Троцкизм · 1924–

트로츠키주의

Trotskyism

레프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 제4인터내셔널이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의 한 갈래. 후진국의 민주주의 혁명이 노동계급 권력과 국제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연속혁명론, 스탈린 치하 소련을 관료가 권력을 빼앗은 '퇴보한 노동자 국가'로 보고 관료에 맞선 정치혁명을 요구한 분석, 일상 요구와 사회주의 목표를 잇는 이행강령,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축으로 한다.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볼셰비키-레닌주의자라 불렀고,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름은 1924년 당내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견해를 레닌주의의 이단으로 몰기 위한 규정으로 자리 잡았다.

상세

이름의 내력

'트로츠키주의'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 파벨 밀류코프였다. 그는 1907년 펴낸 『제2대 국가두마 선거는 어떻게 치러졌나』에서 1905년 10~11월의 집회 분위기를 돌아보며 트로츠키주의의 '혁명적 환상'을 언급했다. 1905년 혁명 때 트로츠키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을 추구했고, 이 해에 훗날 연속혁명론이라 불릴 이론을 정식화했다.

볼셰비키 당내에서 이 말이 되살아난 것은 1924년 가을의 '문헌 논쟁' 때였다. 트로츠키가 저작집 제3권 서문으로 「10월의 교훈」을 발표하자, 부하린이 쓴 『프라우다』 사설이 1917년 이후 처음으로 '트로츠키주의'라는 말을 썼다. 이어 11월에 카메네프의 「레닌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 지노비예프의 「볼셰비즘이냐 트로츠키주의냐?」, 스탈린의 「트로츠키주의냐 레닌주의냐?」가 잇따라 나왔다. 레닌은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에 들어온 1917년 이후 '트로츠키주의'라는 개념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이를 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스탈린과 함께 1924년에 지어낸 '트로츠키주의의 전설'이라 불렀으나, 레닌주의에 적대적인 견해라는 이 규정은 1980년대 말까지 소련 공식 사학과 공식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남았다. 지지자들 자신은 좌익반대파, 볼셰비키-레닌주의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같은 이름을 썼다.

이론의 축

트로츠키는 자기 강령을 다른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가르는 요소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반대파의 두 단계 혁명론에 맞선 연속혁명 전략, 1924년 이후 소련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1933년 이후 소련에서의 정치혁명 지지,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노동계급의 대중행동을 통한 사회혁명,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그리고 노동계급의 일상 투쟁과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최대 목표를 잇는 이행강령이다.

소련 분석의 중심은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이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이 생산수단을 수용해 사회주의적 토대를 놓았지만 대략 1923~1929년에 관료층이 프롤레타리아에게서 권력을 빼앗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관료는 주식도 채권도 없이 행정 위계로 충원되는 특수한 카스트일 뿐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고 하여, 소련 관료를 '국가자본가' 계급으로 보는 견해를 물리쳤다. 이 밖에 극우에 맞선 통일전선 전술, 노동자 통제와 소비에트 민주주의, 농업의 자발적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가 트로츠키주의의 특징으로 꼽힌다. 주요 문헌은 『연속혁명』, 1936년의 『배반당한 혁명』,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의 공식 강령이 된 1938년의 『자본주의의 단말마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이행강령)다.

당내 반대파에서 국제 조류로

1923년 10월 트로츠키는 당내 민주주의 강화를 요구하는 편지를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에 보냈고, 같은 때 지지자들은 정치국에 「46인 선언」을 냈다. 이렇게 형성된 좌익반대파는 1926년 스탈린과 갈라선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통합반대파를 이루었으나 패배했다. 트로츠키는 1927년 10월 권력에서 밀려나 11월 당에서 제명되었고, 1928년 1월 알마아타로 유형되었다가 1929년 2월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1928년 이후 각국 공산당은 트로츠키주의자를 축출했고, 당 노선에 이견을 보이는 이는 누구나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혔다. 1937~1938년 대숙청으로 당내 트로츠키주의자는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국외에서 트로츠키는 1930년 코민테른 안의 반대파로 국제좌익반대파를 세웠다. 그러나 가입자가 곧바로 코민테른에서 축출되자 1933년 국제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 조직 건설로 돌아섰으며, 이것이 1938년 파리에서 창립된 제4인터내셔널의 바탕이 되었다. 코민테른이 돌이킬 수 없이 스탈린주의에 넘어갔다는 판단이었다.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시티에서 내무인민위원부 요원 라몬 메르카데르의 습격을 받아 이튿날 숨졌다.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운동

제4인터내셔널이 창립된 1938년 무렵 트로츠키주의는 베트남과 스리랑카, 조금 뒤에는 볼리비아에서 대중적 정치 조류였다.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 창립자 천두슈가 1931년 트로츠키의 권고로 결성된 중국공산주의자동맹에 참여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서는 따투터우가 이끈 『라 뤼트』 그룹이 한때 인도차이나공산당과 공동 노동자 후보 명단을 낼 만큼 강했으나, 따투터우는 1945년 9월 베트민에게 처형되었다. 1935년 창당한 스리랑카의 랑카 사마 사마자당은 1940년 친모스크바파를 축출해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되었고 1947년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었다. 볼리비아의 혁명노동자당은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대중정당으로 성장해 볼리비아 민족혁명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스탈린주의자가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어디서나 트로츠키주의자가 최악의 적으로 추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트로츠키주의는 베트남에서 대중운동으로서 분쇄되었고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주변화되었다. 제4인터내셔널은 1951년 동유럽의 새 공산 정권을 '변형된 노동자 국가'로 규정했고, 1953년에는 미셸 파블로의 노선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그 뒤로도 아르헨티나의 좌파노동자전선처럼 의회에 진출한 트로츠키주의 연합이 활동하고 있다.

이웃 개념과의 구별

트로츠키주의는 그 구성 요소나 조직과 구별된다. 연속혁명론은 1905년 트로츠키가 정식화한 혁명 이론으로 트로츠키주의를 규정하는 특징이 되었지만, 트로츠키주의는 여기에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과 이행강령, 국제 조직 건설까지 포괄한다. 좌익반대파는 1920년대 소련 당내에서 활동한 분파이고, 제4인터내셔널은 1938년 이후 이 조류가 세운 국제 조직이다. 레닌주의와의 관계는 논쟁적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17년 이후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식 민주집중제 당 조직에 온전히 헌신했다고 보며, 1922~1923년 소련 관료제에 맞선 레닌과 트로츠키의 제휴와 레닌의 유언을 근거로 든다. 반면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자를 레닌과 다른 견해를 가진 수정주의자로 규정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레닌주의를 자처하면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명칭을 자기에게 쓰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스펙트럼에서 트로츠키주의는 흔히 왼쪽에 놓이지만, 대개 비볼셰비키적인 오늘날의 좌익공산주의와는 구별된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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