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1927

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

레닌이 남긴 당이라는 무대 위에서, 한 사람이 모든 경쟁자를 제압하고 유일한 후계자가 된 과정은 무엇이었는가?

레닌 사후 권력투쟁은 1923년 가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당을 움직이던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삼두체제에 맞서 트로츠키와 46인 진술서 서명자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한 뒤, 삼두체제는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을 빌미로 그를 군사 인민위원직에서 해임했고, 이어 스탈린이 내놓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두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결별하면서 삼두체제는 붕괴했다. 1926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통합 반대파'를 결성했으나 스탈린-부하린 동맹에 연이어 패배했고,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시위에서 독자적인 구호를 내걸었다가 강제 해산당한 뒤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는 좌익 반대파의 입장을 당적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75명의 활동가를 추방함으로써 스탈린의 단독 승리로 막을 내렸다.

무대가 놓인 방식: 레닌은 누워 있고, 당은 움직이고 있었다

레닌이 1922년 12월 23일 비서에게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를 구술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이끌던 당은 이미 그가 손을 뗄 수 없는 하나의 기계로 작동하고 있었다.

레닌은 같은 해 5월 25일 첫 뇌졸중으로 우측 반신이 마비되고 언어 능력이 손상되었다. 고리키의 별장에서 요양한 뒤 7월까지 상당히 회복했고 10월 모스크바로 복귀했으나, 12월 13일 두 번째 뇌졸중이 그를 다시 쓰러뜨렸다. 정치국은 레닌의 면회와 정보 접근을 통제했고, 이 통제를 맡은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불과 8개월 전인 1922년 4월 3일, 제11차 당대회 직후 중앙위원회 서기국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 자리는 행정과 간부 배치를 관장하는 실무직으로 여겨졌다. 스탈린을 이 자리에 추천한 사람은 지노비예프였고, 모두가 그 자리를 권력의 핵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조직국(Orgburo) 위원과 노농감찰인민위원, 민족문제인민위원을 겸임하며 이미 당 내에서 가장 많은 임명권을 쥔 인물이었다. 자신이 임명한 지방 당 서기들이 차기 당대회 대의원을 선출하는 구조, 즉 훗날 '순환적 권력'이라 불릴 메커니즘이 이미 작동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레닌의 첫 뇌졸중 직후인 1922년 5월,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삼두체제를 결성했다. 이 동맹의 직접적 목표는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적군 창건자이자 내전의 영웅으로 당내 위상이 스탈린을 압도했고, 레닌이 가장 신뢰하는 동지 중 하나였다. 1922년 9월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인민위원회 부의장직을 제안하며 연대를 모색했고, 양자는 관료화에 맞서 공동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닌의 몸은 이미 그 동맹을 완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같은 해 가을, 그루지야 사건이 터졌다.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는 그루지야를 자캅카스 연방에 강제 편입시키려 했고, 이에 저항하는 그루지야 볼셰비키들을 탄압했다. 오르조니키제가 현지 당원을 구타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레닌은 격분했고,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구술해 스탈린의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글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와 병행해 구술되었으며, 레닌이 스탈린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음을 보여주는 문서다.

당 자체도 이미 1917년의 당이 아니었다.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는 크론시타트 반란과 농민 봉기에 대응해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했지만, 동시에 「당 통일에 관하여」 결의로 파벌을 전면 금지했다. 내전기에 구축된 중앙집권적 당 기구는 NEP 아래에서 오히려 비대해졌다. 사적 상업이 허용되는 조건에서 당은 유일한 권력의 중심으로서 스스로를 더 단단히 조였고, 지방 서기 임명권을 가진 서기국은 그 조임쇠였다.

1922년 12월, 레닌이 두 번째 뇌졸중으로 다시 고리키에 누웠을 때, 당이라는 무대는 이미 주인공 없이도 움직이는 구조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를 움직이는 손잡이를 쥔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레닌이 이 사실을 깨닫고 경고를 구술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시점에서였다.

마지막 3개월: 말을 잃기 전에 남긴 것들

레닌에게 두 번째 결정적인 뇌졸중이 찾아온 것은 1922년 12월 16일이었다. 우측 반신이 마비되었고, 의사들은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레닌은 바로 그 병상에서, 하루 5분에서 10분씩 허락된 구술 시간을 쥐어짜며, 3개월에 걸친 마지막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그가 싸운 대상은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당 안에서 빠르게 굳어지고 있던 관료제와 그 관료제의 정점에 선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구술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국의 결정 덕분이었다. 12월 18일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에게 '레닌 동지의 의료 체제 준수를 개인적으로 책임질 것'을 명령했다. 이틀 뒤인 12월 21일, 의사들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 레닌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대외무역 독점을 고수하라는 레프 트로츠키 앞 서한을 구술했다. 다음날 스탈린은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를 걸어 '의료 체제를 위반했다'며 폭언을 퍼붓고 중앙통제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다. 크룹스카야는 레프 카메네프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당원으로서 30년을 살아왔고, 지금도 서기 한 사람이 감히 저에게 말할 수 없는 그런 언어를 들었습니다."

바로 이 전화 사건의 여진 속에서 레닌은 12월 23일부터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즉 '유언'으로 알려질 문서를 구술하기 시작했다. 속기사는 마리야 볼로디체바였다. 핵심은 두 사람이었다. "동지 스탈린은 서기장이 된 후 무한한 권력을 손에 집중시켰으며, 나는 그가 이 권력을 언제나 충분히 신중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현 중앙위원회에서 아마도 가장 유능한 사람"이지만 "지나친 자신감과 행정적 측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지적했다. 가장 날카로운 구절은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 두 탁월한 지도자의 이 두 자질은 무심코 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며, 우리 당이 이를 방지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분열은 예기치 않게 올 수 있다."

레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2월 30일과 31일에는 「민족문제에 관하여,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구술했다. 그루지야 사건, 즉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가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아카키 코바히제의 뺨을 때린 사건을 조사한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보고를 받고서였다. 레닌은 스탈린의 '서두름과 행정적 열중'이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고, "정치에서 앙심은 일반적으로 가장 비열한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이 글은 대러시아 우월주의에 대한 레닌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1923년 1월 4일, 레닌은 리디야 포티예바에게 유언의 추신을 구술했다. 더 이상 은유는 없었다. "스탈린은 너무 거칠고, 이 결함은 우리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용납될 수 있지만 서기장 직위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모든 점에서는 스탈린 동지와 다르지 않으면서 오직 한 가지 장점, 즉 더 관대하고, 더 충성스럽고, 더 예의 바르고 동지들에게 더 사려 깊으며, 덜 변덕스러운 사람을 임명할 방안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레닌은 이후로도 쉬지 않았다. 1월부터 3월 초까지 그는 다섯 편의 논문, 「협동조합에 관하여」, 「우리 혁명에 관하여」, 「라브크린을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적을수록 좋다」를 구술했다. 이 글들은 신경제정책의 장기화, 국가기구의 근본적 개혁, 중앙통제위원회의 강화를 통한 관료제 견제를 주장하는 그의 정치적 유언의 나머지 절반이었다.

종착점은 갑작스러웠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은 스탈린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로 폭언한 사실을 뒤늦게 안 것이다. "당신은 내 아내를 전화로 불러내 상스러운 말을 했소. 나는 나 자신에게 가해진 일을 그리 쉽게 잊을 생각이 없으며, 내 아내에게 가해진 일 역시 내게 가해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따라서 당신이 말한 것을 철회하고 사과할 준비가 있는지 생각해보든지, 아니면 우리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는 쪽을 선호하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라오."

닷새 뒤인 3월 10일, 세 번째 뇌졸중이 레닌을 덮쳤다. 마비는 반신 전체로 퍼졌고, 언어 능력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레닌의 정치 활동은 거기서 끝났다. 그가 남긴 문서들은 크룹스카야의 손에 맡겨졌고, 당의 지도부는 이제 레닌 없는 레닌주의를 운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남은 것은 한 사람이 구술한 경고와, 그 경고가 겨냥한 서기장이 장악한 당 기구 사이의 대결이었다.

경제는 무너지고, 독일은 배반하고, 당은 침묵한다: 46인이 움직이다

1923년 여름, 소비에트 경제는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공업품 가격이 1913년 대비 276%까지 치솟은 반면 농산물 가격은 89%에 머무는 '가위차' 위기 속에서, 농민은 곡물을 내놓지 않았고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 체불에 직면했다. 125만 명이 실업 상태였고,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격렬한 파업이 잇따랐다. 비밀 경찰인 GPU는 '노동자의 진실'과 '노동자 그룹' 같은 지하 당내 반대 조직을 적발해 진압했고, 9월에는 제르진스키 자신이 중앙위 소위원회에서 "당의 쇠퇴, 내부 생활의 소멸, 선거를 임명으로 대체하는 관행이 정치적 위험이 되고 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초인플레이션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마르크화 가치는 폭락했고, 노동자들은 급진화했으며, 코민테른은 1917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선진 공업국에서의 혁명적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브란들러가 이끄는 독일 공산당 지도부는 켐니츠 공장위원회 회의에서 결정적 순간에 봉기를 철회했고, 함부르크에서 고립된 무장봉기는 진압되었다. '독일 10월'의 실패는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고립을 확정지었고, 당내에서는 환멸이 번졌다.

이러한 이중의 위기 속에서 트로츠키는 1923년 10월 8일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에 서한을 보냈다. 그는 당 기구의 관료화가 "전시공산주의의 가장 혹독한 시절에도 지금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서열제에 의한 당 간부 임명이 "당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고 비서 계층을 당의 의견과 결정을 창출하는 기구로 간주하는" 체제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일주일 뒤인 10월 15일, 그 취지에 공명한 46명의 주요 볼셰비키가 정치국에 비밀 진술서를 제출했다.

서명자 명단은 볼셰비키 당의 내전 영웅들을 망라했다: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 게오르기 퍄타코프,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니콜라이 무랄로프 등. 이들은 "분파적 독재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고 선언하고, 경제 위기가 "지도력의 부재,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지도력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했다. 더 나아가 당의 암묵적 분열을 지적했다: "서열제에 의한 당 간부층과 '평신도'들 사이, 위에서 선발된 직업적 당 기능자들과 당 생활에 참여하지 않는 당원 대중 사이의, 이제는 거의 은폐되지 않는 분열"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10월 25~27일 중앙위-중앙통제위 합동 전원회의에서 삼두체제는 반격에 나섰다.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제출한 6개항의 당내 민주화 방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대신 전원회의는 트로츠키의 10월 8일 서한을 "당과 세계혁명에 결정적 순간에 저지른 중대한 정치적 오류"로, 46인 진술서를 "분파적 행위"로 규탄했다. 그러나 당내 불만이 워낙 광범위했기 때문에, 지도부는 프라우다 지상에 토론을 개방하는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노비예프는 11월 7일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체를 갖추기 시작해야 한다"고 썼지만, 곧 "혁명의 이익이 최고법"이라며 '순수한' 민주주의 원칙을 조롱했고, 스탈린은 12월 2일 "토론에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2월 5일 정치국은 스탈린·카메네프·트로츠키 3인의 소위원회가 초안한 결의를 채택했는데, 표면적으로는 트로츠키의 비판을 수용한 '신방침'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46인을 트로츠키로부터 분리하려는 전술적 양보였다. 트로츠키는 이 결의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곧 자신의 소책자 『신방침』을 통해 "구세대가 점차 관료주의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대대적인 청년 동원을 호소했다. 12월 11일 모스크바 당회의에서 사프로노프는 트로츠키의 12월 8일 서한을 원용해 당 기구를 옹호하는 카메네프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이로써 트로츠키가 공개적으로 반대파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새 국면이 열렸다.

논쟁이 격화되는 동안 레닌은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3월 9일의 세 번째 뇌졸중으로 언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는 자신이 만든 당을 찢어발기는 싸움을 지켜볼 수조차 없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은 고리키 별장에서 사망했다. 트로츠키는 당시 결핵 치료 차 코카서스로 향하는 기차 안에 있었고, 스탈린은 그에게 레닌의 사망을 암호 전문으로 통보했다. 장례식 날짜를 두고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1월 26일이라고 알렸으나 실제 장례는 하루 전인 25일에 치러졌다. 트로츠키는 참석하지 못했다.

죽은 레닌에게 입당하고, 트로츠키를 재판하다

레닌 입당 운동은 사실 레닌이 죽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1923년 12월 5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노동자 10만 명을 당에 받아들이라는 결의를 채택했고, 1924년 1월 14~15일 전원회의에서 지노비예프는 "멘셰비즘의 부활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공장 노동자의 대량 입당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1월 21일 레닌이 죽자, 이미 돌아가던 모집 기계는 '레닌 입당 운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2월 8일 프라우다와 크라스나야 가제타가 이 말을 처음 썼다. 2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 30만 명 이상이 지원해 20만 명 넘게 합격했고, 이 신입들의 절반가량은 내전 때 붉은 군대에 복무한 이들이었다. 삼두체제의 계산은 분명했다. 트로츠키의 지지는 대학의 젊은 지식인들과 구간부에 몰려 있었는데, 교육 수준이 낮고 당원 경험이 전무한 신입 노동자들은 누가 길러주느냐에 따라 의견이 정해지는 말랑한 재료였다. 제13차 당대회(5월 23~31일)는 이 팽창이 끝난 직후 열렸다. 레닌의 유언은 각 대표단에만 낭독되고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스탈린은 유언이 서기장 해임을 권고했음에도 자리를 지켰다. 신입들은 자기 입당을 '레닌의 이름으로' 승인해준 위원회들, 곧 스탈린의 서기국이 임명한 기구들에 충성을 느꼈다.

가을에 트로츠키는 스스로 무기를 건넸다. 저작집 제3권 서문 「10월의 교훈」에서 그는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의 실패와 1917년 10월 러시아의 성공을 대비시키며, 봉기에 반대했던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독일 공산당의 망설임을 같은 병으로 묶었다. '기다리는 운명론'이라 부른 그것은 "우리는 점점 더 유력해지고 있다"는 위안 속에 행동 불능을 숨긴다는 것. "레닌은 옳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없다"고 그는 썼다. 이는 트로츠키가 독일 패배의 책임을 지노비예프에게 돌리는 셈이었고, 지노비예프는 자기 책임을 독일 당 지도부에 덮어씌우고 있던 참이라 참을 수 없었다.

반격은 '문학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포문을 연 것은 부하린의 프라우다 사설 「10월의 역사를 어떻게 쓰지 말 것인가」였고, 곧 카메네프의 「레닌주의인가 트로츠키주의인가」, 스탈린의 「트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 지노비예프의 「볼셰비즘인가 트로츠키주의인가」가 판을 벌였다. 트로츠키의 분석에 맞설 논거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논쟁의 터를 통째로 옮겨 1917년 이전의 '레닌과 트로츠키의 영원한 대립'이라는 전설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가장 지저분한 장치는 프라우다가 트로츠키의 편지 두 통, 1913년 치헤이제 앞으로 보낸 것과 1921년 올민스키 앞으로 보낸 것을 공개한 일이었다. 첫 편지는 레닌을 향한 격한 비난으로 가득했고, 둘째 편지는 트로츠키가 그 1913년 편지를 '순간적 감정'의 산물이라며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문서였다. 카메네프는 발췌를 실으면서 "아직 의심이 남아 있는 당원들은 트로츠키 동지의 편지를 거듭 읽으라. 그러면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라고 썼다. 전국 당위원회는 짜맞춘 듯 같은 문구의 결의를 수백 건 송출했고, 「10월의 교훈」은 '볼셰비즘사의 조잡한 왜곡',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바꾸려는 시도'로 규정되었다.

이 일방적 재판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이는 스탈린이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자기들의 1917년 잘못을 변호해야 했고, 스탈린은 그들을 '볼셰비즘의 공동 토대 위에 선 구볼셰비키'라 감싸며 공정한 중재자 행세를 했다. 덕분에 스탈린 자신의 1917년 오류는 그림자 속에 남았다. 그는 트로츠키가 봉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말 자체를 전설이라 처음 선언했고, 레닌이 세계 노동자들에게 읽으라고 권했던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까지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라 부르며 재출판을 금지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혁명 1주년에 "봉기의 실천적 조직은 전적으로 트로츠키 동지의 직접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고 쓴 글은 감추어 버렸다. 문학토론이 끝날 무렵 트로츠키의 군사 권위는 이미 무너져 있었고, 1925년 1월 전원회의에서의 해임은 판결문에 찍은 서명이 아니라 이미 끝난 과정의 확인이었다.

전쟁의 영웅을 밀어내고, 한 나라의 약속으로 다수를 묶다

트로츠키의 해임은 단순히 군사 직책 하나를 바꾼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내전기의 붉은 군대를 대표했고, 군사·해군 인민위원과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라는 직위는 그가 당의 다른 지도자들과 맞설 수 있게 해 준 마지막 제도적 기반이었다. 1924년 가을 「10월의 교훈」에서 트로츠키가 1917년 봉기를 반대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과거를 공개한 뒤, 두 사람은 이를 역사 논쟁이 아니라 지도부의 정통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1925년 1월 17일 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 합동회의에서 그들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트로츠키가 ‘레닌주의를 수정’하고 ‘당 지도부의 급격한 변경’을 꾀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병 때문에 회의에 나오지 못했고, 1월 15일 서한에서 당이 정하는 어떤 직책도 맡고 통제를 받겠으며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직에서는 빨리 물러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이 양보를 이용하면서도 즉각 제명을 택하지 않았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요구한 것은 당에서의 완전한 제거였지만, 스탈린이 택한 해임과 정치국 잔류는 자신을 중재자로 보이게 하면서 트로츠키를 군대와 분리하는 절충이었다. 후임 미하일 프룬제에게는 정규군 중심의 재편과 통일 군사교리라는 과제가 돌아갔다. 군사행정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조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트로츠키가 더 이상 독자적 권력 중심을 만들 수 없다는 신호였다.

그 다음 쟁점은 해외 혁명이 언제 올 것인가가 아니라, 오지 않는 동안 소련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였다. 1925년 4월 제14차 당대표자회의에서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이 말은 세계혁명을 포기하자는 선언이라기보다, 혁명이 서유럽에서 지연되어도 소련이 노동자 국가의 권력을 보존하고 경제를 재건하며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다는 방침이었다. 농민 다수가 사는 후진국에서 신경제정책의 시장을 통제하면서 국가공업을 키워야 했던 현실이 이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부하린은 곧 이 논리를 이론화하여, 국제혁명을 기다리는 동안 국내 건설을 중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 실천적 귀결이었다. 그들은 고립이 장기화될수록 관료층이 노동계급을 대신하고, 신경제정책의 농촌 부유층과 타협하는 정책이 사회주의의 방향을 흐릴 것이라고 반박했다. 따라서 그들의 반대는 트로츠키와 같은 영구혁명론의 반복이 아니었다. 삼두체제에서 트로츠키를 몰아낸 동맹자들이, 이제 스탈린이 서기국의 인사권과 부하린의 농촌 노선을 결합해 만든 새 다수파를 상대로, 집단지도와 국제주의를 방어하는 위치로 이동한 것이다. 해임은 한 사람의 군사적 영향력을 끊었고, ‘한 나라에서도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은 그 빈자리를 당의 현실 정치로 채웠다.

패배한 두 반대파가 하나의 계산서가 되다

제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가 진 것은 단순히 노선의 표결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농촌의 부유층을 자극하는 양보가 노동자 국가의 기반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들이 말한 문제는 농민을 적으로 돌리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공업이 뒤처지면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교환, 곧 스미치카가 함께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빠른 공업 투자와 부유한 농민·네프맨에 대한 조세 부담, 당내 토론의 회복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부하린과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의 안정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농민이 생산을 늘리고 시장에 곡물을 내놓게 해야 도시가 숨을 돌릴 수 있으며, 국제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이 그들의 노선을 현실적인 방어책으로 보이게 했다. 스탈린은 제14차 당대회에서 반대파의 농업정책을 ‘중농 중립화’로 몰아붙였고, 카메네프가 “지도자”를 만들지 말자며 서기국이 정책을 미리 결정한다고 비판하자 회의장은 스탈린을 연호하며 그의 발언을 끊었다. 공개 논쟁은 있었지만, 당 기구가 어느 편의 발언을 조직하고 어느 편을 고립시킬지를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대표단의 패배 뒤 지노비예프는 코민테른과 정치국에서 밀려났고, 그가 장악했던 지역 당 조직도 재편의 표적이 되었다.

1926년 봄 트로츠키가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손을 잡은 것은 과거의 책임을 잊어서가 아니었다. 지노비예프는 이제 1923년 반대파가 관료화의 위험을 옳게 보았다고 인정했고, 트로츠키도 「10월의 교훈」에서 두 사람의 1917년 오류를 스탈린의 후일 노선과 섞어 공격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물러섰다. 양쪽은 당을 깨자는 대신, 당이 실제로 토론하는 조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7월 「13인 선언」은 “레닌 사후 당의 위기는 놀랍게 커진 관료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고, 노동자 임금과 주거 개선, 간접세 부담 완화, 공업화 가속, 부유한 농촌층에 대한 과세를 한 묶음으로 제시했다. 반대파에게 공업화는 노동자 숭배의 구호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동맹을 지키는 물질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지도부는 그 내용을 먼저 반박하기보다 제10차 당대회의 분파 금지 결정을 들이밀었다. 비밀 회합과 독자 문서 배포는 ‘파벌’로 규정되었고, 7월 전원회의 뒤 지노비예프는 정치국에서 쫓겨났으며 10월에는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반대파는 당원들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지만, 공장 세포의 집회는 야유와 방해 속에 진행되었다. 이때 패배는 사상 논쟁의 결론인 동시에, 발언권과 대표권을 배분하는 기구의 승리였다.

거리로 나간 논쟁, 당대회에서 닫힌 문

1927년 가을 통합 반대파가 맞닥뜨린 문제는 단순히 지지자가 적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위원회는 당대회 전 토론에서 반대파 강령을 공식 인쇄물로 널리 배포하지 않았고, 많은 당 조직에서 반대파 연설과 회의를 제한했다. 반대파는 자신들의 강령에서 관료화된 기구를 노동자 민주주의로 되돌리고, 네프만과 부농에게 경제적 양보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공업화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수파는 이를 당의 통일을 깨뜨리는 분파 활동으로 규정했다. 반대파가 비밀 인쇄소와 비공식 집회를 택한 것은 이 봉쇄를 뚫으려는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은 다수파가 기다리던 증거가 되었다. 1927년 11월 7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그들은 공식 행렬과 나란히 「레닌의 유언을 실행하라」,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하여」, 「네프만, 부농, 관료에 맞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리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트로츠키와 카메네프가 참여한 모스크바 행렬은 군중 속에서 고립되었고, 반대파가 점거한 건물의 발코니에서는 구호와 현수막이 제거되었다. 중앙통제위원회가 11월 15일 발표한 결정은 이 장면을 다르게 서술했다. 결정문은 반대파가 당의 공동 연단을 거부하고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인 세력’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반대파의 관점에서 그것은 당 안에서 말할 통로가 막힌 뒤 노동자에게 직접 호소한 마지막 공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의 국가기구와 무장한 질서 유지 수단을 상대로 한 거리 행동은, 혁명 기념일의 상징을 공유하면서도 당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읽혔다. 그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11월 12일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제명되고, 레프 카메네프와 이반 스미르노프를 포함한 지도적 인사들의 당적 문제는 제15차 당대회로 넘어갔다. 12월 2일부터 19일까지 열린 당대회는 반대파의 견해가 당적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활동가 75명을 추방했다. 공식 집계에서 강령 지지표는 4,120표였지만, 스탈린은 이듬해 회의에서 실제 반대표가 1만 표에 가까웠다는 정정을 묵인했다. 숫자의 차이는 반대파가 다수를 이길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전원에게 자유롭게 공개된 토론에서 자발적으로 소수화되었다’는 공식 서사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당대회는 논쟁의 승패만 결정한 것이 아니라, 누가 토론의 의제와 대표단을 정하고 패배한 사람에게 당 안에 남을 조건을 부과할지를 결정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잘못을 인정해 복귀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고, 트로츠키와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곧 유배와 정치적 격리로 향했다. 혁명 기념일의 병렬 행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반대 의견을 설득으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조직과 공개 발언의 통로를 함께 제거함으로써 만들어졌다.

결과

좌익 반대파의 패배는 소련 정치에서 조직화된 당내 반대가 사라지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제15차 당대회는 반대파 75명을 추방했고, 이후 약 8천 명이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곧 '잘못을 인정'하고 복당했으나 실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트로츠키는 항복을 거부해 1928년 초 알마아타로 유배된 뒤 1929년 2월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이 투쟁에서 스탈린이 완성한 권력 메커니즘, 즉 서기장이 임명권을 통해 당대회 대의원 구성을 통제하는 방식은 이후 모든 당내 숙청의 원형이 되었다. 1926~27년 반대파가 제기했던 공업화 속도, 농촌 정책, 당내 민주주의 문제는 1928년 이후 스탈린이 좌익 반대파 없이 우익 반대파(부하린)를 숙청하며 급진적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실행하게 된다.

연표

  1. 1922.12
    레닌,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레닌이 두 번째 뇌졸중을 앓은 직후, 후계 구도에 대한 우려를 담아 스탈린의 무례함과 권력 집중을 경고한 문서를 구술하다.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권고하는 추신이 1923년 1월 추가되었다.

  2. 1923.03.10
    레닌의 세 번째 뇌졸중

    레닌이 언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우측 반신이 마비되어 정치 활동이 불가능해지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삼두체제가 당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3. 1923.10.15
    46인 진술서

    트로츠키의 10월 8일 서한에 공명한 46명의 주요 볼셰비키가 정치국에 보낸 비밀 진술서에서 당내 분파 독재를 비판하고 당내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다. 좌익 반대파의 사실상 출발점이었다.

  4. 1924.01.21
    레닌 사망

    레닌이 53세로 사망하다. 크룹스카야는 5월에 열릴 제13차 당대회에서 유언이 낭독되기를 요구했으나, 삼두체제는 각 대표단에만 제한적으로 공개했다.

  5. 1924.05
    제13차 당대회와 레닌 입당 운동

    5월 23~3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좌익 반대파가 최종 패배하다. 동시에 '레닌 입당 운동'이 시작되어 2년 만에 당원이 47만에서 100만 이상으로 팽창했고, 정치 경험이 부족한 신입 당원들은 스탈린의 충성 기반이 되었다.

  6. 1924.10
    「10월의 교훈」과 문학토론

    트로츠키가 1917년 혁명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봉기 반대를 폭로하는 「10월의 교훈」을 출판하자, 삼두체제는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는 시도'라며 맹공격을 퍼부었다. 이 '문학토론'의 결과로 트로츠키의 군사적 권위가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7. 1925.01
    트로츠키, 군사인민위원에서 해임

    1월 17~20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트로츠키가 군사·해군 인민위원 및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직에서 해임되다. 지노비예프는 제명을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온건파로 행세하며 반대했다.

  8. 1925.04
    일국 사회주의와 삼두체제의 균열

    제14차 당대표자회의에서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 테제를 제출하고 부하린이 이론화하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반대하며 삼두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다. 스탈린은 부하린·리코프와 새로운 다수파를 형성했다.

  9. 1925.12
    제14차 당대회와 신반대파의 패배

    12월 18~31일 열린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크룹스카야·소콜니코프 등 '신반대파'가 농촌 정책의 우경화와 일국 사회주의론을 비판했으나 압도적으로 패배하다. 지노비예프의 레닌그라드 당 조직은 이후 숙청당했다.

  10. 1926.07
    통합 반대파의 결성과 패배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통합 반대파'를 결성하여 13명의 중앙위원·중앙통제위원 명의로 당내 관료화를 다시 비판하다. 7월과 10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지도부는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11. 1927.11.07
    혁명 10주년 시위와 반대파의 최후

    통합 반대파가 10월 혁명 10주년 기념 시위에서 '레닌의 유언을 실행하라',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하여' 등의 독자적 구호를 내걸고 행진하다 OGPU와 붉은 군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다. 이 사건 직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11월 12일 당에서 제명되었다.

  12. 1927.12
    제15차 당대회: 좌익 반대파의 종말

    12월 2~19일 열린 당대회는 좌익 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적 견해를 당적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75명의 활동가를 추방했다. 공식 집계로는 반대파 지지가 4,120표에 불과했으나, 스탈린은 나중에 실제로는 약 1만 명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인정했다.

관련 인물 11명

지도부5

병상에서 후계 구도를 구술한 당의 창시자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2차 뇌졸중(1922.12)부터 3차 뇌졸중(1923.3)까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문제에 관하여」, 최후 논문 5편을 구술. 이후 권력투쟁의 중심 텍스트가 되었다.

유언이 겨냥한 서기장, 레닌의 의료 감독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1922년 4월 서기장 선출, 12월 18일 중앙위 결정으로 레닌 의료 감독 맡음. 12월 22일 크룹스카야에 대한 전화 폭언이 레닌의 '관계 단절' 서한과 유언 추신을 촉발했다.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 46인 진술서를 촉발한 10월 8일 서한의 필자레프 트로츠키1879–1940

1923년 10월 8일 중앙위에 당내 관료화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46인 진술서를 촉발. 「신방침」을 집필하고 통합 반대파를 이끌었으며, 1927년 제명 후 1929년 소련에서 추방.

삼두체제의 일원, 1923년 11~12월 프라우다 지상 당내 토론을 개시했다가 트로츠키 공격으로 전환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

삼두체제 일원으로 1923년 11월 7일 프라우다 지상 토론을 개시했으나, 12월 15일 '트로츠키주의' 공격으로 전환. 이후 신반대파를 형성했으나 1927년 제명.

삼두체제 일원, 1923년 12월 11일 모스크바 당회의에서 당 기구를 옹호한 보고자레프 카메네프1883–1936

삼두체제 일원으로 1923년 12월 11일 모스크바 당회의에서 기구를 옹호하는 보고를 했다. 12월 5일 정치국 결의 초안 작성에 참여. 이후 신반대파를 함께 형성했으나 1927년 제명.

관련 용어

출처: E.H. Carr, The Interregnum 1923-1924 (A History of Soviet Russia, Vol. 4), Macmillan, 1954Isaac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Trotsky, 1921-1929, Oxford University Press, 1959Vadim Rogovin, Was There an Alternative? Trotskyism: A Look Back Through the Years, Mehring Books, 1992Leon Trotsky, The New Course (1923), Marxists Internet Archive,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24/newcourse/index.htmThe Declaration of 46 (October 15, 1923), Marxists Internet Archive, 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document/ilo/1923-lo/ch02.htmXIII съезд РКП(б): Стенографический отчет, Москва, 23-31 мая 1924 г.XIV съезд ВКП(б): Стенографический отчет, Москва, 18-31 декабря 1925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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