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52 ○ 자연사

여성 해방을 혁명의 의제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각료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때를 두고 콜론타이는 «내 생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장군 미하일 도몬토비치의 딸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핀란드 제재소주의 딸이었다. 1917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복지인민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반대해 곧 사임했다. 1919년 여성부(제노트델)를 세우는 데 앞장서 여성 문맹 퇴치와 노동·가족 제도 개편을 알리는 일을 맡았고, 1920년 노동자반대파에 가담했다가 패배했다. 1922년부터 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의 외교 사절로 나가 1943년 대사로 승진했는데, 이 임무는 사실상의 유배여서 국내 정치 활동은 막혔고 195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 혁명의 성적 의제

콜론타이는 여성 해방을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 과제로 격상시킨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부르주아적 '성 해방'이 아닌,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공동 육아를 통한 구조적 해방을 주장했다. 1917년 복지인민위원으로서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고, 곧 여성국(제노트델)을 이끌며 노동 여성 조직화, 모성 보호, 아동 복지 제도를 추진했다. 1920년대 당내에서 '자유연애'론과 노동자반대파 참여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가 제기한 질문(사적 가족의 해체 없이 진정한 여성 해방이 가능한가)은 이후 모든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기초 질문이 되었다.

외교관 콜론타이, 사실상의 유배와 정치적 후퇴

1922년부터 콜론타이는 해외 외교직으로 옮겨졌다. 노르웨이(1922~26, 1927~30), 멕시코(1926~27), 스웨덴(1930~45)에서 근무했고 소련의 국제연맹 대표단에서도 일했다. 이 임명은 그녀를 국내의 모든 지도적 정치 역할에서 떼어놓았으며, 자료들은 이를 사실상의 유배라고 부른다. 그녀 자신은 제노트델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곧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했다. 러시아어 자료는 같은 시기를 유배라는 표현 없이 적는다. 1922년 외교에 들어섰고, 여성이 공사로 임명된 것은 세계사에서 손꼽히게 이른 사례였는데, 그 배경에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과의 기존 관계와 1921~22년 코민테른 국제여성서기국의 서기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노르웨이에서는 그 나라가 소련을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고 멕시코에서는 소련과 멕시코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스웨덴 근무 중인 1943년 대사로 승진했고 1945년 은퇴했다.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막는 일이었다. 소련과 핀란드의 '겨울 전쟁' 시기에는 스웨덴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소련과 핀란드 회담에서 스웨덴의 중재를 이끌어내려 했으며, 1944년에는 다시 핀란드의 전쟁 탈퇴를 중재했다. 1946년과 1947년에는 핀란드 대통령 J. K. 파시키비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정치권 인사들이 1940~44년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적대 행위를 끝내려 한 외교적 노력을 근거로 그녀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으나, 노벨위원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톡홀름 시절 그녀의 건강은 무너졌다. 1942년 8월 첫 뇌졸중을 겪었고 1943년에는 좌측 마비를 동반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며 1945년 다시 뇌졸중이 왔다. 1945년 3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7월에 대사직에서 물러났고 소련 외무부 고문으로 남아 있다가 같은 해 관직에서 은퇴해 회고록, 특히 레닌에 관한 회고록 집필로 돌아섰다.

자료들은 이 시기를 정치적 후퇴로 규정한다. 20년 넘게 사실상의 유배로 해외에 보내진 동안 그녀는 개혁과 여성을 위한 투쟁을 포기했고, 1926년의 가부장적 법률과 1936년 헌법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스탈린 숙청 시기에 침묵했다는 점, 그 과정에서 전 남편 파벨 디벤코와 전 동지이자 노동자반대파 동료였던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가 처형되었는데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으로 비판을 받았고 일부 기록에서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런 비판은 사전 자체의 단정이 아니라 자료에 나타난 비판자들의 평가이며, 그녀에게 완전한 행동의 자유가 없었고 가족을 걱정해야 했다는 기록이 이와 균형을 이룬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는 증언도 전한다. 1929년 친구 마르셀 보디와의 사적 대화에서 그녀는 '기구에 맞서 갈 수는 없다'고 말하고 '내 원칙을 양심 한구석에 치워 두었다'고 했다고 전해지며,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그녀가 처음에는 그와 레닌 모두에 반대하는 극좌적 입장을 취했다가 나중에 스탈린 체제에 '가장 감동적으로 머리를 숙였다'고 경멸조로 썼다. 1946년 글 《소련 여성, 조국의 완전하고 평등한 시민》처럼 이후의 공적 저술은 이전의 입장과 어긋나는 표현으로 소련의 여성 성과를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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