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해방을 혁명의 의제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각료
1917년 10월 25일 밤, 스몰니. 네바 강에서 오로라호의 함포가 울렸다. 레닌이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콜론타이는 훗날 이렇게 썼다. «내 생애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장군의 딸로 태어나 세계 최초의 여성 정부 각료(복지인민위원)가 되었고, 자유연애론과 가사노동의 사회화 주장으로 당 안에서도 논쟁을 일으켰다. 노동자 반대파에 섰다가 외교관으로 「명예 유배」되었는데,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대사관저가 그녀를 대숙청에서 살렸다. 옛 볼셰비키 가운데 드물게 침대에서 죽었다.
경력 연표
- 1908–17망명, 여성 노동운동 조직
- 1909《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출간
- 1917–18복지인민위원: 세계 첫 여성 각료
- 1919–22여성부(제노트델) 지도
- 1920–21노동자반대파 참여
- 1921팸플릿 《노동자 반대파》 발표
- 1923–45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 공사·대사: 세계 첫 여성 공사
- 1923《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 발표
- 1944소련-핀란드 강화 교섭 중개
관련 역사 사건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 혁명의 성적 의제
콜론타이는 여성 해방을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 과제로 격상시킨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부르주아적 '성 해방'이 아닌,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공동 육아를 통한 구조적 해방을 주장했다. 1917년 복지인민위원으로서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고, 곧 여성국(제노트델)을 이끌며 노동 여성 조직화, 모성 보호, 아동 복지 제도를 추진했다. 1920년대 당내에서 '자유연애'론과 노동자반대파 참여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가 제기한 질문(사적 가족의 해체 없이 진정한 여성 해방이 가능한가)은 이후 모든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기초 질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