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 코뮌
Baku Commune
1918년 4월 25일 바쿠 소비에트가 구성한 바쿠 인민위원회의(바쿠 소브나르콤)를 소비에트 역사학이 부른 이름. 스테판 샤우먄이 이끈 볼셰비키·좌파 사회혁명당 정부로 바쿠와 주변 지역을 다스렸고, 이름은 1871년 파리 코뮌을 본뜬 것이었다. 7월 말 다슈나크·우파 사회혁명당·멘셰비키가 주도한 센트로카스피 독재로 교체되었다.
상세
3월 사건 뒤인 1918년 4월 바쿠 소비에트 308석 가운데 볼셰비키는 58석에 그쳤지만, 샤우먄은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만으로 인민위원회의를 꾸리자는 결의를 찬성 124, 반대 2, 기권 20으로 통과시켰다. 다른 정파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개인 자격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좌파 사회혁명당 출신 위원은 4명이었고, 나머지는 볼셰비키였다. 정부는 스스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라고 선언했다. 정부는 법원과 학교를 개편하고 은행·해운·어업·석유 산업을 수용했으며, 5월 22일 지하자원 국유화 법령을 내고 5월 25일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바쿠 체카가 처형한 사람은 공금을 횡령한 소비에트 위원 두 명뿐이었다.
코뮌의 기반은 약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소수였고, 바쿠 인구에서 가장 큰 집단인 무슬림은 정부에 대표되지 않았다. 군대의 70%는 아르메니아인이어서 다슈나크의 영향력이 컸고, 간자 공격이 실패할 때 아르메니아인 병사들이 무슬림 주민에게 폭력과 약탈을 저질렀다. 괵차이에서 붉은 군대가 캅카스 이슬람군에 패하자, 7월 25일 다슈나크·우파 사회혁명당·멘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바쿠 소비에트는 엔젤리에 있던 라이어널 던스터빌의 영국군을 불러들이기로 의결했다. 인민위원들은 항의 표시로 사퇴했고, 7월 26일 97일 만에 센트로카스피 독재가 그 자리를 이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코뮌을 볼셰비키와 아르메니아인의 결탁으로 보았다고 적는다.