐칸에 실어 나르다
1944년 2월 23일, 베리야는 NKVD 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체첸인과 잉구시인 약 50만 명을 하루 만에 체포해 가축 수송열차에 실었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으로의 강제이주 과정에서 수만 명이 사망했다. 베리야는 이 작전의 계획·집행·보고를 모두 직접 총괄했고, 스탈린에게 '작전 완료'를 보고한 것도 그였다. 크림 타타르, 발카르인, 메스헤티 튀르크인 등 다른 소수민족 강제이주도 같은 해 베리야의 지휘 아래 집행되었다. 오늘날 체첸인과 잉구시인에게 베리야라는 이름은 집단적 트라우마의 상징이다.
핵무기 없는 초강대국은 없다 — 베리야의 원폭 프로젝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스탈린은 즉시 반응했다. 8월 20일, 국가방위위원회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의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소련의 모든 원자력 연구, 산업 시설, 정보 활동은 이제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비밀경찰 총수이자 굴라크의 주인, 그리고 이제 원자 폭탄 프로젝트의 절대적 관리자였다.
베리야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운영했다. NKVD의 해외 정보망을 통해 맨해튼 계획에서 클라우스 푹스 등이 넘긴 기밀 정보를 확보하고, 굴라크 수감자 수만 명을 우라늄 광산, 원자로 건설, 비밀 도시(첼랴빈스크-40 등)의 기초 공사에 투입했다. 과학자들은 전면적 감시 속에서 일했고,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미국 정보 당국은 소련의 원폭 보유를 1953년 이후로 예측했지만,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첫 번째 번개'가 작렬했다. 히로시마로부터 불과 4년 만이었다. 베리야는 스탈린상 1급을 받았고, 마침내 소련은 미국과 대등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베리야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효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리학자 율리 하리톤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이 나라 현대사의 악을 의인화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활력과 실행력을 가졌다. 자신의 지성과 의지력, 목적 달성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곧 공포와 진보의 접점이었던 셈이다.
스탈린 사후 100일 — 개혁가로 변신한 비밀경찰 수장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가장 위험한 후계자는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15년간의 비밀경찰 수장, 굴라크의 설계자, 소련 핵무기 프로젝트의 감독자. 그러나 스탈린 사후 100일 동안 베리야가 한 일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수백만 수감자들의 대사면을 명령하고, 고문을 금지했으며, 굴라크를 KGB에서 내무부로 이관해 경제적 수용소로 전환하려 했다. 동독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통일이 아닌 중립 통일을 제안했다. 소수민족 공화국에 민족 간부 우대를 주장했다.
베리야가 진심으로 개혁가가 된 것인가, 아니면 위협을 느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책략인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말렌코프와 흐루쇼프가 연합해 그를 급습했고, 1953년 12월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의 짧은 봄 동안 소련 체제의 경직성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공포 정치 집행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