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공산주의
Left communism
좌익 공산주의는 10월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의 전술·조직 노선을 왼쪽에서 비판한 공산주의 조류들을 묶는 이름이다. 1918년 무렵 뚜렷한 흐름으로 떠올랐으며, 크게 안톤 판네쿠크·헤르만 호르터·오토 륄레의 독일-네덜란드 좌파와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이탈리아 좌파로 나뉜다. 개량주의·중앙파와 완전히 분리된 공산당이나 노동자 평의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 의회 선거 참여를 거부하거나 극히 제한한다는 것, 인민전선과 민족해방운동 지지에 반대한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레닌은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이들의 반의회주의와 노동조합 활동 거부를 비판했다. 1918년 러시아의 ‘좌파 공산주의자’ 분파와 평의회 공산주의는 이와 겹치는 더 좁은 개념이다.
상세
정의와 두 전통
좌익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치사상과 실천을 비판하는 공산주의 좌익의 여러 입장을 가리킨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이 제2차 대회 이후, 그리고 스탈린 아래 ‘볼셰비키화’된 뒤 내세운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자신들의 입장이 더 진정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두 주된 흐름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좌파와 독일-네덜란드 좌파다. 두 전통은 인민전선과 여러 형태의 민족주의·민족해방운동, 그리고 의회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공유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좌익 공산주의가 독자적 조류로 자리 잡기 전인 1919년에 살해되었지만, 대부분의 좌익 공산주의자에게 정치적·이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말은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이래 정통 공산당 쪽에서 왼쪽의 경쟁자를 가리키는 비판적 표현으로도 쓰였다. 이탈리아어 자료는 레닌이 이 흐름을 ‘순수한 공산주의의 진리’를 교조적으로 되풀이하는 순수성의 정치로 규정했다고 정리한다.
형성: 독일·네덜란드·이탈리아·영국
좌익 공산주의는 1918년 무렵 뚜렷한 운동으로 떠올랐다. 개량주의·중앙파와 완전히 분리된 공산당이나 노동자 평의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 가장 제한된 형태를 빼고는 선거 참여에 반대한다는 것, 투쟁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었다.
독일에서는 1919년 10월 하이델베르크 당대회에서 파울 레비가 이끄는 당 지도부에 의해 축출된 독일 공산당 좌파가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세웠다. KAPD는 독일 공산당과 달리 레닌주의 조직 원칙인 민주집중제, 선거 참여, 개량주의 노동조합 안의 활동을 거부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면서도 러시아식 일당 독재는 배격했다. 네덜란드의 안톤 판네쿠크와 헤르만 호르터가 이 당에서 중요한 이론적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이탈리아 사회당 안에 ‘기권파 공산주의 분파’를 만들어, 프롤레타리아는 무장투쟁과 혁명적 행동으로만 정치권력을 쥘 수 있으므로 당이 선거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흐름은 그람시·톨리아티의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과 함께 1921년 1월 리보르노 대회에서 사회당을 떠나 이탈리아 공산당을 세웠고, 보르디가는 그 첫 서기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실비아 팽크허스트 등의 노동자사회주의연맹이 의회 투쟁과 노동당과의 협정에 강하게 반대했다.
레닌의 비판과 코민테른과의 결별
레닌은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썼다. 이 책은 같은 해 러시아어·독일어·영어·프랑스어로 출간되어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대의원들에게 배포되었다. 레닌은 KAPD의 노동조합 활동 거부와 반의회주의, 그리고 카를 에를러가 ‘당의 독재’에 맞세운 ‘대중의 독재’를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상당 부분이 의회에 환상을 품고 있는 한 공산주의자는 반동적 조직 안에서도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좌파와 이탈리아 보르디가의 반의회주의, 영국의 팽크허스트와 윌리 갤러커의 글도 비판 대상이었다. 호르터는 같은 해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이 책을 상세히 반박했다.
판네쿠크와 호르터는 1919년부터 코민테른 서유럽 사무국에서 일하다가 1920년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밀려났다. KAPD는 1920~1921년 코민테른의 준회원이었으나, 1921년 호르터는 코민테른과 완전히 결별했다. 1922년 KAPD 에센파는 네덜란드의 호르터 그룹, 영국의 팽크허스트 그룹 등과 함께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세웠지만 1925년까지 와해되었다.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전통은 이후 평의회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일부는 러시아 혁명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보게 되었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 혐의로 민족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형된 네덜란드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도 평의회 공산주의자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926년 1월 리옹 대회에서 좌파가 모스크바에 동조하는 중앙파에 밀려 소수파가 되었다. 보르디가는 같은 해 체포되어 우스티카섬에 유배되었고, 1930년 트로츠키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국외의 이탈리아 좌파는 1927년 오토리노 페로네를 중심으로 분파를 꾸려 《프로메테오》와 《빌랑》을 냈으며,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는 입당 전술과 인민전선 문제 등 원칙의 차이로 협력하지 못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민주집중제 대신 ‘유기적 중앙집중제’를 조직 원칙으로 내세웠다.
러시아의 좌익 흐름
러시아에서는 1907년 전진파가 레닌의 권위주의와 의회주의에 도전하면서 좌익 볼셰비즘이 나타났다. 1918년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에 반대한 부하린 중심의 ‘좌파 공산주의자’ 분파가 생겼으나 1918년 말까지 대체로 사라졌고, 그 성격 일부는 군사 반대파와 노동자 반대파, 그리고 신경제정책과 레닌 후계 논쟁 시기 가브릴 먀스니코프의 노동자 그룹으로 이어졌다. 먀스니코프는 1921년 5월 당원과 중앙위원들에게 돌린 「보고 메모」에서 언론·출판의 자유와 ‘소비에트의 소생’을 요구했고, 레닌이 직접 그와 논쟁했다. 그는 1922년 2월 당에서 제명되었다.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은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 발전의 전환점으로 여겨졌고, 1930년대에 이르러 이들은 소련을 자본주의를 돕는 국가로 규정했다.
이웃 조류와의 구별과 그 뒤
좌익 공산주의는 1918년 러시아의 ‘좌파 공산주의자’ 분파보다 넓고, 독일-네덜란드 갈래인 평의회 공산주의를 포함하면서도 국제적 혁명 정당의 필요를 강조한 이탈리아 좌파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평의회 공산주의보다도 넓다. 이탈리아 좌파 안에서도 보르디가파는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로, 다멘파는 룩셈부르크주의자로 여겼고, 1952년 국제주의 공산당은 선거 참여와 민족 문제 등을 둘러싸고 두 갈래로 나뉘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새로운 혁명적 노동자 기관의 건설을, 보르디가파는 기존 노동조합의 재장악 가능성을 주장하는 등 입장이 갈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많은 좌익 공산주의 그룹이 파괴되었으나, 1945~1952년에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등의 그룹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가 평의회 이론을 발전시켰다. 1968년 5월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좌익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1970년대 초에는 여러 갈래를 종합한 ‘코뮤니자시옹’ 경향이 생겼다. 파울 마틱과 막시밀리앵 뤼벨이 이 시기의 대표적 이론가로 꼽힌다. 오늘날에는 국제공산당, 국제공산주의 조류, 국제주의 공산주의 경향 같은 단체가 이 전통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