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9–1953 ✕ 처형

개혁안을 든 비밀경찰 총수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53.07 해임 · 1953년 6월 체포, 12월 처형

관련 역사 사건

캅카스의 주인으로: 1918~1938년, 모스크바 이전의 베리야

1918년 9월 바쿠 코뮌이 무너진 뒤 베리야는 바쿠 볼셰비키 지하조직에서 활동했고,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1919~19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ADRP) 방첩기관에 들어가 정보를 넘겼다 한다. 이 경력의 진위는 확정되지 않았으며, 1953년 그를 공격하는 죄목의 하나가 되었다. 1920년 체카에 들어간 그는 1921년 7월 아제르바이잔 체카 부의장(다른 사료에는 같은 해 5월)이 되었고 1922년 잠시 그 기관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11월 트빌리시로 옮겨 그루지야 체카·GPU 부의장이 되었다. 1924년 그루지야 멘셰비키 봉기를 진압한 뒤 최대 1만 명이 처형되었고 그는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6년 12월 2일 그루지야 GPU 의장(1931년 12월 3일까지)이 되었고, 동시에 자캅카스 SFSR OGPU의 고위 전권대표를 겸했으며 1927년 4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그루지야 SSR 내무인민위원을 맡았다. 1931년 11월 14일에는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1938년 8월 31일까지), 1932년 10월 17일에는 자캅카스 지역위 제1서기가 되어 이 지역의 반대 없는 당 지도자가 되었다. 그 전에 그는 휴양 중이던 스탈린과의 면담을 거듭 요구했고 1931년 9월 말 네스토르 라코바의 주선으로 이를 얻었다. 1932년 스탈린은 그를 '좋은 조직가이자 유능하고 일 잘하는 간부'로 평가했으며, 제1서기 카르트벨리슈빌리는 그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다.

1935년 그는 스탈린의 초기 역할을 확대한 연설·저서 '자캅카스 볼셰비키 조직의 역사에 대하여'로 총애를 굳혔는데, 역사가들은 그 책이 인용한 경찰 문서의 진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1936년 7월 9일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 아가시 칸지안이 총상으로 숨졌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처리되었으나 1961년 KGB 의장 셸레핀은 그가 베리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고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소련 아브하즈의 지도자 라코바가 베리야와 식사한 뒤 중독으로 사망했고, 라코바의 가족도 파괴되었다. 두 형제는 1937년 11월 4일 밤 총살되었고 어머니 사리야는 감옥에서 죽었으며 15세 아들 라우프도 결국 총살되었다.

그는 외부의 개입 없이 자기 지역을 숙청할 만큼 무자비하다고 여겨졌다. 1937년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는 므디바니, 오쿠자바, 캅타라제 등 이른바 '트로츠키주의-간첩-파괴' 조직을 열거했는데, 그들에 대한 증거는 나중에 고문으로 받아낸 거짓 자백으로 드러났다. 1937년 10월 30일 스탈린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는 그해 그루지야에서 12,000명이 체포되어 10월 말까지 7,37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기록되었고(5,236명은 트로이카에 의한 판결), 그는 지역의 사형·징역 권한을 확대해 줄 것을 요청해 받아냈다. 1937년 5월 17일 그루지야 공산당 제10차 대회와 같은 해 10월 28일 전원회의 보고에서 그는 그루지야 작가·예술가들을 지목하며 '최후 경고'를 남겼다. 시인 파올로 이아슈빌리는 자살로 내몰렸고, 작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니콜로 미치슈빌리, 디미트리 셰바르드나제 등이 총살되었다.

지역에서의 그의 '근대화' 기록도 함께 문서화되어 있다. 그의 지도 아래 자캅카스 경제는 성장했고, 그는 지역 석유산업과 제모-아프찰라 수력발전소 같은 대형 산업 시설을 추진했으며, 그루지야는 전연방 휴양지대로, 아열대 농산물은 그루지야 농민을 비교적 잘살게 했다. 이 기록은 그의 탄압 기록과 맞세울 것이 아니라 함께 저울에 올려야 한다. 1938년 모스크바로 간 것은 바로 이 자캅카스 기록의 직접적 결과였다. 그곳에서의 무자비한 숙청 처리가 그의 준비성을 스탈린에게 확신시켰고, 1938년 8월 그는 NKVD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불려 갔다.

전선 없는 원수 — 대조국전쟁기 국가방위위원회의 베리야

1941년 6월 30일 국가방위위원회(GKO)가 창설되자 베리야는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말렌코프와 함께 다섯 창설 위원에 들었다. 1942년 2월부터 항공기·항공엔진·화기·박격포 생산과 공군 운영을 감독했고, 같은 해 8~9월에는 GKO 전권대표로 캅카스에 파견되어 방어선 조직을 지휘했다. 1942년 12월 작전국 위원이 되면서 석탄산업과 철도까지 맡았고, 1944년 5월에는 GKO 부의장 겸 작전국 의장으로 올라 방위산업·수송·야금·연료·전력 등 전시 경제 전반을 총괄했다. 1943년 9월 '전시의 어려운 조건에서 무기·탄약 생산을 강화한 특별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손이 1941년 10월 18일 슈테른, 스무시케비치, 리차고프 등 25명을 재판 없이 총살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고, 1944년의 민족 강제이주도 그의 지휘였다. 1945년 7월 그는 야전 지휘 경험 없이 소련원수 계급장을 달았다: 전선에 선 적 없는 원수, 그것이 전쟁이 베리야에게 준 자리였다.

1944년 체첸·잉구시 강제이주 — 국가가 민족 전체를 짐칸에 실어 나르다

1944년 2월 23일, 베리야는 NKVD 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체첸인과 잉구시인 약 50만 명을 하루 만에 체포해 가축 수송열차에 실었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으로의 강제이주 과정에서 수만 명이 사망했다. 베리야는 이 작전의 계획·집행·보고를 모두 직접 총괄했고, 스탈린에게 '작전 완료'를 보고한 것도 그였다. 크림 타타르, 발카르인, 메스헤티 튀르크인 등 다른 소수민족 강제이주도 같은 해 베리야의 지휘 아래 집행되었다. 오늘날 체첸인과 잉구시인에게 베리야라는 이름은 집단적 트라우마의 상징이다.

핵무기 없는 초강대국은 없다 — 베리야의 원폭 프로젝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스탈린은 즉시 반응했다. 8월 20일, 국가방위위원회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의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소련의 모든 원자력 연구, 산업 시설, 정보 활동은 이제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비밀경찰 총수이자 굴라크의 주인, 그리고 이제 원자 폭탄 프로젝트의 절대적 관리자였다.

베리야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운영했다. NKVD의 해외 정보망을 통해 맨해튼 계획에서 클라우스 푹스 등이 넘긴 기밀 정보를 확보하고, 굴라크 수감자 수만 명을 우라늄 광산, 원자로 건설, 비밀 도시(첼랴빈스크-40 등)의 기초 공사에 투입했다. 과학자들은 전면적 감시 속에서 일했고,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미국 정보 당국은 소련의 원폭 보유를 1953년 이후로 예측했지만,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첫 번째 번개'가 작렬했다. 히로시마로부터 불과 4년 만이었다. 베리야는 스탈린상 1급을 받았고, 마침내 소련은 미국과 대등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베리야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효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리학자 율리 하리톤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이 나라 현대사의 악을 의인화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활력과 실행력을 가졌다. 자신의 지성과 의지력, 목적 달성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곧 공포와 진보의 접점이었던 셈이다.

스탈린 사후 100일 — 개혁가로 변신한 비밀경찰 수장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가장 위험한 후계자는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15년간의 비밀경찰 수장, 굴라크의 설계자, 소련 핵무기 프로젝트의 감독자. 그러나 스탈린 사후 100일 동안 베리야가 한 일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100만 명이 넘는 비정치범을 풀어 준 대사면을 주도하고, 수사 중 고문을 금지했으며, 굴라크를 법무부로 넘겼다. 동독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통일이 아닌 중립 통일을 제안했다. 소수민족 공화국에 민족 간부 우대를 주장했다.

베리야가 진심으로 개혁가가 된 것인가, 아니면 위협을 느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책략인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말렌코프와 흐루쇼프가 연합해 그를 급습했고, 1953년 12월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의 짧은 봄 동안 소련 체제의 경직성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공포 정치 집행자였다.

1953년 6월, 크렘린에서 라코시를 추궁하다

1953년 6월 13일 스탈린의 옛 집무실에서 열린 소련·헝가리 지도부 회담에서 베리야는 가장 많은 숫자를 들고 나온 발언자였다. 그는 버려진 농지 통계로 말을 꺼낸 뒤 농업만 키워서는 안 되고 중공업 개발을 늦추어 소비재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내무 문제였다. 「인구 950만의 헝가리에서 150만 명에게 소송을 제기한 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라고 물은 그는 내무·사법기관과 국가보안기관(ÁVH)이 형편없이 일했다며 내무부와 ÁVH를 통합하라고 요구했다.

베리야는 라코시가 직접 보안기관을 지휘하고 개별 수사에 개입하며 신체적 폭력까지 명령했다고 비난했다. 무고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직업적 오류라는 것이었다. 그는 두 차례 스탈린의 같은 행동도 비판했다. 그리고 「각료회의 의장은 헝가리인이 맡는 것이 더 어울린다」며 라코시의 총리 사임을 요구했고, 너지 임레의 이름을 처음 꺼냈다. 1949년 너지를 배제한 것이 옳지 않았다고 말하고, 너지가 총리가 되면 경험 많은 라코시는 당을 이끌라고 제안했다.

16일 회의에서 그는 헝가리 측 결의 초안이 너무 짧고 숫자가 없다며 농업 상황, 대량 탄압의 수치, ÁVH 지휘에 대한 라코시의 개인 책임을 넣게 했다. 너지가 쿨라크 명부 폐지를 고집하자 이를 받아들였고, 라코시가 협조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망칠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의 회고에서 이 말은 「허리를 부러뜨리겠다」로 남았다. 마지막에는 그해 초 체포된 페테르 가보르 사건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열흘 뒤 베리야는 체포되었다. 7월 초 흐루쇼프는 라코시·너지·게뢰를 모스크바로 불러, 헝가리 문제 토론에서 베리야가 보인 태도가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라코시는 이후 너지를 「베리야의 사람」으로 몰았고, 카다르 야노시도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까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라이너는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 증거가 전혀 없으며, 베리야는 라코시 비판에 특히 열성적이었을 뿐 다른 소련 지도자들과 노선이 달랐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와 말렌코프는 헝가리 지도부의 유대계 인사를 줄이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1956년 9월 너지는 한 잡지 편집진에게, 베리야가 스탈린 사후 내부 논쟁에서 위성국들을 중립화하는 「가장 급진적인」 대안을 내놓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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